에덴동산의 창설
에덴동산의 창설(창2:8,9)
여호와 하나님(여호와 엘로힘)께서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에덴이란 개방된 들판을 뜻하는 수메르어 에덴(eden)이나, 아카드어 에디누(edinu)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고, 70인역본은 히브리 어근 아단(즐기다)에서 직접 유래한 것으로 보고 이 단어를 '기쁨의 동산'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에덴동산은 살기에 매우 적합한 낙원과 동일시되었습니다(계 2:17). 창 2:8, 10, 4:16에서는 에덴동산이 위치한 지리적인 구역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덴의 정확한 위치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티그리스강과 유브라테스강의 위치는 알 수 있으나 다른 두 개의 강, 즉 비손 강과 기혼 강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에 사람을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첫 창조활동은 에덴동산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창세기1-3장에서 다루고 있는 에덴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장 이상적인 세상의 모습입니다. 에덴은 하나님과 사람과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의 질서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평화롭게 사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에덴동산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산가운데에는 생명나무도 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생명나무는 영원한 생명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예기한 에덴과 관련된 어떤 규정이 있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생명나무는 마법의 나무는 아니었습니다. 생명나무라는 명칭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생명을 상징합니다.
영생이라는 말은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산다고 해서 괴롭고 고난을 당하면서 영원히 산다는 것은 그것은 저주입니다. 성경에서 영생이라는 것을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생의 한 가지는 하나님과의 삶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삶입니다. 내세를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만큼 위대한 생애는 없습니다. 영생이라는 것은 피상적(皮相的)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생이라는 것은 소설속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문자적이며 현실입니다. 따라서 영생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영생의 또 한 가지는 고통 속에서의 영원한 삶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영생이라고 하지 않고 영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마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영벌은 끝이 없는 형벌입니다. 거기에는 영원한 불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 불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곳은 영원한 죽음이 있는 곳입니다. 이 죽음은 죽지 않는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를 두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사느냐 아니면 법을 어기고 사느냐의 근간이 되는 나무들입니다. 생명나무를 어거스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존재가치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로 피조된만큼 이 금지된 선악과를 통하여 인간의 전인격적 자유가 주체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인간에게 금지된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을 판단력이나 선택력도 없이 양처럼 방황하게 하시려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인간자신의 본분에 지나친 지혜를 추구하려 하여 자기자신의 지각을 신뢰하여 하나님의 명예를 내팽개치고 선과 악을 중재하고 판단하는 자로 자처하지 않게 하시려고 금지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