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의 보호
가난한 자의 보호(출애굽기22:25-27)
어떤 사람이 자기의 백성들 중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꾸어주었다면, 이자를 요구함으로서 그를 괴롭히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그가 자기의 웃옷을 전당잡히거든 그것을 해지기 전까지 그에게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그 옷이 그의 유일한 옷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동방의 가난한 계급의 사람들은 커다란 천 조각으로 되어 있는 웃옷을 이용하여 그 속에 들어가 잠을 잤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옷이 그의 몸을 덮는데 사용하기에 이불입니다(카일·델리취). 즉 옷을 주지 않으면 그날 저녁에 옷을 맡긴 사람은 덮을 것이 없이 춥게 자야 했습니다.
“가난한자” “아니”는 “가난한 poor, 비천한 humble, 낮은, 억압(압제) 받는 oppressed”들을 의미한다. 원래 “아니”는 일반적으로 사회적인 입장에서 가난한 자들 즉 토지가 없는 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가난은 상속권 박탈과 불법적인 손해에 의해서 많이 발생했습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 자신의 잘못에 의하여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가난을 완전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재산의 편중으로 인하여 가난은 항상 발생하고 있습니다. 즉 가난은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전제주의나 왕정시대에는 재산이 왕족이나 정권을 가진 사람들의 몫이었습니다. 독재주의나 공산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재산이 독재자의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이론만 좋지, 실제로는 공정하게 분배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산이 너무나 편중이 되어 있습니다. 재벌에게는 대대손손 재산이 상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대대손손 가난을 상속하고 있습니다. 대기업임원은 봉급이 629만원이라고 보도가 되었습니다. 서민들의 연봉도 더 되는 돈입니다. 물론 내 돈 가지고 내가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하지만 그 돈이 모두 자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도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가 기도하면 그를 괴롭히는 자를 손을 보겠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셔서 그렇게 험한 꼴을 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자들이 주안에서 평강을 누리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평등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자들이 잘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과부나 고아를 괴롭히고 압제하며 가난한 자에게 압박을 가하는 사람들을 보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도이십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학대받고 천대받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고 하였습니다. 가난한자들을 학대하는 자들을 범죄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본을 보이셨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