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새벽강해

종을 상해했을 때(출애굽기21:26-27)

김해수/예수촌교회 2011. 4. 17. 18:23

종을 상해했을 때(출애굽기21:26-27)

종은 구약시대에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23-25절의 동상해 보복법은 종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았습니다. 자유로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었습니다. 종들의 경우에는 다른 법이 적용되었습니다. 종들의 경우에는 주인이 종의 눈을 쳐서 상하게 하였다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어야 했습니다. 이를 쳐서 빠트렸으면 남종이나 여종들을 놓아주어야 했습니다. 눈과 이는 신체의 대표를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신체의 일부를 상하게 했을 때는 종을 놓아주어야 했습니다.

지금 이것을 우리들이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차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의 중동지방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의 고조선은 기원전108년까지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존재한 한국 최초의 국가입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朝鮮)을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습니다. 그 뒤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 고조선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지금은 단군이 건국한 조선과 위만조선을 포괄하여 고조선이라고 부릅니다.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신화에서는 주전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삼국유사가 건국연대를 위로 끌어올린 이유는, 역사가 오래될수록 그 왕조는 권위가 있으며 민족도 위대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 초이다. 이 무렵에 저술된 관자(管子)에 ‘발조선(發朝鮮)’이 제(齊)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보하이만[渤海灣]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遼河]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집단이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세운 중심집단의 시조설화(始祖說話) 형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뒤에 고조선 국가 전체의 건국설화로 확대되었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와 주(周)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고조선도 인접국인 연(燕)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고조선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大夫) 예(禮)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조선은 주전4세기 무렵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연과 대립하고, 또 당시 중국인들이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주전3세기 후반부터 연이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고조선은 밀리기 시작하였다. 주전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동호족(東胡族)을 원정한 다음 고조선 영역내로 쳐들어왔다. 이때 연은 요동지방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고 장새(障塞)를 쌓았다. 그 결과 고조선은 서방 2,000여리의 땅을 상실하고, 만번한(滿潘汗:랴오둥의 어니하 및 그와 합류한 청하의 하류지역에서 동북으로 성수산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요하 유역쪽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뒤 진(秦)나라가 연을 멸망시키고(주전222), 요동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의 공격이 두려워서 복속할 것을 청하였지만, 직접 조회(朝會)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부왕이 죽고 아들 준왕(準王)이 즉위할 무렵 진(秦)이 내란으로 망하고, 대신 주전202년 한(漢)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은 진과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고, 다만 과거 연이 쌓은 요새만을 수축하고 고조선과의 경계를 패수(浿水)로 재조정하였다. 주전195년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지방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위만(衛滿)도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위만은 주전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로 가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 한다.

위만은 유이민집단과 토착 고조선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중국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임둔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는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漢)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濊君) 남려(南閭)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은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고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은 주전109년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동원해 수륙 양면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고, 고조선은 총력으로 저항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 ·이탈되었다.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은 강화(講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남쪽의 진국으로 갔다. 또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尼谿相) 삼(參), 장군(將軍) 왕겹(王唊)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長)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BC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한은 고조선의 영역에 낙랑 ·임둔 ·현도 ·진번 등 4군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이때 많은 고조선인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그들은 삼한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조선이 한의 대군을 맞아 약 1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조선의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이었다. 고조선 후기에는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되고,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은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 지배층 사이의 취약한 결속력은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조선 사회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지금 전하는 범금팔조(犯禁八條)를 통해 볼 때 계급의 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제·신분제가 존재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 시대와 성경시대인 출애굽기를 비교하면 충분히 이해가 갈수 있습니다. 고조선 훨씬 이후 시대에도 다른 나라의 종들은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종은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애굽에 이스라엘이 종살이를 할 때에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백성을 죽이고 싶으면 죽였습니다. 유린하고 싶으면 유린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법을 지키려해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애굽의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불러내어서 애굽같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비록 이방의 종이라고 하여도 관대하게 대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타국에서는 짐승과 같아서 아예 취급도 하지 않는 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종에 대한 인권을 침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종이라 하더라도 해방시켜야 할 때는 해방시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날 인권국가라고 자부하는 미국도 남북전쟁이전에는 노예제도가 버젓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재도 인종차별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십니다. 백인이나 황인종이나 흑인이나 모두 똑같습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똑같습니다. 무지하거나 지혜롭거나 같습니다. 여자이나 남자든지 평등합니다. 다만 그의 백성들은 더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종과 같았던 우리들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인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하십니다.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