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무엘상

하나님의 관리를 받는 한나

김해수/예수촌교회 2010. 9. 26. 16:42

하나님의 管理를 받는 한나

사무엘상1:1-8

찬송가 470장을 작시 작곡한 사람들은 그 생활이 욥과 같았습니다. 작시자는 호레이쇼 케이츠 스파포드(1828-1888)입니다. 그는 뉴욕에서 출생하여 변호사, 교수, 시카고장로교회 주일학교교사 등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871년에 전재산을 투자하여 시카고에 호화별장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대화재로 인하여 그의 모든 재산이 재가 되었습니다. 이에 스파포드는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유럽여행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있어서 1873.11.15일에 프랑스여객선에 가족만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후에 배가 대서양에서 충돌하였습니다. 겨우 아내만 구조되고 네 아들은 구조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스파포드는 사고해역을 지나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시편23편을 읽고 난 후에 이 찬송시를 썼습니다.

이 찬송을 작곡한 사람 필립 폴 블리스도 무디의 전도부흥에 합류하기 위해 시카고로 가던 중 철교가 무너져 간신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나오지 못하자 아내를 구하러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항상 긴장의 연속입니다. 편안한가 하면 불편할 때가 있고, 좋은 때가 있으면 좋지 못한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라고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오늘도 그러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1절과 2절을 읽어보면

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그 사람의 이름은 엘가나의 아내로 한나(Hannah)입니다. Hannah는 많은 여자 중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첫 번째로

I. 자식이 없는 한나(1-2절)

에브라임지파 관할에 라마다임소빔이라는 곳이 있었습니다(삿4:5, 삼상1:1). 이곳은 다윗이 피신했던 곳입니다(삼상19:18). 라마라고도 불리는 지역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지역을 아리마대(!Arimaqeiva)라고 불렀습니다(마27:57). 아리마대 요셉의 고향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32㎞지점에 있었습니다. 성경은 사무엘의 아버지에 대해서 세밀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엘가나는 여호수아 21:20-21절을 보면 레위인입니다.

1절에 나오는 족보는 역대상 6장에 나오는 족보와 똑같습니다(대상6:34-35). 사무엘의 아버지는 엘가나요, 엘가나의 아버지는 여로함입니다. 여로함의 아버지는 엘리후며, 엘리후의 아버지는 도후입니다. 도후의 아버지는 숩이라 했습니다. 사무엘부터 시작해서 5대를 거슬러 올라가 숩에 이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라마다임소빔이 숩의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룻기와 마찬가지로 사무엘상의 시대도 어지러운 시대였습니다. 사무엘이 태어나기 전의 시대는 사사시대였습니다. 이 시대는 참으로 캄캄한 때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였습니다. 거의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환상도 희귀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전혀 희망이 없는 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이럴 때 사무엘의 출생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소망이 있음을 말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한나이고, 하나는 브닌나(Peninnah)입니다. 한나(hN;j')의 뜻은 ‘은총’입니다. 브닌나(hN:nIP])는 ‘모퉁이’입니다. 그런데 Peninnah는 자식(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Hannah에겐 자식이 없습니다. ‘모퉁이’는 있는데 왜 ‘은총’에게는 없습니까?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있어야 할 것들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괴리입니다. 자식이 있어도 우리가 더 있어야 하고, 재산이 있어도 우리가 더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음에 가끔씩 실망하곤 합니다.

Peninnah는 자식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Hannah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주변의 사람들에게는 있을 것들이 넘칩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있어야 할 것들이 없습니다. 우리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경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사라가 25년간 자식이 없었습니다. 리브가도 20년간이나 자식이 없었습니다. 유다에게도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습니다. 삼손의 부모에게도 아주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신자들이나 이방의 사람들에게는 자식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혼돈을 일으킵니다. ‘굳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도 복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으나 안 믿으나 똑같은데 굳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있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도 그렇게 보일 때가 많은데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아직도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치관을 어디에 둡니까? 눈에 보이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에 필요한 것들을 가치관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데 보이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사실 Peninnah에게는 여러 명의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름들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현재까지 자식이 하나가 없어도 그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다복한 ‘Peninnah’가 좋아 보이는데 성경은 ‘Hannah’가 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성도라는 말이 신명기에 처음 등장합니다(신33:2). 코데쉬(vd<qo)로 나와 있는데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마태복음 27:52에 처음 등장합니다. 역시 “거룩한”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성도들은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저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던, 있지 않던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라합이나 밧세바, 다말, 룻 같은 여자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자격미달입니다. 인사청문회에 내보내면 그냥 걸립니다. 오히려 이스마엘이라든지, 에서라든지, 사울 왕 같은 사람들은 인사청문회를 거뜬히 통과합니다. 이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을 볼 때 어떻습니까? Peninnah쪽입니까? Hannah쪽입니까? 어떤 쪽에 속한 사람입니까? 아마도 Hannah 쪽일 것입니다. 신앙이 좋아서 Hannah가 아니라, 받지 못해서 Hannah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세상을 현재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집안 사정이 여의치 못해도 우리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관리하심을 받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리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우리를 돕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관리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필경은 더 은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리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것을 필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이래서 있을 것이 풍족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점점 더 어려워져가도 하나님과 함께 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8절을 보면

3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6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7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8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오늘 두 번째로

II. 고통당하는 한나(3-8절)

엘가나는 해마다 실로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때 실로의 대제사장이 엘리였습니다. 엘리는 아론의 후손이었습니다. 제사장으로는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였습니다. 이들은 제사장이면서 성소에서 갖은 비리를 다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이스라엘은 교회로부터 전 국민들에 이르기까지 부패한 국가였습니다. 사사기는 실로에서 절기(gj') 때 춤을 추러 나온 여인들을 베냐민지파가 잡아 자신들의 아내로 삼으면서 끝이 납니다. 그리고 그들이 무엇이 옳은지 모르면서 자기 생각대로 행동했습니다(삿21:26). 사무엘서 역시 실로를 배경으로 시작하는데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때에 누군가를 보내시기를 원하셨는데 그가 바로 사무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쉽게 보내지 않으십니다.

Hannah는 자식이 없는 것만도 고통이었는데 더 고통스러운 것은 Peninnah의 시집살이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Hannah에게는 한 자식도 없는데, Peninnah는 여러 명의 자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Peninnah는 기회만 있으면 Hannah를 구박했습니다. Peninnah의 낙이 Hannah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Hannah의 괴로움이 Peninnah의 낙이었습니다. 시어머니 시집살이가 아니라 Peninnah의 시집살이였습니다. 말끝마다 물고 늘어졌습니다. 말마다 ‘자식도 없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니 남편이 아무리 잘해주어도 싫었습니다. 그것도 모르는 ‘남편은 내가 있지 않아 내가’해도 Hannah에게는 귀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Hannah의 고통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실로에 예배드리러 갈 때마다 속이 상했습니다. Hannah는 슬퍼서 울고, 남편은 그를 달래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신이난 사람은 Peninnah였습니다. 이러니 어떻게 Hannah가 살맛이 있겠습니까? 아마도 Hannah가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Hannah에게 원인제공을 한 이가 있었습니다. 5절과 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태를 닫으셨다”했습니다. 아예 하나님은 Hannah의 태를 작심하시고 닫으셨습니다. 만일에 아이를 낳게 되면 Hannah담당 천사는 무지하게 혼났을 것입니다. 이러니 Hannah와 엘가나는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당시 히브리사람들의 정서는 불임여인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Hannah의 고통은 갈수록 쌓여만 갔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Hannah의 편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Peninnah편 같이 Hannah를 괴롭게 하셨습니다. 왜 Hannah를 고통스럽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섭리가 Hannah로 하여금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가질 것을 못가지게 했습니다. 사라가 잉태하지 못했습니다(창11:30). 리브가가 아이를 바로 낳지 못했습니다(창25:21). 야곱의 사랑하는 라헬이 아이를 바로 낳지 못했습니다(창29:31). 삼손의 어머니 마노아가 역시 아이를 바로 낳지 못했습니다(삿13:2). 그러나 이들이 가질 것을 모두 가졌습니다. 하나같이 어렵게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유명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주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이스라엘을 회복할 지도자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한나에게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태어나기 전의 이스라엘은 처참했습니다. 하나님의 국민들이 이방인들한테 오금을 펴지 못했습니다. 저희들끼리 싸우고 죽였습니다.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태어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의 회복 500년이 한나의 한숨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희망이 한나의 눈물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미래가 Hannah의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Hannah는 모릅니다. 엘가나도 모릅니다. Peninnah만 신명이 났습니다. 보나마나 엘가나의 전재산은 자기의 자식들 것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Peninnah의 생각일뿐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우리를 비교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집 남편들은 돈도 잘 벌어옵니다. 그런데 우리 집 남편은 아닙니다. 다른 집 남편들은 manner가 참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 남편들은 아닙니다. 다른 집 아이들은 참 잘 됩니다. 뭐라고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합니다. 좋은 직장을 힘없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우리 집 아이들은 아닙니다. 갑자기 친구한테 전화가 옵니다. 밥 한번 사겠다고. 왜 밥을 사느냐니까 아들이 어쩌고저쩌고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밥 살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밥 좀 사고 싶은데 여간해서 그런 일이 안 올 것 같습니다. 다른 교회는 크고 좋습니다. 찬양대도 있고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교회는 뻔합니다. 얼마나 관리가 잘 되느냐? 누가 교회에 일찍 오고, 늦게 나오느냐까지 세밀하게 알 정도입니다. 그래서 우리성도들이 이런 생각도 할 줄 압니다. ‘내가 교회를 잘 선택했는가?’

왜 우리들이 고통을 받습니까?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잘못했습니까? 우리들이 더 열심히 하지 않았습니까? 어쩌면 그 말도 맞을 것 같습니다만 정답은 아닙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우리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이유 있는 어려움이고, 이유 있는 고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숨기신 어떤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서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흔한 일들이, 우리에게는 기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현재의 고통보다 장차의 복을 예견하지 못하면 중도에서 포기하여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더 좋은 은혜에서 제외됩니다.

마태복음 5:3-10절을 보면 인생의 irony가 있습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심령이 가난해야 하고, 애통하며,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다른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며, 화평케 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Makavrioi)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이 이 안에 있습니다. 누가 이러한 고통을 복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을 누가 하셨습니까? 우리의 주님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유 있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복이 그 안에 다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애통하고, 하나님께 대해서 열려있는 자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서 5장 7항을 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일반적으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미치는 것처럼, 하나님은 가장 특별한 방식을 따라 그의 섭리로 자기 교회를 돌보시며 모든 일들을 교회에 유익이 되게 처리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 현재 없을 때,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아하 사라처럼, 리브가처럼, 라헬처럼, 마노아처럼, 한나처럼 우리를 특별히 관리하시는가 보다’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것을 준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나는 브닌나에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더 좋은 것을 사모했습니다. 우리에게 엄청난 것을 준비하셨는데, 그것을 믿음으로 보지 못하면 후에 있을 복을 완전히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내 아들과 딸들이, 내 배우자가, 내 부모가, 내 교회의 목사가 좀 부족해도 기다리기를 바랍니다. 더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이고”하거나 “에이”하면 “아이고 신앙”이 되고 “에이 신앙”이 됩니다. 더 좋은 것을 위해서 기다릴 줄 아는 성도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현재 있을 것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현재 내가 고통을 받고 있다면 이유 있는 고통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준비하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