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
고린도후서1:1-7
김소월(金素月;1902.8.6-1934.12.24)이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의 시중에 대표적인 시가 “진달래꽃”입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이외에도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산유화”등 많은 명시를 남겼습니다. 김소월은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를 거쳐 배재고보(培材高普)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도쿄상대[東京商大]에 입학하였으나 관동대지진으로 중퇴하고 귀국했습니다. 당시 오산학교 교사였던 안서(岸曙) 김억(金億)의 지도와 영향 아래 시를 썼습니다.
이렇게 많은 명시를 남겼지만 그는 3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 이유는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동아일보사 지국을 경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운영에 실패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실의의 나날을 술로 생활하다가 자살을 했습니다. 왜 그가 자살했습니까? 위로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위로를 받지 못하여 자살한 것입니다. 돈으로부터 위로를 받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어떤 것으로부터 위로를 받지 못하면 인생을 매우 힘들게 살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로부터 위로를 받고 있다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1절에서 3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I. 우리가 믿는 하나님(1-3절).
오늘 우리들은 왜 이곳에 모였습니까? 왜 이렇게모든 것을 뒤로 하고서 이곳에 모였습니까? 교회에 오면 별로 볼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작은 공간에 모여 있습니다. 저와 성도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온 것입니다. 건물을 보고 오지 않았습니다. 최첨단의 교회가 많은데도 오늘 우리들은 작은 이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우리가 또한 기독동호회로 모이지 않았습니다. 취미와 성향이 같아서 동호회로 우리가 모이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이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와 아가야지방의 성도들에게 문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안을 자신이 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자신과 디모데가 인사는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이름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qeou' patro;" hJmw'n kai;) 주 예수 그리스도(kurivou jIhsou' Cristou')의 이름으로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과 디모데의 은혜와 평강이 아니고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입니다.
3절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Eujloghto;" oJ qeo;"),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자비의 아버지(path;r tw'n oijktirmw'n), 모든 위로의 하나님(qeo;" pavsh" paraklhvsew")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예배 때마다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설명하고 또 설명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우리가 멀리 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의 생을 불평합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불평합니다. 소신 없는 정부의 발표는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습니다. 정부에서 일자리 창출한다는 소리는 작년12월부터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일자리는 한 개도 없습니다. 그래도 이 말은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습니다. 일자리를 창출하신다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은혜를 주신다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로 인한 우리들의 강퍅함 때문입니다. 이 강퍅함을 우리들이 깨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지 않으면 우리들의 삶이 암담해지고 미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극적으로 만난 사람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떨기나무가 타는 것을 보았습니다(출3:2).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수많은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극적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따라서 말도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도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모세시대 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저주했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레24:10-23). 엘리사 시대에 어떤 신하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가 밟혀 죽었습니다(왕하7장). 신약시대에 예수님제자들조차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가 예수님께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한 결 같이 느낀 것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곳에도 뛰어들었습니다. 살 곳은 더 말할 것 없이 뛰어들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바로 옆에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요한계시록 1:8절을 보면 주님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전능한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삶을 변화하고 싶으면 우리들의 생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들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것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도태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활은 계속 퇴보할 것입니다. 우선은 잘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접점에서부터 막히기 시작합니다. 풀릴 것 같으면서도 풀리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앞에 항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제발 순종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성도들의 삶이 나아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해지기를 원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따라주지 않는 것입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가 잘 살 수 있는데, 우리가 성숙될 수 있는데 왜 순종하지 않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제부터 그렇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제 개인의 생각이 아닙니다. 성경의 생각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작은 것부터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그 순종이 우리의 생활과 연결되었다는 것을 꼭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꼭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보고 계시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4절에서 7절을 읽습니다.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II.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4-7절).
프랑스의 리용(Lyon)과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비엔나(Vienna)를 고울 지방이라 했습니다. 이곳에서도 참혹한 기독교의 박해가 있었습니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Blandina(블란디나)라는 자매는 로마의 군인들에게 끌려가 밤낮 고문을 당했습니다. 예수를 부인하라고 온몸을 채찍으로 내리쳤습니다. 그러나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겼는데도 ‘나는 기독교인입니다’하고 죽어가면서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순교를 했습니다. 이 세상의 권력과 고통도 그녀의 신앙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박해는 여러 세대에 걸쳐 수많은 곳에서 기독교인들을 괴롭혔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기쁜 일보다 슬픈 일이 훨씬 많습니다. 좋은 일보다 나쁜 일들이 훨씬 많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힘이 듭니다. 좋은 일은 많고, 나쁜 일은 없었으면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살맛이 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위로한다’ parakalevw(파라칼레오)는 ‘초청하다’는 뜻입니다. parakaleo는 파라v(para;/곁에)와 칼레오((kalevw/부르다)의 합성어로 ‘자기 곁으로 부르다’입니다. “좀 위로해 줄까?”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예 우리를 자기 곁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박카스 한 병 던져주고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리무진에 태워서 목적지까지 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로는 세상의 위로와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는 조금만 힘들어도 못산다고 하지만, 바울에 비하면 야유회에 나온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바울사도가 당했던 환난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는 굶기를 밥 먹듯 했습니다. 춥고 헐벗었습니다. 전도하다 무수하게 매를 맞았습니다. 감옥을 자신의 집으로 삼을 정도였습니다. 전도여행 중의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이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바다와 길이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강도를 만나서 털렸으며, 극성스런 유대인들이 원수같이 여기고 죽이려했습니다. 거기에 모든 교회를 위한 근심과 염려로 마음이 항상 억눌려 있었습니다. 편안한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몸에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받는 고난은 우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일해야 한다고 바울을 떠밀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당장 그만두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사도는 그 어려운 일들을 모두 감당했습니다. 어떻게 감당했습니까?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환난은 일 년 365일을 우리를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긋지긋하게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하늘 문을 닫고 3년 반 동안 어떻게 살았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까마귀가 날마다 떡을 배달했습니다. 사르밧의 여인을 통해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치고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삶의 현장을 직접 찾으셨습니다. 애굽에서 압제받는 고통의 현장을 찾으셨습니다(출2:24). 방주에서 이젠가 저젠가 기다리고 있는 노아를 하나님이 찾아가셨습니다(창8:1). 99살까지 제대로 된 아들 하나 없는 아브라함을 찾아가셨습니다(창17:1).
시편68:5은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했으며, 34:6에서는 하나님은 곤고한 자가 부르짖을 때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5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도는 그래서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서 우리에게 큰 위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대속적고난을 통해서 위로가 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음으로써 우리가 생명을 얻고, 우리가 위로를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고난을 당함으로써 고린도교회는 생명이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순환적입니다. 바울사도가 사역 중에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위로하십니다. 이렇게 받은 하나님의 위로는 바울사도에게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넘쳐흘러서 고린도교회뿐만 아니라 우리교회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로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불신자들의 고난은 대가없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망의 고난입니다. 위로가 있는 고난이고, 복이 되는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오면 이를 기뻐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대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예수그리스도-사도를 통해서 들어온 고난은 하나님-예수그리스도-성령을 통해서 위로가 우리에게 배달됩니다. 그래서 고난이 와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역설적인 고난입니다. 이유 있는 고난입니다.
일 년 내내 현 정부에서 한 일은 십년간에 걸쳐서 일어난 경제를 죽인 일입니다. 일년 내내 매일 경제 살린다, 나라 살린다, 하지만 그 소리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해마다 한 해가 가는 문턱에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할 때면 희망을 가져 보는데 이번에는 그것마저 허락이 되지 않습니다. 내년에는 더 절망적이라고 경제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을 한방에 날려버리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지옥에서 순간 건지셔서 천국으로 올리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고난에서 건지시는 분은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난을 당한만큼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는 기도만큼만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고난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께 모두 가져갑시다. 우리를 위로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하십니다. 이제로부터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