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라기

특별하신 하나님의 사랑

김해수/예수촌교회 2012. 4. 10. 06:48

특별하신 하나님의 사랑

말라기1:1-5

9․11테러사건은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미국 뉴욕의 110층 세계무역센터(WTC)와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에 대한 항공기 동시 다발 자살테러 사건입니다. 벌써 10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남대문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숭례문은 1395년(태조4년)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7년)에 완성한 건물입니다. 하지만 세종29년(1447년)에 고쳐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명박 서울시장 때 개방반대를 무릅쓰고 개방하더니 2008년 2월 10일에 불이나 완전히 소실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건이 issue가 될 때는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장담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일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나면서 점점 뇌리에서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이에 사건사고가 엄청나게 많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해결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일들이 있습니다. 가족을 잊어서 안 될 것이며, 자신들이 지금 누구의 은혜로 살고 있는지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잊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혜를 이스라엘은 잊고 있었습니다. 1절에서 2절을 보면

1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I. 하나님께 섭섭한 이스라엘(1-2a절).

‘꽃무릇’이라고도 하고, ‘석산’이라고도 하며, 상사초(相思草)라는 식물이 있습니다. 이 식물은 9월 중순에 꽃대가 나오는데, 잎과 같이 나오지 않고 꽃잎이 모두 떨어진 다음에야 잎이 나옵니다. 그리고 잎은 겨울을 지나 5월에 시들어버립니다. 한 뿌리에서 잎과 꽃이 평생 단 한 번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상사초입니다. 꽃이 잎을 보려다가 너무나 잎이 늦게 나와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잎도 마찬가지입니다. 꽃을 보려고 겨울 내내 기다리고 이듬해 봄이 되어도 꽃이 나오지 않습니다. 잎과 꽃이 평생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무척 섭섭한 마음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bhea;)하였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했노라”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말씀이냐는 것입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도무지 하나님이 사랑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체적으로 그 사랑을 말씀해보라는 어투입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말라기(나의 사자)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하셨습니다. ‘경고’(massa)는 좋은 소리가 아닙니다. 어떤 나라가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을 때는 뒤이어 심판으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경고라고 했을 때는 이스라엘이 무엇인가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라기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고 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은 성벽을 재건하라고 해서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성벽을 재건했습니다(스1:2-느3장). 거기에 성전을 재건하라 해서 재건했습니다(스6:15). 성전재건은 지연되기는 했지만, 무사히 마쳤습니다. 이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차례라는 것입니다. 우리 책임은 어쨌든 다 했으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무척이나 섭섭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에서 돌아온 후 성전만 완공되면 모든 것이 잘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너나없이 최선을 다해서 성전공사를 완수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사랑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성전공사를 하기 전이나 하고난 후나 똑같았습니다. 성전공사가 끝난 지가 50여년이나 되는데 하나님께로부터 아무런 은혜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책회의를 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면 좋을까? 우리도 할 만큼 했는데’ 하면서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이왕 이럴 바에야 우리가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나?’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신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히 실망했습니다. 심히 낙심했습니다. 그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명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망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방사람들이나 똑같아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섭섭한 마음을 넘어서서 반발까지 했습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1:2).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1:6).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3:8).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3:13). 이스라엘 백성들은 ‘My Way’를 외쳤습니다. 나는 나의 길을 가렵니다. 그러니 하나님 상관 마십시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과 우리가 똑같지 않은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라 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임직을 받으라고 해서 임직을 받았습니다. 열심히 하라고 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고 했습니다. 말씀을 믿으라고 해서 졸지 않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라고 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섭섭하게만 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섭섭하게 했지, 안 섭섭하게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생활이 신앙에서 빠져나가게 됩니다. ‘믿어도 소용없더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섭섭하게만 하더라.’ ‘하나님도 차별을 하더라.’ 하면서 이스라엘처럼 ‘My Way’를 외칠 마음을 가지지 않았나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스라엘처럼 반발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의 약속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오늘 두 번째로

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찌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5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II. 에서를 미워하시는 하나님(2b-6절).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심히 섭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신 하나님은 깜짝 놀라셨습니다. ‘한 번도 섭섭하게 대하지 않았는데, 그리고 너희들을 특별대우를 했는데…’하시면서 오히려 하나님이 더 섭섭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700분 공개토론’을 제안하셨습니다. 서로 섭섭했던 것 모두 이야기해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토론의 panel들을 준비하셨습니다. 아브라함 때문에 혼났던 애굽 왕, 역시 아브라함 때문에 죽을 뻔했던 아말렉왕, 다윗왕에게 늘 당했던 왕들 그리고 최근에 바벨론에게 멸망당했던 왕들을 토론참가자로 참석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왕들은 죽었고, 어떤 왕들은 노역 현장에서 토론장에 도착했습니다. 이스라엘만 멀쩡한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각 패널들에게 마음대로 말하라고 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대표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서운하게 해주셨다고 섭섭함을 드러냈습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다가 지쳤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웅성웅성했습니다. 모든 대표들이 이스라엘을 성토했습니다. ‘우리들은 이스라엘 때문에 숨 한번 제대로 쉬어 본적이 없다.’ ‘여호와 하나님의 편애 때문에 우리들은 지금까지 숨을 죽이고 있다.’ ‘바벨론에게 멸망당했어도 그래도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 할 말이 없다.’ 여러 나라들이 이스라엘의 대표를 성토하고 나섰습니다. ‘우리는 지금 노역현장에서 왔다. 우리들은 바벨론의 압제에서 존재도 없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본국으로 돌아갔지 않느냐?’ 이스라엘은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문제를 들고 나오셨습니다. ‘에서가 야곱의 형이 아니냐? 맞지?’ ‘그런데 나는 야곱만을 사랑했다. 알지?’ ‘똑같은 형제인데 에서는 미워했고(anEc;/sane/증오하다), 야곱은 사랑했다. 그것을 너희들이 알지?’ ‘너희들이 에돔을 봐서 알 것이다. 그들이 계속 일어나려고, 재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대로 안 되었다. 그것은 내가 그렇게 했다. 그 지역을 본 사람들이 아주 쓸모없는 땅이라 할 정도로 내가 만들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영영한 진노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듣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구원할 자와 버릴 자를 결정했다는 말씀입니다. 예정과 선택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정대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에 따라서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만 바벨론에 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바벨론에 망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회복되었습니다. 옆에 있는 에돔을 보니 폐허로 남아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을 특별히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성도여러분,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고난은 받습니다. 그러나 함께 고난 받아도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들과 다른 사람들의 고난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고난은 연단입니다. 더 좋은 신앙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고난과 환란을 당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고난은 심판이고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고난을 당해도 차원이 다릅니다.

로마서9:11-13을 보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볼 수 있습니다.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선택에 의해서, 예정된 자만 구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다면 교회를 세우실 필요도 없고, 전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정된 자만 구원하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버림을 당하고, 어떤 사람은 선택을 받습니다.

제가 군에서 1차 교육을 받고, 2차 교육을 받을 때, 갑자기 지펜글씨와 그라스펜 글씨를 쓰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600명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선에 합격했습니다. 그러나 본선에서 저 하나만 합격했습니다. 동료들이 저를 무지하게 부러워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저는 제대할 때까지 행정병으로 근무했기 때문입니다. 600명중에서 뽑힌 것만 해도 대단한 영예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를 구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하심 속에서 은혜와 선택원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입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영원 전(창25:22-23)입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택하심에 따라’입니다. 즉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입니다. 사람의 미래는 ‘운명’이 아닙니다. 사람의 미래는 타고난 ‘생년월일’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가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계획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에 두셨습니다. 불교와 같이 56억7000만년 후에 세 번의 설법으로 이 세상의 282억명(96/94/92억명/미륵의 구원)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쓸데없는 말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영원 전부터 불렀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행위 즉 선행(good conduct)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조건을 보고, 한 일로 구원을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 할 것 같아서 우리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리브가의 뱃속에 있었습니다. 리브가의 뱃속에 있는 야곱이 잘 할 줄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에서와 야곱의 행위가 아직 체크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창세전에 야곱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나오고, 우리가 예수를 믿은 것 같은데, 성경은 창세전에 내가 너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하는 행위로 봐서 선택했더라면 우리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조건으로 본다면 우리는 자격미달입니다. 이 사회에 얼마나 조건이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까? 한국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서강부(서울대, 강남,부저)여야 합니다.

우리가 부족하여도 하나님은 우리를 영접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왜 구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려고 부르신 것이지, 거룩해질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엘리트가 될 것을 아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개판을 치고 제멋대로 사는 우리들을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셔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부르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습니다. 자신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엡1:4-5).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보니 하찮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자신들을 포기했습니다. 자신들을 경멸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으니까 우리대로 살길을 찾자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떠나는 동인(motivation)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말라기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심히 잘못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데도 그 사랑을 몰라준다면 심각한 것입니다. 말라기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온갖 부정이 횡행했습니다. 갖은 부패가 만연했습니다. 자포자기가 온 이스라엘을 휩쓸었습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설득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한다는 증거로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예배도 회복하고, 언약도 잊지 말며, 그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일어나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1985년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세계 마라톤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 대회에서 잊지 못할 감격스런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1등으로 뛰던 선수가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나서 절룩거렸습니다. 2km 정도 밖에 안 남았기 때문에 그는 고통을 참으면서 계속 발을 내디뎠습니다. 고통으로 얼굴은 일그러졌습니다. 그런데 그 때 악전고투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2등으로 달리던 선수가 그를 부축하고서 같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1등을 할 수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결국 그 두 선수는 천천히 결승점으로 들어와서 메달을 얻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로 인해 숙연해졌고, 그에게 뜨거운 갈채를 보냈습니다. 2등으로 뛰던 사람, 그는 1등이라고 하는 면류관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1등과 같이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대단한 은혜입니다. 사람들이 장수를 하면 보통 100살을 삽니다. 100년이란 평생은 긴 시간입니다. 그런데 100년을 100번 산다는 것은 더 긴 해입니다. 왜냐하면 1,0000년이기 때문입니다. 10000년은 참으로 긴 시간입니다. 하지만 영원에 비하면 점 하나도 되지 않습니다. 영원이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이 없는 시간 영원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왜 영생이 중요합니까? 만일에 영생하지 못한다면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 심판도 영원히 받습니다. 끝없는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우리를 작정하시고 선택하셨습니다. 선택하신 우리들을 부르셨습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로 살아가게 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서운하게 하시더라도 더 열심히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와 항상 동행합시다. 때로 고난이 오더라도 개의치 말고 주님을 사랑합시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잊어도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에게 살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십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지켜보시고 무한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끊임없이 사랑하십니다.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믿음대로 되게 하십니다. 그를 의지하는 대로 은혜를 주십니다. 좀 더딜지라도 하나님을 기다립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사랑하시고 내일도 사랑하심을 잊지 마시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오직 그를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