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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7
거짓자 이세벨을 책망하시는 주님
요한계시록2:18-29
헌법재판소(憲法裁判所/Verfassungsgericht)는 국가 내에서 최고의 실정법 규범인 헌법에 관한 분쟁이나 의의(疑義)를 사법적 절차에 따라 해결하는 특별재판소입니다.
헌법재판소는 법적분쟁을 사법적으로 해결한다는 점에서는 일반법원과 같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파급효과가 큰 헌법적 분쟁을 대상으로 하며, 헌법을 최종적으로 유권 해석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일반법원과 구별됩니다. 헌법재판소는 법원의 제청에 의한 법률의 위헌여부 심판, 탄핵의 심판, 정당의 해산 심판, 국가기관 상호간,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 간 및 지방자치단체 상호간의 권한쟁의에 관한 심판, 법률이 정하는 헌법소원에 관한 심판을 담당하는 그야말로 이쪽도 저쪽도 아닌 한 가운데서 귀를 막고 바른 판결을 해야 할 기관입니다. 그런데 가끔가다 ‘위법’이지만 ‘유효하다’는 모순의 판결을 한 예도 있습니다. 2009년 10월 29일 헌법재판소는 지난 7월22일 국회에서 표결처리한 신문법, 방송법 등 소위 media법이 ‘위법’이라는 지적이 그것입니다.
‘違法’인데 ‘正法’이라는 말은 ‘검정색’의 페인트와 하얀색 페인트를 섞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헌법재판소는 검정색이 아니고 하얀색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검정색을 검정색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하얀색이라고 말하는 것은 헌법재판소에서 할 일이 아닙니다. 이로 인해 나라의 도덕성이 또 한 번 국내외적으로 심각하게 실추되었었습니다. 이에 대한 파급은 훗날에 엄청날 것입니다. 따라서 헌법재판소가 과연 존치해야 될 기관이가를 생각해볼 판결입니다. 이후로 계속 헌법재판소는 右 click한 판결을 내곤 했습니다.
두아디라교회도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교회처럼 칭찬을 받을 점이 있었습니다. 19절을 보면
내가 네 사업(행위)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I. 두아디라교회의 믿음을 칭찬하는 예수님(19).
옛날 우리들이 어렸을 때 학교에서 숙제검사를 받았습니다. note를 선생님에게 제출하면 선생님은 빨강색 펜으로 원을 그려주었습니다. 원이 다섯 개면 100점, 원이 네 개면 80점, 세 개면 60점입니다. 더러 네 개를 받는 날도 있었지만, 다섯 개의 원을 받는 날이 많았습니다. 다섯 개의 원을 받으면 기분이 매우 좋았습니다. 사람이 괜찮아서 원을 다섯 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숙제를 제대로 했기 때문에 다섯 개의 원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도요한을 통해 두아디라교회의 감독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잘 안다( oi\dav). 너희 교회가 하는 일들이 처음보다 나중이 더 많다고 하셨습니다. 칭찬을 받아도 보통 받은 것이 아닙니다. 빨강색의 원을 다섯 개나 받았습니다. 두아디라교회의 행위(ta; e[rga)는 곧 사랑(th;n ajgavphn)과 믿음(th;n pivstin), 섬김(th;n diakonivan)과 인내(th;n uJpomonhvn)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평안할 때 받았다면 칭찬의 도가 좀 낮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상황에서 받았다면 칭찬을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두아디라교회가 칭찬받은 행위, 곧 사랑과 믿음, 섬김과 인내는 짝을 이루는 것들입니다. 사랑은 섬김을 낳습니다. 믿음은 인내를 낳습니다. 이 모두 예수님을 믿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주님을 사랑함이 없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역시 주님을 믿지 못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섬김은 인내할 때 할 수 있습니다. 신앙으로 인내할 때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믿음, 믿음(pivsti"/faith.)하는데 과연 우리가 믿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120년이나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데, 25년이나 기다렸습니다. 이삭도 20년을 지나서야 아들들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다윗은 왕의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어땠습니까?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겨야 했습니다. 그 많은 날들을 우리 선배들은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은 예수님 당시 혁명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존재한 의식적 경건을 버려야 했습니다. 랍비식 가르침을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즉 인간적인 것의 계속적 포기였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꼭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믿느냐’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서 병 고침을 받을 때에 그들의 믿음을 극구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보다 ‘믿음’을 구(求)하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역사를 행하실 수 있는 가능성을 나타내는 통로입니다. 마가복음6:5-6을 보면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불신이 매우 강해 예수님께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수 없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불신은 하나님의 능력과 항상 충돌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머릿속에 이 세상의 지식과 지혜가 꽉 차있을수록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자기의 의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불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을 다시 돌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많은 불이익을 당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신앙이 이 세상에서 범하는 죄 중에 가장 크고 두려운 죄입니다. 사실 믿지 못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갔고, 지금 가고 있으며, 이 세상에서도 헤매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문맹자들이 아닙니다. 지성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종교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신앙에 관한한 my-way를 외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가능성들에 복종하셨습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범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산을 옮긴다 하셨습니다(막11:23). 믿음은 뽕나무 뿌리를 뽑는다 하셨습니다(눅17:6). 뽕나무 뿌리가 뽑힌다는 것은 당시 히브리관용어였습니다. 절대로 불가능할 때 뽕나무를 들먹거렸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 그 불가능한 것을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창조의 질서를 변형시킬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Ecete pivstin qeou'/have faith in God/막11:22), 믿음을 더하소서(Provsqe" pivstin/increase faith/눅17:5)는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특별히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이 세상의 모든 일에 가능성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Martin Luther는 믿음이란 ‘전망을 밝게 하고, 관망을 환하게 하며, 소망을 솟아나게 한다’고 했습니다. Spurgeon은 ‘믿음이란 자신을 약속 위에 던지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힘은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미래는 믿음에 있습니다. 가정에도, 사업장에도, 직장에도 내가 있는 곳에는 항상 믿음과 같이 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와 같이 살지 않습니다. 남을 짓밟고, 흔들어서 떨어뜨린 다음에 그 자리에 오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뇌구조와 그들의 뇌구조가 다릅니다. 우리들은 법대로 살지만, 그들은 무법으로 삽니다. 지금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장 법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법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fair play를 하려고 하지, 편법을 쓸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민완형사가 자리 잡고 있어 편법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주님의 능력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지만 믿음으로는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이 세상을 이기는 성도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반드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여러분을 전혀 다른 사람을 만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II.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20-23).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 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단체행동을 할 때 가장 제재를 받는 곳은 군대입니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서 전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군에 있을 때는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이와 비슷하게 제재를 받는 것이 조합(partnership)입니다. 농업협동조합, 축산협동조합, 인삼협동조합 등 조합은 2인 이상이 상호 출자하여 공동사업을 할 목적으로 결합한 단체입니다. 조합은 단체를 이루어 공동사업을 경영하는 단체입니다. 조합의 목적은 조합원 전원에 의해 경영되고, 그 이익은 전 조합원에게 분배됩니다. 그러므로 조합은 함께 경영하고 함께 분배를 받는 단체입니다.
성경주석학자 바클레이에 의하면 두아디라는 종교적으로 특별히 중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Artemis와 Apoll0 신전이 있었지만 유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황제숭배(Caesar Worship)의 중심지도 아니기 때문에 이방종교의 위용에 압도되거나 황제숭배 위협에 직면하지는 않았습니다. 즉 두아디라교회의 성도들 대부분이 외부적으로 박해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두아디라市는 종교적인 중심지는 아니었지만 상업적인 요충지였습니다. 그곳을 지나는 도로망을 통해서 세계무역의 반수이상을 관장했다고 합니다. 두아디라는 양모의 중심지였으며 염색 산업으로 유명했습니다. 사도행전16:14의 자주장사 루디아는 두아디라에서 왔습니다. 당시 자주빛 염색약은 엄청나게 비싼 품목이었습니다. 자주염료 453g이 약1억원(1000데나리온)이었습니다. 자주장사 ‘루디아’는 엄청난 물품을 파는 귀부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두아디라는 어느 도시들보다 무역조합이 많았습니다. 이 무역조합이 교회에게 막강한 영향을 행사했습니다. 두아디라에서는 어떠한 장사나 업자도 상업조합 일원이 되지 않고서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가입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역조합을 하는 사회적인 활동들은 이교의 신들의 숭배와 연관되었습니다. 각 조합마다 수호신인 우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두아디라에서 출세하려면 조합에 가입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조합원이 되면 우상을 숭배해야 했습니다. 조합원은 조합에서 갖는 제례의식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조합원들은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이 밥은 ‘아폴로’나 ‘아데미’ 신전에 바쳐지고 남은 술잔과 함께 먹었습니다. 그 다음 식사 후에는 동물을 잡아서 아폴로나 아데미 신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바쳐진 고기를 먹었습니다. 다음으로 술에 취해야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행음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동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아디라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경제적인 제재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Iezavbel)이 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난국을 타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타결 책을 그럴듯하게 제시하였습니다. 이세벨의 타결 책이 무엇입니까? 사단을 이기기 위해서는 사단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란 것을 경험해보지 않고 어떻게 죄를 알 수 있느냐? 그러므로 사단의 은밀한 행동을 배워보자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가르침은 성도들에게 파격적이었습니다. 우상숭배 괜찮아, 까짓것, 음행? 신전행사잖아? 우리가 능히 이길 수 있어. 그러므로 우상숭배도 해라. 신전의식의 음행에 참여하라,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머물면서 보다 나은 성도가 되자라고 가르쳤습니다. 성도들에게 간음을 행하고 우상에게 바쳐진 것들을 먹어도 좋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충동해서 이교의 상업조합에 가입하고, 우상에게 절하고, 바치고, 먹고, 행음해도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사단의 깊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단의 깊은 ‘계곡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이 판을 치고 있는데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은 엘리야 선지자의 대적자입니다. 시돈에서 섬기던 바알신을 이스라엘에 끌어와 이스라엘을 타락시킨 여자입니다(왕상18:4).
그러나 ‘불꽃같은 눈’을 가지시고 악인을 발로 밟으실 주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미 그 여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심판이 그에게 임합니까?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그와 같이 하는 사람들은 큰 환난가운데 던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녀의 자식들은 죽여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가 행한 대로 갚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빨리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왜 여기에서 이세벨의 이름을 썼습니까? 그 여인의 이름 이세벨은 음행과 우상숭배에의 유혹과 동의어입니다.
열왕기상16: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18: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일백인을 가져 오십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었더라 13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일백인을 오십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께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19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19:1,2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성도여러분! 오늘날 교회는 유명한 사람들이 망치고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 같이 작은 교회들은 제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은 교회들은 여러 가지가 개입됩니다. 정권, 경제, 스포츠, 문화 등이 서서히 교회를 타락시킵니다. 2015년에 W.C.C. 세계대회를 부산에서 개최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일부는 좋아하지만, 일부는 싫어합니다. 이 대회는 세계적인 대회입니다. 그런데 싫어하는 이유는 천주교, 힌두교, 기독교, 불교, 무당들도 함께 하는 모임입니다. 우리는 Sola Fide, Sola Christus, Sola Gratia입니다. 순수하다는 것은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것입니다. 꿀에 설탕을 약간 넣어도 꿀맛 그대로입니다. 먹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정수된 물 20ℓ에 한 컵의 하수도 물을 섞는다면 마시겠습니까? 이세벨은 두아디라 성도들에게 정수된 물 10ℓ에 썩은 물 20ℓ를 타서 마시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두아디라교회는 다른 교회들처럼 외부에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내부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적인 위협은 외부적으로 오는 박해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소리 없이 안으로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두아디라교회에게 너희 교회에 있는 칭찬한 일들을 ‘굳게 잡으라’고 했습니다.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 너희들은 너희에게 ‘있는 것들’을 굳게 잡으라고 했습니다. ‘사랑과 믿음’, ‘섬김과 인내’입니다. 이것을 절대 놓치지 말고 ‘굳게 잡으라’는 것입니다. 손가락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손안에 넣고 꼭 잡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신앙을 굳게 잡는 자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철장으로 질그릇을 깨뜨리는 것처럼 세상을 깨트릴 것이라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굳게 잡고 믿음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우리들에게 닥치는 악들을 제거하신다 하십니다. 그리고 참된 왕권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어떤 권세입니까? 철장으로 질그릇을 깨트리듯 하는 권세입니다. 이렇게 되도록 누가 함께 하십니까? 교회를 쥐고 계시는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사실 요새 취업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IMF이후로 우리나라는 청년실업이 해마다 정체되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말도 안 되는 정책과 억지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右click 정권8년 만에 그나마도 잡은 직장을 비정규직으로 묶어놓고 있습니다. 좋은 정책, 좋은 제도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죽을 정책, 죽일 제도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조합에서 탈퇴한다면 빈곤과 배고픔, 핍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들을 세상에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음과 행위를 감찰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불꽃같고 날카로운 눈은 이세벨 같은 자들을 용납하고 그녀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가만두지 않으십니다. 기실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기로 남아있는 성도들에게는 아무 짐도 지우지 아니 하십니다(행15:28,29). 성도가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음행을 피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의 판도(版圖)는 갈수록 뒤바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깨끗한 양심을 갖고자 하는 성도들이 억압당하는 때입니다.
따라서 비록 우리들의 현재가 심상치 않아도 주님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아디라의 성도들은 아사직전에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날그날 사는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신앙을 굳게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우리의 신앙을 굳게 지켜 이 세상을 이깁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굳게 잡을 때 사탄의 머리는 우리의 발아래에 있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굳게 잡고 있을 때 소망의 항구에 다다르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굳게 잡을 때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을 굳게 하고 말씀을 굳게 붙잡으십시다.
우리는 주님과 연합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새벽별은 새벽하늘을 다스리는 상징이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스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의 빛나는 왕권과 통치를 함께 나눌 것입니다. 별은 항상 홀과 연결된 왕권의 상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