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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과거와 현재(로마서6:15-23)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왼쪽 항은 우리들의 과거의 상황입니다. 오른쪽은 우리들의 현재상황입니다. 판이한 대조이며, 상반된 대조이기도 합니다. 물론 아직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왼쪽 항에 속해 있습니다. 정치를 논하며, 경제를 논하고, 알 수 없는 우주를 논하며 연구할지라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항상 왼쪽 항에 속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무서운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한다하더라도 어떤 직에 있을지라도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왼쪽 항에 속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평등한 사회입니까? ‘소득양극화란 사회의 빈익빈 부 익부 현상이 심화되어 소득분포가 양극단으로 쏠리며 중간소득계층이 해체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우리는 외환위기 이후 심화된 경기침체와 경제성장률 저하 및 실업률 증가 등으로 인해 소득양극화가 급격히 촉발되었습니다. 2007년 초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전국의 가구 소득은 전년보다 5.1%증가해 2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늘었다고 하지만 계층별 소득격차는 통계작성이 시작된 2003년 이후 최대로 벌어졌습니다. 중간층이 줄어들고 상위층과 하위 층의 규모가 늘어나는 전형적인 소득양극화 현상이 가속되고 있습니다. 해마다 국회의원이나 국무위원들은 수 십 억원 내지 수조원의 재산이 있음을 고지합니다. 과연 그들이 국민의 재산이나 국민의 생활을 진실로 진정으로 생각하고 있을까요? 과연 그럴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라는 생각이 왜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국민들의 실업률은 천정부지로 뛰고 있는데 밥그릇싸움 하는 국회의원들을 우리가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안다는 것,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등을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곁에 있는 어려움조차 조금도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들,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이 없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짐을 벗겨 주셨습니다. 무거운 멍에를 대신 져주셨습니다. 감사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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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마서6:1-11)

 

Ohmy News 2015.05.25.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대 교회와 50megachurch 23개를 갖고 있습니다. 1958년 가정교회에서 시작한 순복음교회는 최대치를 찍은 2010년에 신도 수가 78만 명이었습니다. megachurch에 속하는 23개의 한국 교회 중 5개는 전세계 10위권에 들어 있습니다. 명실상부한 기독교 국가답게 독실한 기독교 신자 출신 대통령도 3명이나 나왔었습니다. 이승만, 김영삼, 이명박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 명의 대통령이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하나, 그들은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조차 그들을 좋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대통령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정재계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만해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럼에도 고린도교인처럼 파당정치를 하느라 상대의 그리스도인들을 같은 하늘아래에 있어서는 안될 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철천지 원수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에 대하여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에 대하여 죽으시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셨다는 것은 아담 즉 인간의 방향전환(方向轉換)입니다. 방향전환이라 함은 죄와의 관계를 끊고 타락이전의 아담상태로 회복시키심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이루신 구원을 우리는 너무쉽게 받아들이는 것과 같아서 난 이제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이런 것쯤은 이해하실거야하면서 죄에 대하여 담대한 마음을 가지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의 교리는 권면의 형태로 바뀝니다.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구원이 성취된 사실을 확실히 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원리적으로 죄에 대하여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으로 확신에 차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이 우리들의 모든 사고에 적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계획, 언사, 행동을 위한 도약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전의 우리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죄에 매여 있어서, 죄의 종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면서 새 사람이라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택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창세기4장을 보면 가인의 죄악상과 가인의 후손들의 생활이 기록되었습니다. 4:26부터 셋의 후손들이 기록되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후손들만 기록되었습니다. 몇 살까지 살다가 자녀를 낳고 죽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셋의 후손들은 기록이 되었습니다. 셋과 가인의 후손들이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6장에 가면 1절과 2절에 전환점이 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1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입니다. 여러 해석이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손이요,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입니다. 문제는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후손들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움 b/f/tôb 좋은, 선한, 즐거운, , 이익, 번영, 복지등으로 번역합니다. 때로 토브는 심미적이거나 감각적인 선함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비친 사람의 딸들의 매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딸들의 매력에 빠지니까 헤어나올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심판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로보건데 오늘날 우리들은 성도다운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산위의 동네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오픈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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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들(로마서2:17-24)

 

17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교회당 건물에는 어김없이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교회의 목사들이 방송설교를 합니다. 방송에 출연하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서 대외에 많이 알려졌습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립니다. 좋은 것으로 오르내리는 것이 아니라 좋지 못한 일, 부적절한 일로 오르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만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전체교회가 욕을 먹습니다. 거기에서만 그치면 괜찮은데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면 전도의 길도 막히고, 교회가 크게 훼방을 받습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들이 스스로 믿는/ 스스로 자랑하는것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합니다. 유대인들이 평소 행하는 행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자신이 가르침을 받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은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을 유대인들을 만들려고 혈안이었습니다. 정권이 바뀌거나 정부의 요직에 공석이 생기면 정신 나간 사람들은 전화를 기다립니다. 정부의 부름을 받자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괜찮았습니다. 부르는 즉시 그 직()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새는 힘듭니다. 청문회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사람이 정부의 고위직에 앉을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막상 청문회에 들어가면 부동산투기, 군 징집거부 등 부적절한 일들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자신을 닦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총리에 몇 사람이 나갔다가 그냥 낙마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도적질하지 말라고 하면서 도적질에 대해서 악명이 높았습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서 간음을 했습니다. 우상을 가증하게 여기는 그들은 오히려 신사의 물건을 도적질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Fulvia(로마의 Claudius 장군의 아내)가 로마에 있으면서 유대교로 개종했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바쳐달라고 어떤 유대인들에게 자줏빛 옷과 금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그들의 개인적인 용도에 써 버렸습니다. 그것을 티베리우스 황제가 Claudius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민족들과 달리 특권을 주었는데도, 툭하면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유대인들이 심히 못마땅했습니다. 그리하여 로마로부터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이교의 사원을 수시로 약탈했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증오한다는 열성 유대인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감행했다는 것입니다. 결국에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들 때문에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신성한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으로부터 모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의 행위에는 지대한 관심을 가집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살지 못하고 그렇게 하지 못해도 너희들(그리스도인들)은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이 이 세상에서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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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도에서 바울의 설교/겸손(사도행전20:17-35) 

바울은 요샛말로 말하면 엘리트입니다.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졌으며, 신분 또한 대단한 사림이었습니다. 유대사회에나 로마사회의 어디에 내놓아도 별로 빠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빌립보서3:4-6절을 보면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이 투철해서 다른 사람들을 심히 무시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바울의 이력을 내놓으면 그들은 입을 다물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지키지 못할 자기들만의 율법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예단하여 거의 죽여 놓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겸손했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겸손하게 주를 섬겼습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이 바르게 전파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겸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겸손해지기로 작정했습니다. 빌립보서2:3을 보면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의 본을 직접 보여준 것입니다.

성도들이 왜 겸손해야 합니까?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눅18:13-14). 그래서 우리는 죄인임을 느껴야 합니다(눅18:14). 자기의 죄를 느끼고,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끼는 사람들은(눅15:17-21) 겸손합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압니다(왕상3:6-14). 겸손한 사람들은 자신은 추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느끼기 때문에 겸손합니다(사6:1-8). 하나님의 의를 느낍니다(빌3:4-7).

우리들을 겸손하게 하는 요인들이 있는데, 우리들을 고생하게 합니다(신8:3). 그리고 환난이 우리들을 겸손하게 합니다(대하12:2-12).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라고 합니다.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신15:15). 스스로 높은 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잠25:6-7).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전5:2). 큰 일을 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렘45:5). 스스로 칭찬하지 말것입니다(잠27:2).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미6:8).

사람들은 심히 겸손하지 않습니다. 특히 정치인들 중에 교만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신이 아니면 이 나라가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해서 얻어지는 것보다 겸손해서 얻어지는 것이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겸손한다고 해서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만한 사람이 비굴해질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겸손은 교만의 회개를 낳습니다. 따라서 겸손은 온총이면서 동시에 은총을 담는 그릇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못나서 겸손했던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겸손했습니다. 겸손은 성도들이 가져할 기본적인 덕목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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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일꾼의 조건(사도행전6:1-6)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3절)

사도들은 식탁을 위한 구제로 일곱 사람을 택하라고 했습니다. 택함을 받는 일꾼들은 성령 충만해야 했습니다. 지혜가 충만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사도들이 했던 것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것들은 일꾼의 내적조건(지혜와 성령 충만)과 외적조건(칭찬 듣는 사람)을 충족시켜야 했습니다.

목회를 해보면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어려운 소형교회에서는 사람들이 도무지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예배만 드려줘도 대견한 일처럼 여깁니다. 십 수 년을 목회하면서 느끼는 것이 일꾼의 부재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심리가 참으로 묘합니다. 소형교회에서는 일을 하지 않다가도 대형교회로 옮기면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신자들의 신앙부재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같은 교회인데 신자들이 제대로 믿음만 있다면 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잘하면 저기에서도 잘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도리요 일꾼 된 의무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소형교회들은 어렵게 목회하고 있습니다. 생활이 말이 아닙니다. 어떤 교회는 새벽에 목회자의 가족만 나와서 흐느끼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의 목회자는 당장 밀린 집세 때문에 어찌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일을 하지 않는 신앙부재현상입니다. 대형교회에 가서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헌신(?)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똑같은 교회에서 교회가 작다고 전혀 헌신하지 않는 모습들을 보면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왜 신자들이 두 얼굴의 신앙행태를 보입니까? 확실한 신앙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크거나 작거나 교회입니다. 대형교회는 하나님이 관장하시고, 작은 교회는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이 관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이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관장하십니다. 문제는 사람들의 세속화입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였을 때부터 기독교는 세속화가 되어 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건물과 교세가 행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교회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인간들의 뜻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의 일꾼들이 성령이 충만하다면, 지혜가 충만하다면, 교회를 가릴 수 있을까요?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고자 애쓰는 교회들을.

신앙을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원형경기장에서, 또는 화형으로 순교한 성도들, 예배를 드리겠다고 신앙의 자유를 부르짖다가 종교재판으로 순교한 성도들,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도 오직 하나님만 믿었던 성도들이 오늘날에는 그리운 시대입니다. Postmodernism의 시대이면서 modernism이 같이 공존하는 시대. 교회의 세속화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이 시대, 과연 참다운 일꾼들은 어디에 있을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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