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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서원(사도행전18:18)

바울사도는 고린도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최소한 수개월을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와 헤어졌습니다. 바울사도는 배를 타고서 수리아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함께 동행했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서원을 했기 때문에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민수기6:2-21을 보면 나실인의 서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나실인(ryzIn:/nāzîr)는 ‘봉헌된 자’입니다. ‘나실인’은 ‘특별히 하나님에게 성별된 자’입니다. 서원으로 나실인이 될 수 있습니다(민6:2). 출생하면서부터 나실인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삿13:5,7). 부모의 서원으로 나실인이 됩니다(삼상 1:11). 그러나 아무나 나실인이 될 수 없습니다. 나실인은 지켜야 할 사항이 많았습니다. 자기 몸을 구별해야 했습니다(민6:2). 포도나무 소산 및 독주를 금해야 했습니다(민6:4). 머리를 깍지 말아야 합니다(민6:5). 시체를 가까이 하여 몸을 더럽히지 않아야 합니다(민6:6). 심지어 부모 형제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인하여 몸을 더럽히지 않아야 합니다(민6:7).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민6:8). 나실인은 서원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일정 기간 동안의 서원기간이 있었습니다(민6:8,12). 영구적으로 서원하는 기간이 있었습니다(삿13:7,삼상1:11). 나실인이 더럽혔을 때 정결케 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민6:10,11). 자기 몸을 성별하는 날을 새로 정했습니다(민6:12). 나실인의 정한 기간이 완료되었을 때의 의식은 그 사람을 회막문으로 데리고 갔습니다(민6:13). 그리고 번제물로 일년 된 흠 없는 수양 하나와 속죄 제물로 일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하나와 화목제물로 흠 없는 수양 하나를 드렸으며(민6:14). 무교병 한 광주리와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드렸습니다(민 6:15). 제사장은 그것들을 여호와 앞에 가져다가 속죄제와 번제를 드렸습니다(민6:16). 화목 제물로 수양에 무교병 한 광주리를 아울러 여호와께 드리고 그 소제와 전제를 드렸습니다(민6:17).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두었습니다(민6:18).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이 그 머리털을 민 후에 제사장이 삶은 수양의 어깨와 광주리 가운데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를 취하여 나실인의 두 손에 두었습니다(민6:19).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들었습니다. 흔든 가슴과 든 넓적다리는 성물은 제사장에게 돌렸습니다. 그 후에 비로소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민6:20).

삼손이 ‘나실인’이었습니다(삿13:5,7,17). 사무엘이 나실인이었습니다(삼상1:11). 레갑족속이 서원했습니다(렘35:6,7). 세례요한이 나실인이었습니다(눅1:15). 그리스도께서 나실인이었습니다(히7:26). 바울이 일찍 서원을 했습니다(행18:18).

바울의 서원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F. F. Bruce는 고린도에서의 선교사역과 관련된 어떤 목적을 위해서 한 것으로 여겼습니다(F. F. Bruce, 1986. 157). Thompson은 바울이 유대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작정한 서원을 중히 여겼기 때문에 서원의 규례를 지켰다고 했습니다. Open Bible은 바울이 다가올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지키기 위해서와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의 새로운 각오를 통해서 시련과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서원했다고 했습니다. Matthew Henry는 유대인과의 조화를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이며 경건한 의미를 지속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Matthew Henry, 1981. 206). Calvin은 예루살렘에 찾아가 만나려고 했던 유대인들에게 적응하려고 하는 것 같이 보인다고 했습니다(John Calvin, 1979, 193). 유승원도 바울사도가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의무를 다하려 머리를 깎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서원해서 머리를 깎았던 것은 1,2차 전도여행 중에 못 볼 것을 보았고, 여러 더러운 것들을 보는 가운데 혹 마음이 더러워지지 않았을까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2000년 전이지만 사람의 타락은 지금과 같았을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지방 같은 곳은 소돔과 고모라이상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본 바울사도는 머리를 깎고서 서원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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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의 견해(사도행전15:13-21)

유대인의 눈에는 우상숭배, 간음, 살인은 3대 죄악으로 간주했습니다. 야고보가 말한 ‘우상의 더러운 것’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정육점이 별도로 있어서 고기를 아무데서나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당시에는 로마제국 등 여러 지역에서 고기를 구입할 때, 우상에게 제사하고 난 후에 그 고기를 시장에서 팔았습니다. 따라서 온전한 고기가 거의 없었습니다. 부지불식간에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게 되었습니다.

간음은 방탕한 성행위였습니다. 당시 이방사람들은 우상에게 제사하는 과정에서 문란한 성행위를 가졌습니다. 이 성행위는 우상을 숭배하는 과정에서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고, 부끄러움도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순결이라는 관념이 없었습니다. 특히 비너스 등 소위 여신상들에게 제사하는 풍습은 잔인했고, 문란했으며, 더러웠습니다. 또한 간음은 부도덕한 성행위로서 당시에 만연했던 근친혼이나 축첩행위였습니다. 이런 것들은 최소한 교회에서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것은, 짐승을 목맸을 때에 피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피의 식용을 금지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금지사항이었습니다.

야고보는 아무리 이방사람들이지만 성도라면, 이런 것들은 지켜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당시의 이방교회에 guideline을 그어놓은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이중에서도 지키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즉 이런 것들은 구원을 받는데 필요한 사항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에게는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적인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운다고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성도라면 술을 마신다거나 담배를 피운다면 당장 성도로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술파티를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사교파티를 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마다문화가 다르고, 민족마다 풍습이 다르지만, 한 성경을 쓰기 때문에 성도는 어느 나라 성도이든 간에 성도입니다. 윤리와 도덕은 어느 종교보다 우수해야 하며, 어느 종교보다 인간다워야 합니다. 교회는 우익도 아니고 좌익도 아닙니다.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일 뿐입니다. 그래서 어디나라 사람이든 같으며, 세상 사람들과는 성별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유대라는 특정한 나라에서 출발했습니다. 율법(토라)을 중시했던 나라였기 때문에 복음이 이방에 전해지는 것도 싫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들의 의견과 달랐습니다. 이방에 복음이 반드시 전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에 대한 태도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교회는 최저의 guideline을 그어서 원만하게 이방교회에 부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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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설교/그리스도를 예비함(사도행전13:16-22)

왕은 좋은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 국가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백성들의 머리요, 한 국가의 최고통치자이기 때문에 왕을 하려고 과거에도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임기가 매우 짧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왕을 선호하다보니까 궁중에서 암투가 심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왕자들은 왕의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자리는 하나고, 왕을 하기는 해야겠고, 해서 쿠데타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왕의 임기가 짧았습니다. 왕을 한번 하면 죽을 때까지 하는 자리인데 그렇게 주변에서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물론 오래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오래 하지 못했습니다. 국가조차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전란과 변란으로 인해서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 두 부류의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사도는 설교를 합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내용을 다윗 왕까지 말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오랜 세월을 섭리하셨는가를 말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많은 나라 중에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선택하실 때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이 세상을 치료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에덴에서 파괴된 이 세상을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치료하고자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에서 양육하셨습니다. 250만-300만 명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키우셨습니다. 애굽에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큰 권능(meta; bracivono" uJyhlou'/메타 브라키오노스 휩셀루)으로 빼내셨습니다. 문제는 광야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보내주신다고 해도 이스라엘은 믿지 않았습니다. 돌다리도 두드려서 건너야한다고 하면서 스파이를 보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의 스파이보고를 받고 좌절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40년을 방황하다가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1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인내하셨습니다. 결국 믿음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가나안의 강한 족속들을 멸하시고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약450년간). 사무엘 선지자때까지 사사를 주셨습니다. 그들이 왕을 구하자 하나님께서 기스의 아들 사울을 왕으로 40년간 세우셨다가 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새의 아들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며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삼상13:14, 시89:20)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의 선택에서 다윗의 선택까지의 요지를 보면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요약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 땅에 오셔서 역사하셨음을 말하고자 회당장이 읽은 성경에 답을 한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전하는 것이 곧 예수그리스도요, 복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예수를 전하고자 말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복음이요, 복음이신 예수님은 이 세상의 구원자요, 사람을 살리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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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히 여긴다는 말(사도행전13:6-12)

‘기이히 여기니라’의 nuance는 ‘이상하다’라는 느낌으로 받습니다. 국어사전에도 ‘기묘하고 이상하다.’라고 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기이히 여기다’ ejkplhvssw/ekpllêsso/‘에크플렛소’는 ‘놀라게하다’, ‘경악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놀라게 하는 원인들은 ‘두려움, 갈망, 사랑, 기쁨, 쾌락’ 등입니다. 놀라는 현상은 예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이 놀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마7:28, 막1:22, 눅4:32, 마22:33, 막11:18, 마13:54, 막6:2). 예수님의 신유능력에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누가복음9:43)”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 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마가복음7:37)”.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 중에서 지혜와 대답에 대해 그의 부모가 놀랐습니다.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2:48).” 예수님의 구원에 대한 언급에 대해 제자들이 놀라는 반응을 표현했습니다.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19:25/막10:26). 사도행전13:12에서 총독이 바울의 언급 및 이적에 대해 기이히 여겼습니다.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때 사람들이 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기적입니다. 기적이란 초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해진 것입니다. 기적이란 “물질계에 알려진 자연법칙을 넘거나, 그 법칙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초월한 사건이나 결과, 또는 초인간적 섭리에 의해 발생된 비범하고 파격적이며, 비정상적인 사건”입니다(Webster). 왜 이런 기적을 하나님께서 베푸십니까? 기적들은 계시의 진정성을 보증합니다. 기적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써진 것임을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 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예수님 외에 누구도 물위를 걸었던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람이 없습니다. 38년 된 중풍병자를 낫게 하시고 죽었던 나사로를 살린 예수님은 누구도 흉내를 내지 못합니다. 이런 모습을 사람들은 ‘기이하다’고 말합니다. 서기오 바울 앞에서 박수무당에게 말한 대로 된 것을 보고 누구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영접할 때 천국의 자녀들이 되는 것 또한 기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하고 말씀을 믿을 때, 그렇게 믿고 행할 때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 기적입니다. 복음은 기적과 함께 합니다. 구약시대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복음은 기적과 함께 했습니다. 기적과 함께 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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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에서 총독에게 복음전함(사도행전13:6-12

사울과 바나바는 살라미의 중심부로 이동했습니다. 거기에는 로마의 총독부가자리 잡고 있는 ‘바보’(Pavfo"/Pâphos)에 이르렀습니다. 바보는 구바보(Old Pâphos)와 신바보(New Pâphos)가 있었습니다. 구바보는 페니키아인이 건설했고, 신바보는 그리이스인이 건설했습니다. 살라미에는 바보가 중심지이며, 로마의 총독부가 있을 만큼 번화한 지역이었습니다. 구바보나 신바보는 종교적으로 ‘파비안느’라는 여신을 숭배했습니다. 파비안느는 시리아에서 기원한 신입니다. 파비안느는 그리이스의 아프로디테(Aphrosite)이며, 로마의 Venus(비너스)입니다. 바보는 Venus를 깊게 숭배하는 본거지였습니다. Venus의 신봉자들은 Venus가 바다에서 태어났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원뿔형의 운석을 중심에 두는 감각적인 의식으로 그녀를 숭배했습니다. Venus 신전은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였습니다. 사울과 바나바는 이곳에서 총독을 만났습니다. 구브로의 총독은 세르기우스 파울루스(Sergius Paullus/서기오 바울)였습니다. 총독은 사울과 바나바를 초대하였습니다. 총독은 사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말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복음에 대해서 관심까지 가졌습니다. 누가는 서기오 바울에 대해서 ‘지혜있는 자’라고 했습니다(7). 그런데 항상 총독의 옆에서 마술을 부리던 무당 ‘바예수’가 적극적으로 방해를 했습니다. 이 자는 총독의 마음이 사도들의 교훈에 이끌리지 않도록 하기위해 방해하고 반대하였습니다. 만일에 경우 총독이 사도들의 말을 들으면 자신의 궁중마술사직이 위태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사도바울이 그를 제지하면서 궤계(기만)와 악행(분별력이 없는 행동)이 가득한자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자식이며, 의의 원수이고, 주의 바른 길을 왜곡시키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10). 그리고 얼마동안 네가 소경이 될 것이라고 하자마자 곧 바로 소경이 되었습니다. 총독은 그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총독이 믿었습니다(ejpivsteusen /epîsteusen). 또한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겼습니다( ejkplhssovmeno"/ekpllēssômenos).

이것을 볼 때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음을 우리는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철저하게 막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잔하는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서 순탄하게 전해지지 않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대사도인 바울사도가 전하는데도 그러니 우리들은 당연히 더 인식하여야 합니다. 지상에는 두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측과 그 반대 측이 있다는 것을. 그러나 결국은 마귀와 그 일당들은 손을 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9절에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사울과 바나바와 마가요한만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신 것입니다.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비록 우리들이 부족하고 연약해도 성령께서 함께 하심을 우리는 늘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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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교회의 구성원들/바나바(사도행전13:1)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들을 미리 아는 선지자들, 그리고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가르치는 면에 있어서 성령의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Calvin). 선지자의 원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이상을 보거나 환상, 또는 꿈 그리고 말씀으로 선지자에게 임했습니다. 교사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었습니다. 1절에서 누가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안디옥교회에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사울 등입니다.

바나바(Barnavba"/barnâbas/바르나바스)는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바나바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름대로 ‘위안의 아들’입니다. 누가의 기록처럼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입니다. 거기에 바나바는 설득력까지 있었습니다.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들’이라 칭하였습니다(사도행전14:1-14). 전승에 의하면 그는 예수님이 파송한 70인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누가복음10:1). 초대 교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eria)는 바나바가 70인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으며, 그의 지상전도 사업에서 그를 수행했었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12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초기기독교 사도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중심적인 인물입니다(사도행전11:19-15:41). 바나바는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지상에 내려오신다면 바나바와 같은 형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나바는 예수가 죽은 직후 예루살렘교회에 들어온 구브로인 가정에서 태어난 유대계 헬라인으로 추정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구브로 섬에 정착해 살고 있었는데, 성령강림절에 사도들이 제각기 여러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바나바는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구브로에서 왔다가, 베드로가 자기 민족의 방언으로 복음을 설교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나바의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바나바는 기독교인이 된 이후 사도들에 의해 붙여진 별칭입니다(행4:36). 유대인 태생으로 레위족속이었던 요셉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권고의 아들” 혹은 “훈계의 아들”,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었습니다. 사도들이 그에게 그런 이름을 부여했던 것은 그의 마음과 생활이 친절했고, 관대한 마음과 돕고자 하는 사랑으로 충만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바울 간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의 헌신적이고, 고귀한 정신은 조금도 시기심이나 질투심이 없었습니다. 바나바의 생애의 경력을 보면 인정 많고 친절한 성향입니다. 바나바는 동료 바울과 같이 탁월한 지성이나 독창적이거나 창조적인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초대교회에서 마치 천사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사랑과 신뢰를 받으며 항상 널리 인간의 이익을 구하는 입장에 서있어, 사회적 영향력을 얻어 초대 교회에서 탁월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자신의 깃 아래 보호하고 바울의 첫 동료가 되어주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언급될 경우 바나바가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를 파송한 안디옥교회가 그에게 그만한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점차 두각을 드러내게 되면서 바나바는 서서히 뒷자리로 물러나 이야기의 전면에서 사라집니다. 오늘의 교회에서 바나바 같은 사람들은 필히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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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천사에 대하여(사도행전12:12-16)


성도들이 흔히 어떤 일을 당할 때 수호천사가 도와줬다고 말을 합니다. 과연 수호천사를 하나님께서 붙이시는가? Bruce는 이 천사는 어떤 인물의 수호천사로 여겨졌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Matthew Henry는 Hammond를 인용하여 어떤 사람이 죽기 전에 그의 수호영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이 영들은 본인이 있지 않는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며, 곧 죽을 것을 말하는 것으로, 예루살렘교회는 이제 그들의 기도가 거부된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Calvin은 베드로의 안전을 위해서 수호자로 임명한 천사를 가리켜 ‘그의 천사’로 부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각 개인에게 개별적인 천사가 할당되어 있어서 인간들을 돌보고 있다고 추론하는 것은 너무 근거가 박약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한 민족을 상대로 한 천사가 허용되는가 하면(출14:19), 단 한 사람에게 부지기수의 천사들이 허용되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사의 종의 눈이 열렸을 때 그는 이 선지자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불병거가 하늘에 정렬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왕하6:17). 그런가 하면 다니엘서에 보면 페르샤 민족과 헬라민족 각자에게 하나의 천사가 지명되고 있습니다(단10:13, 20). 그리고 성경은 각자에게 특유한 천사가 지목되어 있는 것으로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천사들에게 각 신자들을 보호할 것과(시91:11), 경건한 자들 주위에 장막을 칠 것을 명령하시는 것으로(시34:7),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Charles Hodge는 각각의 신자에게 수호천사가 있다는 것은 성경에서 아주 확연하게 선언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8:10에서 소자에 관해 하늘에서 내 아버지의 얼굴을 뵌다고 말해지는 “저희 천사들”이라는 표현과 사도행전12:7을 많은 학자들에 의해 수호천사로 주장을 하지만, 베드로가 수호천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녀가 그것이 베드로의 유령이라고 말했다면, 그 사실이 천사에관한 대중의 미신을 입증하는 것이 아님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즉 각 소아 또는 각 신자는 그 자신의 수호천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Millard J. Erickson은 수호천사의 사상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보편화된 신앙의 일부로서 수호천사들의 개념에 대해서는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수호천사가 구해주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필요할 때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천사를 보내기도 하고, 다른 피조물들을 통해서도 역사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수호천사는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수호천사가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늘 지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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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교회의 반응(사도행전12:12-16

베드로가 잡히자 예루살렘교회는 즉각 기도에 돌입했습니다(…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5절). 그러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냈습니다. 베드로를 촐통같은 감옥에서 탈출시켰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가니까 그때까지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12절). 교회가 그렇게 기도하고 있을 때,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로데라는 아이가 베드로의 음성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기쁜 나머지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밖에 베드로가 왔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그의 말에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정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아니라 그의 천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계속 대문을 두드리자 문을 열어주고 그들은 놀랐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빨리 문을 열어주기를 바랐습니다. 아그립바의 군인들이 베드로를 찾을 것이고, 교회에 탈출소식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막상 베드로가 구원을 받고, 마가의 집으로 오니까 교회는 그를 믿지 못했습니다. 로데는 베드로의 음성을 듣고 너무 기쁜 나머지 미처 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더욱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베드로가 밖에 있다고 말한 로데를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라고 말했는데도 오히려 그의 수호천사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급한 것은 베드로입니다. 빨리 숨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문을 계속 두드리자 그때에야 비로소 저희들이 문을 열고 베드로를 보고 놀랐습니다.

우리가 일고 있는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 매우 가뭄이 심하여 교회에서 비를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매일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더욱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과연 어느 날 주일 낮에 비가 주룩주룩 내렸습니다. 비는 예배가 끝난 시간에도 계속 왔습니다. 성도들이 우산이 없어서 집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 하나가 우산을 쫙 펴고 가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어떻게 알고 우산을 가져왔느냐?’ 그러자 ‘기도를 했지 않아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성도들은 기도는 했지만, 비가 오리라고는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기도는 했지만, 기도의 응답에 확신은 없었습니다. 그 근거로 로데가 말했는데도 아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愚(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면서 응답은 기다리지 않는 것, 이런 일들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며,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사형수임에도 잠을 잔 것도 은혜이고, 구원받은 베드로가 환상으로 착각한 것도, 그리고 베드로가 왔음에도 믿지 못했던 초대교회의 일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성령께서 늘 교회와 함께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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