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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도가 얼마나 우아하고, 얼마나 균형이 잡혔으며, 얼마나 내용이 다양해야 하는지를 조금도 헤아리지 않으신다. 또 당신의 기도가 얼마나 감미로운 목소리로 진행되고, 얼마나 논리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는지도 전혀 개의치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도가 얼마나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를 주목하신다.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공인되며 허용되고 기록되고 또 보상을 받는 기도란 없다. 다만 진실하고 온전한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가 있을 뿐이다. 진정한 어머니는 두 마음을 가진 자식을 낳지 않는 법이다. 하나님께서는 상하고 애통하는 심령을 사랑하신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분리된 마음을 혐오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머뭇머뭇하거나 둘로 나뉜 마음을 사랑하지 않으신다.

                                                                          Thomas Br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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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마가복음1:35-39

 

Russian-Ukraine War 20222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사건입니다. 21세기 유럽 대륙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대규모 전면전입니다. 푸틴의 야욕으로 인해서 우크라이나에 약 600만 명이 피난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인 약 1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부상자가 약 10만 명입니다. 사망자들과 부상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2022년 현재 전 세계 물가가 폭등했습니다. 전 세계 식량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이것이 불안한 국제상황입니다.

2022년 국내상황은 제가 말 안 해도 우리가 잘 압니다. 엄청 뛰어나고 명석하다고 하는 자가 대통령이 되다 보니 모든 것을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국민은 모두 답답합니다. 불안불안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 철이 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고 질문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나를 비워야 한다. 베풀어야 한다. 그러나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착하지 않습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비우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들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Russian-Ukraine War 을 멈추게 할 나라가 없습니다. 모두 푸틴의 형편만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른 새벽에 베드로의 집에서 나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한적한 곳 곧 광야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온 갈릴리 백성들이 환영하게 되자 즉시 한적한 곳 곧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사단이 주님을 기적만 행하는 Messiah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즉시 처음에 사단과 싸우시던 광야로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도를 통해서 다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어두운 새벽에 나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마음을 쏟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기도였을 것입니다. 이제 시작한 갈릴리 대사역에 필요한 힘과 능력 주시기를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한편 베드로는 일어나보니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은 부지런히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찾은 목적은 지극히 세상적입니다. 그를 다시 가버나움으로 모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곳에는 가버나움의 큰 무리가 베드로의 집 앞에 모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은 제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이 사실을 예수님께 알려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자신들의 터전인 가버나움에 예수님이 오래 계시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사역 곧 그의 전도 여행에 제자들을 함께 데리고 계속 다니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죄인의 구원과 그들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널리 선포하는 일에 역점을 두셨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구원에 대한 여러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후세계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두 자신들은 자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도 영혼 불멸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혼불멸을 믿는 사람들도 엉터리입니다. 자신의 알량한 행위가 자신을 틀림없이 구원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일을 강조하셨습니다. 전도하심이 목적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자신 구주로서 하늘로부터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 사는 갈릴리까지 가셔서 전도하시고 귀신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38절에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는 말씀은 사람에 대한 구원의 message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사렛이나 가버나움에서 오셨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나는 하늘에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왔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일을 하시려고 오신 예수님께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제자들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받으실 때 기도하셨습니다(3:21). 열두 제자를 택하시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풀 때와 베푸신 후에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시고자 할 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없이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는 성도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합니다. 기도는 성도에게 있어서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면서도 기도를 차일피일 미룹니다. 기도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기도를 싫어합니다. 기도는 해야만 하는데 하고 싶은데, 뭔지 모르게 우리와 실제로 기도하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사이에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 고통을 체험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기도하지 못하도록 막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해야 할 일들과 가정사들 때문에 분주하게 생활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쁘다고 해서 먹지 않거나 잠자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는 데에는 더 깊고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기도를 막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대인들에게 거의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기도하기 위해 기도에 관한 모든 것을 먼저 완전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기도할 수 있으려면 먼저 우리의 삶이 멋지게 조율되어야 하고, 기도하는 법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기도에 따르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유창하게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구비되고 채워져야만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부질없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영원의 이편에서는 순수한 것들과 불순한 것들을 나누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세금을 부과하거나 어떤 짐을 우리에게 메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이중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납하실 만큼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꼭 현명하거나 순수하거나 믿음이 충만하거나 어떤 것을 갖추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은혜로 살아가며 또한 은혜로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어린아이들이 부모님께 나아오는 것과 유사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무조건 맹렬하게 요구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요구가 이기적이거나 저속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동기가 어찌 되었건 그들이 우리에게 나아온다는 그 자체입니다. 기도의 문제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기도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순수한 동기를 충분히 갖고 있지 않다거나 충분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제쳐 두고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실제로 기도하는 바로 그 행위 속에서, 즉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이 문제들이 때가 되면 해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또 우리의 기도를 있는 그대로 들어 주십니다. 어린아이가 나쁜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는 나쁜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단순하게 해야 합니다. 단순한 기도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숨김없이 하나님께 내놓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가려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런 가식 없이 우리의 관심을 나누고 간청할 뿐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직장동료나 이웃 사람들로 인해서 얼마나 마음이 상했는지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또는 좋은 날씨나 먹을 양식과 건강 따위를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한 기도는 그 초점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필요와 욕구와 관심이 우리의 기도를 지배합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수많은 교만, 자만, 허영, 가식, 등 전반적으로 이기주의가 가득 차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량도 있고, 관대함도 있으며, 이타심 그리고 보편적인 호의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리고 죄를 지으면서 삽니다. 그러다가 종종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일어서서 다시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다시 하나님을 따르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시 우리의 교만함과 방종함에 굴복하고 맙니다. 이런 일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자백하고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단순한 기도는 때때로 다시 시작하는 기도입니다. 단순한 기도는 성경에 나오는 기도 중에서 가장 흔한 기도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 가운데 고상하거나 아량이 넓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 옛날 목이 곧은 백성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불평하던 모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 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11:11-12). 또 자기를 대머리라고 놀린 아이들에 대한 엘리사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왕하2:24).

 

이러한 자기중심적 기도의 한복판에는 사람들의 가장 고상하고 숭고한 기도 내용도 있습니다. 불순종하고 완고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모세가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32:32). 엘리사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수넴 여인여인에게 돌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왕하4:16). 시편 기자는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119:97)라고 했습니다. 단순한 기도에는 좋은 것, 나쁜 것 그리고 흉한 것 모두가 섞여 있습니다. 기도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일상적인 문제를 가지고 사랑하는 아버지 앞에 아뢰는 것입니다. 그 기도에는 가식이 조금도 없습니다. 실제 우리의 모습보다 더 거룩하고, 더 순결하고, 더 성스러운 체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자세로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 놓읍시다(요일3:20). 어쩌면 기도는 항상 초보적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기도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John Dalrymple 존 달림플우리는 이런 기도 이상은 드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는 부족함과 필요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기본적인 기도를 멸시하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보다 성숙한 기도를 드리겠다는 소망으로 단순한 기도를 건너뛰려고 합니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이기적인 요구의 기도를 경멸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기도는, 그것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뛰어넘는 길은 그것을 피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기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십중팔구 그들은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기도에 대해서 논의해 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진심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 상태는 온전히 드러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있는 곳에서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기도는 이론으로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바로 시작해야 합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이웃 사람들과 친구들과 더불어 시작하면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가볍게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있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진리가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상적인 삶 속에서 복을 주신다고 믿는 것이 바로 기도의 재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처소로 들어오신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그런 기도를 멸시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내게 복을 주실 수 없다.”고 우리는 신음합니다. 내가 졸업하면, 내가 이 일을 끝내면내가 CEO가 되면.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 장소는 우리가 있는 바로 그 장소뿐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불붙는 떨기나무 앞에 있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자신이 거룩한 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현재 있는 곳이 거룩한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곳이 직장이든 가정이든 동료, 친구, 가족 그 누구와 함께 있는 그곳이 바로 기도를 배우는 곳입니다. 가장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일상의 경험들을 기도하려면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사건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밤잠을 못 잘 만큼 엄청난 시련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우리의 상처와 고통과 실망을 느끼며, “왜 접니까? 왜 제가 이 아픔을 당해야 합니까?" 이렇게 좌절과 슬픔과 분노에 대하여 호소하는 것이 단순한 기도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길을 잃고 상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동행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이웃 사람이 무심코 내뱉는 한마디가 우리 속에 있는 분노, 시기, 두려움 따위의 감정을 모두 폭발시키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솔직하고 정직하게 그 일을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감정 뒤에 숨어 있는 상처를 치료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유로이 불평도 하고 따지기도 하고 외치기도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20:7). 예레미야의 기도입니다. Clive Staples Lewis우리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아 니라 우리 안에 있는 바로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삶의 자질구레한 것들은 기도의 올바른 내용이 아니라고 하는 속임수를 믿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기도가 숭고하고 이 세상 것이 아닌 활동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믿지 마십시오. 기도할 때는 하나님에 관해서만 하나님께 말해야 한다고 배웠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우리는 일상의 체험들이 올바른 기도를 방해하고 주의를 산만하게 한다고 쉽게 단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영성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께서는 냄새 나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서 피와 땀과 눈물로 이 땅 위를 다니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한시도 벗어남이 없이 살아가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적인 생활들에 관해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해야 합니다. 단지 하나님께 이야기해야 합니다. 자유롭고 숨김없이 상처를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의 슬픔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올 때 그러하듯이 하나님도 사랑과 긍휼로 우리의 말을 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귀중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단지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기도를 배울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입니다.

 

Closing 청교도 William Gurnal은 어린아이가 우는 것과 새로운 피조물이 기도하는 것은 똑같다. 어린아이는 우는 법을 누구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알게 된다. 어린아이는 울면서 세상에 태어난다. 마찬가지로 기도도 그 양식이나 규칙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새 생명의 원리 자체로부터 자동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기도는 유한한 우리가 무한한 하나님께 채워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And

교회가 기도한 결과(사도행전12:6-10)

예루살렘교회는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베드로는 언제 죽을지 풀릴지 알 수 없었습니다. 만일에 그가 죽는 것을 알았다면, 아마도 잠에 빠져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사도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베드로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군인들 네 명의 틈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내일의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베드로사도는 잠을 푹 자고 있었습니다. 같은 시간에 예루살렘교회는 베드로사도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특히 초대교회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성령의 비호를 받으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의 사자가 베드로의 곁에 섰습니다. ‘주의 사자’(a[ggelo" kurivou/앙겔로스 퀴리우)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갑자기 감옥 안이 밝게 빛이 났습니다. 그리고 주의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웠습니다. “빨리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동시에 베드로를 고정시킨 쇠사슬이 풀어졌습니다. 천사는 나갈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허리띠를 매고, 신을 신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천사의 말대로 했습니다.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아직까지 꿈속이었습니다. 베드로자신은 감옥 안에서 환상을 보는 줄 알았습니다. 진실인줄 알지 못했습니다. 착고가 풀어졌습니다. 첫째 감옥을 지나고 둘째 감옥을 지났습니다. 그리고 쇠문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은 굳게 잠긴 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이 자동으로 열렸습니다. 그리고 한 거리를 지났습니다. 같이하던 천사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자의식적이십니다. 자결정적인 분이십니다. 항상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신 분으로 건축자이십니다 그래서 피조물들을 관리하시는 분입니다. 피조물의 필요를 항상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만일에 그의 공급이 없다면 지금쯤 모든 우주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주에 대소용돌이를 칠 것이며, 많은 것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잡고 계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살 수 있고 그의 백성들이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눌린 자들의 보호자십니다. 자유의 수호자이시며 동정심 많은 상담자이시고, 고난의 종이시며, 승리의 구주십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같이 힘없고, 고난당하며, 고통 받는 사람들이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기도했고,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셨으며, 베드로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수많은 어려움에 봉착했었습니다. 그때마다 교회는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도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아니 평소에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시고,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시면, 우리의 주변이 변화되고, 우리의 주변이 변화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들에게는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에게서 하나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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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사도행전12:1-5)

헤롯과 유대인들은 한마음이 될 수 없었습니다. 헤롯은 로마인의 분봉왕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인과 유대인들은 철천지원수였습니다. 그러므로 헤롯과 유대인들은 친해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친해진 것입니다. 헤롯 아그립바1세(Herod Agrippa I)는 헤롯 대왕의 손자입니다. 그는 로마의 두 황제 갈리굴라(Caligula)와 글라우디우스(Claudius)의 은총을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점차 왕이라 불렸고, 팔레스타인 전역의 통치권을 획득했습니다. 54세에 가이사랴에서 죽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사도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투옥시킨 직후였습니다(행12:1,6,11,19-21). 그는 자신이 이두메 사람인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로마의 비호아래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면서도 제대로 통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유대정책을 썻습니다.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헤롯이 분석해보니까 예수께 속한 자들을 싫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헤롯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기둥같은 몇 명만 죽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사도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만 죽이면 교회가 와해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헤롯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무교절을 이용해서 유대인들을 즐겁게 해주고자 베드로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무교절의 7일 첫날에 베드로는 잡혔습니다. 베드로는 축일기간에 갇혀있어야 했습니다. 아그립바는 축일이 끝나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재판에 붙여서 사형시킬 참이었습니다. 혹시 사도단들과 교회의 성도들이 베드로를 탈옥시킬까봐서 군인 넷에 네 무리로 돌아가며 지키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두명과 감옥문에 둘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를 지키기 위해서 로마는 하루에 16명을 투입한 것입니다. 그만큼 아그립바는 정치적인 입지를 위해서 탄탄하게 베드로를 죽일려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만큼 교회는 어떤 방법이 없었습니다. 야고보에 이어서 베드로를 잃는다는 것은 예루살렘교회로서는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베드로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습니다.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베드로를 헤롯 아그립바가 잡아갔지만,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당하고, 야고보가 순교당했지만 교회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Calvin). 절망하지 않고 베드로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세상은 어떻게든지 우리를 괴롭히려고 합니다. 그래서 더욱 어렵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성도들일 수 없습니다. 기도도 하지 않으면서 불평만 한다는 것은 성도의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기도를 간절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의 성도들은 자신을 위해서는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다른 성도들이나 교회를 위해서는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도 많이 하고 돕기도 해야 하는데 그렇지를 않습니다. 교회가 그만큼 세속화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교회를 위해서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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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에서 기도하는 제자들(사도행전1:12-14)

제자들은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에서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웠습니다.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였습니다. 그들은 기거하는 다락방에 올라갔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빌립, 도마, 바돌로매, 마태, 야고보(알패오의 아들), 시몬(열심당원), 유다(야고보의 아들)였습니다. 그 외에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기도에 계속 열중했습니다(12-14).

사도들은 주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소에 기거하던 다락방에 모여서 주님의 명령대로 했습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절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기다리라고 했을 때 이들은 다락방에서 모여서 열정적인 기도를 했습니다. 소위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많이들 말하지만, 그 말은 신빙성이 없습니다. 어쨌든 이들은 기도에 열심 했습니다. 이들 기도는 개인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합심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목적을 두고 합심하여 전심으로(proskarterou'nte")기도 했습니다.

누가는 사도들 외에 여자들’(gunaixi;n)과 마리아를 기록했습니다. 누가에게는 여자들을 많이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8:1-3을 보면 누가는 여성도들이 예수님의 생애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기록했습니다. 여자들의 신앙이 사도들의 수준에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누가의 보기에 예수는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사람들, 민족적으로, 종교적으로 차별당하는 사람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죄 있는 모든 사람들, 죄인들의 구주였습니다. 또한 고대에 사회적으로 업신여김을 당하던 특별한 한 집단으로 여자들을 들 수 있었습니다. 누가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는 그들에게 특별한 한 방식으로 주의를 기울여 주셨으며, 그들과 특별한 한 방식으로 만나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태도는 제자 공동체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가치 척도를 세웠습니다.

1-2장의 어린 시절 역사에서 마리아가 중심점이었습니다(1-2장의 중심은 요셉). 자주 한 남자가 등장하는 자리에 곧바로 한 여자가 옆에 세워졌습니다. 시몬 옆에 여예언자 한나를(2:25-35), 가버나움의 백부장 옆에 나인성의 과부를(7:1-10) 세웠습니다. 여자들은 예수를 따라감에 남자들과 똑같이 받아 들여 졌습니다. 이것은 유대적 사고방식 및 고대의 이방적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여자들을 사도들과 나란히 예수의 공생애 등장, 그의 죽음과 부활의 유자격한 증인들로 세우셨습니다.

또한 이 기도모임에 예수님의 아우들이 함께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생전에는 거의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마리아와 함께 동참했습니다. 이제 이들은 전 세계에 전해질 복음을 위해 기도의 불을 붙였습니다. 그들의 모임과 기도는 곧 다이나마이트 폭발의 심지였습니다. 기도의 심지가 서서히, 그러나 뜨겁게 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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