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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교회의 구성원들/바나바(사도행전13:1)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들을 미리 아는 선지자들, 그리고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가르치는 면에 있어서 성령의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Calvin). 선지자의 원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이상을 보거나 환상, 또는 꿈 그리고 말씀으로 선지자에게 임했습니다. 교사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었습니다. 1절에서 누가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안디옥교회에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사울 등입니다.

바나바(Barnavba"/barnâbas/바르나바스)는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바나바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름대로 ‘위안의 아들’입니다. 누가의 기록처럼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입니다. 거기에 바나바는 설득력까지 있었습니다.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들’이라 칭하였습니다(사도행전14:1-14). 전승에 의하면 그는 예수님이 파송한 70인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누가복음10:1). 초대 교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eria)는 바나바가 70인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으며, 그의 지상전도 사업에서 그를 수행했었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12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초기기독교 사도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중심적인 인물입니다(사도행전11:19-15:41). 바나바는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지상에 내려오신다면 바나바와 같은 형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나바는 예수가 죽은 직후 예루살렘교회에 들어온 구브로인 가정에서 태어난 유대계 헬라인으로 추정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구브로 섬에 정착해 살고 있었는데, 성령강림절에 사도들이 제각기 여러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바나바는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구브로에서 왔다가, 베드로가 자기 민족의 방언으로 복음을 설교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나바의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바나바는 기독교인이 된 이후 사도들에 의해 붙여진 별칭입니다(행4:36). 유대인 태생으로 레위족속이었던 요셉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권고의 아들” 혹은 “훈계의 아들”,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었습니다. 사도들이 그에게 그런 이름을 부여했던 것은 그의 마음과 생활이 친절했고, 관대한 마음과 돕고자 하는 사랑으로 충만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바울 간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의 헌신적이고, 고귀한 정신은 조금도 시기심이나 질투심이 없었습니다. 바나바의 생애의 경력을 보면 인정 많고 친절한 성향입니다. 바나바는 동료 바울과 같이 탁월한 지성이나 독창적이거나 창조적인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초대교회에서 마치 천사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사랑과 신뢰를 받으며 항상 널리 인간의 이익을 구하는 입장에 서있어, 사회적 영향력을 얻어 초대 교회에서 탁월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자신의 깃 아래 보호하고 바울의 첫 동료가 되어주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언급될 경우 바나바가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를 파송한 안디옥교회가 그에게 그만한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점차 두각을 드러내게 되면서 바나바는 서서히 뒷자리로 물러나 이야기의 전면에서 사라집니다. 오늘의 교회에서 바나바 같은 사람들은 필히 필요합니다.

And

유대인에서 그리스도인으로(사도행전9:19-22)

다메섹의 유대인들은 신이 났었을 것입니다. 보기 싫은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체포해서 본국으로 송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정통유대인으로 각광을 받고, 촉망을 받는 인물이라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그렇게 살아왔고, 다메섹에 그러한 이유로 왔기 때문입니다. 다메섹에 있는 유대들은 아직 사울의 상황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사흘이나 식음을 전폐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성령과 아나니아로부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점점 음식을 먹고 기력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여러 날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각 회당을 다니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습니다. 사울의 이 말은 유대인들이 인정하지 않는 말이요, 인정하기 싫은 말입니다. 따라서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22절을 보면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이 말하는 것에 대해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임무가 무엇인데, 이 사람이 사울이 맞아? 다메섹에 온 이유가 뭐야, 저들을 잡아가려고 오지 않았나?’ 주님께 잡힌 사울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울은 자신을 부른 주님의 이름을 힘있게 전파했습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다메섹에서는 사울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정작 도착해서 하는 말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메시아) 전파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과 달리 교회는 이로써 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교회라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主(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크고 작음이 없이 모두 교회입니다. 사실 사람들보기에 크고 작은 것이지, 교회는 대소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교회자랑이 아닙니다. 교회표어의 자랑이 아닙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축복, 복이 교회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보여지는 물질의 복이 전부였다면, 열 두 제자들은 최고로 복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도 부자가 없었고, 모두 순교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님의 제자들을 복된 자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계속 전파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위해 사울이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명을 위해 우리들이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명을 위해 교회를 이 땅에 세우셨습니다. 이 사명을 위해 오늘 우리들을 이 땅에 존재케 하십니다. 우리를 반대하든지 안하든지, 어디에서나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끝 날까지.

 

 

 

 

 

 

 

 

 

 

And

사울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사도행전8:1-3)

1절a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1절b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 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사울의 교회에 대한 핍박이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우선 스데반이 죽어서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유대교를 배반하는 사람들은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국법을 어기고 종교법을 어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죽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당하는 날부터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스데반을 죽인 유대인들은 마치 이리떼 같았습니다. 성도들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된 것입니다. 성도들을 보는 족족 잡아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산헤드린은 이 기회에 그리스도인들을 없이하지 못하면 기회가 없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하여 혹독하게 박해를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들을 제외하고는 여러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핍박을 피해 흩어졌습니다. 일부 성도들이 스데반을 장사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신명이 났습니다. 아예 교회자체를 없이하려 했습니다. 사울이 회심하기 전에는 그야말로 살기등등했습니다. 자신이 믿는 도가 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없이하고자 한 것입니다. 후에 바울사도는 그런 자신을 회상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1: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디모데전서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 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주님께서는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십자가죽음이 사단을 궤멸시킨다는 것을 사단이 알았다면, 절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세등등하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자신들이 100%승리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였습니다. 그로 인해서 사단의 나라는 궤멸되고, 유대인들은 엄청난 재해를 당했습니다. 스데반을 기세등등하게 죽인 산헤드린은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 선두에 사울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은 오랜만에 사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의 도를 선동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듯했고, 선봉에 서는 사람들은 감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反轉(반전)을 몰랐습니다. 타고 있는 불에 기름을 붓는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 끝으로 가고 있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기독교가 땅 끝까지 전파되도록 기여했습니다. 그들의 심한 박해로. 그들의 잘못된 종교관으로, 그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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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등장(사도행전7:58)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흔히 사울의 뜻은 위대하고 바울은 작은 자라고 해서, 그 근거를 그리스도를 만나기전에는 사울, 만난 후에는 바울이라고 하는데, 성경에 그런 근거는 없습니다. 사울(lWav;/Shâ’ûwl/간구된)이라는 이름은 유대식 이름입니다. 사울의 헬라어음역은 사울로스(Sau'lo")입니다. 그의 다른 이름은 바울입니다. Pau'lo"(파울로스)는 라틴어 파울루스(Paulus)에서 유래한 헬라어 음역입니다. 여기에서 ‘작은’이란 말이 유래했지만, 성경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리기아의 다소에서 났습니다(행9:11,21:39,22:3). 유대인 양친에게서 태어났습니다(빌3:5). 그의 부친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행23:6). 로마의 시민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출생 때부터 로마시민이었습니다(행22:28,16:37). 그는 천막 만드는 일을 배웠습니다. 바울은 청년기 초에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인 가말리엘에게서 유대신학을 철저히 교수 받았습니다(행22:3 ,5:34). 바울사도는 스데반의 순교를 마땅하다고 생각할 만큼 유대신학에 미쳐있었습니다. 유대인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악하게 공격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그리스도께로 개종하였습니다. 이후 지칠 줄 모르고 굽힐 줄 모르는, 그리스도의 전파자요 많은 그리스도 교회의 설립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열심과 교리로 그는 스스로 유대인들의 불구대천적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로 인해 결국 되고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로 호송되었다가, 2년 후에 로마로 보내졌습니다. 로마에서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바울사도의 등장은 악인으로 등장합니다. 기독교인들을 잔해하려고 날뛰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가 많았습니다. 수리아지방에 있는 기독교인들까지 잔해하려고 하는 선봉에 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의 등장은 기독교회사에 거대한 획을 긋게 됩니다. R. E. D. White는 바울사도를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 가장 심오한 교사, 가장 충실한 친구, 가장 용맹스런 모험과 불굴의 수난자, 가장 눈길을 끄는 성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병사요, 종이요, 그를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사도의 개종은 급격하고, 극적이었습니다. 그의 업적은 기독교를 히브리사람들만의 종교가 아니라 세계종교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전 세계를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로 바울사도가 전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유대인과 로마인과 환경들의 엄청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죽는 날까지 복음을 위해서 살다가 순교했습니다. 후에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대열에 자신도 함께 하고 평생을 주님과 동행했던 그 결과 오늘날 전 세계에 복음이 가일층 순조롭게 전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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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의 경제(사도행전4:32-35)

우리나라에 정확한 교회의 숫자는 모릅니다. 각 교회의 경제사정도 모릅니다. 어떤 교회는 풍부하게 사용하고, 어떤 교회는 늘 빚에 쪼들리고 있습니다. 같은 사명과 같은 뜻을 가졌지만, 사정은 다릅니다. 어떤 교회들은 돈이 남아돌아 사회사업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교회들은 돈이 없어서 대출받고, 그도 모자라 매달의 운영비를 걱정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극과 극의 경제를 운영하는 곳 중 하나가 교회입니다. 어찌보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면서 평행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성도들이 많이 있는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적은 교회에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교회를 개척하라고 했어?’ ‘이제 교회도 big-deal 이 필요해’라고 합니다. 순전히 작은 교회를 비하하는 말이며, 동시에 생각 없이 하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회자로 부름 받은 사람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목회자로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되도록 목회자로 부름을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목회자의 길로 가게 됩니다. 그때에 목회자로 간다고 해서 경제적인 문제가 보장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냥 앞으로 나갈 뿐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사회의 경제구조와 비슷합니다. 피라밋으로 형성된 맨위에 부유한 교회들이 있고. 그 밑에 중소형교회들(순전히 교인들의 숫자에 의한)이 있습니다. 사실 중형교회도 경제면에서는 괜찮습니다. 문제는 소형교회들입니다. 소형교회의 어떤 목회자들은 눈을 뜨기가 겁이 날 정도라고 했습니다. 밀려드는 세금 등과 각종요금을 어떻게 감당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교육비 등을 어떤 방법으로 조달할 길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은 없거나 미미합니다. 그야말로 핍절한 목회생활입니다. 어디에서 조달할 수도, 그렇다고 목회를 그만둘 수도 없습니다. 끝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매일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기도하고, 움직이고, 또 기도합니다. 그리고 움직입니다. 그래도 힘이 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국의 성도들의 신앙성향 때문입니다. 옛날 우리들이 신앙생활 할 때는 충성스럽게 했습니다. 우리들의 움직임은 직장과 가정과 교회였습니다. 직장이 끝나면 교회로 갔습니다. 어떤 때는 교회에서 직장으로 출근할 때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늘의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선도들은 예전과 달라졌습니다. 큰 건물을 선호하고 그 인파에 숨어버리기를 원합니다. 적당한 부서에 들어가 적당히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소일합니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소형교회는 힘이 들어집니다. 또는 도심에서 목회하다가 재개발이 되면 그냥 쫓겨나야 하는 상황입니다. 쫓겨날 때는 맨손으로 쫓겨나는 것을 우리들은 언론을 통해서 봤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내 일처럼 여기지 않습니다. 남의 일입니다. 4:34을 보면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데 현재 양극화된 한국의 교회는 핍절한 교회가 너무나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들이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형제애(ajdelfovth")가 없기 때문입니다. 형제애가 없기 때문에 양극화된 상태로 계속 질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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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경제(사도행전4:32-35)

사람이 한 평생을 살려면 엄청난 식량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은 양을 계산한다면 천문학적인 숫자입니다. 하루에 물만 계산한다하더라도 1일분을 최소한 1.8ℓ로 계산한다면 1.8ℓx250만명=450만ℓ입니다. 빵으로 계산한다면 제과점 빵으로 기준해서 5개정도로 계산한다면, 5개x250만=1250만개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이 당시에 정확한 숫자가 없습니다. 따라서 250만-300만 명으로 계산한다면, 1일에 소모하는 물만해도 약 6000톤, 빵2000만개 이상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죽는 날까지의 양을 계산한다면 과히 적지 않은 양입니다. 식량만 가지고는 살 수 없습니다. 옷, 집 등 수많은 것들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합니다.

이번 청문회를 보면서 우리들은 많은 것을 생각합니다. 총리를 비롯해서 장관들을 하려면 도덕적으로 깨끗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 명도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국민들은 그들이 저지른 일들을 범죄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위장전입을 하면 추상같은 법의 제재를 받습니다. 국민들이 땅 투기를 하면 언론과 법의 엄청난 제재를 받습니다. 국민들이 쪽방 촌 투기를 하면, 범법자로 낙인이 찍힙니다. 국민들이 대가성으로 뇌물을 받으면 직장에서 쫓겨납니다. 국민들이 어떤 사람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람들을 정부와 여당에서 인준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도덕성은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들의 삶은 윤택하게 살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라살림을 잘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라를 이용해서 자신들을 윤택하게 해보겠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32절을 보면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어려운 상황에서 물건을 서로 같이 썼습니다. 자기 소유지만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같이 쓰고, 같이 먹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들의 소유를 팔았습니다. 밭을 팔고, 집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판 것의 일부를 사도들에게 주었습니다. 사도들은 그것으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습니다. 즉 이때 초대교회는 공동체경제였습니다. 같이 쓰고 같이 나누는 공동체경제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재산문제를 생각해볼 때, 초대교회와 비교해보면 극과 극입니다. 개교회 독립체제인 교회들은 위치 좋고, 세력이 있으면 경제생활은 걱정이 없습니다. 걱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매주 마다 부흥되고 확장됩니다. 그러나 재정이 넉넉지 못한 교회들은 매주 마다 걱정입니다. 전기세, 수도요금, 통신비, 교회월세금 등을 매달마다 걱정해야 합니다. 정말 핍절합니다. 같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같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같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려운 교회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은 현실과 이상간의 dilemma에 아니 빠질 수가 없습니다. 교회공동체를 어렵게 운영해가는 교회들 힘을 내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때에 더욱 힘을 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실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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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과 본디오 빌라도(사도행전4:23-31)

헤롯(@Hrwvdh")家(가)는 예수님과 사도시대에 유대에서 세력을 휘둘렀던 왕가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네 명의 헤롯이 있습니다. 이두매의 안티파테르(Antipater)의 아들 헤롯대왕, 이 자의 말년에 세례요한과 그리스도께서 탄생했습니다(마2:1 눅1:5). 그는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죽이라고 명하였습니다(마2장). 헤롯 안티파스는 헤롯대왕과 사마리아 여인 말다케 사이의 아들로서 세례요한을 참수한 경박하고 관능적이었으며 사악하였습니다. 헤롯 아그립바1세(Herod Agrippa I)는 누가에 의해 Herod이라고만 불리며 요세푸스는 Agrippa라 부릅니다. 헤롯 대왕의 손자로서 두 황제 갈리굴라(Caligula)와 글라우디오(Claudius)의 그늘에 점차 왕의 칭호와 더불어 팔레스타인 전역의 통치권을 획득했습니다. 이 자가 세베대의 아들 사도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투옥시킨 자입니다. 아그립바Ⅱ세(Herod AgrippaⅡ)는 Herod Agrippa I세의 아들이며, 그의 부가 죽었을 때 17세였습니다. 48년에 Claudius Cesar로부터 칼키스(Chalcis)의 통치권을 부여 받았으며, 유대의 대제사장 임명권 및 예루살렘 성전의 관리, 감독권을 받았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헤롯가는 교회에 대해 항상 악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대적자로, 박해자로 나옵니다. 헤롯은 빌라도와 더불어 교회의 대적자였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의 재판이후에 무능한 총독으로 전락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자기에게 넘겨준 것은 유대인들의 시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18절). 빌라도는 그의 아내가 보낸 메시지를 통하여 예수께서 무죄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19절). 그리하여 빌라도는 유월절을 기념하여 백성들이 원하는 죄수를 풀어주는 관례에 따라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했습니다(7절). 그러나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것을 요구할 때 그는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사형언도를 하면서 자신은 예수님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다고 선언했습니다(24절). 사도신경에는 빌라도에 대해서 심히 정죄합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죽이려고 기획재판까지 한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인데 왜 빌라도가 사도신경에 등재되어 후세에까지 계속 정죄를 당하는가?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단어가 기록되어 그리스도의 최종 수난에 관계된 여러 인물들 가운데 빌라도의 이름만 기록된 것은 어떤 이유인가?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38)은 말하되 ‘그는 어찌하여 재판관으로서의 본디오 빌라도 아래 고난 받으셨는가? 그가 무죄하시되 오히려 세속재판관에 의해 정죄(定罪)를 받으신 것은 그것에 의해 우리를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엄한 심판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게 함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역사적 사실성이 매우 특별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로 가는 길의 여러 계단들의 하나인 빌라도의 정죄를 전기적(傳記的)인 묘사함에 관심두지 않고, 이 수난의 구원적 의의에 두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죄의 용서와 영원히 사는 것으로 결론하는 그 신경에 그리스도의 수난과 관련하여 이름을 기록한 것은 관원 빌라도가 아니라 로마사람 재판관 빌라도였습니다. 그의 재판권은 하나님의 주신 바로서 그리스도의 무죄하심을 선언한 후에 사형을 선고함으로 그의 죽으심이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을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빌라도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은 종교지도자들이지만 빌라도는 단지 세속재판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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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박해(사도행전4:23-31)

교회는 애초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구약의 교회 즉 하나님의 사람들도 박해를 받았습니다. 신약시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박해란 이미 교회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 중에 일찍 박해를 예고하셨습니다. 마태복음5:10-13절을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따라서 박해는 세상 끝날 까지 함께 있는 훼방거리요, 그리스도의 장애물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 구약 신약의 성도들 할 것 없이 핍박은 항상 예상했습니다. 마음에 이미 다짐을 하여 의연하게 대적했습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은 예고된 것입니다(마20:22, 23:34,35, 24:8-10, 막13:9-13). 그래서 의연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눅6:22,23, 17:33, 요17:14). 잘 견디는 자에게 구원과 상급이 약속되었기 때문입니다(마5:10-12). 핍박으로 인해 교회가 확장됩니다(행8:1,4, 11:19).무엇보다 박해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롬8:35-39).

박해의 칼이 얼마나 교회에 영향력이 있습니까? 사람을 죽이고, 교회를 말살하기까지 손을 놓지 않습니다. 지중해변의 작고 적은 나라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교회는 늘 칼의 위협에 있어야 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박해에서 해방시키고 교회회의를 하기 위해 감독들을 소집했습니다. 그러자 팔이 없고 다리가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로마의 박해로 인함이었습니다. 주후500년경부터 시작된 로마카톨릭은 종교개혁의 때까지 그 이후로 약1000년간을 성도들을 박해했습니다.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녀재판을 했습니다. 종교재판으로 종교인들을 엄청죽였습니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건재했습니다. 구약의 교회도, 신약의 교회도, 초대교회도, 중세시대에도 교회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박해의 칼이 목에 들어와도 선교는 중단 없습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박해의 총알이 날아와도 교회의 전진을 막지 못합니다. 사보나롤라, 위클리프 요한 후스, 왈도파 등 수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서머나교회의 감독 폴리갑 , 이그나티우스 등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고 순교했지만, 순교의 피들은 또다른 폴리갑을 만들었으며, 또 다른 후스가 일어났습니다. 이들이 용감해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으며 교회와 함께 했기 때문에 이들은 두려움이 이미 없었습니다.

현재도 박해는 계속됩니다. 그 양상만 다르게 나타나지, 박해는 계속해서 교회를 괴롭히고 성도들을 괴롭힙니다. 대 심판 때가 되어서야 박해는 없습니다. 그때는 사단까지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전에는 박해는 산발적으로 전 세계교회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박해가 교회를 멸하기는커녕 오히려 교회의 성장에 물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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