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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에 의한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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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분의 아들에 관한 복음
  8. 2018.08.24
    약속된 복음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현재 평화와 안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들을 영원히 누리고 만끽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매순간 평화가 당신을 떠나고 있을 때, 그것이 다시 당신에게 임하리라는 소망이 없다면, 그것은 다시 임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시작하는가가 중요한 것 핍박이 아니라 어떻게 끝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William Gurnal

And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의 변명(로마서3:1-8)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그림물감에서 노랑색을 하얀 백지에 칠하면 그리 선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얀색인지, 노랑색인지, 멀리서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깥에 검정색을 칠하면 노랑색이 확연히 돋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검정색이 노랑색을 두드러지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3:4절은 시편51:4절을 인용한 구절입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바울사도는 사람은 다 거짓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참되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편51:4을 인용했습니다. 다윗은 내가 주께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시편51편은 표제에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시편51:3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지은 죄를 y['v;p]/pĕshâʽay/‘페샤아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간음죄(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살인죄(우리야를 죽게 한 죄)를 졌습니다. 그런데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고백합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죄를 삭감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 반역죄를 졌다고 고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란 복합적으로 나타나서 어떤 결과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죄란 서로 얽혀서 이렇게 나타나기도 하고 저렇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죄란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 항상 숨어있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모릅니다. 바울의 반대자들은 억지스러운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말하기를 “당신(바울)의 말이 사람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더욱 날카롭게 드러낸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틀림없이 그 전능하신 분께서는 그러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기뻐하실 것이 아닌가요? 그러면서도 사람에게 진노를 내리신다면 하나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요?” 이에 대한 바울사도의 말은 “결코 그렇지 아니하다”고 분노에 찬 말을 함으로써 사악한 생각을 타파하고 있다. “무엇이라고?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다니 네가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살 자격이 있으시다. 실제로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불의하실 수가 있느냐?

 

바울을 시기하고 반대하는 자들은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는 것입니다. 이들의 논리는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임한다면, 죄를 많이 지을수록 은혜가 넘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행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은 마치 바울이 사람은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이 “너 마음에 원하는 대로 계속 죄를 지어라. 그러면 은혜가 더 크게 작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사도는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건전한 교리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왜곡되게 말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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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심판의 표본/하나님의 진노(로마서1:18-23)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우리말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단어가 있습니다. gavr/gâr/가르입니다. gavrge/적어도, 심지어 a[ra/그런 까닭에, 그러므로, 그렇다면 의 단축형으로 참으로, 사실은, 왜냐하면이라는 원인, 설명, 추정 또는 계속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접속사입니다. 가르가 번역이 되었으면 훨씬 해석에 빛을 더해주었을 것입니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8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왜냐하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21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바울사도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이유로(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7절에서 18절을 잇는 접점에서도 (왜냐하면)을 사용합니다. 원래 성경은 장절이 없었습니다. 성경의 장()을 나눈 사람은 영국교회의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랭튼(Stephen Langton/1150-1228)입니다. ()은 스테파누스(Stephanus Robertus)가 신약성경을 절로 구분하여 1551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출판했습니다.

17절과 18절의 왜냐하면/gâr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는 방법 이외에는 어떤 것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gâr이 그것을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태초부터 인간에게 임한 이후로 인간은 율법의 행위로나 다른 방업으로나 자신을 완전히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있다고 하면 희대의 사기꾼이며, 대대로 마귀의 자식들입니다. ‘하나님의 진노’/ojrgh; qeou'/‘오르게 쎄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이 잠깐 화를 내는 것일까? 만일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잘못 계산한 것입니다. 다음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사람에게 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로마서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에베소서5: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골로새서3: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창세기6장에서 8장을 보면 홍수심판이 나옵니다. 홍수심판은 전해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동지방에만 심판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지구상이 일 년간 물에 잠겨 있었던 공포의 홍수입니다. 이 홍수로 인해서 방주에 있었던 노아가족만 살아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멸망입니다(19). 이 도시들은 유황불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사해로 그 잔해가 남아있습니다. 또한 출애굽기6장에서 12장까지의 애굽에 내린 재앙입니다. 이런 심판들이 모두 하늘에서 있었습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심판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심판이 있다 해도 나대로의 종교가 있으니까 걱정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영역에 있음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빨리 회개하고 심판에서 탈출해야 함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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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믿음으로 의롭다함(로마서1:15-17)

 

D. M. Lloyd-Jones는 로마서 강해 서론에서 기독교의 역사와 기독교회의 가장 주목할 만한 지도자들의 생애에 있어서 로마서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책이나 성경의 다른 부분은 없다고 했습니다. Augustine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은 것도 로마서13장의 몇절을 읽음으로써 되었고, Martin Luther가 로마서 1:17을 상고하면서 참된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이어서 John Bunyan을 개종시켰습니다. 그로 인해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의 대작을 남겼습니다. John Wesley’s의 구원도 어떤 사람이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읽고 있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만큼 로마서는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로마서는 사람들을 변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든지 로마서를 읽게 되면 변화를 받아서 개종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로마서에서 뿜어져 나오는 말씀의 힘은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1:16절에서 17절을 보면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람이 어떻게 구원함을 받는가? 그것은 바로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기쁜소식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도대체 믿음은 무엇이길래 사람을 영원히 구원합니까?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우리의 시야는 한계가 있습니다. 멀리 있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망원경이 있다면 한계 밖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망원경이 믿음일 수 있습니다. 분명히 저 멀리 있는데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초점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2:12, 12:2).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때 역사가 나타나며, 믿음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118:8,9/2:4/27:25). 믿음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속역사를 신뢰하는 것입니다(3:21-25,10:9/2:20,21).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과 대조됩니다(고후5:7). 그래서 믿음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의 밑바탕입니다(1:1,4/1:3).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12:3/2:8). 그런데 믿음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10:9,10). 믿음은 성령의 역사로 인해 생깁니다(고전2:5). 그리고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케 됩니다(2:22). 하지만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살후3:2). 의인(의롭다고 칭하심)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2:4/1:17/3:11/10:38). 믿음은 의로 간주됩니다(15:6/4:3,5,9/3:6/2:23). 믿음이 있으면 기적을 일으킵니다(17:18-22/9:23,11:23/1:6,5:15). 그래서 성도들에게 꼭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고전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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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 않은 복음(로마서1:15-17)

 

바울사도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울사도가 복음을 사랑하고 좋아했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전파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란 나는 기회를 얻어 복음전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고 기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바울사도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것이 세상 사람들 눈에는 치욕적이었다는 말입니다. Roma의 총독은 황제를 대신하는 지방관입니다. Roma의 총독이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것은, Roma인들을 우위에 두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Roma인들의 생각에는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이 어떻게 복음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Roma인들이 복음을 과소평가하지 못하도록 일축한 것입니다.

로마사람들에게 있어서 힘은 로마인들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전 세계를 제패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그들은 무서운 나라가 없었습니다. 황제가 될 집정관이 전투에 나가면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잘 훈련된 군인들을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는 그들의 전투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Roma인들은 긍지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마저 복음은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Roma인들이야 한 세대를 풍미한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영원하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다윗의 혈통에서 성경대로 출생하여 메시아로서의 일들을 모두 마쳤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왕으로 오셔서, 위대하게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높아지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 즉 전 세계의 어떤 나라도 어떤 민족도 모두 구원을 가져다주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세속적인 일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돈에 환장한 듯합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눈을 부라리고 달려듭니다. 목숨을 걸고 돈에 매달려 있습니다. 세속적인 것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것을 위해서 온 생애를 다 걸고 있습니다. 오직 세속적인 명성을 위하여, 오직 오늘과 내일 즉 살아있는 세상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와 내세를 위한 준비는 zero상태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열심인데, 저 세상을 위해서는 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저 세상을 위한 spec은 전혀 쌓은 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접하거나 복음이 오면 받아들이면 되는데 인간의 오만함이 복음을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당하게 귀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서 믿는 자에게 유효하게 역사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모든 믿는 자에게/16).

And

바울의 소원(로마서1:8-10)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육신에 소용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衣食住입니다. 옷을 입어야 합니다. 먹어야 합니다. 비바람을 가릴 거주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들이 최소한만 있어도 괜찮은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계속 업그레이드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인 줄 압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재산)이 인격입니다. 아무리 개차반 같더라도 돈이 많으면 성인군자로 사람들이 인정합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국가가 발전하지 못하고 공동체가 제대로 가지 못합니다. 역사를 왜곡하고 사회를 왜곡되게 하는 것입니다. 경향신문에 의하면 교학사와 리베르스쿨 한국사 교과서가 3·1운동을 폭력적이라고 기술했다는 것입니다. 아시아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했던 일제의 총칼에 항거한 거족적 저항을 폭력적으로 기술한 것입니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왜구가 우리나라를 농단하든 말든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 한국인이 되어가지고 이런 못된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라는 것은 사람을 심히 왜곡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을 짐승으로 돌변하게 하는 것이 사람들이 그렇게 추구하는 副産物입니다. 그래서 인격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거부가 되면 공동체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쪽도 저쪽도 온전히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좋아합니다. 재물은 사람을 편하고 만족시켜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시장에 가려면 삼십리 내지 사십리를 걸어야 했습니다. 12km-16km를 왕복하니까 24-32km를 걸은 셈입니다. 시장에 갔다 오는데 꼬박 늦은 하루가 걸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10분에서 20분이면 갈 수 있습니다. 자동차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을 좋아합니다. 따라서 대체적으로 소원들이 재물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의 소원은 일반사람들과 다릅니다. 8절에서 10절을 보면

 

8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Roma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10). 고대 헬라적 서신은 대게 받는 자에게 복을 비는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말도 합니다. 바울사도 역시 이 관습대로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사도는 편지의 머리에 감사의 말을 했습니다. 그 속에 그 편지의 중요한 동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4-9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빌립보서1:3-11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혹 같지 아니한 것을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골로새서1:3-11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이요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 자니라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데살로니가전서2:2-10 2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3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7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고린도교회에는 바울이 그의 기도를 통하여 그들에게 당부하고 있는 것은 고린도의 성도들이 아직도 목표점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7). 따라서 그들이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9-10).

이처럼 Roma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좋은 소식에 대한 감사(8)를 합니다. 이어서 Roma를 곧 방문할 길이 열리기를 바라는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10).

오늘의 우리들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진정한 소원은 어떤 것입니까? 사도바울처럼 최소한 거룩한 소원을 바라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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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의 아들에 관한 복음(로마서1:1-3)

 

peri; tou' uiJou' aujtou'/페리 투 휘우 아우투/ 그의 아들에 관하여. 교회란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로 통일되어 있는 특수한 곳입니다. 바울사도나 모든 사도가 전하는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서 한 발자국이라도 옮겨가는 것은 복음에서 심히 이탈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큰 교회당을 가지고 유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바알을 숭배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하나님의 살아있고 명백한 형상이기 때문에 그분만이 우리의 전 신앙의 대상이요 중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지혜를 찾는 것은 무모하고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들의 행태입니다(Calvin). 그리스도인들은 Warfield의 주장대로 초자연주의적(Supematurlistic) 구원개념과 자연주의적 구원개념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자연주의적 구원이란, ‘자력구원론’(Self-Salvation)이라 불리는 것으로서 교회는 이러한 사상을 최초로 주장한 5세기 초 영국의 수도사 Pelagius의 이름을 따라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라고 부릅니다. 이 사상은 사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타고난 능력으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초자연적 이해는 힙포의 주교인 Augustine의 이름을 따라 어거스틴주의라고 하는데, AugustinePelagius의 가르침을 신랄하게 반박했습니다. 절대로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며 영혼을 구원하는데 필요한 모든 권능은 하나님께로 부터라고 했습니다. 어거스틴주의는 제16차 카르타고회의에서 펠라기우스주의를 정죄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승리함으로써 기독교는 죄인을 위한 종교로 인식하였습니다. 그 결과 구원이 필요 없는 의인들에게만 적합한 완전한 윤리체계로 전락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점에 관해서 세계의 모든 종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만 초자연주의적이거나 어거스틴주의적이므로 이런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론적 신앙에서 어거스틴적이어야 합니다.

Augustine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한 구원교리와 교회와 성례전을 통해 베풀어지는 구원교리입니다. 전자는 그의고백록속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표현 속에서 그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제가 더 이상 이 세상의 어떤 약속을 추구하지 않고 당신을 향하도록 저를 이끄셨습니다(8.12). “당신의 은사에 의해 저는 스스로 품어온 뜻이 아니라 당신이 품어 오신 뜻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사역이었음을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와 성례전을 통해서 베풀어지는 구원교리도고백록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행위를 인정하면서 믿음으로 기뻐하면서 당신의 의지의 행위를 인정하면서 믿음으로 기뻐하면서 당신의 이름에 찬양을 돌립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저의 지난 죄에 대해 안심케 해주지 못하곤 했습니다.”(9.4). 그 후에 AugustineAmbrosius에게 세례를 받고나서야 과거의 삶에 대한 모든 걱정이 사라졌습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Warfield는 종교개혁에 대해 개혁교회 입장에서 공정하게 평가했습니다. Warfieldprotestant 종교개혁을 Augustine의 교회론에 대한 은총론의 반역이라고 보았습니다. “protestant 종교개혁은 성례(sacraments)를 통하여 은총이 전달된다고 보는 생각에 대한 반란이었고, 교회의식의 좁은 틈을 통해서만 예정이 조금씩 실현된다는 생각에 대한 반란이었다그 반대로 종교개혁은, 인간이 버림받아서 어두움과 악한 것에 매여 있는 상태에 처해 있으며, 따라서 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Augustine의 생각을 확언한 것이었습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펠라기우스주의가 418년에 열린 회의에서 정죄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멸되지는 않았습니다. 항상 사탄은 교회를 계속 공격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Pelagius의 가르침에 동조하면서 지하로 숨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형태를 바꾸거나 교회의 정죄를 피할 만큼만 수정하면서 교회를 괴롭혔습니다. 이단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유사하게 교회를 표방하면서 못된 교리를 전파했고 전파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행위를 강조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합니다. 이러한 못된 것들을 받아들여 구원을 위한 선행적 은총의 필수성을 거부하는 펠라기우스주의로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주의는 529년에 제2차 오렌지회의에서 거부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회의는 펠라기우스주의에서 교회를 건져낸 반면에, 교회를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선행적 은총의 불가항력성을 거부하는 반반(semi-semi) 펠라기우스주의로 인도했습니다. 이 신학사상은 Gottschalk/고트샬크, Bradwardine/브래드워딘, Wycliffe/위클리프, Hus/후스와 같은 사람들의 시대를 지날 때까지 계속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Aquinas에 의해 체계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트렌트공의회(1545)에서 반()종교개혁과 연합하여 Roman-Catholic의 공식적 입장으로 선포되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Roman-Catholic神人(신인) 공조적 구원론(synergistic)을 거부하고, 후기 어거스틴의 탁월한 통찰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영감어린 통찰로 돌아갔습니다.

펠라기우스주의는 어떤 형태를 취하든지, 근본적으로 오직 그리스도-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리에 대한 위협으로서, 인간은 누구나 적어도 자신을 구원시킬만한 분량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비록 처음부터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최초의 은혜에 협력하여 그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므로, 교회는 언제나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성경의 원리가 여전히 구원의 유일한 궁극적 근거라는 것을 보증하는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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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복음(로마서1:2)

 

바울이 전하려는 복음은 오래전부터 계시된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선지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복음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았습니다(3:21). 이 복음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나타난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이미 글로 인하여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려고 알게 하신 것입니다(16:25-26).

흔히 새로 소개되는 교훈은 그것의 권위가 상실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신빙성을 그것의 유구한 역사성을 들어 확립시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갑자기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에 들어보지 못한 신흥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복음과 함께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약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15에 이미 복음이신 예수님은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여인의 후손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셋을 준비하셨고, 에녹을 준비하셨으며, 노아를, 셈을, 아브라함을, 이삭을, 야곱을, 다윗을, 요셉을, 마리아를 준비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것은 神話도 아닙니다. 주로 오래된 것들은 神話的인 요소가 많지만, 복음이신 예수그리스도는 전혀 신화와 관계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아들에 관하여란 말로 로마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이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 없는 신학은 바른 신학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 없는 신앙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 없는 교회는 바른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 없는 세상은 바른 세상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 없는 종교는 바른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 없는 가정은 바른 가정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 없는 사회는 바른 사회가 아닙니다. 사람에게 예수그리스도가 없는 것은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이 세상은 돈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려고 합니다. 인간복제도 서슴지 않고 하려 합니다. 그러나 복음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미래에 심판이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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