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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8.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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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과 인간의 관계(로마서1:15-17)

 

사람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향방이 결정됩니다. 왜냐하면 심판이든지, 구원이든지가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여러 종교를 신봉하면서 안심하고 있지만, 결국에 가서는 심판대에 서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심판대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방송이나 신문, 그리고 여타 언론과 직접적인 전도를 하고 있어도 도무지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음은 전해져야 하고 퍼져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그리스도십자가 사역은 구속의 사역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사역을 말할 때 구속의 사역이 완성되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부정과거 시제로 사용했습니다.

 

마태복음20:28 인자가 온 것은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주려(동사, 부정사, 과거, 능동)

마가복음10:45 인자의 온 것은주려함이니라(동사, 부정사, 과거, 능동)

베드로전서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동사, 직설, 과거, 수동)

히브리서9:12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동사, 분사, 과거, 중간)

히브리서9:15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동사, 분사, 과거 중간디포)

디모데전서2:6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동사, 분사, 과거, 능동)

디도서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동사, 직설, 과거, 능동)

고린도전서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동사, 직설, 과거, 수동)

고린도전서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동사, 직설, 과거, 수동)

갈라디아서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속량하셨으니(동사, 직설, 과거, 능동)

갈라디아서4:5 속량하시고(동사, 직설, 과거, 능동)

요한계시록5:9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동사, 직설, 과거, 능동)

요한계시록14:3-4 3구속함을 얻은(동사, 분사, 완료, 수동) 4구속을 받아(동사, 직설, 과거, 수동)

사도행전20:28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동사, 직설, 과거, 중간)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현재 진행 중이 아닙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의 공로로 쌓아지는 것이 아니고 완성입니다. 단번에 구원받은 것이지, 점차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택하심을 통해서, 선택에 관계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가르침을 통해 소명에 관계하시며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성령님은 인침을 통해서 칭의에 관계하셨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And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로마서1:15-17)

 

하박국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갈라디아서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히브리서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소위 기도 많이 한다고 하는 사람들, 사람 많은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들에게서 더러 나타나는 현상이 자신들은 완전한 줄 압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목회의 폭이 넓으면 비례해서 자신들의 모든 것들이 완전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혹 있다면 세상의 종교에서나 생각할 법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칭 의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신성모독을 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절대로 의인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롭다 하심이란 말을 사용한 구약의 주된 단어군은 qd'x;/tsâdaq에서 왔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dikaiovw/dikaiôo입니다. Murray는 법적인 의미를 갖는 기본형 qd'x;/tsâdaqQal(능동형) Hiphil(사역형) Piel(강의형)으로 널리 쓰인다고 했습니다. 또한 Hihpael(재귀형)으로 한번 쓰이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70인역 성경과 신약성경에서 dikaiovw가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Leon Morris“-ovw(오오)로 끝나며 도덕적 특질을 언급하는 동사들은 선언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선언적인 의미이지, ‘-게 만든다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지, ‘의인되게 만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의롭다 하심이 주관적인 변화에 반대되는 객관적인 법정적 심판이라는 사실을 다음의 구절에서 증명합니다.

 

신명기25: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Hiphil)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 의인을 의롭다 함에 있어서 재판장들이 그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기32:2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Piel) / 엘리후에 따르면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의롭다 했다는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인데 즉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잠언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Hiphil)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이것은 분명히 그 땅의 재판장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뇌물 때문에 악인을 의롭다고 선언하거나 의인을 정죄하는 그 재판장은 여호와를 분노케 했습니다.

누가복음7:29 하나님을 의롭다하되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고 선언하거나 인정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의롭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의롭다하심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죄인들을 의롭다 하신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래서 의롭다 하심은 복음의 본질이요 핵심입니다. 의롭다하심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지, ‘어떤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는 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말은 조심해야 합니다. “마치 내가 죄를 짓지도 않은 것처럼 나를 보신다라는 말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Roman-Catholic의 교리를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Roman-Catholic은 트렌트 공회(Council of Trient/1547)를 인용하는 Catholic교리문답(1994)의롭다 하심은 죄의 속함일 뿐만 아니라 내적인 사람의 거룩하게 하심과 새롭게 하심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그것은 의롭다 하심은 세례에서 시여되며(para. 1989)”그것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비의 능력에 의해 우리를 내부적으로 의롭게 하신다(para. 1992)”라고 말합니다. 즉 이들이 말하는 의란 하나님의 의와 어느 정도 있는 인간자신의 의가 합해져 인간을 의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있어서 의란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우리와는 동떨어진 우리 밖의 의입니다. 우리의 노력 대가로 얻은 의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And

참된 교회의 속성/교회의 사도성(로마서1:11-15)

 

J. C. Lambert사도의 권위는 영적이며, 윤리적이고, 인격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공공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에게 양도될 수 없었다. 바울은 스스로 초기 사도들 전체가 지녔던 견해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였으며(2:6,11),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을 감화시키기 위해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려고 노력하였다(고후4:2). 사도들이 집단적으로 독자적이고 독재적인 권위를 행사하였었다는 증거는 없다고 했습니다(Herbert Lockyer, 1982, 30). 사도는 예수님께 택함을 받은 12제자입니다. 사도의 자격은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 보낸 12제자로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이어야 했습니다. 예외로 바울은 특별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Gospel Serve, 2005, 577). “사도적이란 말은 사도적 과거를 강하게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사도적이란 역사적 측면이 가시화되는 말입니다. “사도성에서는 교회의 인간적 측면이 강하게 부각됩니다(G. C. Berkouwer, 2006, 256). 그래서 다른 속성들과는 많이 논쟁이 붙었었습니다. 지금도 사도권이 계승되었다느니, 자신이 사도라느니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Karl Barth사도적이라는 것을 사도들의 가르침과 지시를 따르며, 그들의 규범적 권위 아래에 있는 것이며 그들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이고, 그들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전하는 message를 듣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성은 반드시 사도들의 교리를 충실하게 따르는 것과 연관됩니다. 그 교리는 초자연적인 계시로 사도들에게 주어졌고, 초자연적인 영감을 통해 그들에 의해서 문서로 기록되었습니다. Roman-Catholic이 말하는 것처럼 교황이 사도권을 계승했다고 하는데, 비성경적며, 아무런 연고도 없는데 Roman-Catholic과 교회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고 그런 말을 하는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사도성은 사도들의 교리를 충실히 따르는 것입니다. 그 교리는 초자연적인 계시로 주어졌습니다. 초자연적인 영감을 통하여 그들에 의해서 문서로 기록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참된 후손이 혈통과 상관없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쫓는 사람들인 것처럼, 사도적인 교회는 연속되는 승계의 문제와 관계없이 사도들의 믿음의 자취를 좇는 교회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교리에 순복하는 것만이 교회의 사도성을 보장합니다. 사도성은 결코 사도들로부터 이어지는 교회 조직의 승계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승계는 사도들로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해도, 교리적인 순수성을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속성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0:40 너희(사도들)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가복음10:16 너희(뽑힌 72)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요한복음13:20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3:1)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그분이 지명하신 사도들이 그분의 권위를 입고 능력을 받은 대리인들이며 대변인들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분의 사도들의 말을 듣거나 거절하는 것은 곧 그분의 말씀을 듣거나 거절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사도들)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사도행전2:42 저희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갈라디아서1:6-9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에베소서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히브리서1:1-2: 21-3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먼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요한계시록21: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Reymond는 교회가 사도적이라고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원래의 기초인 사도들의 복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라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분의 교회가 사도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거짓된 선지자들이 장차 교회 안에 나타날 것을 자신의 지상사역 기간 동안에 경고하셨습니다(24:11,24, 13:22).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셨는데, 그 교회가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2:2).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시험을 위한 시금석은 구약성경에 이미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 선지자가 예언한 것들이 실제로 일어났는가, 그리고 그가 선언한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해 주신 신앙과 일치하는가(13:1-3, 18:20-22) 하는 것입니다. 이 기준들에 덧붙여 신약성경의 교회에서는 사도로 자신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증언자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1:22). 또 그가 다른 사도들이 가르친 동일한 복음을 가르치고 동일한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한다고 합니다(1:8-9, 고전15:11, 고후 11:4).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요일4:1-3). 사도임을 입증하는 기적과 기사들, 표적들을 행해야 합니다(고후12:12).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들을 위하여 고난과 박해를 기꺼이 감내해야 합니다(고후12:13-13:13).

따라서 자신이 사도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도를 계승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미 탈교회화 한 사람들입니다.

And

참된 교회의 속성/교회의 보편성(로마서1:11-15)

 

보편성이란 특별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구원을 받으려면 거액의 돈을 내야 한다든지, 지성인, elite들에게만 구원이 임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제한을 받기 때문에 보편성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보편성이 되려면 사람들에게 많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28:18-20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에 모든 족속(pavnta ta; e[qnh)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하고 어떤 민족은 안 되고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입니다. 사람이라면 동서고금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3:16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를 믿는 자마다(pa'" oJ pisteuvwn)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이지, ‘믿어도 너는 완 돼, 너는 돼가 아닙니다. 이것이 교회의 보편성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큰 교회라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많다고 해서 큰 교회는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Roman-Catholic은 교회의 보편성을 Roman-Catholic 세력이 미치는 곳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Roman-Catholic이 미치지 않으면 교회가 될 수 없다는 황당함을 주장합니다. 교회의 보편성은 지상명령(28:18-20)에 따른 복음의 민족적인 보편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목하게 하는 사역을 온 세상 앞에 나타내는 可見的(가견적) 공동체인 교회의 성격에서 나옵니다.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universality)은 지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속성으로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회원 구성에서 분리주의나 배타주의를 추구하는 교회는 교회가 본질적으로 갖는 보편성이라는 측면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현재의 교회 성장학은 사회의 한 계층만을 파고들려고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자신이 요구하신 것 이외에 또 다른 자격을 신자 됨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베드로의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10:13-15).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15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자꾸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시는데, 이상한 것들을 만들어서 성경을 부인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습니다. 그래서 보편적입니다(마태복음28:19, 갈라디아서3:28, 골로새서3:11, 요한계시록5:9-10, 7:9).

And

참된 교회의 속성/교회의 거룩성(로마서1:11-15)

 

Roman-Catholic은 교회가 성례와 미사와 여타 선행으로 인해서 거룩해진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수많은 이단들이 얼마나 많이 소위 예배하고 선행을 행하며 성례의식을 하는데도 거룩하지 못하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사야6:1-4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요한계시록4: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거룩하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구약에서 거룩하다는 말을 vd,qo/로 표현합니다. 즉 거룩함이란 분리된, 신성한 것입니다. 따라서 ‘qôdesh’거룩함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qôdesh’는 거룩한 영역에 속하는 사물로 凡俗(범속)한 것과는 구별되는 사물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이스라엘은 신성의 영역과 범속의 영역 간의 상호불가침적 구별을 유지시켜야 했습니다(18:32). 고유적으로 거룩한 것, 또한 하나님의 법률이나 종교의식에 의해 거룩하다고 명명된 대상은 범속한 것으로 취급하면 안 되었습니다. 예로 안식일은 거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날과 관련된 금지 사항들은, 그날의 독특한 성격을 유지시켜 주고 그 날이 범속한 날로 취급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거룩한것을 a{gio"/hâgios라고 했습니다. 신에게 바친이라는 뜻입니다. 신에게 바친 것은 거룩하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룩하다는 것과 성경이 생각하는 거룩한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은 아무것이나 거룩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로 聖火奉送(성화봉송)이라고 말합니다. 과거 귀신들에게 바쳤던 불을 거룩한 불이라고 명명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불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이라는 단어를 아무데나 붙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연관이 있을 때만 붙여야 합니다. 관련도 없으면서 聖地(성지), 聖人(성인)이다, 聖女(성녀) 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Reymond는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있는 공동체라는 절대적인 관점에서 확정적으로 거룩하고, 교회는 그 성화(聖化)가 사람의 내면에서 시작되어 점진적으로 삶 전체에 표현된다는 상대적인 관점에서 거룩해져 가는 과정에 있다고 했습니다. 칼빈(Calvin)교회는 매일 전진하면서도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 즉 하루하루 전진하지만 아직은 거룩이라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그리스도께 헌신된 공동체라는 점에서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John Murray는 성도는 확정적인 성화와 점진적인 성화를 소유했다고 했습니다(John Murray, 2001, 289-318). 어떻게 그렇습니까?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요한복음17:15-19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고린도전서3:16-17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린도후서6:14-7:1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에베소서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5:25-27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5:23-24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베드로전서1:15-16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따라서 교회의 거룩함은 확정적인 동시에 점진적입니다. 교회의 거룩함이 확정적인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와 더러움으로부터 급격하게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고, 그 거룩함이 점진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의롭다고 선언하심으로 인해 이제 성화의 과정이 반드시 따라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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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교회(로마서1:11-15)

 

사람들은 특별한(special) 것을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다르게 대우하는 것을 좋아하고, 어딘가 다른 사람과 차별 있게 대해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같은 기차인데 일등석, 이등석, 삼등석이 있습니다. 같은 비행기인데 최고급 좌석인 First class, 고급좌석인 Business class 그리고 일반석인 Economy class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 대우를 달리합니다. 돈으로 대우를 산 것입니다. 아파트도 마찬가지입니다. 25평형, 32평형, 42평형, 64평형 등이 있어서 되도록 사람들이 같이 어울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토록 사람들은 특별하게 다른 사람들과 대우를 달리 받았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11절과 12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Roma교회를 보기 원하는 것은 바울사도가 알고 있는 것을 Roma교회에도 알게 하여 Roma교회를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차에 안위함을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피차에 안위함을 받다sumparakalevw/‘쉼파라칼레오함께 격려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본 절에서는 수동태로 기록되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격려를 받거나 위안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사실 바울사도 같은 분이라면 다른 사람의 격려를 받을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로마교회에 바울사도는 피차 격려를 받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이런 면을 볼 때 바울사도의 인격적인 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오직 주 예수님을 위해서 평생을 바친 사도가 Roma교회로 인해서 격려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다시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저 잘난 맛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의 어떤 목회자들은 마치 교황처럼 행세합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교회가 자신처럼 되어야 한다는 뉘앙스를 주는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도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교회의 지탄의 대상인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편적인 교회를 만드셨는데, 혹자들은 특별한 교회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과 사도들 그리고 우리의 선배들이 세웠던 것을 한꺼번에 모두 갉아먹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주님께 대한 오만이요 교만이며, 말할 수 없는 거만입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그의 백성들이 보편적 교회에 들어와서 구원 얻게 하시려는데 찬물을 끼얹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보편적이라고 하는 것은 문턱이 낮은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하다는 것은 문턱이 높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And

교회를 튼튼히 하시는 주님(로마서1:11-15)

 

사람이 보고 싶은 사람은 아무리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고,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는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교회를 심히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사실 바울사도는 주님께서 택하신 사람으로서 특이한 사도인 것 같습니다. 오직 복음을 위하여 택하신 사도입니다. 그래서 지중해를 중심으로 로마제국에 바울사도같이 선교여행을 많이 하고 고난을 당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바울사도는 모든 것을 기쁨으로 했습니다. 바울사도의 가슴에는 주님의 교회가 어디서든지 든든히 서가는 것이었습니다.

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바울사도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먼저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 됨이로다’(8). 너희 로마교회의 믿음(pivsti")이 로마제국전체에 전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교회를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기도하는지 안하는지는 나의 하나님께서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기도만 할뿐만 아니라 너희교회를 방문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방문하게 될 과정을 위해서 간구한다는 것입니다. 가는 이유는 많겠지만,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은사하면 은사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사가 너무 커서 다른 사람들의 은사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도들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령한 은사는 그가 복음 전하는 것, 권하는 것과 예언(말씀)에 대하여 소유하였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가 얻었던 것으로 알고 있던 능력들을 말합니다(Calvin). 방언 등과 같은 어떤 특정한 은사가 아닌 영적인 견고함에 대한 은사입니다(Hendriksen).

이런 은사들을 로마교회에 나누어주고 싶은 이유를 너희를 견고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피차 안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로마교회의 안위함이었습니다.

마태복음18:17을 보면 예수님께서 ejkklhsiva/‘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교회권징에 말씀하셨습니다. “공동체에 속한 한 지체가 죄를 범하였을 때입니다. 이때 이 지체가 다른 지체의 책망을 무시하고, 또 둘 이상의 다른 지체들의 권면 역시 무시하는 경우에 어떻게 처리할까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책망한 사람(單數)이 세 번째 단계로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기를 거절한다면, (單數)는 그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교회/ejkklhsiva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과감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한 사람이 규정된 권징의 절차에 따라 ejkklhsiva 바깥으로 쫓겨나게 된다면 그 공동체 안의 사람들은 그 공동체 밖으로 쫓겨난 사람을 마치 이방인이나 인기 없는 로마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에 세리는 정당한 세금보다 더 많은 양을 강탈해 갔었습니다. 만약 그 세리가 유대인이라면 그는 유대사회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즉 이방인과 세리의 비유를 든 것은 회개하지 않고 출교된 죄인을 이스라엘 사회에서 따돌림 당하는 사람의 처지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분의 ejkklhsiva를 이스라엘의 참된 언약 공동체로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일반적인 이스라엘의 관례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이방인이 되는 것의 반대입니다. 이방인이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의 반대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ejkklhsiva는 전 세계적인 실체(worldwide entity)를 말할 뿐 아니라(16:18), 개개의 지역 공동체를 묘사하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ejkklhsiva는 메시아의 공동체이며 하나님 나라의 구속적(redemptive)인 표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스라엘”(6:16)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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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소원(로마서1:8-10)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육신에 소용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衣食住입니다. 옷을 입어야 합니다. 먹어야 합니다. 비바람을 가릴 거주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들이 최소한만 있어도 괜찮은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계속 업그레이드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인 줄 압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재산)이 인격입니다. 아무리 개차반 같더라도 돈이 많으면 성인군자로 사람들이 인정합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국가가 발전하지 못하고 공동체가 제대로 가지 못합니다. 역사를 왜곡하고 사회를 왜곡되게 하는 것입니다. 경향신문에 의하면 교학사와 리베르스쿨 한국사 교과서가 3·1운동을 폭력적이라고 기술했다는 것입니다. 아시아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했던 일제의 총칼에 항거한 거족적 저항을 폭력적으로 기술한 것입니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왜구가 우리나라를 농단하든 말든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 한국인이 되어가지고 이런 못된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라는 것은 사람을 심히 왜곡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을 짐승으로 돌변하게 하는 것이 사람들이 그렇게 추구하는 副産物입니다. 그래서 인격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거부가 되면 공동체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쪽도 저쪽도 온전히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좋아합니다. 재물은 사람을 편하고 만족시켜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시장에 가려면 삼십리 내지 사십리를 걸어야 했습니다. 12km-16km를 왕복하니까 24-32km를 걸은 셈입니다. 시장에 갔다 오는데 꼬박 늦은 하루가 걸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10분에서 20분이면 갈 수 있습니다. 자동차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을 좋아합니다. 따라서 대체적으로 소원들이 재물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의 소원은 일반사람들과 다릅니다. 8절에서 10절을 보면

 

8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Roma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10). 고대 헬라적 서신은 대게 받는 자에게 복을 비는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말도 합니다. 바울사도 역시 이 관습대로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사도는 편지의 머리에 감사의 말을 했습니다. 그 속에 그 편지의 중요한 동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4-9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빌립보서1:3-11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혹 같지 아니한 것을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골로새서1:3-11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이요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 자니라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데살로니가전서2:2-10 2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3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7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고린도교회에는 바울이 그의 기도를 통하여 그들에게 당부하고 있는 것은 고린도의 성도들이 아직도 목표점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7). 따라서 그들이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9-10).

이처럼 Roma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좋은 소식에 대한 감사(8)를 합니다. 이어서 Roma를 곧 방문할 길이 열리기를 바라는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10).

오늘의 우리들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진정한 소원은 어떤 것입니까? 사도바울처럼 최소한 거룩한 소원을 바라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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