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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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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9.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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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9.05.11
    사형에 해당한 인간의 죄들
  5. 2019.02.02
    심판의 표본/하나님의 진노
  6. 2014.12.29
    죄책감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알지만(로마서7:8-12)

 

교육이란 어떤 것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에게 잘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잘 몰랐던 것을 교육을 받아서 잘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바른 교육이 꾸준히 전개되어야 하며, 바른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참 교육 참 교육 하지만 말로만 참교육을 하는 교육당국입니다. 이를테면 역사를 왜곡한다는 것은 바른 역사를 비틀어서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곡된 역사를 배우게 되면 왜곡된 것이 머리에 각인이 되어버립니다. 요즘 박근령의 망언에 우리나라사람들이 매우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틈만 나면 역사왜곡을 하며 오만잡것들을 합사한 것들에게 절을 하는 일본의 총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같이 아시아에서 흉폭하고 잔인한 일을 저지르고도 전혀 반성하는 기미가 없습니다. 그런 중에 박근령이 미친 말을 한 것입니다. 아베나 박근령이나 역사왜곡에 대해서 전혀 생각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말들을 듣고서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아주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극우주의자와 태평양전쟁의 주범들의 후손이라고 하는 작자들이 태평양전쟁이 잘못되었노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르게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더구나 생명에 관한 일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 사람들은 생명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물며 영원한 생명에 관한 일들은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교육에 찌들면 그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자신의 고집대로 갑니다. 그러다가 망합니다. 국민들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 4대강 공사를 이명박이란 어리석은 사람이 어기고 공사를 끝끝내 했습니다. 국민들은 4대강공사를 하면 우리나라에 심각한 경제난과 강이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기고 어기며 어기고 공사를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들어간 돈만 22조원입니다. 이 돈은 한 노동자 1000만년에 해당하는 연봉입니다. 2015년도 우리나라 예산이 306조원입니다. 4대강은 단 1%도 쓸모없는 공사입니다. 그런 곳에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이란 자가 어기고 공사를 한 4대강의 혜택을 받았습니까?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피해만 막심하게 입었을 뿐입니다. 끝내는 4대강의 댐을 파괴해야 할 것입니다. 이토록 고집 세게 한 결과 국민들에게 엄청난 손해와 피해를 주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르지 못한 것이고 고집을 세운 결과입니다.

바울사도는 첫걸음마를 하고 있는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바르게 알려주려고 무진 애를 쓴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전통, 전통 하면서 자신들의 교리를 바꾸지 않으려 했습니다. 바울사도의 변()이 무엇입니까?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법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의 근본적인 것을 다루지 않습니다. 율법은 죄의 존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율법이 죄를 정합니다. 죄는 율법이 없다면 죽은 것입니다. 죄는 율법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습니다. 율법에 의해 어떤 일이 죄로 정해지기 전에는 사람은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기한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매년 대속죄일에 하나님께 희생제를 드렸습니다(9:24-26).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일 년간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사람들의 어떠한 행위로 인해서 죄를 용서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희생양의 죽음으로 용서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지켜서 용서함을 받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이 죄고, 저것이 죄다라고 알려주는 것뿐입니다. 희생양으로 인한 속죄가 언제 끝났습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입니다. 이제 다시는 희생양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함 받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형의 희생양의 원형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And

죄가 우리 주인일 수 없다(로마서6:12-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aJmartiva/hamartîa 는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에서 표적(과녁)을 벗어나는 것 또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aJmartiva는 윤리적, 지적, 법률적으로 모두에 사용되었습니다. 그 범위는 단순한 잘못에서 중죄까지 모든 그릇된 행위를 표현했습니다. LXX역본에서 aJmartiva taF;j'/hathâ’t(과오, ), @/[;/ʽâôn(옳은 길에서 의식적으로 이탈하는 죄), [v'P,/phesha’(반역) 등을 번역했습니다. 죄란 그 뿌리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전 生涯(생애)를 간섭합니다. ‘주관 한다 kuvrio"/kûirios주인이 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죄가 사람을 영생하지 못하게 하고 바르게 살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과 불편한 관계를 늘 조성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럼에도 바울사도가 로마교회에게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죄가 사람(너희를)의 주인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말합니다. 너희가 율법아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십계명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백성 전반을 규정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구별하고자 세우셨습니다. 율법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수시로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사람들을 비난하고 저주했으며, 심판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것들을 했으면서도 율법은 정작 사람이 가장 필요했던 것은 하지 못했습니다. 즉 율법은 사람을 멸망에서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나라고 간에 범죄자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잔악한 살인죄로부터 각종 경범죄까지 헤아릴 수없이 많습니다. 사실 헌법이 그렇게 많은 조와 항목이 필요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다면. 그런데 범죄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매일같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법조항이 수없이 많은데 그 이상 죄는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조항이 많이 있어도 죄는 사라지지 않고 사람은 계속 멸망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죄를 처벌할 조항이 없으면 세상은 온통 난리일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죄를 없이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죄를 처벌은 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그렇게는 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인가는 죄인들을 완전히 용서할 하나님의 은혜가 이 땅에 와야 했습니다. 그 사이에는 모형으로 원형을 대신해야 했습니다. 모형은 각종제사였습니다. 원형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로마서8:1-3절을 보면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셔서 율법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이루신 것입니다.

헬라에서 은혜 cavri"/chârisHomer 이래 사람들 중에 복리를 가져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카리스/은혜는 바울의 중심개념으로 인사말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카리스는 사람의 구원사건입니다. ‘카리스의 기본적인 사상은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카리스는 십자가에서 구체화되었습니다(2:21). 그리고 은혜는 복음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죄인들에게 나타납니다(3:23-24). 그러므로 은혜는 구원의 전부입니다(고후6:1). 모든 신자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고전1:4).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된 은혜로만구원을 얻습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믿음으로만구원을 얻지, 어떤 사람들의 공덕이나 본인들의 행위로 구원받지 않습니다(3:24). 이것은 구원의 방법으로서 율법을 배제하는 것입니다(4:16). 하나님의 은혜는 칭의(의롭다 하심)의 기반이었습니다(5:20-21). 그래서 은혜는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상태입니다(5:2). 또한 은혜는 항상 선물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선물이지, 어떤 대가가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는 충분합니다(고전1:29). 그러므로 죄가 우리들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And

깨닫지 못하는 인간(로마서3:9-18)

 

로마서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시편14: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우리들은 어떤 사람들이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말들을 종종 듣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별것도 아닌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대부분 이 세상에 속해 있는 것들을 남보다 조금 안다고 해서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들갑을 떨어댑니다. 이렇게 해서 깨달았다고 하지만 실상 그 자신의 영혼에는 아무런 소득이 없는 예가 허다합니다. 특히 깊이 깨달아서 종교의 교주들이나 창시자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자신의 깨달음이(?) 오히려 걸림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과 깊이 통달했다고 하는 유대인에게 말하기를 깨닫는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시면서 지각이 있는가 하고 살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시지만,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4장을 보면 가인의 후손들이 기록되었습니다. 즉 사람의 자손들입니다.

 

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18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창세기5장을 보면 셋의 후손들이 기록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들의 후손들입니다.

 

1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5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6 셋은 일백 오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 칠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8 그가 구백 십 이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9 에노스는 구십세에 게난을 낳았고 10 게난을 낳은 후 팔백 십 오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1 그가 구백 오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12 게난은 칠십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 사십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4 그가 구백 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15 마할랄렐은 육십 오세에 야렛을 낳았고 16 야렛을 낳은 후 팔백 삼십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 그가 팔백 구십 오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18 야렛은 일백 육십 이세에 에녹을 낳았고 19 에녹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0 그가 구백 육십 이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21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3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 칠세에 라멕을 낳았고 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 팔십 이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 그는 구백 육십 구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28 라멕은 일백 팔십 이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 라멕이 노아를 낳은 후 오백 구십 오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31 그는 칠백 칠십 칠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32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이들 자손들이 혼합됩니다. 가인의 후손들과 셋의 후손들이 혼합되어버립니다.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후손들과 합해집니다.

창세기6:1-2 1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경건했던 사람들이 아름다운 여자들을 보자 정신이 없었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져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따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경건했던 자들이 너도나도 자기들의 좋아하는 자들로 아내를 삼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경건했던 셋의 후손들이 정욕적으로 해결하려고 경건하지 않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서 아내를 삼은 것입니다. 문제가 붙은 것입니다.

창세기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신(성령)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사람에게 주어진 생명의 신적인 영, 즉 육체적, 윤리적, 자연적, 영적인 생명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그의 성령을 사람에게서 거두신다는 말씀입니다. ‘육체가 됨이라’는 사람들이 그들의 범죄와 배신으로써 자신들이 육체가 된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능력이 결여되고 있는 육신과 하나님의 영이 논쟁하는 것은 헛수고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육체에 맡겼습니다. 그리하다보니 성령의 지배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점점 그들의 생활은 하나님의 목표하신 것에서 후퇴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점점 벗어나버렸습니다. 더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짐승같이 변해버렸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두 잊었습니다. 오히려 잊으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쾌락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육신적인 정욕에 사로잡혀서 자신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한 사람도 깨닫는 자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소위 도통(道通)했다고 하는 사람들, 무엇을 깨달았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았다는 것이 하나님의 형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세상은 변화무쌍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과학의 정상에 있는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져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람의 따뜻함을 찾기가 여간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정신없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자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탄식하는 것입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래도 살 수 있는 사랑을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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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사형에 해당한 인간의 죄들(로마서1:29-32)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1. 불의/ajdikiva/adikîa/부정한 행위. 불의한 행위, 부정(불공정)한 행위

2. 추악/ponhriva/ponerîa/사악, 비행, 부정, 계획적으로 행해진 악의.

3. 탐욕/pleonexiva/plleonxîa/탐욕스러움, 탐욕스러운 욕망

4. 악의가 가득함/사악(kakiva/kakîa)이 가득함

5. 시기/fqovno"/자기가 원하는 것을 빼앗는 것.

6. 살인/fovno"/phônos/살인, 살해

7. 분쟁/e[ri"/êris/다툼,분쟁,불화

8. 사기/dovlo"/미끼, 올가미, 기만, 계략

9. 악독이 가득함/kakohvqeia(악의, 원한, 악한 성격)이 가득함

10. 수군수군함/yiquristhv"/psithuristês/중상자, 은밀한 비방자,

11. 비방함/katavlalo"/katâllallos/욕하는 자

12. 하나님을 미워함/qeostughv"/theostugês/하나님을 미워하는

13. 능욕함/uJbristhv"/huibristês/난폭한 사람, 오만한 사람

14. 교만함/uJperhvfano"/huiperêphanos/거만한, 교만한, 자랑하는

15. 자랑함/ajlazwvn/allazôn/허풍선이, 사기꾼.

16. 악을 도모함/kakov"/kakôs()을 고안함.

17. 부모를 거역함

18. 우매함/ajsuvneto"/asûinetos/어리석은, 이해력이 없는

19. 배약함/ajsuvnqeto"/ashûinthetos/불충실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20. 무정함/a[storgo"/âstorgos/사랑이 없는, (타고난) 애정이 없는.

21. 무자비함/ajnelehvmwn/anelleêmon/무정한, 무자비한.

인간의 부패한 상태로 버림받아서 나타난 결과의 21가지의 죄악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의 구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고린도전서5:9-11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고린도전서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린도후서12:20-21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갈라디아서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라는 말은 나라마다 민족마다 다르게 해석되어 왔습니다. 헬라세계에서는 힘이 의가 되기도 했으며, 로마제국에서는 로마의 다른 국가의 점령이 의가 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 국가에서 의가 다른 나라에서는 불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의()는 구약성경을 배경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Socrates의 제자이며 Aristoteles의 스승이었던 Platondikaiosuvnh/디카이오쉬네/‘()’를 네 개의 주요덕목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정의, 지혜,절제, 용기의 덕목들은 스토아학파(Stoicism)의 철학자들에 의해서 강조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Hellenism 유대교에서도 차용해서 썼습니다. 헬라어의 ’/dikaiosuvnh/dikaiosûine/‘디카이오쉬네어떤 표준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의 는 윤리적인 특성만의 가 아닙니다. ‘의롭다’/‘차디크는 주어진 표준에 순응한다는 뜻입니다. 즉 일차적으로 인격적인 윤리적 특성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의 충실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말씀하셨을 때 윤리적인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나님의 표준에 부합한 자를 말합니다.

이런 면에서 이 세상에서의 의는 하나님의 표준에 조금도 부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보기에 이기 때문입니다. 즉 윤리적인 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표준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윤리적인 의는 인간의 기준에서 만들어지고 인정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것들을 지키면서도 위의 죄들을 짓는 사람들을 우리들은 많이 보고 있습니다. 정권의 찬탈을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고 짓밟아버리는 일들을 먼 과거에서만의 일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것이 라고 말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점점 하나님의 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만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치와 야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과 교회가 야합을 하면 세상은 이익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반드시 불이익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과 야합하다보면 교회가 세속화되어 버립니다. 세속화되다보면 세상을 이해해야 합니다. 세상을 이해하다보면 죄가 교회에 들어옵니다. 위와 같은 죄가 거침없이 교회의 문턱을 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들을 교회가 조장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 시대에 있었던 죄들은 2000년이 지난 오늘에는 진화되어서 더욱 사형에 해당하는 죄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으면 노도와 같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함을 얻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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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표본/하나님의 진노(로마서1:18-23)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우리말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단어가 있습니다. gavr/gâr/가르입니다. gavrge/적어도, 심지어 a[ra/그런 까닭에, 그러므로, 그렇다면 의 단축형으로 참으로, 사실은, 왜냐하면이라는 원인, 설명, 추정 또는 계속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접속사입니다. 가르가 번역이 되었으면 훨씬 해석에 빛을 더해주었을 것입니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8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왜냐하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21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바울사도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이유로(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7절에서 18절을 잇는 접점에서도 (왜냐하면)을 사용합니다. 원래 성경은 장절이 없었습니다. 성경의 장()을 나눈 사람은 영국교회의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랭튼(Stephen Langton/1150-1228)입니다. ()은 스테파누스(Stephanus Robertus)가 신약성경을 절로 구분하여 1551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출판했습니다.

17절과 18절의 왜냐하면/gâr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는 방법 이외에는 어떤 것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gâr이 그것을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태초부터 인간에게 임한 이후로 인간은 율법의 행위로나 다른 방업으로나 자신을 완전히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있다고 하면 희대의 사기꾼이며, 대대로 마귀의 자식들입니다. ‘하나님의 진노’/ojrgh; qeou'/‘오르게 쎄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이 잠깐 화를 내는 것일까? 만일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잘못 계산한 것입니다. 다음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사람에게 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로마서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에베소서5: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골로새서3: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창세기6장에서 8장을 보면 홍수심판이 나옵니다. 홍수심판은 전해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동지방에만 심판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지구상이 일 년간 물에 잠겨 있었던 공포의 홍수입니다. 이 홍수로 인해서 방주에 있었던 노아가족만 살아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멸망입니다(19). 이 도시들은 유황불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사해로 그 잔해가 남아있습니다. 또한 출애굽기6장에서 12장까지의 애굽에 내린 재앙입니다. 이런 심판들이 모두 하늘에서 있었습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심판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심판이 있다 해도 나대로의 종교가 있으니까 걱정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영역에 있음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빨리 회개하고 심판에서 탈출해야 함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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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사도행전2:37-42)

사도들의 말과 베드로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을 박도록 종용한 사람이 주와 그리스도인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경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줄을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제일로 잘 섬긴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른다고 생각하여(물론 잘못된 생각이지만)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는데, 알고 보니 자신들이 너무나 잘못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음이 심히 찔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심히 찔렸던 것입니다. ‘찔려’(katanuvssw/카타뉫소)katav/카타/-에 대하여)nuvssw/뉫소/찌르다)에서 유래했으며, ‘마음에 예리한 고통을 주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데 잘못알고 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는 색깔론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소위 보수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 쓴 소리를 하면 무조건 좌파/빨갱이라고 예단해버립니다. 일부 언론들이 조장하고 보수라고 하는 사람들이 몰고 갑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우리나라는 절반이상이 좌파입니다. 보수라고 하면서 보수 아닌 사람들은 절반도 안 됩니다. 아주 적은 숫자에 불과합니다. 대단히 잘못된 예입니다. 좌파를 알고나 하는 소리인지 모릅니다. 보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나 알고 자신들을 보수라고 하는지 모릅니다. 나라가 이렇게 될 때 힘이 극히 감소됩니다.

창세기50:15에서 21을 보면 요셉의 형들이 야곱이 죽은 뒤에, 요셉에게 부탁하는 말입니다. “16…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찌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만난 뒤에 야곱의 그늘 밑에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셉은 이미 형들의 죄를 용서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죽은 뒤에 후환을 생각했습니다. 죄책감이란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도둑 제 발 저린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려면 죄책감도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 외에 ‘당신 죄인이지?’라고 묻는다면 그 말에 대한 긍정은 아주 희소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주지 않아도, 능히 자신들이 그 죄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신 죄책감은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전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많은 죄책감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과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 죄책감이 없어집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없다고 인정해주십니다. ‘하나님, 저 죄인입니까? 아니’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으로 인해서 죄가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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