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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나교회를 격려하시는 주님

요한계시록2:8-11 

 

개인의 유익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자기와 자신의 가족의 안녕만을 위해서 삽니다. 그래서 자신과 자신들의 가족을 위한다면 역사와 민족 앞에서 비굴한 삶을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굴욕의 시대에 자신들만 살겠다고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를 총독부에 팔다시피 했습니다. 교회의 헌금으로 일본에 비행기를 헌납했습니다. 그리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목사들을 회유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빼앗았습니다. 자신들은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와 자신의 가족들을 뛰어넘어 교회와 국가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자들이 일본에 협력하느라고 정신이 없을 때, 이들은 만주벌판에서, 백두산에서, 지리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어떻게 해서든지 일본인들을 몰아내고자 했습니다. 이런 분들이 있어서 그래도 우리나라가 희망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당시에도 이런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유익만 생각하는 사람들과 공동의 유익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8절에서 9절을 보면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주님은 사도요한에게 서머나 교회에게 편지를 쓰라고 했습니다. 

 

I.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주님(8-9절)

 

Smuvrna/Smyrna는 ‘몰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머나 市는 인도와 페르시아에서 로마로 가는 통상로였습니다. 서머나는 과학이 발전했던 도시였습니다. 서머나에는 의학학교가 있었습니다. 멋지고 웅장한 건축물이 있었습니다. 2000년 전에 넓은 포장도로로 유명했습니다. 서머나에는 술의 신(酒神) 박카스(Bacchus)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시인 호머(Homer)의 출생지가 바로 서머나였다고 합니다. 서머나는 에베소와 같은 항구도시로서 경쟁하다가 결국에는 에베소를 누르고 아시아 제일의 항구도시였습니다.

 

서머나는 우상숭배가 극심한 지역이었습니다. 서머나 사람들은 소아시아 도시 중 최고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로마제국은 황제숭배를 위한 신전건축 후보지 12곳을 놓고서 박빙의 경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서머나 市는 신전건축을 유치했습니다. 소아시아 제1도시라는 호칭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서머나 市는 항상 처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서머나는 에베소, 버가모 등과 항상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그 결과 황제의 흉상이 있는 화폐를 주조하는 특권을 부여받았던 극성스런 도시였습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을 괴롭히는 유대 배교자들이 서머나에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서머나에 있는 성도들을 무척이나 괴롭혔습니다.

 

이러므로 서머나 교회는 안 좋은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심한 환난 속에 있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또한 견딜 수 없는 궁핍 속에 있었습니다. 서머나의 성도들은 로마제국의 시민으로서 황제숭배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심한 제재를 받아야 했습니다. ‘너희들 때문에 우리들이 피해를 본다.’ ‘서머나 사람이라면 황제를 모두 섬겨야 하는데 너희들은 왜 그러냐?’하면서 모든 혜택을 끊어버렸습니다. 성도들은 모든 일자리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서머나의 성도들은 카드에 ‘요주의 인물들’이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굶주려야 했습니다. 심한 환난과 압박과 빈곤과 굶주림, 투옥, 화형, 사나운 짐승의 위험이 언제 올지 몰랐습니다. 이러므로 여간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꺼려했습니다.

 

거기에 유대인의 탈을 쓴 자들이 성도들을 항상 훼방했습니다. 이름만 유대인이지, 실상은 사단의 자식들인 이들은 성도들에게 늘 적개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법정에다 성도들을 열심히 고발했습니다. 그래서 언제 죽을지, 언제 고발당할지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듯 했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당하며 성도들이 매일 위험 속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환난과 궁핍의 끝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볼 때 안개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주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알고 있다(ei[dw)고 했습니다. 네가 황제숭배를 거부한 것을 안다. 네가 그것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난 것을 안다. 다른 사람들은 진수성찬의 밥을 먹는데, 너희는 매일 끼니를 걱정하고 있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 유대인들의 고소고발도 알고, 로마의 행정관이 너희를 압박하는 것도 알고 있다. 너희가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사람들은 서머나 교회를 별로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작고 가난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성도로서 여러 어려운 일들을 만납니다.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처럼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힘든 일들을 견디고 만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울 때는옆에서 누가 알아주기만 해도 힘이 납니다. 따끈한 위로의 말 한마디가 힘을 내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다 알고 있다.” 우리의 형편을 주님께서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민들이 무엇입니까? 힘들지 않게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아니 ‘다른 사람들처럼만 살게 해주십시요’입니다. ‘더도 덜도 말고 다른 사람들처럼만 같게 해주십시오.’가 우리들의 소원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내가 다 알고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주님께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우리의 형편을 아신다면 좀 도와주십시오. 지금 죽을 지경입니다.’ ‘지금 안 도와주고 언제 도우시려 하십니까?’

 

1절을 보면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붙잡고’의 “kratw'n/크라톤”은 “kravto"/크라토스/권능”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어떤 것을 지배하는 힘이 ‘붙잡고’입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시는 분이 붙잡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들을 붙잡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모든 상황을 정확히 아시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켜주시고, 인도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처럼 유명한 사람들만 붙잡으시는 것이 아니라, 작고 낮은 우리들을 꼭 붙잡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권능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잡고 있는 한 누구도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의 주님께서 우리를 몰라주신다면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아신다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신 주님께 모든 고통과 어려움들을 모두 맡겨버립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을 모두 주님의 수레에 옮겨 실읍시다.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주님께 우리의 수고의 짐들을 모두 맡겨버립시다. 가정문제도 맡기고, 사업문제도, 맡기며, 자녀들 문제도 모두 주님께 맡기십시다. 한 사람도 주님께 맡기지 않은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오늘 두 번째로 아시는 주님께서

 

II. 우리에게 두려워말라고 하신 주님(10-11절)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성도들 모두 100%가 편안하고, 교회에 사람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목회자의 꿈이기도 하고, 성도들의 바램이기도 합니다. 에베소교회와 서머나 교회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머나교회에서의 문제는 에베소교회에서는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굶는다, 환난을 당한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는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재정적인 문제가 원활했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재정적인 문제가 대두가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후 107년에 순교한 ‘이그나티우스’라는 교부가 있습니다. ‘이그나티우스’가 에베소에 보낸 편지에 의하면 선행과 화목한 사랑을 가진 사랑의 사람, Oneimus 목사아래에서 훌륭한 지도를 받은 에베소 교회는 ‘정말 행복한 교회’(deservedly happy church)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그런 여력이 없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작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외부적인 압박에 서머나 교회는 많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싶어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성도들이 앞으로도 계속 우리교회에서 지켜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대체적으로 교회가 편안해지면 목회자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시합니다. 교회에 어려움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려고 합니다. 본질이 아닌 것에 신경을 씁니다. 교회가 편안해지고 어려움이 없어지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보다 행사나 하고 사업에 뛰어들려고 합니다. 노인사업, 어린이 사업, 교도소사업 등입니다. 이러한 사업들이 순수하고 복음의 진보를 위한다면 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의 돈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들은 이러한 것들을 경계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부탁하신 것을 발목을 잡는다는 것입니다. 시작은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했는데, 끝이 항상 돈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정말 신앙상 어려움이 오면 하루아침에 무너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앙생활이 제일 좋은가는 성경을 사랑하는 신앙이 제일 좋은 신앙입니다. 이것을 배제하면 위기의 때에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왜 일본의 침략시대에 교회가 부흥했습니까? 왜 초대교회가 부흥했습니까? 왜 종교개혁시대에 교회가 부흥했습니까? 대적들이 성경을 믿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로부터 일차적으로 빼앗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만 없으면 넘어지는 것은 하루아침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 곧 말씀의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은 넘어지려고 하다가 곧 일어서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모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줄입니다. 말씀을 믿고 기도하고, 또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말씀으로 위안을 받고 응답을 받으면서 뜨겁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때 이상한 면이 많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서머나 교회에게 즉시 은혜를 베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가 무한하고, 영원하며, 불변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하고 영원하며, 불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너희들에게 곧 고난이 온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너희 중 몇 사람을 시험하려고 감옥에 넣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너희가 10일간 환난을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givnou pisto;"

a[cri qanavtou/기누 피스토스 악슬리 싸나투 ’하셨습니다. 직역하면 ‘네가 죽기까지 믿어라’입니다. 우리말로는 ‘충성’과 ‘믿음’이 뉘앙스가 다릅니다. 그러나 헬라어는 같은 말입니다. 즉 네가 죽기까지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에 굳게 서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 대가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서머나의 행정관들은 로마황제에게 잘 보이려고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황제를 위한 신전도 유치했습니다. 아시아 제일의 관광명소로 만들었습니다. 마치 그와 같이 너희 서머나 교회는 죽기까지 믿으라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환난과 고난을 한정해 놓으셨습니다.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계속 고난과 환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십일 동안’입니다. ‘열흘’이란 정확하게 10일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 이상의 기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열흘이라는 것은 제한된 짧은 기간입니다.환난이 짧은 기간만 있다는 것은 성도들에게 인내할 용기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54:8을 보면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도여러분! 자비로운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오래도록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오랜 날을 환난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역경때문에 조금이라도 낙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고통은 항상 순간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나놓고 보면 고난이 가벼운 것을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영원하고 긴 편에 비해서 고난은 순간적이라는 것입니다. 열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영원한 복에 비하면 아부 짧은 것입니다.

 

주후 80년에 태어나 165년 경에 순교한 폴리갑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사도들과 후 사도시대를 연결해주는 교량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시도요한의 가르침을 후대에 전달했던 교부입니다. 그는 선생인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을 보존하였습니다. 이그나티우스가 로마로 순교행을 떠났을 때 20대였습니다. 그때 서머나의 감독이었습니다. 자신도 언제인가는 반드시 순교할 줄로 믿고 신앙을 항상 바르게 했습니다.

폴리갑은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때에 로마군에 체포되었습니다. 로마군은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된다고 본보기를 보이고자 일부러 먼 길로 폴리갑을 끌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구경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형장에서도 온갖 유혹을 다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총독은 황제에게 맹세하시오, 그러면 풀어 주겠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은 86년간 한 번도 나를 부인한 적이 없는데 당신은 나더러 무어라고 하는거요? 하면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서머나 교회에게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 그대로 그는 순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형편을 내가 모두 안다. 너의 고통도 알고, 네가 받는 환난도 알며, 네가 어떤 형편에 처해져 있는지 안다. 그러나 그 기간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를 계속 믿고 충성하기 바란다. 그러면 네가 결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꼭 믿음을 지켜 세상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서머나 교회처럼 환난과 고통이 적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두려운 것은 죄를 지을 확률이 높은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머나에서 활동했던 마귀가 이 시대에 우리를 무차별공격을 감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타락해 가는데도 목숨을 걸고서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은 목숨과 바꾸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빼앗기면 우리들의 모든 것을 뺏기는 것입니다. 끝까지 주님께로부터 온 진리, 그 말씀을 지키고 끝까지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And

박해에도 불구하고/폴리갑(사도행전21:7-14)

서머나교회의 감독이었던 Polycarp/Poluvkarpo"은 사도요한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Ignatius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Polycarp은 Ignatius가 로마로 압송되는 107년경에 이미 서머나교회 감독이었습니다. Polycarp과 Ignatius는 매우 긴밀한 관계였습니다. Polycarp은 사도요한의 제자로 Irēnaeus와 Tertulliān이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Polycarp은 영지주의에 대항해 싸웠습니다. 137년에는 이단 Mārkion과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Polycarp은 Mārkion이 소아시아 지방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Mārkion은 137년경에 Hierapolis의 감독 Pāpiās와 Polycarp의 인정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둘다 Mārkion을 배척했으며, Polycarp은 Mārkion을 사탄의 장자라 했습니다. Polycarp은 155년경 로마를 방문하여 로마교회의 감독 Anīcētos와 부활절의 시기문제로 논쟁을 벌렸습니다. Polycarp이 로마를 방문한 것은 로마의 교인들 가운데 소아시아 출신의 교인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Polycarp과 Anīcētos 사이의 부활절논쟁은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로 아무 결론도 없이 끝냈습니다.

Polycarp은 80년에 태어나 165년경에 순교할 때까지 86년동안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사도들과 후 사도시대를 연결하는 교량역할을 했습니다. Polycarp은 사도요한의 가르침을 후대에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Ignatius의 서신들을 모으고 보존하였습니다. Ignatius의 순교는 Polycarp에게 큰 도전과 용기였습니다. 죽음 앞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그날이 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초연하고 담담한 Ignatius의 신앙에 도전을 받은 Polycarp은 자신도 언젠가는 순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Polycarp은 Marcus Aurelius 때인 165년 경에 순교하였습니다. Polycarp의 순교에 대한 서머나인들의 편지에 의하면 “내가 86년동안 그 분의 종으로 살아왔지만 그분은 결코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마지막 회유를 단호히 거절하고 순교를 딩했습니다.

Polycarp의 순교는 유명합니다. Polycarp이 발걸음을 옮기자 총독은 Polycarp인지 물었습니다. Polycarp이 그렇다고 하자 총독은 고소를 거부하라고 재촉했습니다. 총독의 회유의 말입니다. ‘황제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태도를 바꾸라. 그리고 무신론자들을 없애 버리라. 이야기하라’고 덧붙이면서 총독은 ‘너의 나이를 생각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Polycarp은 운동장에 모인 군중을 쳐다보면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나는 너희들의 신을 믿지 않으니,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 층독은 강요했습니다. ‘맹세하라. 그러면 너를 자유롭게 해주겠다. 그리스도를 저주하라. ’ Polycarp은 ‘86년 동안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었다. 그는 나를 나쁘게 대한 적이 전혀 없다. 나를 구원해 준 나의 왕을 내가 어떻게 욕할 수 있겠는가?’ 총독은 ‘나는 사나운 맹수들을 가지고 있다. 만일 네가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너를 그 맹수에게 던질 것이다’고 했습니다.

Polycarp은 ‘맹수들을 불러라.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면 태도를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잔인함에서 정의로 바꾸는 것운 훌륭한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총독이 ‘네가 맹수들을 얕잡아 보고, 또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화형에 처하겠다’라고 했습니다. Polycarp은 ‘당신이 위협하는 그 불은 잠시 타다가 곧 꺼진다. 당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불이 있다. 즉 장차 임할 정의의 불과 영원한 형벌의 불 그리고 불신자들을 위해 예비된 불이 그것이다. 왜 당신은 주저하는가? 당신이 원하는대로 행하라’ 그리고 곧 이어 화형에 처했습니다.

And

박해에도 불구하고/요한 후스(사도행전21:7-14)  

역사는 항상 정의와 싸워왔습니다. 역사는 정의와의 싸움입니다. 그런데도 정의는 실제로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만일에 정의대로 사람들이 산다면 국가와 사회가 이렇게까지 추락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같은 법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10년징역형을 받고 교도소에 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보다 더한 범법을 저지르고도 법무장관을 하며, 대법원장을 하고, 대법관을 하겠다고 하는 모습을 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정의가 죽고, 불의가 살면 역사는 후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의를 지켜야 합니다.

요한 후스(John Hus/1374-1415)는 체코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위클리프는 영국에서 왈도파는 프랑스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Hus는 1401년 사제로 임명되었습니다. 프라하의 찰스 대학에서 가르치고, 찰스대학 가까이에 있는 베들레헴 예배당에서 설교했습니다. Hus는 저술과 설교에서 삶의 개인적 경건과 순결을 강조했습니다. Hus가 이렇게 한 이유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Hus는 교회내의 권위로서 교황이 아니라 성경을 강조하였습니다. 설교를 교회 예배에서 중요한 위치로 끌어올렸습니다. Hus의 주저 교회론(On the Church)에서 그리스도를 유일한 머리로 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정의하였습니다. 그는 성직자의 전통적 권위를 옹호하였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죄 사함을 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Hus는 어떤 교황이나 추기경도 성경에 어긋나는 교리를 만들 수 없으며, 어떤 그리스도인도 잘못된 자들의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성직자의 부패를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하였고 사람들이 彫像(조상)을 예배하고 거짓된 기적을 믿으며 “미신적 순례 여행”을 하는 것을 비평했습니다. Hus는 성찬식에서 잔을 평신도에게 허락하지 않는 교회를 비판하였습니다.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였습니다.

이에 프라그의 대주교는 Hus의 입장을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위클리프의 저서도 그는 배격했습니다. 프라그의 대주교는 이들의 책들을 스스로 모아다가 같이 참석한 사제들이 부르는 Te Deum(하나님이여 당신을 찬양하나이다)의 찬송가가 울려 퍼질 때 자신의 마당에서 책들을 불에 태웠습니다. 미친 개 같은 짓을 한 것입니다.

사실 중세시대의 Roman-Catholic은 교회가 아니고 교회를 빙자한 거대한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을 건드리는 것은 곧 죽음이었습니다. Hus는 프라하에서 오랜 악전고투 가운데 있었습니다. Roman-Catholic이 Hus를 가만둘 리 없었습니다. 곧 그의 문제는 로마에 회부되었습니다. 1415년에 후스는 그의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콘스탄스 공의회(Council of Constance)에 참석하였습니다. Hus는 황제의 안전 통행증을 가지고 여행하였습니다. 그러나 Hus는 그의 견해를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 불법재판을 받고 화형선고를 받았습니다. Hus가 말하려고 하면 사방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Hus의 말이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방적인 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체코인의 민족감정이 일어났습니다. 체코인은 합스부르크(Hapsburg)家가 1620년 정복하여 Roman-Catholic교회를 회복할 때까지 보헤미아에 Hus파 교회를 세웠습니다. Hus의 개혁은 독일의 지배에 대한 체고인의 저항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Hus주의자들이 그들의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다볼파(Taborites)라고 불리다가 보헤미아 형제단, 모리비안 형제단(the Moravian Brethren)으로 알려졌습니다. Hus는 순교를 당했지만, 그의 사상과 신앙은 오늘의 바른 교회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순교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출처: 기독교회사,중세교회사,교회사핸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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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에도 불구하고/위클리프(사도행전21:7-14) 

개혁교회라 했을 때 성도들은 ‘개혁’이란 말을 자꾸 무엇을 고쳐나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개혁’이란 말은 다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꾸 고쳐나간다 해서 성경적으로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초대교회를 모범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해야 한다는 말은 초대교회로 회귀하자는 말입니다. 초대교회는 잔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고 확장을 했습니다. 문제는 313년의 밀라노칙령입니다. 분명히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를 박해로부터 구해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교회가 초대교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대형교회여야 했고, 황제가 다니는 교회의 규모는 당연히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儀式이 말씀보다 앞섰고, 행위가 신앙보다 앞서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꾸 초대교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6세기부터 17세기 약 1000년간 교회는 그 방향을 잃었습니다. 이것을 개혁하고자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John Wycliffe는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옥스퍼드에 있다가 1361년에 밸리얼 대학(Balliol College)의 학장이 되어 이 대학에서 신학박사를 취득했습니다. Wycliffe는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썼습니다. 당시 영국도 교황권의 지역이라 교황에게 세금을 바칠 때였습니다. 영국의 왕들과 영국의 지성인들은 영국이 굳이 Roma-catholic에 세금을 바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Wycliffe는 1366년 왕이 교황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거부한 사건과 관련하여 에드워드 3세의 눈에 띄었습니다. Wycliffe는 교황에게 세금을 바치기를 거부하는 작은 논문을 썼던 것입니다. Wycliffe는 교황이 영국 국왕에게 영국교회의 돈을 모아서 로마로 보내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황은 영국이 오랫동안 매년 1000 마르크에 상당한 세금을 바치지 않고 있었으므로 영국에게 매우 못마땅해있었습니다. 이 돈은 죤 왕이 교황 인노센트 3세에게 매년 로마에 바치기로 약정했던 금액입니다. 이에 교황 우르반 5세가 그동안 밀렸던 세금을 받으려고 하자, 1360년에 에드워드3세는 의회를 소집하였는데, 의회는 세금을 거부했습니다. 1374년에 왕실 성직자로 임명받은 Wycliffe는 왕을 대표하여 교황의 사절들과 만났을 때 왕의 신임을 더욱 얻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성직자들과 탁발 수도승들이 위클리프를 미워했습니다. Wycliffe는 수도승들의 나태와 시주 행위 그리고 종교적 진리를 왜곡하는 사실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기 때문입니다. Wycliffe는 우상(또는 형상)과 유품들을 숭배하는 것을 어리석은 짓으로 비판하였습니다. 면죄부 판매, 죽은 자를 위한 미사, 행진(行列聖歌)과 순례 등을 부정하였습니다. Wycliffe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하고 “가장 저주받은 도둑이요 사기꾼이며 교만한 로마의 사제”라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영국교회의 주교들은 1377년에 런던에서 열린 성 바울교회의 성직자회의에 참석하도록 Wycliffe를 소환하였습니다. Wycliffe는 그 회의에 참석하여 혹독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교황은 바로 Wycliffe에 대하여 다섯 가지의 교서를 발표하여 그의 저술에서 19가지 혐의를 걸어 정죄하였습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Wycliffe는 화체설을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국에서 극렬한 반발을 샀습니다. 왕도 Wycliffe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습니다. 여러 학장과 동료들마저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Wycliffe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1381년에 농민반란(the Peasant’s Revolt)이 일어났습니다. 이것 때문에 Wycliffe는 더욱 곤경에 처하였습니다. Wycliffe는 책임이 없었지만 그와 그의 동료들이 그 사건과 관련하여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를 보호하고 있던 공작 곤트의 죤이 Wycliffe에게 개혁운동을 포기하라고 충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계속 공표하였습니다.

항상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연합하여 숫자로 진리를 왜곡하곤 했습니다.

의회는 켄터베리 대주교에게 교회회의를 소집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켄터베리 대주교는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지진회의’(Earthquake Council)로 불리었습니다. 회의기간에 지진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Wycliffe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심으로 그들을 돕는 증거로 여겼습니다. 그럼에도 Wycliffe의 가르침은 정죄를 받았습니다. 위클리프는 교황의 소환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로마로 가지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서로 상대방을 향하여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두 사람의 교황이 권좌에 있었습니다. Wycliffe의 추종자들과 동료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Wycliffe는 박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1384년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Wycliffe는 전도단을 조직하여 일반 백성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백성들의 무지와 영적인 맹목성을 불쌍히 여겨 그는 이러한 전도자들을 통하여 복음의 진리를 전달해 주려고 했습니다. 전도자들은 붉은 갈색의 길다란 가운을 입고 전도여행을 다녔습니다. 그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Wycliffe의 가장 큰 업적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어서 그 진리를 배울 수 있도록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때까지 Roma-catholic은 Vulgate역이라고 불리는 라틴어 성경만을 사용하였는데 이렇게 한 이유는 일반 백성들이 읽을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Wycliffe는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몰랐습니다. Latin語를 번역을 해야 했기에 정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큰 복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성경을 일일이 손으로 필사할 때였습니다. 가난한 전도자들은 번역 성경의 일부를 휴대하고 다니면서 도시나 촌락에 사는 남녀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Wycliffe는 최초로 성경전체를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로 많이 나옵니다. 영국의 의회와 교회는 위클리프와 그의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몰았습니다. 그리고 화형 시켜야 한다는 법을 1401년에 통과시켰습니다. 1417년에 존 올드캐슬(John Oldcastle)경이 고초를 겪었습니다. 성직자회의에서는 위클리프의 성경번역을 정죄하였습니다. Roma-catholic은 존 위클리프를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 후에 콘스탄스 회의(The Council of Constance/1415)를 열어 위클리프의 무덤을 파헤쳤습니다. 1428년에 링컨의 주교는 위클리프의 유해를 태웠습니다. 그리고 그 재를 스위프트 강에 뿌렸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순교자들의 피에 빚진 자들입니다. 스데반을 비롯해서 최근에 일어한 순교자들의 피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출처: 교회사핸드북,중세교회사,기독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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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의 피(사도행전8:4)

주로 열대지방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열매를 맺은 나무들의 열매를 주로 새나 원숭이, 그리고 박쥐 등이 먹습니다. 이때 씨가 땅이나 강에 떨어집니다. 씨가 흘러가기도 하고, 땅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강에 흘러간 씨 중에 강가에 걸린 씨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싹이 돋습니다. 적당한 수분과 온도가 씨를 발아하게 하고, 돋아난 싹은 이내 자라게 됩니다. 열대우림은 누가 심지도 않았는데 이런 현상들로 인해서 많은 숲들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씨가 저절로 떨어지기도 하지만, 다른 동물들에 의해서 강제로 옮겨져 번성한 것입니다.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스데반의 피를 맛본 산헤드린은 가관이었습니다. 박해의 수위를 점차 올리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피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이로 인해서 교회가 흩어졌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교회가 흩어졌습니다. 흩어졌다기보다 원어적인 뜻은 ‘diasparevnte"’흩뿌림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열대지방의 열매들처럼 發芽(발아)할 복음을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터툴리안’의 변증서에 나오는 문장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Plūrēs efficimur, quotiēns metimur ā vōbīs, Sēmen est sanguis Christiānōrum.

우리가 너희에게 殺戮(살육)을 당하면 당할수록, 우리의 수는 늘어간다. 크리스챤들의 피는 씨앗이다.

그리스도인들을 죽여서 교회를 없애겠다고 하면, 큰 오산입니다.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순교를 당한 성도들은 수 천만 명이 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 성도들이 없을 줄 알았는데, 죽이면 죽일수록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양산되더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의 순교자의 피, 중세시대의 카톨릭의 호된 박해에 의한 순교자의 피, 근세현대사에서의 순교자들의 피 값으로 오늘 우리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일제침탈 때 많은 우리나라의 성도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그 피 값들이 오늘 복음의 꽃을 피운 것입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쌔

성도들은 모두 복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성도들을 박해했습니다. 성도들은 이곳저곳으로 흩어졌습니다. 사마리아로 튀었고, 유대로 튀었으며, 이방 땅으로까지 튀었습니다. 예수님의 땅 끝까지의 복음전파라는 것은 순한 전도가 아니었습니다. 심한 박해였습니다. 피바람과 칼바람의 박해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은 전해졌습니다. 어떻게 교회는 이런 상황에서 왕성하게 복음을 전했습니까? 성령님의 은혜였습니다. 교회 내에서 교회 밖에서 성령은 교회를 꾸준히 지원하셨습니다. 복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지원하셨습니다. 복음을 받을 사람을 지원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교회와 함께 하셨습니다. 스데반과 함께 하셨고, 사도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루살렘교회와 함께 했고, 사마리아와 함께 하셨으며, 이방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성령은 성도들과 늘 같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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