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477)
교회소개 (1)
교회약도 (1)
후원계좌 (1)
대요리문답1 (2)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4)
소요리문답 (1)
좋은글들모음 (49)
설교자료 (10)
연관 블로그 (2)
성경의 공인 (1)
홍수까지의 연표 (1)
이스라엘 분열사 (1)
10대 박해 (1)
성경숫자의 상징 (1)
-------------------- (0)
창세기새벽강해 (142)
출애굽기 새벽강해 (262)
마태복음 새벽강해 (267)
사도행전 새벽강해 (366)
로마서새벽기도 (216)
빌립보서 (0)
- 에베소교회 (1)
- 서머나교회 (1)
- 버가모교회 (1)
- 두아디라교회 (1)
- 사데교회 (0)
- 빌라델비아교회 (0)
- 라오디게아교회 (1)
성경 개관 (0)
- 에스라, 느헤미야 (1)
- 학개 개관 (1)
- 스가랴 개관 (1)
- 사도행전 (1)
- 고린도전서 (2)
- 고린도후서 (2)
- 빌레몬서 (1)
- 야고보서 (1)
기도 (1)
성경 각 권의 주제 (1)
예배순서 (4)
예화 (2)
찬양 (1)
- 온전히 (1)
- 창세기 (4)
- 출애굽기 (1)
- 레위기 (2)
- 민수기 (1)
- 신명기 (1)
- 여호수아 (1)
- 사사기 (1)
- 룻기 (1)
- 사무엘상 (1)
- 사무엘하 (1)
- 열왕기상 (1)
- 열왕기하 (1)
- 역대상 (1)
- 역대하 (1)
- 에스라 (1)
- 느헤미야 (2)
- 에스더 (1)
- 욥기 (3)
- 시편 (1)
- 잠언 (1)
- 전도서 (1)
- 아가 (1)
- 이사야 (2)
- 예레미야 (1)
- 예레미야애가 (1)
에스겔 (1)
- 다니엘 (1)
- 호세아 (1)
- 요엘 (1)
- 아모스 (1)
- 오바댜 (1)
- 요나 (1)
- 미가 (1)
- 나훔 (1)
- 하박국 (3)
- 스바냐 (1)
- 학개 (2)
- 스가랴 (1)
- 말라기 (1)
- 마태복음 (3)
- 마가복음 (7)
- 누가복음 (1)
- 요한복음 (3)
- 사도행전2 (2)
- 로마서 (1)
고린도전서 (0)
고린도후서 (0)
- 갈라디아서 (1)
에베소서 (0)
빌립보서2 (0)
골로새서 (0)
데살로니가전서 (0)
데살로니가후서 (0)
디모데전서 (1)
디모데후서 (0)
디도서 (0)
빌레몬서 (0)
히브리서 (0)
야고보서 (0)
베드로전서 (0)
베드로후서 (0)
요한일서 (0)
- 요한이서 (1)
- 요한삼서 (1)
- 유다서 (1)
- 요한계시록 (1)
붓글씨 (9)
수채화 (1)
공지사항 (0)
- 게시판 (29)
철학.인문학 (8)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ARCHIVE

LINK



  1. 2020.01.18
    예수님의 명령
  2. 2018.07.07
    열 두 사도였던 가룟 유다
  3. 2018.07.01
    열 두 사도/맛디아
  4. 2018.06.16
    열 두 사도/도마
  5. 2018.06.08
    열 두 사도/다대오
  6. 2018.05.19
    열 두 사도/빌립 2
  7. 2018.05.14
    열 두 사도/베드로
  8. 2018.05.02
    열 두 사도/사도 요한

예수님의 명령

사도행전1:1-5 

 

어느 나라든지 국민들이 투표를 해서 국정수반에 당선되면, 국민들이 믿을 수 있는 국정철학을 발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임이 했던 일들이 옳으면, 그것을 반드시 계승해야 합니다. 만일에 옳은데도 계승하지 않고, 무조건 헐고, 새롭게 세운다면 국가가 이상하게 되어 국민들이 힘들게 됩니다. 지난 정권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국정전반에 걸쳐서 수정을 할 시에 국민들은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나라가 발전한다든지,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에는 지속적으로 좋은 정책이 필요한 것입니다. 별로 알지도 못하면서 국민들의 가는 길을 막아설 때, 그 정책은 대단히 나쁜 정책입니다. 우리나라의 혹자들은 정권만 잡으면 무조건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위한 대화도 막아버리고, 국민 중 일부, 그것도 그러한 사람들은 국가에 대한 철학도 없습니다. 따라서 국정철학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정권을 잡을 때 국민들이 엄청 고통을 당했습니다. 4대강공사라든지, 해외개발 사업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실익은 전혀 없으면서 마치 거대한 이익이 있는 것처럼, 과대포장을 했기 때문에 국가에 치명상을 입었음을 우리들이 아주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의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은 자신의 철학과 사명을 그의 제자들에게 맡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로 보고나서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복음이 전 세계에 퍼지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다시 하나님의 나라에 올라가셔야 했습니다. 누가는 그의 친구 데오빌로에게 그간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1절에서 3절을 보면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누가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둘 다 데오빌로에게는 사람에게 써 보냈습니다(1:3,1:1). 과연 데오빌로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3에서 누가는 그를 데오빌로 각하”/Qeovfilo" kravtisto"라고 불렀습니다. 각하란 말을 쓰는 것을 보아 데오빌로는 로마정부의 한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총독을 각하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를 심히 박해했던 로마정부의 고관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그런 사람에게 목적을 가지고 편지를 쓴 것입니다. 누가는 기독교를 로마정부에 천거하고자 했습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여러 차례 반복하여 로마의 지방장관들이 바울에게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 주었는지를 보여 주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13:12에서는 구브로의 총독 서기오 바울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18:12에서 아가야 총독인 갈리오가 고린도 사건 때 철두철미하게 공평했던 것을 기록했습니다. 16:35절에서 빌립보의 관헌들이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은 후 바울에게 공개사과를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19:31절을 보면 에베소의 관현들이 바울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쓰기 전까지는 로마관헌들이 친하고 기독교에 대해 공정하고 공평한 태도를 취한 것을 여러 번 보여 주었습니다. 더 나아가 누가는 기독교인들은 신령하고 충성스러운 국민이며 항상 그렇게 인정되어 왔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노력했습니다, 18:14절에서 총독 갈리오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부정하거나 괴악한 일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19:37절에서 에베소의 서기장이 기독교인들에게 유리한 중언을 합니다. 23:29절에서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바울에게 불리한 말을 하지 않으려고 매우 조심합니다. 25:25절에서 베스도는 바울이 죽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고 진술했으며, 베스도와 아그립바는 같은 장소에서 만약 바울이 황제에게 호소하지만 않았다면 석방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는 이 글을 기독교인들이 증오와 박해를 받을 때 썼으므로 로마 관헌들이 기독교에 대해 항상 공평하게 대했으며, 기독교인들을 악한 사람들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으로 글을 썼습니다. 이토록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바칠 수 있던 가장 고귀한 것인 예수님의 이야기라고 써서 헌정한 것입니다.

 

I.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1-3)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단어적인 차이로는 의 차이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ejn tw'/ aijw'ni touvtw//en tô aiȏni toûto)은 우리가 살아 있을 때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저 세상 즉 오는 세상(ejn tw'/ mevllonti/en tô mêllonti)은 우리가 이 세상의 판단으로 죽었을 때의 세상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세상저 세상을 경험합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갑니다. 한번 저 세상으로 가면 다시는 이 세상으로 오지 못합니다.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는 절대로 올 수 없습니다. 저 세상에 영원히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 세상은 영원합니다. 이 세상은 불과 100년 안팎입니다. 그러나 저 세상은 영원합니다. 이 세상은 사람들의 육안으로 보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저 세상은 사람들의 육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세상은 우리들의 육안으로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 세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매우 소홀하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 세상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직 이 세상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을 때는 모두 같이 있습니다. 가족과 같이 있고, 친지들과 같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 세상에 갈 때는 나누어져서 가게 됩니다. 그때는 내 마음대로 가지 못합니다. 선택사항(option)이 아닙니다. 죽기 전에 천국에 갈래?” “지옥에 갈래?”라고 묻지 않습니다. 각각 분리되어서 automatic으로 갑니다. 저 세상에서 분리되는 기준은 사람들이 웃었겠지만,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영접했느냐, 안했느냐입니다. 그 외의 다른 어떤 기준은 없습니다. 선한 행동, 윤리적인 행동은 아예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 도덕적인 행위이지 저 세상에서는 전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 저 세상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실(fact) 구약시대만 해도 오는 세상은 미래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이 세상에 들어오심으로 해서 이 세상저 세상은 긴장관계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저 세상이 공존하는 세대로 변했습니다. 어떻게 공존하는 세대로 만들었습니까?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헌정(presentation) 했다고 했습니다.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누가가 먼저 쓴 글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1:1-4절을 보면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써서 헌정한 복음이 누가복음인데 그 안에는 예수님의 행하심, 예수님의 가르치심, 사도들을 택하시고 명하신 일, 그리고 승천하신 날까지를 기록했습니다. 즉 누가복음 안에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일부터 다시 가신 일까지가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까지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저 세상의 약속을 가져다주는 세상인데, 곧 예수그리스도의 행하심가르치심에서 출발합니다.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저 세상에서의 삶을 약속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사람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지금 당장 미국을 우리에게 준다 해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한다면 물려야 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 사면령을 내리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들은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화목하게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성취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 있는 우리들이 저 세상의 능력을 체험하고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저 세상이 세상서 확실하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했다는 것은 우리나라 전체를 선물 받은 것보다 더 기뻐해야 할 사건이며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에 대해서 늘 감사하며,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두 번째로 3절에서 5절을 보면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누가는 조용하지만 새롭게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데오빌로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II. 구원을 위해 제자들이 할 일(3-5)

 

프랑스사람들은 영어를 별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는 프랑스어를 반드시 씁니다. 영국 사람들도 미국의 영어를 별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국식 발음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미국식 영어에 죽습니다. 영어에 살고, 영어에 죽습니다. 어린쥐, 어미쥐 하면서 orange의 본토발음을 하려고 굉장히 애를 씁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 영어를 모른다고 해도 흉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어를 모르면 흉입니다. 우리가 영어를 모른다고 해서 그다지 불편하지 않습니다. 미국사람이나 영어를 잘해야지, 한국 사람이 영어를 미국사람보다 잘한다고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닙니다. 서울을 서울로 발음해야 하는데 서우-’로 발음한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미국이 자국어를 왜 세계 공용어로 만들려고 합니까? 미국이 세계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식의 모든 것을 세계로 퍼뜨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강제로 자신들의 문화를 세계로 퍼뜨리려 한다고 해서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는 자발적으로 전해져야 합니다. 주전333년에 AlexanderHellas문화를 전 세계에 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죽었습니다. 주전 60년에 Caesar는 로마의 집정관이 되었습니다. 이후로 그의 정치철학을 전 Roma제국에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암살을 당했습니다. NapoleonEurope을 제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HitlerMussolini(Benito Mussolini), 일본의 도조 같은 악한 자들이 세계제패를 하려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들이 왜 실패했습니까?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하려고 한 것들은 모두 자신들의 악한 발상들이었습니다. 무력적인 발상들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한 위험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실패해야 했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패하지 않았다면, 역사적으로 세계가 위험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Hitler나 일본의 흉악무도(凶惡無道)한 자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끔찍한 일입니다. 따라서 전 세계적으로 전할 일이라면 우선 그 발상이 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력성이 있으면 안 됩니다. 공정성이 있어야 하고, 인류를 살리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계화(globalization)가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것을 전한다 해도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전해지지 않습니다. 또한 전할 사람들이 있다하더라도 전할 내용이 시원찮으면 전할 수가 없습니다. 전할 내용이 좋다하더라도 그것을 잘 전하지 못하면 역시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적인 것들이 되고 세계화가 되려면 내용도 좋아야 하고, 전하는 사람들이 좋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주신 상품(commodity)은 극상품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상품은 나라전체를 주고서라도 구해야 할 상품이었습니다. 현재 국제적인 최고의 상품은 석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상품은 그보다 더 좋은 상품이었습니다. 꼭 구해야 할 극상품입니다. 얼마나 좋은가? 저 세상에까지 소용되는 필요한 상품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품은 이 세상에서 꼭 구해야 할 상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드신 제품입니다. 누구도 이 상품을 만들지도 못하고 복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상품명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상품을 팔지 말라고 했습니다. 동행해야 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예수님께 들었던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14:26을 봅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보혜사입니다. 보혜사를 NIV성경에서는 CounselorNKJVHelper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ASV(미표준역)Darby성경은 Comforter로 번역했습니다. 영어의 보혜사(comforter)란 단어는 Wycliffe(1320 1384)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Wycliffe시대 1300년에서 1400년경에 comforter란 단어는 Latin용감하다는 fortis에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보혜사란 사람에게 용기와 힘을 불어 넣 어 주시는 분입니다. 곧 하나님이신 성령이십니다. 제자들이 가져갈 상품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만드시고 함께 하시는 상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너희들은 그가 오실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 나가라는 것입니다. ‘성령세례어떤 사람이 물에 푹 잠기듯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지배받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은혜를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의식이었습니다. 실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성령세례는 실체였습니다.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을 때에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참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세례를 받을 때에 전하는 제자들이나 전함을 받는 사람들에게 성령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왜 기다리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의 복음을 열정적(passionate)으로 전하면 되는데 왜 기다리라고 하십니까? 열정(passion)을 앞세우고 가면 되는데 왜 말리십니까? 무장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마귀는 제자들이 나오자마자 잡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마귀와 세상은 무력을 세워서 공격해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 붙잡히지 않으면 그냥 나가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성령세례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마치 마력적인 체험을 하는 양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성령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셔서 우리와 우리의 전도를 받는다든지, 우리의 사역의 대상에게 함께 하심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지, 특별한 능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받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간 의심했던 제자들에게 40일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믿도록 독려하셨습니다. 믿음을 확실히 갖도록 사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로 올라가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에 또 한분의 하나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입니다.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의 구원을 모두 마련하셨습니다. 망하지 않을 길을 모두 마련하셨습니다. 그는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교회의 지성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죄를 폐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간들이 살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물론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첫 번째 명령을 받은 제자들도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위명령은 제2, 3, 4의 제자들이 계속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 역시 그 대위명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약속하신 성령도 이미 우리는 받았습니다. 받은 그 은혜를 우리는 사장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할 일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많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과 우리 중, 우리가 주체(main body)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체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돕는 자일뿐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의 대위명령에 임해야 합니다.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내가 부흥시켜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은퇴한 신자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일광욕을 즐기듯이 교회에 나와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야성(wild)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마귀를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야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모여야 합니다. 부지런히 전해야 합니다. 이미 구원을 이루신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모여야 합니다. 부지런히 기도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가서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주님께로부터 들은 성령님과 함께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삼위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 사도행전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루살렘교회가 선택한 사람들  (0) 2023.07.30
And

열 두 사도였던 가룟 유다(사도행전28:30-31)

 

慣用語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관용이란 말은 ‘습관적으로 늘 쓰거나 오랫동안 써서 굳어진 것’을 말합니다. 話者들이 자신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기존의 단조로운 표현과는 다른 새로운 표현양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브루터스 너마저’라는 말은 믿고 신뢰했던 사람마저 배반했다는 말입니다. 즉 씨저가 죽음의 순간에서 관용과 믿음을 베풀었던 사람의 배신을 탄식하는 관용구가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하면 누구나 ‘배반자 유다’라고 할 만큼 관용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사도직이란 그야말로 쉬운 자리가 아니었고, 아무나 하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상 끝까지’의 사명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의 산헤드린보다, 세상의 그 어떤 자리보다 보배로운 자리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성경 속에서 가장 비극적이며 불가사의한 기록 중의 하나입니다. 주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사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가룟 유다와 본디오 빌라도는 영원한 악명을 얻은 야비한 사람으로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예술가들은 유다를 가장 비열한 정열을 묘사하기 위한 주제로서 이용하여 왔으며, 시인들은 그의 지독한 악덕과 음흉한 배은망덕을 제시하기 위하여 모든 상상의 공포를 자아내어서 그를 저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마10:4)를 마귀라고 지칭하셨습니다(요6:70,71). 그는 돈궤를 맡았었습니다(요12:4-6, 13:29). 예수님에게 향유 부은 마리아를 비난했습니다(요12:3-6). 가룟 유다는 마귀에게 사로잡혔습니다(요13:2). 가룟 유다는 멸망의 자식으로 일컬어졌습니다(요17:12). 예수님을 팔기로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흥정했던 자입니다(마26:14-16). 그러면서도 예수님과 함께 최후의 만찬에 참석했습니다(눅22:21).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눅22:22).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막14:44-45, 마26:47-50, 눅22:47-49, 요18:2-5, 행1:16-25). 후에 예수님을 판 것을 뉘우쳐 은 삼십을 도로 갖다 주었습니다(마27:3,4).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마27:5, 행1:18). 유다가 받은 은 삼십은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습니다(슥11:12,13, 마27:6-8). 가룟 유다대신 맛디아가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시109:8, 행1:20,26).

사기꾼들이 사람을 속여도 사기를 당한 사람은 일을 당한 뒤에 알게 됩니다. 사도들은 유다를 마지막까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유다가 배반하리라는 생각을 그의 음모가 완수될 때까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팔려가고 난후에야 그들은 유다의 파렴치한 행위를 알아차렸습니다. 유다는 가룟 출신이었습니다. 가룟(Kerioth)이란 이름이 그에게 부가된 것은 당시에 유다란 이름을 가진 同名異人이 여섯 사람이나 되었기 때문이라고 혹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에게 따라다니는 말이 있는데 ‘…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사도였습니다. 그는 돈궤를 맡은 자였습니다. 그는 영원을 위해 뛰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좋은 것들은 모두 과거가 되었고, 그에 대한 보상이 없어졌습니다. 유다의 이 계획을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끊임없이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귀 너머로 넘겨버렸습니다. 유다는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을 배반하려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주님을 은 삼십(당시 노예 값)에 팔았습니다. 그러나 그 돈도 소유하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어쩌면 가룟 유다에게 회개할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의 기회를 가룟 유다는 놓쳐버렸습니다. 그리고 my way를 외쳤습니다. 자기 갈 길을 가다가 영영 잘못된 길로 들어섰습니다.

유다를 보면서 우리들이 인식해야 할 것은 우리들도 얼마든지 유다의 심성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 반발하고 불순종하다가 다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면전에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유다도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닭이 울자 밖에 나가서 슬피 울었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절대로 자신을 용서하시리라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자비를 곧이듣지 않은 귀들은 결국 악함 속에 완전히 방치되어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바로의 강퍅함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돌이킬 기회가 많았는데 전혀 바로는 그 많은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악한 것과 악한 자들이 제 갈 길로 가버린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계속하는 경고를 듣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스스로 뿌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선택이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울의 소원  (0) 2018.11.06
다시 생각해보는 로마서  (0) 2018.08.02
열 두 사도/맛디아  (0) 2018.07.01
열 두 사도/바울  (0) 2018.06.23
열 두 사도/도마  (0) 2018.06.16
And

열 두 사도/맛디아(사도행전28:30-31)

 

사도행전1:13-26 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15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맛디아를 과연 사도라 할 수 있는가? Calvin은 그리스도께서 일찍이 제정하시고 엄명하셨던 일이 한 사람의 부정한 행위로 인하여 부서져 버리게 되지 않기 위해서 맛디아가 유다를 대신하여 선택되어야 하는 일은 옳았다고 했습니다(Calvin 1980, 56). 결원된 사도자리를 보충하는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 완수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로 여겼을 것이라는 것입니다(변종길 2007,115). 베드로는 시편 두절을 인용하는데, 시편69:25과 109:8입니다. 시편69:25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시편109:8 ‘그 년 수를 단촉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원수들이 거하는 거처가 황폐하게 해달라’는 간구와 원수가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죽어 그 원수가 맡았던 막중한 임무를 타인이 취하게 해달라는 기도인데, 이 두 구절은 유다의 계승자를 임명하는데, 한 사람의 결손으로 인하여 사도의 전체성이 무너지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석했습니다(F. F. Bruce 1986, 66). 베드로가 제시한 사도 선택계획은 유다의 죽음으로 인한 사도직의 공백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특이한 방법으로 그 일이 성경말씀의 성취였고, 맛디아도 인간의 수단에 의해서 사도가 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Matthew Henry 1981, 52-60). 그를 사도로 선택하는 사용된 구약에 그 전례가 있으며(삼상14:4), 그 근거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 사람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에 있다고 했습니다(Derrik Williams 1996, 145), 가룟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은 이유는 가룟 유다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그의 배신과 죄악 때문이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가 죽은 뒤에 다시 열둘을 채우기 위해서 사도를 뽑지는 않았다(open Bible).

Herbert Lockyer는 사도들이 유다의 계승자를 선택하는 과정에 있어서 다윗으로 하여금 사도직에 필요한 모든 자격을 갖춘 자가 배신자의 계승자로 선택되어야 한다고 예언하게 만들었던 주격(主格)은 바로 성령이었다는 점이다. 맛디아는 누가에 의해 열 두 제자 중에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문제는 그가 하나님에 의해 열두 번째 사도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베드로에 의한 의사진행의 타당성이 여러 가지 점에서 문제시된다. 비교적 소수의 신자들만이 모여서 계승자는 제비뽑기로 선택되어야 한다는 베드로의 제안을 승인하였고, 결과적으로 맛디아가 뽑혔다. 그러나 그 직책의 선출이 공정한 절차에 따랐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계승자의 임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열 한 사도에 의해 이루어진 인간적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도들은 자신이 독자적으로 선택한 자들임’을 계속 강조했던 것을 보면, 그 열 한 사도가 그들의 선택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에 의해 인도되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결여되어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Herbert Lockyer 1982, 350).

이스라엘에 있어서 12이란 참으로 매력적인 숫자입니다. 이름 못지않게 성경에서는 심오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3,7,10,12 등의 숫자는 ‘완전한 숫자’의 개념이 있습니다. 3은 하나님의 완전하심(perfection)을 상징합니다. 7은 영적인 완전성(perfection)을 의미합니다. 10은 서수적 완전성(ordinal perfection)을 의미합니다. 12는 완전한 통치(Governmental perfection)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12을 부르셨는데, 그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고 가룟 유다가 배신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12을 채우기 위해서 맛디아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생각해보는 로마서  (0) 2018.08.02
열 두 사도였던 가룟 유다  (0) 2018.07.07
열 두 사도/바울  (0) 2018.06.23
열 두 사도/도마  (0) 2018.06.16
열 두 사도/다대오  (0) 2018.06.08
And

열 두 사도/도마(사도행전28:30-31)

 

편견/偏見/prejudice이란 한쪽으로 치우친 공정하지 못한 생각이나 견해를 말합니다. 어떤 것을 보더라도 이미 선입관이 서 있어서 공정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 편견입니다. ‘저 인상 봐! 분명히 저 사람은 성격이 거칠 거야.’하고 미리 그 사람을 평가하게 됩니다. ‘저 여자 몸매와 얼굴 좀 봐. 저 여자는 분명히 착할 거야.’라고 평가합니다. 두 평가는 잘못된 평가입니다. 공정한 평가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입관을 가지고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편견의 대상이 된 사람은 아무런 이유 없이 피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피해자가 바로 도마입니다. 도마는 누명을 쓴 사도입니다. 웬만한 주석가나 설교자들은 그에 대해서 한 마디도 좋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도마는 의심하는 자, 도마는 불신앙 자, 도마는 열등한 사람, 도마는 우울한 사람, 도마는 믿음이 없었던 사도, 도마는 확인주의자 라고 도마에 대해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평가입니다.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6:25). 주님의 이 말씀에 ‘녜’하고 절대로 염려하지 않겠습니다. 말할 수 있습니까? 만일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사람일 수 없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셔도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도마는 회의주의자도 아닙니다. 물질주의적인 심성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상실한 사람은 더욱 아닙니다. 우울한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도마는 개성이 뚜렷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사람들의 한 면만 보고 잘못 평가한 것입니다.

도마는 히브리이름입니다. 아람어 !/aT;/thā’ôm/쌍동이란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따라서 Qwma'"/thomȃs란 쌍둥이란 말입니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에서 디두모는 헬라어로 역시 쌍둥이라는 뜻으로 ‘디두모’는 도마의 별명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총 여덟 군데에 도마가 나와 있습니다(마10:3, 막3:18, 눅6:15, 요11:16,14:5,20:24,26,27,28,29,요21:2, 행1:13). 공관복음에는 도마의 이름밖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도마의 면면을 약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14: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20:24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1: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사도행전1:11을 보면 도마는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도마는 제자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는지 어떤 말도 없습니다. 그의 이름은 주님께서 열 두 제자를 택하셔서 둘씩둘씩 보내실 때입니다. 누구나 그랬듯이 도마의 인생이 변화된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고서였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평범한 도마의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사자가 되었습니다. 사자는 사자로되 지존자(至尊者)의 사자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질병을 제어할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았습니다. 귀신들도 자신에게 항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은혜를 얻었습니다. 마태복음10:2-4절을 보면 열 두 사도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가룟 유다’ 이 배열은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배열입니다. 도마는 마태와 함께 묶여있습니다. 즉 마태와 도마는 공통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세리 마태입니다. 그런 자와 함께 묶여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세리는 유대사회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부류였습니다. 그들은 조국 유대를 생각하지 않았고, 오직 자신들의 안일만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 마태와 같이 묶여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주님께서 택하셨구나 하는 은혜입니다.

도마는 사도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열 두 사도 모두가 겪을지도 모르는 슬픈 일을 자기도 기꺼이 무릅쓰겠다는 뚜렷한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주님 죽을 때 같이 죽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일으키시려고 제자들더러 베다니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을 만류했습니다. 그곳의 종교지도자들이 주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설득하여 유대로 가지 못하도록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도마는 비록 죽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주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못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이 말로 인해서 도마는 온갖 못된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주님께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예수와 함께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 자신들 모두 거기서 죽을 수밖에 없 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유대로 올라갔습니다. 생명의 위협이 있을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겠다고 한 비장한 각오입니다. 물론 도마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적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베다니에 가셔서 무슨 일을 하실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러이러해서 저러저러하다’라고 브리핑을 하지 않으십니다. 가서 현장에서 보고 인식하기를 원하셨기에 웬만해선 out-line만 말씀하시지, 자세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도마의 생각은 살 수 있는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로 주님께서 U-turn하시는 것이 안타까워서 한 말이지, 회의주의자여서 죽으러가자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도마는 다만 주님의 마음을 언제나 빨리 알아차려서 행동하고자 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과의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과 헤어진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다시피했습니다. 제자들 모두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와 그가 그들을 위하여 예비할 처소의 기쁨을 말씀하시고, 자기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때 도마가 나서서 우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며, 거기로 가는 길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심히 슬퍼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 모두의 생각이었습니다. 이윽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거기 있지 않았습니다(요한복음20:24).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만났다고 하자 나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로 도마는 믿음이 없는 자라고 낙인이 찍혀버렸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라고 별명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를 만났을 때에 도마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감히 손을 넣지도 않고 확인도 하지 않고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을 너무 쉽게 비교분석합니다. 베드로는 어떻고 바울은 어떠하며 도마와 빌립은 어떻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편견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제자들 전원은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부활하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거기에서 거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다만 그러한 실망 투성이의 제자들을 사용하셔서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신 주님을 항상 찬양해야 합니다. 전혀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믿게 하시고 그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 두 사도/맛디아  (0) 2018.07.01
열 두 사도/바울  (0) 2018.06.23
열 두 사도/다대오  (0) 2018.06.08
열 두 사도/가나안인 시몬  (0) 2018.06.02
열 두 사도/빌립  (2) 2018.05.19
And

열 두 사도/다대오(사도행전28:30-31)

 

다대오는 사도였지만 성경에서 역시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대오에 대해서

마태복음10: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마가복음3: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누가복음6:16 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사도행전1: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요한복음14: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다대오/Qaddai'o"/Thaddaȋos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과(KJV의 마10:3에는 "다대오라는 별명을 가진 렙베오”라고 했다) 질문을 한 적이 있는 것과 예수께 몇 마디의 질문을 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열 두 사도 중의 하나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랑스러움과 온유한 기질이라는 것입니다. 다대오는 열 둘 중에 가장 막내였습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것들은 자기 자신을 정의합니다. 자기자신을 현재의 모습으로 규정지으며, 자기 자신과 그 외의 모든 것 사이를 구별해주는 속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경역시 자기를 정의하고 현재의 모습으로 규정지으며 다른 모든 글들과 자기 자신을 구별해주는 속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는 과정의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성경적 신앙은 언제나 책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Robert L. Raymond 2004, 107).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자신의 교회를 위해 장차 있을 모든 복음전파를 위한 원천과 기준, 즉 사도의 직무가 될 공식적인 권위체계를 세우셨습니다. 주님은 사도들이 말하고 기록할 말씀들을 인정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크다 작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눈으로만 보고 인지한 것이지, 그 이상의 것들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볼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크다 작다는 표현은 단지 어떤 像(상)에 대한 것만 인지한 것이지, 그 외의 것에 대한 認知(인지)는 제외 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도들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성경 몇 줄 정도밖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도들을 선택하실 때 주님께서는 기도하신 후에 선택하셨습니다. 후세의 우리들은 이러한 것을 충분히 감안해야 합니다.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음을 우리들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사도들은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했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인명사전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는 오늘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유명한 사람들은 그 일부분일 뿐입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 두 사도/바울  (0) 2018.06.23
열 두 사도/도마  (0) 2018.06.16
열 두 사도/가나안인 시몬  (0) 2018.06.02
열 두 사도/빌립  (2) 2018.05.19
열 두 사도/베드로  (0) 2018.05.14
And

열 두 사도/빌립(사도행전28:30-31)

 

빌립/Fivlippo"/Phîlippos는 ‘말(horse)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빌립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인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사역할 초기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요1:28). 예수님께서 빌립을 선택하여 제자로 부르셨습니다(요1:43). 빌립의 고향은 갈릴리 바닷가에 있는 벳세다입니다(요1:44). 안드레와 베드로도 벳세다 사람입니다(요12:21).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을 예수님에게 소개하였습니다(요1:45).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확신시켜 주었습니다(요1:49). 종려주일(Palm Sunday)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몇몇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어하여 빌립에게 간청하였습니다(요 12:20-23). 빌립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더디게 깨달았습니다(요14:8-21).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기도한 신실한 사람들과 함께 있었습니다(행1:12-14).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기 전에 그를 시험하셨습니다(요6:5-7).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말 때문에 예수님으로 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요14:8-11).

사람들은 모두 같을 수 없습니다. 지구상에 여태까지 같은 얼굴을 가진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비슷하긴 해도 똑같지는 않습니다. 얼굴뿐만 아닙니다. 심성도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착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심성이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질이 급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느리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같은 말을 해도 이해를 빨리 하는 사람이 있고, 이해를 늦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빌립이 이해사 느린 사도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빌립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신 제자들의 명단에서만 빌립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제자들의 명단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빌립의 인간성과 개성에 대해서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합니다.

요한복음6:5-7 5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6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7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12:20-23,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23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오늘날에 목사청빙요건을 보면 참으로 세상과 똑같은 기준을 적용합니다. 4년제 대학교졸업, 이름 있는 신학교3년을 마치고 석사를 끝내고 박사학위를 소지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봐야할 자격인 인간성은 안두에도 없습니다. 사람이 되지 않은 사람을 인간적인 자격에 맞추다보니 교회가 시끄럽고, 기독교계가 야단이며, 전도의 문을 아예 이 사람들이 막아버립니다. 빌립은 다소 우둔했던 사도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빌립은 냉철한 합리적 생각과 물질주의적인 사고경향을 가졌습니다. 그 예를 우리들은 갈릴리해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장소에서는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먹을 때가 이미 지나서 사람들은 배고플 때였습니다. 당장에 먹을 것을 제공해줘야 했습니다. 더구나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남자만 5000명이었습니다. 여기서 5000명이란 20세 이상 60세미만의 남자들입니다. 즉 전쟁에 나갈만한 나이입니다. 따라서 남자도 20세미만이 빠졌습니다. 60세 이상 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자와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감안하면 거기에 모인 사람의 숫자는 어마어마합니다. 그 사람들을 먹이기 전에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복음6:5-6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도 어디에서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음을 알면서도 빌립에게 물으신 이유를 ‘시험코자’peiravzw/peirâzo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어떤 해결책을 듣고자 하심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그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심은 빌립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럼에도 빌립은 계산을 했습니다. 떡을 살수만 있다면 200데나리온의 떡은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적은 떡으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200데나리온은 회중들의 숫자를 계산해서 200데나리온의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공금의 전부였습니다. 그 돈으로는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기에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에스겔37:1-3을 보면 ‘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사람의 마른 뼈가 심히 많은 곳으로 데려가신 후에 이 뼈들이 살아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에스겔은 주께서 아신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에스겔과 빌립의 사이에서 늘 갈등하는지 모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데 세상에 속아서 믿음으로 하지 못하고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다. 늘 성경을 대하면서 갈등합니다. 항상 말씀이 나를 주관하게 한다고 하지만, 망설이고 갈등하다가 세상에 늘 끌려 다닙니다. 통상 우리는 하나님을 전능하시다고 하면서도 부분적인 것만 믿을 때가 많습니다. 영적인 통찰력도 부족하고 믿음도 없고, 천상 우리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 삼아주심은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Rufinus는 390년경에 옛 로마신경에서 거룩한 교회를 언급했습니다. 700년경에 채택된 사도신경은 거룩한 보편적 교회라고 했습니다. 325년에 니케아에서 열린 첫 번째 공의회에서 작성된 신조는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라고 했습니다. 381년도에 작성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신조에서는 ‘우리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고 했습니다. 열 두 사도를 선택하신 주님은 그 중에 어떤 한명이나 특정인에게 교회를 맡긴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나 바울에게만 맡긴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은 성격상 활달하거나 차분하거나 많이 알거나 적게 알거나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졌을 때 거의 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모두 순교당합니다. 사도 빌립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이란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뭐가 잘났다고 마천루 같은 교회를 세우고 마치 한국교회의 대표인양 행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 두 사도/다대오  (0) 2018.06.08
열 두 사도/가나안인 시몬  (0) 2018.06.02
열 두 사도/베드로  (0) 2018.05.14
열 두 사도/마태  (0) 2018.05.10
열 두 사도/사도 요한  (0) 2018.05.02
And

열 두 사도/베드로(사도행전28:30-31)

 

유능한 회사에서 사원을 뽑으려면 많은 것들을 걸러냅니다. 사원에 대한 많은 기준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 사원들을 선발합니다. 그 기준에는 회사만을 위한 기준입니다. 인격, 부지런함, 성실함, 희생정신 등 오직 회사를 위한 기준만 들어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생산량이 증대되고 회사가 번영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격사유가 될 만한 것들을 걸러내려고 입사시험을 치를 때 많은 항목을 만들어 놓습니다.

좌충우돌이란 이리저리 치고받고 부딪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상당히 피곤해지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떤 조직 내에 있으면 사람들이 항상 경계하고, 항상 조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조직에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과 같이 있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릴 수 있습니다. 돌발행동을 수시로 하는 사람과 같이 생활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피곤합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하고 절대로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전술했지만 예수님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오늘의 회사경영원칙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선택하시려면 성경에 능통한 서기관이나 유대의 전통에 정통한 산헤드린을 선택하셔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곳에서 한 사람의 제자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모두다 자격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사람들을 제자로 선택하셨습니다. 세상 끝까지 증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한마디로 말해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요나(요한)의 아들 곧 바요나 시몬입니다(마16:17-요21:15). 베드로는 게바라고도 했습니다(요1:42). 시몬/Sivmwn/Sîmon은 들음이란 뜻으로 히브리어를 음역한 유대이름입니다. 게바/Khfa'"/Kephȃs는 아람어의 음역으로 반석이란 뜻입니다. 베드로/Pevtro"/Pêtros는 게바를 헬라어로 표기한 이름으로 ‘(4074, 페트로스) 바윗 조각, 돌, 바위를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요한(요나)의 아들이며((마16:17-요21:15), 안드레의 형제(마4:18)입니다. 베드로는 결혼을 했고(막1:30, 고전9:5), 그리 많이 배우지 못했습니다(행4:13). 가버나움에 살았으며(막1:21,29), 어부였습니다(마4:18, 5:1-7, 요21:3). 형제인 안드레에 의해 예수께 인도되었습니다(요1:40-42). 예수께서 제자로 부르셨습니다(마4:18-20, 눅5:11).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도로 세우셨습니다(마10:2). 믿음으로 갈릴리 바다 위를 걷기도 했습니다(마14:28-31).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야)라고 고백했습니다(마16:16-19).6:69). 그런가하면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예수를 말리다가 책망을 듣기도 했습니다(마16:21,22, 막8:31-33). 경솔하게 예수의 물으심을 가로채서 답변하기도 했습니다(눅 8:43-45).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들 고치는데 참석하기도 했습니다(막5:37, 눅8:51).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의 변모하심을 직접 목격했습니다(마17:1-4, 막9:2-6) 예수님께 여러 가지를 물었습니다. 용서에 대하여 물었습니다(마18:21). 더럽히는 것에 대하여 물었습니다(마15:15-18). 종의 비유에 대해 물었습니다(눅12:41).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예수의 예언에 대해 그 내용을 자세히 물었습니다(막13:3,4). 예수님의 유월절 예비를 위해 요한과 함께 보냄을 받았습니다(눅22:8,9,22:13).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주신다고 할 때에 거절했습니다(요13:6-10).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마26:33-35). 예수님을 잡아가는 말고의 귀를 칼로 내려쳤습니다(마 26:51). 잡히신 예수님을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 가만히 들어갔습니다(마26:58). 잡히신 예수를 세번 부인하고 회개했습니다(요18:17,18,25-27, 26:69-75). 부활하셨다는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눅24:12). 부활한 예수님을 갈릴리에서 보리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막16:7). 그럼에도 다시 이전처럼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요21:1-14).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눅24:32-34). 베드로가 예수님임을 알고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요21:7).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요21:15-19).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했습니다(28:16-20).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행1:12,13),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합심 기도했습니다(행1:12-14). 유다의 죽음에 대해 증언한 후 새로운 사도의 선택을 제안하였습니다(행1:15-22). 오순절에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성령의 강림에 대해서 말했으며(행2:14-41),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행2:37-41).

베드로는 전술한 바와 같이 좌충우돌했습니다. 예수님께 칭찬을 받기도 하는가하면 심한 책망도 받았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바다 위를 걷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님이 잡혔을 때에 면전에서 부인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회개했습니다. 그런 후에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다시 사명을 받았을 때,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주님의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순교했습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앞두셨고 말씀하셨을 때, 자기가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자랑스럽게 내가 주를 위해서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까이 함께 가겠노라고 주님께 말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일들을 다 경험합니다. 혹독한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래도록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어서 순교했습니다. 그야말로 주를 위하여 한 말이 그에게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릴 만큼 좌충우돌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베드로를 다듬으셨습니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빚기 위해 처음에는 거친 흙을 채취합니다. 거기에는 돌도 들어있고 티끌도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토기장이는 그 모든 것들을 다 걸러냅니다. 돌이나 티끌들은 그릇을 만들 때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릇을 빚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걸러냅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치고 주무른 다음에야 그릇을 빚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해서 바로 완전한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확정적인 성화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 성화가 있습니다. 점진적인 성화와 확정적인 성화입니다. 우리는 부르심, 중생, 칭의, 양자됨을 반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한번 부르시고 중생함으로서 확정적인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에서 내주하는 죄로 인해서 갈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신자 안에 여전히 내재하는 죄와 신자가 아직 정해진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세에서의 신자의 상태는 정적인 현상유지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John Murray 2001, 308). 즉 구원을 받았으니까 마음대로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좌충우돌했던 베드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았던 베드로였지만, 말년에 베드로는 너무나도 달라진 모습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빚으시고 다듬으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들도 늘 좌충우돌합니다. 그러나 주님께 우리를 맡기면 주님께서 베드로처럼 우리를 다듬으실 것입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 두 사도/가나안인 시몬  (0) 2018.06.02
열 두 사도/빌립  (2) 2018.05.19
열 두 사도/마태  (0) 2018.05.10
열 두 사도/사도 요한  (0) 2018.05.02
열 두 사도/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1) 2018.04.24
And

열 두 사도/사도 요한(사도행전28:30-31)

 

참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말들을 합니다. 지옥에 있는 자도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고 하고, 성경에도 없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지점을 만들어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해, 살아 있는 사람의 공로여하에 따라서 구원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한다고 하는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할 두 번째의 기회를 주셨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영원한 운명이 이미 결정된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취지로 죽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이미 지옥에 있던 자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구원할 취지로 죽지 않으신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에베소서4:8-10 ‘8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과 베드로전서3: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을 근거로 죽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후에 회개할 기회를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9:27과 누가복음16:26절을 보면 이미 죽은 사람의 운명은 바꿀 수 없음을 우리들은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Robert L. Reymond 2004, 857).

요한/!Iwavnnh"/Ioânnēs이란 ‘그에게 여호와는 은혜롭다’라는 뜻입니다. 사도요한은 세베대의 아들이며(마4:21), 야고보의 형제입니다(행12:1). 사도요한은 어부였었습니다(눅5:10). 그러다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주님을 좇았습니다(막1:19-20). 그리고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마10:2).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가장 가까이 하는 제자 중 하나였습니다(막5:36,37, 마17:1, 막9:2, 눅9:28, 마 26:36,37, 막14:33). 요한은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께 주의 보좌 좌우편에 앉기를 간구하기도 했습니다(막10:35-37). 요한은 성질이 불같아서 불로 사마리아인들을 멸할 것을 예수님께 요청하였다가 책망을 들었습니다(눅9:54,55). 예수님께서 요한의 형제에게 별명을 지어주셨습니다(막 3:17). 사도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유월절을 예비했습니다(눅22:8). 겟세마네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같이 있었고(막14:33), 예수님께서 재판 받으실 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요18:15,16).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을 지켜보았습니다(요19:26).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봉양했습니다(요19:27). 부활하신 예수님을 갈릴리 해변에서 알아봤습니다(요21:7). 예수님의 승천을 목도했습니다(행1:10). 베드로와 함께 앉은뱅이 된 자를 성전 미문에서 고쳤습니다(행3:5-8). 베드로와 함께 갇혔지만(행4:3,13-15), 관원들에 의해 협박을 받고 다시 풀려났습니다(행4:17,21). 베드로와 함께 사마리아로 파송 되었습니다(행8:14). 박해 시에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계1:9).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요21:24). 요한1서,2서,3서를 기록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계22:8,9). 사도들의 삶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요한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다른 사도들보다 항상 주님과 가까이 있었고, 더 오랫동안 주님과 절친한 교제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성경을 기록하면서도 자신을 최대한도로 절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신 제자들은 자기들 방식대로 주님을 닮아갔습니다. 그러나 개성이 파괴되거나 억제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더욱 다듬어지고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세례요한과 사도요한은 사제지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스승과 제자는 모두 주님을 증거 했습니다. 요한은 세례요한이 그 당시에 유대와 복음에서 요한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양 그에게 어떠한 자격이나 혈통관계를 기술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전체 21장의 어디에서도 결코 자기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은 복음서 중에서 자기 자신이 속한 열 두 사도의 명단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겸손했던 요한은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아무런 암시를 던져주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야고보의 동생입니다. 요한은 예수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습니다. 그러나 교회 중에서 가장 오래 남은 사도였습니다. 요한의 아버지 세베대가 그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그녀의 삶과 증거를 통해 그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사역을 세례요한의 제자시절에 준비하였습니다. 아마도 요한은 광야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언자라고 고백했습니다. 메시야의 도래를 애타게 기다렸던 요한은 세례요한이 약속된 분의 길을 예비하러 왔다고 천명했을 때 그 사실을 믿었습니다. 요한은 세례요한이 주님을 가리켜 가로되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하였을 때, 세례요한에게서 주님께로 자신을 이동시켰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 때로는 성급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해 주실 것을 믿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급함은 주님의 방식이 아니라 요한의 방식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을 거절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분개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죽이자고 하였습니다. 요한의 성질도 아마 베드로 못지않았을 것입니다.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신 것으로 보아 불같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주님의 모습에서 주님의 가르침에서 점점 주님을 닮아 갔을 것입니다. 결국은 요한이 사랑의 사도로 변모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가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요한이 ‘사랑의 사도’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과 함께 누린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복음과 서신 속에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사랑을 말했습니다. 주님의 가없는 사랑을 전하다가 주님께로 갔습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 두 사도/베드로  (0) 2018.05.14
열 두 사도/마태  (0) 2018.05.10
열 두 사도/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1) 2018.04.24
열 두 사도/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0) 2018.04.16
열 두 사도/바돌로매  (0) 2018.04.12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