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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자랑할 수 없는 구원(로마서3:24-31)

 

27 그렇다면 자랑할 것이 어디 있느냐? 있을 수 없다. 어떤 율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다. 오직 믿음의 법으로이다. 28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우리는 인정한다. 29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정으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 30 할례자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31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냐? 결코 그럴 수 없으니,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운다바른성경»

17세기와 18세기에 이르러서 중세의 신학자들이 전개한 종교개혁기에 첨예화된 균형이 깨져버립니다. 지구가 네모져서 어느 지역 이상 갔을 때, 한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진다는 것,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는 것 등이 깨져버린 것입니다. 이 시대를 계몽주의시대라고 말합니다. 계몽주의 시대 인간들은 Renaissance라는 기초위에 모든 것을 세웠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는 중세적인 사고와는 다른 사상을 가졌습니다. 이 시대는 인간이해를 전개시키고 발전시켰습니다. 인간의 위치를 격상시켰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한층 높게 평가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역사의 중심무대에 두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따지는 식으로 하나님을 평가했습니다. 철학은 철학대로 과학은 과학대로 어떻게 하면 인간이 괜찮을 수 있는가를 발전시켰습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DescartesGalileo와 같은 사상가들이 개척한 새로운 방법론을 지식의 모든 분야에 적용했습니다. 자연과학뿐 아니라 정치학, 윤리학, 형이상학, 신학 등도 이 과학적 표준규정에 맞추려고 애를 썼습니다. 철학까지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노력이 드는 모든 분야가 자연과학에 휩쓸리게 되었습니다.

계몽주의는 이성을 포함한 몇 가지 원리들이 있는데 자율, 자연, 조화, 진보 등입니다. 뭐니뭐니해도 계몽주의의 제1원리는 이성입니다. 계몽주의 시대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대단히 강조했습니다. 이성의 원리란 우주전체의 바탕을 이루는 근본 질서가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가리켰습니다. 이성의 원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 두 번째 원리인 자연입니다. 사실상 자연(nature)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자연이란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라고 사전에 정의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창조물이지 자연은 아닙니다. 그들에 의하면 자연의 원리란 물질의 본질에 내재되어 있고 그 본질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계몽주의자들은 우주를 내재적으로 자연의 법칙을 가지고 있는 질서정연한 체계라고 간주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과 자연법이라는 말들은 지적추구에서 표어로 되었습니다.

이성자연은 계몽주의 사고의 세 번째 원리인 자율’(autonomy)의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자율적인 인간이 진리와 행동의 결정권자가 되어 외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교회가 가르침의 직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논리에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이니까, 이것은 기독교의 교리니까라는 식으로 호소하는 것이 신앙이나 행위를 부추기는 수긍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개인이 권위에 대한 그런 종류의 모든 외적 주장들을 시험해 보려했습니다.

계몽주의의 넷째 원리인 조화는 이성의 시대가 그 원리로 간주한 우주의 합리성과 질서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세워졌습니다. 사상가들은 우주에는 그것을 지배하는 질서가 특징적으로 내재되어 있어서, 우주 안에 존재하는 각 개인이나 물질의 이기적이고도 독립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우주전체가 가장 적절한 모양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계몽주의 시대는 진보에 대한 낙관적 신념의 시대였습니다. Descartes 등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적 작업에 힘입은 이성의 시대 사상가들은 우주가 질서정연할 뿐 아니라 인식 가능한 대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적합한 방법론을 채택한다면 진정한 지식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차있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 신학자, 과학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들 나름대로 진리에 가장 근접한 것이라고 믿는 사상 체계들을 구축하였습니다.

이성의 시대는 문화가 교회와 기독교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던 때입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 말씀에 입각하여 모든 것을 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에는 아니었습니다. 소위 말해서 지성인들은 교회로부터 세상에 눈을 돌리고 세상에 의하여 연구하려 했습니다.

이런 영향을 교회에서 전연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는데, 교회에서 받아들였습니다. 계시종교는 자연종교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곧 계시종교보다 자연종교를 앞세웠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존로크에 의해서 마련된 이신론자들은 자연종교가 합리적이므로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들은 자연종교로 순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서 19세기의 신학은 이신론을 제껴 버리고 초월성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Immanuel Kant는 도덕적 경험 속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Hegel은 사변 이성 속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Schleiermacher는 종교적 감정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Albrecht Ritschl과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윤리적 문화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으로 신앙을 표현했습니다.

Immanuel Kant는 종교의 적합한 영역으로서 삶의 실천적 영역을 제시했습니다. 즉 도덕적 영역을 제시하였습니다. 실천 이성 안에 그 적절한 기초를 두었습니다. Kant는 거기에서부터 신학을 형성하려 했습니다. 그것으로 초월성과 내재성의 균형을 맞추려 했습니다.

Hegel은 초월적인 것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지적인 차원에 주목했습니다. Hegel은 궁극적인 진리를 인간역사의 진행과정 그리고 그 과정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성의 능력과 연관을 시켰습니다. 인간이 이해할 때 신은 자기인식에 이른다고 주장했습니다.

Schleiermacher는 그가 감정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특별한 경험 곧 직관적 삶을 종교의 중심으로 격상시키려 했습니다. 그는 신학의 근거를 찾기 위하여 감정에 주목했습니다. Romanticism(계몽주의 철학의 냉랭한 합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에 매료된 Schleiermacher는 인간의 감정과 상상력, 직관 등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자기실현과 자기표현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Albrecht Ritschl과 고전적 자유주의자들 곧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자유주의 대표자들인 Adolf HarnackWalter Rauschenbusch 등은 기독교의 신조들을 현대적 지식의 빛 안에서 재구성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신학은 계몽주의 이후로 문화 속에서 일어난 어떤 발전들을 신학이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신학이 적극적인 방법으로 신학 속에 융화(戎華)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학은 그 자신을 잃지 않는 가운데 새로운 과학적, 철학적 경향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사상의 주장들을 최대한 인정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개개기독교 사상가가 전통적 신조들을 비판하고 재구성할 자유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실천적, 윤리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학의 기초를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 이외의 어떤 다른 것에 두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초월성을 간과하고 신적 내재성 쪽으로만 기울어갔습니다. 원래 신학이란 항상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성경의 이중적인 진리를 균형 있게 표현해야 하는데 말입니다(Stanley J. Grenz Roger E. Olson).

요새 우리나라의 어떤 교회들은 자랑할 것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요정도 되면 못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숫자를 자랑하고, 프로그램을 자랑하며, 건물을 자랑하려 하며, 목회자의 자격을 자랑하며, 성도들의 격이 다른 교회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자랑하려 합니다. 우리교회의 성장은 이러이러해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성장했다고 하는데 듣는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적인 공로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기념비를 세우고, 동상을 세우려 하며, 기념관을 지어 인간의 공로를 최대한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 합니다. Barclay에 의하면 어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경리장부와 같이 대차대조표를 기록한다는 것입니다. 의식의 율례를 작은 것까지 엄격하게 지키고 그것을 수행하고 나면 수입에다 기록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갖은 show를 해서 사람을 모아놓았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조건 저 목사는 그릇이 커서(?) 성공한 것처럼 포장되어 버립니다. 사실 우리들의 구원과 우리들의 목회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특히 복음 이외에 윤리적, 율법적인 것들은 고도의 교만입니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로부터 빚지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절대적으로 자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통해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까지도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And

구원을 얻은 사람들(사도행전28:1-6)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Melivth 벌꿀이 생산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헬라인들이 그렇게 불렀습니다. 아마도 벌이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Mellîte는 무리지어 있는 메마른 작은 바위섬입니다. Mellîte는 한때 Carthago의 점령지였습니다. 바울일행은 섬에 무사히 착륙했습니다.

‘구원을 얻은 후에’에서 구원은 diaswvzw/diasôzo 는 ‘안전하게 살려내다. 구원하다. 구출하다’입니다. diav/diâ/통하여 swvzw/sô캐/구원하다의 합성어로서 ‘무사히 옮기거나 구해내다’입니다.

diasôzo는 바울이 로마로 가는 도중에 겪은 난파와 여러가지 다른 위험들을 피한 것에서 등장합니다(행23:24,27:43,44,28:1,4). 또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나음을 입은 병자(마14:36), 자신의 종을 고쳐주기를 원한 백부장의 간구(눅7:3)에 diasôzo가 등장합니다. 베드로전서3:20에서는 노아와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여덟 사람들(벧전3:20)에 관해 사용되었습니다. 육체적인 위험들에 관한 것이지만, 여기에는 구원론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통해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합리한 일들을 많이 접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불합리, 경제적인 불합리, 그 외에 여러 불합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선하다면 이런 일들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선하다면 절대로 불합리한 일들이 일어나서는 안 된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4장2항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피조물을 지으신 후에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여 이성적이고 불멸적인 영혼을 주셨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함을 부여해 주셨다. 또한 그들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해 주셨고 그 율법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다. 그렇지만 그들이 범죄 할 수 있는 가능성 아래 그들 자신의 의지의 자유를 허락해 주셨는바 그 의지는 변화되기 쉬웠다. 그들은 마음에 새겨진 율법 외에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그 명령을 지키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운데 행복하였으며 또한 피조물들을 다스렸다.

라고 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4장1-3항을 보면

우리의 시조들은 사단의 간계와 시험에 유혹을 받아 금지된 실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였다. 이것이 그들의 죄이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을 따라 기쁘게 허용하셨는데 이는 그것을 명령하시어 그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로 이미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이 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본래의 의를 잃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교통도 끊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죄로 죽게 되었고 영과 육의 모든 기능들과 기관들이 전적으로 더럽혀지고 말았다. 그들이 온 인류의 시조이기 때문에, 그들이 범한 이 같은 죄의 죄책은 모든 후손들에게 전가되었다. 또한 그 죄로 인하여 바로 그 사망과 부패한 성품이 통상적인 출생법에 의하여 그 시조들에게서부터 후손들에게 유전되었다.

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왜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소위 말해서 원자들의 우연한 배열로 말미암아 생겨난 산물이 아닙니다. 아주 저등한 것으로부터 고등동물로 진화한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법을 인간들이 따라야 합니다. 생물이 살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조건들이 맞아야 합니다. 온도 습도 등 여러 가지가 맞아야 합니다. 우주의 많은 별 중에서 그에 맞는 조건이 지구밖에는 없습니다. 지구 같은 별을 찾으려고 안간 힘을 쏟고 있지만 현재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지구의 위성인 달에 가서 살려고 얼마나 많이 노력했겠습니까? 그러나 달은 지구와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인식한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믿어야 합니다. 죄인임을 인식한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종교의 자유라는 말을 믿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숨이 붙어 있을 동안에 믿어야 합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 곧 영혼이 떠난 다음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영혼을 절대로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떠난 영혼들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하나님의 지배 안에 있습니다. 그 어떤 세력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배 안에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의 손에서 떠난 것입니다. 있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있다고 하면 신성모독입니다.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죄에 놓여나야 합니다. 사람은 죄에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10: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9)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십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

오직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

경건한 근심을 해야 안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

그러므로 주의 보혈을 믿어야 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오직 주의 이름을 믿어야 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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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만난 바울(사도행전22:5-16)

6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0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우리가 흔히 지나가다가 누구를 만났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만났다는 것은 내가 상대방을 눈으로나 다른 감각에 의해서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만남은 스치는 만남이 아닙니다.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만남이 깊은 만남입니다. 그래서 만난다는 것은 상호적입니다. 상대가 나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고, 내가 상대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만남이 이러할진데 잘못된 만남이 있고, 좋은 만남이 있습니다. 나를 파괴하려고 접근하는 사림이 있는가하면 나를 도우려고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의 향방이 결정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만남으로 해서 인생이 파괴되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좋은 만남으로 해서 그 인생이 꽃을 피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2차세계대전의 원흉들, 히틀러, 무쏠리니, 천황이라고 하는 작자들을 만난 사람들은 엄청난 피를 흘린 것들을 볼 수 있고, 가까운 예로서 국가가 잘못된 정치인들을 만나서 힘든 예를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하늘로서 갑자기 세찬 빛이 둘렀습니다. 당연히 사도바울은 엎드러질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일은 이전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사도바울은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라고 부르시더니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일생 들어보지 못한 음성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더니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신 말씀에 바울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바울은 음성의 주인의 신분을 물었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그러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같은 일행들은 빛은 보면서도 말씀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입니다. 오직 바울에게만 일어난 일입니다.

바울은 이제 주님께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일단 다메섹으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네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알려줄 것이라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주님을 만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을 핍박하는 것은 곧 주님을 핍박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하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핍박할 때 예수님이 자신을 핍박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핍박하는 사람들로서는 소름끼치는 일입니다. 역사적으로 볼때 핍박자들이 회개하지 않았을 때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자신을 핍박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핍박자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핍박하는 것은 전능자를 핍박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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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라는 것(사도행전2:37-42)

구원(swvzw/소조)는 고전 헬라어에서 신이나 사람이 위험에서 힘으로 구해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예로 전쟁 중에서나, 바다에서, 또는 병에서 구원받을 때 소조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LXX에서 히브리어 야사([v'y:/yâshaʽ)와 야사에서 파생한 번역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소조는 일차적으로 육신의 생명에 대한 위험으로부터 ‘구원하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다가 영혼과 육신의 구원으로 확대되었습니다(마1:21). 육신의 구원에서 영혼까지의 구원을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인해서 확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까? 그것은 곧 사람들의 죄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일부가 죄를 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사람의 생성에 대해서 많은 설들을 발표했습니다. 그중 지금까지 믿고 있는 것이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은 가장 저등한 생물에서 사람이 출발합니다. 저등에서 고등동물로, 고등동물에서 사람으로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원숭이를 인간의 조상으로 보기도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설들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먹혀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창1:26-28). 그런데 사람이 범죄 한 것입니다(창3:6). 마귀의 유혹에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 한 것입니다. 이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범죄 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불교도니까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나는 로마-카톨릭이니까 해당되지 않는다. 나는 동양에 사니까 서양의 종교와는 맞지 않아’라고 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말들은 한낮 핑계에 불과할 뿐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사람마다 필수적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신경을 쓰든 쓰지 않든지 간에 구원은 사람마다 받아야 합니다. 이 구원 때문에 다른 세계에서(천국)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이루고 가신 것입니다. 자신이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보내심, 예수그리스도의 순종하심, 예수님의 속죄로 죄를 용서하심,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그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게 하심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는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있는 사람들의 선택하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 하나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 모든 은혜가 적용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결코 시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입니다.

에베소서1:4-5을 보면 ‘성부하나님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였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해도 오늘에야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비하신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역시 신비입니다. 어떻게 나의 구원을 창세전에 예비하셨을까? 놀라울 뿐입니다. 여기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우리가 어찌할까?라는 질문은 도저히 인간적으로는 해결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유대교적으로, 어떤 종교적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으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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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라는 것(사도행전2:37-42)

구원(swvzw/소조)는 고전 헬라어에서 신이나 사람이 위험에서 힘으로 구해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예로 전쟁 중에서나, 바다에서, 또는 병에서 구원받을 때 소조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LXX에서 히브리어 야사([v'y:/yâshaʽ)와 야사에서 파생한 번역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소조는 일차적으로 육신의 생명에 대한 위험으로부터 ‘구원하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다가 영혼과 육신의 구원으로 확대되었습니다(마1:21). 육신의 구원에서 영혼까지의 구원을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인해서 확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까? 그것은 곧 사람들의 죄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일부가 죄를 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사람의 생성에 대해서 많은 설들을 발표했습니다. 그중 지금까지 믿고 있는 것이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은 가장 저등한 생물에서 사람이 출발합니다. 저등에서 고등동물로, 고등동물에서 사람으로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원숭이를 인간의 조상으로 보기도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설들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먹혀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창1:26-28). 그런데 사람이 범죄 한 것입니다(창3:6). 마귀의 유혹에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 한 것입니다. 이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범죄 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불교도니까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나는 로마-카톨릭이니까 해당되지 않는다. 나는 동양에 사니까 서양의 종교와는 맞지 않아’라고 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말들은 한낮 핑계에 불과할 뿐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사람마다 필수적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신경을 쓰든 쓰지 않든지 간에 구원은 사람마다 받아야 합니다. 이 구원 때문에 다른 세계에서(천국)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이루고 가신 것입니다. 자신이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보내심, 예수그리스도의 순종하심, 예수님의 속죄로 죄를 용서하심,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그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게 하심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는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있는 사람들의 선택하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 하나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 모든 은혜가 적용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결코 시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입니다.

에베소서1:4-5을 보면 ‘성부하나님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였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해도 오늘에야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비하신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역시 신비입니다. 어떻게 나의 구원을 창세전에 예비하셨을까? 놀라울 뿐입니다. 여기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우리가 어찌할까?라는 질문은 도저히 인간적으로는 해결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유대교적으로, 어떤 종교적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으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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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의 권고(사도행전2:37-42)

성령의 역사가 강렬하게 역사하신 예루살렘에서는 사도들에게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보도 듣도 못한 기적이 사도들에게 일어났는데 자기나라 말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을 본 예루살렘 사람들은 마음이 심히 찔렸습니다.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을 박도록 종용한 사람이 하나님일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말을 듣고 보니 큰 일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어찌할고’(Tiv poihswmen/티 포이에소멘)하면서 전전긍긍했을 것입니다. 어떤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렀는데 어떤 대책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보긴 해야 하는데 어떤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그들에게 살 방법을 제시합니다. ‘너희가 회개하라(metanohvsate/메타노에사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각각 세례를 받으라‘(baptisqhvtw e{kasto" uJmw'n ejpi; tw'/ ojnovmati jIhsou' Cristou'/밥티스쎄토 헤카스토스 휘몬 에피 토 호노마티 이에수 크리스투)입니다. 이것이 너희들의 죄를 용서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단체로 대표가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 세례는 단순한 세례가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이 회개는 말하기 좋게 잘못했다고 한 다음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는 그런 회개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십자가를 진 한쪽 편 강도, 평생 남을 못살게 한 삭개오, 그리고 이스라엘의 산헤드린의 의원인 니고데모 등의 회개처럼 이전의 잘못을 완전히 뒤집는 것입니다. 이전의 삶을 180도로 유턴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습니다. 이전에는 나의 주인이 나거나, 세상이거나, 마귀이거나 했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삶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회개는 단회적(單回的)입니다. 계속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회개를 해야 그리스도예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회개를 함으로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며,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됩니다. 39절을 보면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회개함으로 죄를 용서함 받는 약속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너희자녀, 모든 먼데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곧 동양이나, 서양, 과거나 미래에 모든 회개하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하신다는 약속입니다.

회개의 신비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구원시키는 동인(動因)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어떤 죄인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40일전에 주님을 배반했던 사람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도록 종용한 사람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신비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한 자들은 어떤 상태에 있거나, 어떤 사람도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심판은 형벌을 동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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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사도행전2:22-36)

-ism(이즘/主義)이란 어떤 단어에 붙어서 오직 한 길로만 가게 합니다. 예를 들면 신비주의(mysticism)라고 할 때 보통 부정어로서 쓰이게 됩니다. 이미 기독교에 신비함이 있는데, 신비주의자들은 성경과 신앙을 오직 신비로만 해석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주의자들은 성경의 성령만을 추출합니다. 삼위하나님 중에서 가장 신비롭게 여기는 성령만을 귀하게 여깁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사도행전을 일명 성령행전이라고까지 말함으로써 사도행전에서 강조하는 기독론을 소홀하게 여겨 중요한 말씀들을 놓치게 하는 우를 범하게 합니다. 물론 사도행전에서 다른 성경보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두드러집니다. 역동적으로 활동하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소외시킨다는 것은 성경을 잘못본 것이라 생각됩니다.

베드로는 2장에서 세 번 구약성경을 인용합니다. 요엘2:28-32(17-21)절입니다.

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그리고 시편16:8-11(25-28)입니다.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9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다음으로 시편 110:1(34-35)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첫 번째 인용에서(요엘2:28-32)는 역시 성령의 활동하심을 잠깐 말한 후에 바로 주님께로 초점을 맞춥니다(기독론). 시편16:8-11도 시편 110:1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에서도 주님의 구원계획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삼위의 하나님 중 딱 떼어서 두 위()중의 하나님을 병행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성경을 바로 읽고 해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계획하셨고, 예수님께서 그 구원을 이루셨으며, 성령께서 그 구원을 사람을 통해, 사람에게 전하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삼위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보내셨습니다. 이루신 구원을 전하십니다. 그 구원의 계획 중에 우리도 포함되었음을 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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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사도행전1:9-11)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의 전기를 쓸 때 신비적으로 쓰게 합니다. 있지도 않은 일들을 쓰기도 하고,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도 씁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을 화려하게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전기처럼 화려하지 않습니다. 무척이나 약합니다. 한번 죽으면 하나님이 정하신 곳에서 꼼작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나타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산 사람에 대해서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약한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스스로 승천했다든지, 또 이 세상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말은 100%거짓입니다.

주님은 40일 동안에 이따금씩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지만, 주님의 모습을 제자들은 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홀연히 나타나셨던 주님께서 승천하셔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계속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지상에 남아 있는 성도들에게 성령강림의 전제조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혹자들처럼 비밀리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밤에 아무도 몰래 승천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을 때 공개적으로 낮에 승천하셨습니다. 성경기록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16:19-20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24:50-53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1:9-12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그리스도의 승천이 갖는 의미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들로부터 그리스도께서 떠나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그의 신격, 위엄, 성령과 관련해서 떠나있음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영적교통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승천해야 할 이유는 더 나은 임재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유대인들만의 왕이 아닌 전 세계의 왕으로서, 세상의 구주로 계셔야 했습니다. 유대의 벽을 넘어서 이방인들의 주님으로 계셔야 했습니다. 유대의 통치자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통치자여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들을 제자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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