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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동정녀탄생의 목적(로마서6:1-11)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느 누구도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fashion show는 fashion designer가 Fashion week의 기간에 있을 일련의 옷들을 공개하는 행사입니다. 전형적인 fashion show에서는, fashion model이 designer가 만들어낸 옷을 입고 무대를 걷습니다. 이때 fashion model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옷이 fashion model보다 더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동정녀 마리아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몸을 빌린 것일 뿐 마리아는 실상 인간으로서 종에 불과합니다(눅1:38). 그러므로 마리아는 사람들이 숭배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만일에 마리아를 숭배한다면 엄청난 우상숭배입니다.

동정녀 탄생의 기사에서 예수님의 마리아 동정녀 잉태를 그의 신성의 작용인(作用因/efficient cause)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Geerhardus Vos는 “주님의 동정녀 탄생과 주님의 신성(神性) 사이에 아주 긴밀한 관련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사실을 그의 신격의 궁극적 근거나 출처로 연장해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신성에 대한 개념 자체를 아주 낮게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 있는 육신의 부모로서 하나님이신 후손을 생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부모들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순전한 동정녀라도 이러한 일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해서 동정녀 잉태라는 사실보다 뛰어나게 또 그것과는 아주 별도로 온전히 그리고 진실 되게 하나님 곧 성자 하나님이 되신다는 이 사실을 지속해서 믿기 위해서는 어떠한 다른 근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정녀 잉태로 인해 혼합종 즉 하나의 신(성령)과 한 인간 어머니 사이의 연합으로 생기는 후손인 일종의 반인반신(伴人半神)이 생겨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반인반신이라면 단지 반인반신 일뿐 아니라 온전한 신도 아니고 온전한 인간도 못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조금도 성경적 근거를 갖지 못하는 한갓 신화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목적에는 마리아가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함은 예수님의 죄 없으심에 대한 작용인입니다(고후5:21/히4:15) 대체적으로 “원죄”는 ‘남성’ 계열을 따라 전이됩니다. 그러나 여성도 인간의 죄를 공유하고 그로 인해 부패하게 되며, 또 이러한 만연하는 죄가 마리아를 오염시켜, 그녀도 죄성의 소유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리아라고 해서 신격마리아가 아닙니다. 죄를 지은 자요, 구세주가 필요한 사람입니다(눅1:47). 생물학적 증거는 말할 것도 없고, 성경의 모든 증거에 의하면 자연적 출생을 통해서 태어나는 자녀의 신체적, 영적, 심리적인 면 전체를 구성함에 여자도 똑같이 기여합니다(시51:5). 다윗의 회개의 시에서 그가 자신의 죄악 된 행실의 원인을 추적하면서 자신의 모친을 언급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내 어머니가 죄 있는 채로 나를 임신하였으매’ 따라서 동정녀 잉태자체의 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존의 사역이 없었더라면 마리아는 그녀의 장자에게 죄성으로 기울어진 인간성을 전이했을 것입니다. Calvin은 “그리스도가 모든 오염에 물들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그의 어머니로부터 남자와의 성관계 없이 태어난 때문이 아니요, 성령에 의해서 거룩하게 구별됨으로써 그 출생이 순결하게 그리고 마치 아담의 타락 이전처럼 오염이 없는 출생이었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믿는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잉태의 최고의 목적을 논하기 전에 비록 그 본질상 동정녀의 잉태이지만 바로 그 육신의 어머니의 태안에서 정상적으로 발육된 것과,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의 자궁 안에 잉태되신 사실과 또 마태와 누가가 모두 기록한 대로 그 인간 자궁 안에서부터 세상에 출생하기까지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예수님은 완전히 사람이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해주고 또 보증해 주는 그의 인성(人性)의 기원의 특질들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완전하시며 참되신 인성이 그의 동정녀 탄생이라는 이적으로 인해 전혀 위협받거나 손상 받는 면이 없다는 점을 아주 확고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한 인간 모친에 의한 잉태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와 같은 인간성을 “공유하였고…(히2:14), 또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으셨다’(히2:17)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복음서 기자는 의도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동정녀 잉태에 의해서 그 밖의 모든 일 전에 “(선재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1:14)는 사실을 이해시켰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동정녀 잉태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수단 즉,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시는’(고후8:9) 수단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God-man)이심을 들을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인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라는 그 질문에 대한 성경의 답변입니다. 동정녀 잉태는 “임마누엘 사건”(사 7:14/마1:22-23)을 가능케 한 수단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의 인격에 결합시키지 않은 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사람(man with us)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리아의 동정녀 잉태로 말미암아 성자 하나님은 본래의 삼위 하나님의 제 2위이시오, 영원한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분이 아니신 일이 없이 성자(聖子)의 신격(神格) 안에 있는 신성(神性)과 우리의 인성(人性)을 연합함으로써 “임마누엘”로서 “우리와 함께”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잉태에 대한 또 다른 목적이 진리를 설사 담고 있다 할지라도, 임마누엘 사건의 영광스런 빛에 가리워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마태와 누가의 기록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고전적(古典的)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 기독론(基督論) 교리(敎理)를 위한 신약의 모든 다른 증거들과 함께 그것들의 정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는 동정녀를 통해서 이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And

이 세상에 들어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로마서4:13-17)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3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는 역사에 근거를 둔 신앙입니다. 교회는 역사적이지 이교들처럼 허무맹랑한 전설과 신화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간은 흐르면서 모든 것을 변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식은 하고 있지만,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구는 그 자체의 축을 중심으로 시속1600km로 자전하고 있습니다. 1600km로 자전하면서 시속 11km로 태양을 공전합니다. 지구는 은하계를 시속 10km로 가로지르는 태양계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구는 시속 77km로 움직이는 은하계 공전 궤도 안에서 움직입니다. 지구는 시속 216km로 공간을 통과합니다. 24시간마다 우리는 9000km를 여행하고 있습니다. 매년 우리는 336km의 공간을 여행합니다. 일 년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지만, 분명히 같은 봄은 아닙니다. 우리를 변하게 한 봄을 맞고 각 계절을 맞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 때문입니다. 흘러가고 있는 시간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역사적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하되 교리적 진술이나 신학적 연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과 언약관계의 이야기 가운데 계시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가장들이 그들의 자녀들의 질문에 대답할 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증거와 말씀과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뇨.”(6:20) 하거든 다시 한 번 출애굽기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위대한 구약성경의 이야기가 전해진 것입니다. 즉 그것은 애굽과 광야에서, 다윗의 통치하에서, 솔로몬 당시의 문명 속에서,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그리고 마카비가()의 지도 아래 싸울 때 그의 백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동일한 이야기의 모든 부분은 로마에서 박해를 당한 그리스도인의 이야기와, 교회의 성장 및 확장과 개혁되어야 하고 사도들의 비전을 다시 가져야 하는 필요성과 더불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신비입니다. 복음의 신비는 간단한 진술로 한정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시정(詩情)을 위해서 정통교리의 기하학적 해석을 잘못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얼마나 잘못된 교리가 마치 정통교리인양 행세하고 있습니다. 행세를 할 때 교회의 건물로, 교세로 행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시입니다. 즉 성령께서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백성의 역동적 여정 안에서 그 백성에게 활력을 줄 때, 성령의 맥박과 심장의 고동소리를 지닌 시입니다.

 

그러나 성경과 교회사를 망라하는 이 하나의 이야기에는 초점이 있다. Oscar Cullmann은 이것을 만일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시간의 관점에서 고려한다면 우리는 기독교신앙의 불명예는 세속사의 다른 기간들과 다를 바가 없는 이 수년간을 전체시간의 중심이며 표준이라고 믿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만물이 시작될 때 말씀은 이미 존재하였음을 이것에 못지않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이 시간을 습격한 실재이며(reality), 불확실한 전망의 그늘진 세계에 쳐들어 온 실제적이고 참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인간 세상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예수만을 강조하는 교리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시는 통로로 마리아를 사용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서 우리 눈은 밝아지고 궁극적인 진리를 얼핏 보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고 다른 모든 경험들은 오직 이것과 관련하여 판단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수수께끼를 의미 있게 하는 참조표입니다. 그래서 이 가장 중요한 이야기의 절정은-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있어서 그 끝이 아니라 중간에 나타납니다. 따라서 신앙은 역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설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본디오 빌라도가 사도신경에서 언급되는 이유입니다. 신앙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는 만납니다. 바로 신앙의 세계밖에 있는 본디오 빌라도가 그리스도인의 주장의 신빙성을 위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억측이나 상상의 어떤 전설적 인물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라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이 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높임을 받아야 하는가? 마리아인가? 예수님인가? 누가 크리스마스의 주인인가? 산타크로스인가? 예수님인가? 누가 교회의 주인인가? 성도들인가? 예수님인가? 우리들은 오늘 이것을 많이 잊고 있습니다. 성탄절의 참된 의미를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예수님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And

구속으로 말미암아(로마서3:24-31)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24),

그의 피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25),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26),

오직 믿음의 법으로(27),

믿음으로(28),

할례자도 무 할례자도 믿음으로(30),

믿음으로 말미암아(31).

 

법정에서는 원고(原告)와 피고(被告)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피고에게 원고가 어떤 죄가 있다고 확신하기에 소송을 한 것입니다. 원고와 피고는 법에 명시된 대로의 법정심리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가 있으면 형 집행을 하고, 없으면 석방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법정입니다. ()를 제기(提起)하면 법정에서는 헌법에 규정된 조항에 의해서 심리를 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모두 하나님의 법정에서 실제로 죽을죄를 지은 피고입니다. 영원히 죽어야 할 중범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죄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어떻게 빠져나올 방법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인간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법정처럼 로비도 없습니다. 어떤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을 대입시킨다 하더라도 중형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영원한 엄벌에 처해져야 합니다. 辯護할 수도, 釋放시킬 수도, 保釋金을 내고 나올 수도, 어떤 사람도 減刑시킬 수도 없습니다. 무능한 채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최후심판의 하늘법정의 모습입니다.

의로 여기다dikaivoun에서 어미가 oun으로 끝나는 동사는 누구를 무엇으로 만든다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무엇으로 취급하다’ ‘인정한다’ ‘간주하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법정에 서있는 우리를 의로 여긴다는 것은 이생과 내생에서 영원한 징역형을 받아야 할 우리를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무죄한 사람으로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예수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렇습니다.

속량/ajpolutrwvsew"/아폴뤼트로세오스는 ajpoluvtrwsi"/아폴뤼트로시스(구속/redemption, 구조/deliverance, 해방/release의 여성, 단수, 속격명사로서 헬라어문헌에서는 속전을 받고서 놓아주다에서 유래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결코 값싼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fiction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fact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어떤 어려움도, 어떤 괴로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실재이고, 그것도 하나님의 자비로 얻은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의 공로는 전연 없는데도, 우리는 시커멓게 죄를 뒤집어쓰고 있는데도 무죄함으로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공로를 내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요 패역한 일입니다.

 

 

And

비참한 인간(로마서3:9-18)

 

로마서:1-18 1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3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4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5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9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사도는 인간들이 자랑할 만한 것도 없고. 뛰어난 점도 없으며, 깨끗한 점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라마다 족속마다 자기들을 자랑하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유대인이나 이방인들) 모두 뛰어남도 없고 좋은 점도 없으며, 자신들을 추켜세울 만한 점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비단 바울사도뿐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전체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해서 비참한 상태로 전락한 인간은 어떤 대책이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타락의 결과는 그야말로 비참하고 비참해졌습니다. 우리의 최초 조상들은 그들의 법률적, 도덕적 무죄성과 본래의 의를 모두 상실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로 인한 죄책과 오염의 주범이 되었습니다. 창세기3:7그들의 눈이 밝아란 무슨 말입니까? 이것을 John Murray내적혁명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즉 자기들의 선함은 하나의 추억으로 그리고 자기들의 불순종의 사실은 죄책에 대한 의식으로 이제 그들이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Robert L. Raymond, 2004, 566). 죄책(罪責)에 대한 의식이 신체적인 벌거벗음에 대하여 상대방 앞에서 수치심과 당혹감으로 나타났습니다. 벌거벗음은 범죄 하기 전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범죄 후에는 신체적인 벌거벗음이 수치스런 것이 되었습니다. 죄로 눌려 있는 양심에 대해서 스스로 느껴진 것입니다. 그래서 벌거벗은 몸을 가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사(gentleman/紳士)란 사람됨이나 몸가짐이 점잖고 교양이 있으며 예의 바른 남자를 일컫습니다. 숙녀(淑女/lady)는 교양과 예의와 품격을 갖춘 현숙한 여자라는 것이 사전적(辭典的)인 정의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과연 신사와 숙녀가 있을까요? 성경에 의하면 신사와 숙녀는 없습니다. 죄로 오염된 그들의 본성은 이전의 본성이 사라지고 새로운 본성에 의해서 움직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앞에서 고의적인 불순종의 행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책임을 전혀 지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죄를 짓게 된 상황을 본인이 책임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와에게 전가하고, 하나님에게까지 전가했습니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3:12). 하와는 하와대로 뱀을 비난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생명나무의 실과까지 먹으려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죄는 결코 사람을 화평하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 사람과 하나님의 사이, 심지어는 그 사이가 가장 가까운 가족관계임에도 예외가 없습니다. 벌어질 대로 벌어져버렸습니다. 그 모두 죄의 결과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인간과 환경이 벌어졌습니다. 인간의 환경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땅이 소출을 많이 내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땅의 생산력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말미암아 손상당하였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참한 인간들이 현재 이 세상에서 도토리 키 재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잘났네, 네가 못났네.’ 하면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허물은 수천 미터의 산 같은데, 겨우 몇십 미터의 산 같은 허물을 들춰내고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비참함은 전혀 모르거나 알고도 덮어둔 채.

And

선행(善行)이라는 맹점(로마서3:1-8)

 

인간의 선이라는 것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두운 면을 감추는 면이 있고, 밝은 면을 나타내는 선이 있습니다.

Albert Schweitzer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독일계의 프랑스 의사이고, 사상가이며, 신학자이고, 음악가입니다. 그는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의 랑바레네에 병원을 개설한 의사입니다. 철학적으로는 생명에 대한 외경(Ehrfurcht vor dem Leben)을 윤리의 기초로 하였습니다. 또한 원자폭탄 실험에 적극적으로 항의하였습니다.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받았습니다. 신학자로서는 종말론적 요소를 강조하였습니다. 철학가로서는 칸트를 연구하였습니다. 독자의 윤리관인 '생명의 경외'를 주장하였습니다. 음악가로서는 뛰어난 오르간 연주가였을 뿐만 아니라 오르간 개량에 있어서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아프리카의 성자로 추앙을 받았었고, 현재도 그렇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음악가요, 도덕가요, 사상가이며, 의사였고 신학자였던 Schweitzer. 그런 그가 내세운 예수님에 대한 것이나 종말론을 살펴보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Schweitzer는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묵시적 요소가 그의 가르침의 껍질이 아니라 핵심이라고 주장한 바이스(Johannes Weiss/1866-1914)의 견해에 찬성하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하나님 나라의 비밀』(The Mystery of the Kingdom of God 1906)과『역사적 예수 탐구』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영역본 1910)에서 Schweitzer는 예수가 19세기의 사람이 아니라 1세기의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또 유대주의적 묵시의 장르가 비록 19세기의 정신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예수의 메시지의 본질적 요소였다고 주장했습니다. Schweitzer에 의하면 ‘망상적 광신자’였던 예수는 자기 자신을 앞으로 오실 인자(coming Son of Man)로 생각하고서 “허황된 묵시적 꿈에 사로잡혀 자기의 삶을 헛되게 내버렸다”고 했습니다. 예수는 전적으로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생전에 올 것이라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종말론적 동기를 일관되고 철저하게 적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메시지는 근본적이고 그리고 절대적으로 종말론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열 두 제자들을 보내신 목적은, 마지막 위기(즉 심판)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 이전에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회개할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마태복음 10장에 진술되어 있는 것과 같은(마10:23) 재림(Parousia)이나 ‘메시야적” 수난이 자신이 예언했던 대로 일어나지 않자, 예수는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깨닫고서(“재림”의 첫 번째 지연), 자신을 대속제물로 삼아 메시야적 저주들을 홀로 젊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새 시대를 강요하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상에서 자기의 오류를 새삼스럽게 깨닫는 가운데, 버림받고 완전히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으로(a forsaken and utterly disillusioned man)죽었다는 것입니다(마27:46). 즉 하나님께서 행할 의도를 전혀 갖고 있지 아니한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스스로 무덤을 판 사람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역사적 예수 탐구』가운데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진술에 보면 Schweitzer는 예수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예수는) 자신을 오실(coming) 인자로 알고서 모든 평범한 역사를 끝장내는 마지막 혁명을 항하여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여나가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바퀴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는 그 위에 자신을 내던졌다 그러자 바퀴가 움직였고, 그 바퀴는 그를 박살냈다. 예수는 종말론적인 상황들을 가져오는 대신 오히려 그것들을 파괴시켰다. 그 수레바퀴는 앞으로 굴렀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위대했던 그 사람. 너무나도 강하여 스스로를 인류의 영적 통치자로 생각하고서 역사를 자기 목적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의 몸은 그 위에 아직도 매달려 있다 그것이 그의 승리요 그의 통치였습니다.

 

실제로 Schweitzer의 관점에서 보면, 마지막 문장 가운데 있는 “강한’이라는 단어보다는 ‘미친”이나 “망상에 속은”이 더 적절한 단어이다. 더욱이,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의 가르침의 종말론적 내용은 예수에게는 중심적일지라도 오늘의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만 예수의 종교적 가치가 1세기 팔레스틴의 유대인으로서 그에 대한 역사적 지식과 무관한 까닭에 예수 자신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비종말론적 가르침으로부터 어떤 윤리적 강조점들을 배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전 짧은 기간만을 위하여 의도된 “한시적 윤리”였을 뿐입니다. 홈스트렴(F. Holmstrom)은 Schweitzer의 정곡을 찔렀습니다.

그러므로 Schweitzer의 결과적(consequent) 종말론은 결과적 자유주의 기독론이다. 그는 형식상으로는 종말론을 옹호하고 있어 보이지만 사실상은 종말론을 배제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윤리는 리출의 윤리주의보다도 참된 기독교로부터 훨씬 더 멀어져 버린 도덕주의로 남아 있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역사이래로 선행이 자칫 하나님의 구원과 대치될 뻔했던 예가 아주 많았습니다. 요새는 아마도 더 그럴 것입니다. 그만큼 선행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행은 어디까지나 ‘하나님보시기에 좋은 선행’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다 인정한다 해도 하나님보시기에 좋은 선행이 아니라면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조금의 자극제는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선행자체가 구원에는 절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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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로마서1:5-6)

 

2000년 전과 오늘의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아버지께 순종하신 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이 오늘날 우리들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들은 복음이란 말, 구원이란 말들이 우리의 귀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셨다는 말,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셨다는 말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귓가로 흘려버리기가 대다수입니다. 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우리들은 아마도 처참하기가 그지 없을 것입니다. 하늘나라와 지옥은 사실(fact)이지, 허구(fiction)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매일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제사는 인간이 어떤 막연한 위로를 받고자 드린 것이 아닙니다. 매일 희생제를 드렸는데, 다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 죽음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그 제물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구약의 제물들은 그냥 죽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사람들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도 그를 믿는 사람들의 죄를 뒤집어썼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를 위해서 오시고(낮아지심), 고난 받으시고(희생), 부활하셨습니다(승귀).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전체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대한민국에 주소를 두고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진정한 국적은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에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우리의 선배들이 순교했고, 고난을 당했습니다. 마귀와 싸우느라고, 사탄의 하수인인 세상 사람들과 싸우느라고 성도들이 처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도 절대로 시민권을 반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은 꼭 쥐고 있었습니다. 이 시민권은 이 세상에서 국적을 초월합니다.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미래는 영원합니다. 살아도 죽어도 삽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소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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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복음/아들의 정체(로마서1:3-4)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바울사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1:1-3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은 말씀이요 곧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오시기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통상 사람의 생각으로는 아들이라 하면 아버지보다 낮은 존재, 또는 못한 존재로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만물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복음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만물위에 계셔서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9:5). 그 아들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이십니다(2:13).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입니다(2:9). 그 아들은 자신의 신성을 벗어버리지 않으시고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습니다. 이 말은 약속의 성취입니다.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는 말은 약속의 성취를 말합니다.

 

사무엘하7:12,13,16 12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6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시편89:3,4,19,24 3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4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 하셨나이다(셀라) 19주께서 이상 중에 주의 성도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돕는 힘을 능력 있는 자에게 더하며 백성 중에서 택한 자를 높였으되 24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저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을 인하여 그 뿔이 높아지리로다

시편132:17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부은 자를 위하여 등을 예비하였도다

이사야11:1-5,10 1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3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4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10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예레미야23:5,6 5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1)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형통하며6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예레미야30:9 너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

예레미야33:14-16 14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이른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15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16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에스겔34:23,24 23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찌라 24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에스겔37:24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마태복음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누가복음1:27,32,33,69 27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32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33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69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누가복음3:23-31 23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31그 이상은 멜레아요 그 이상은 멘나요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요한복음7: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사도행전2: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디모데후서2:8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분명히 말할 것은 주님께서 다윗의 자손이 아니었다면 메시야가 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메시야라고 한 사람들이 종종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이 아니기에 인정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다윗의 후손으로 온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낮아지심입니다. 卑下(비하)의 신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거룩한 영에 의하여 능력으로(ejn dunavmei)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습니다. 어떻게 인정되었습니까? 성결의 영(kata; pneu'ma aJgiwsuvnh")에 의해서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으로(ejx ajnastavsew" nekrw'n)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잉태되었을 때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로마-카톨릭에서 표현하고 있는 아기예수가 아닙니다. 그는 이 세상에 들어오시면서부터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헤롯이 그를 찾아서 살해하려 했지만, 절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성결의 영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입니다. 성결의 영으로 인해 죽음을 벗어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죄와 사망으로 인한 모든 것들을 끊으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의 수혜자들입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일으키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예수님을 성결의 영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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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의 아들에 관한 복음(로마서1:1-3)

 

peri; tou' uiJou' aujtou'/페리 투 휘우 아우투/ 그의 아들에 관하여. 교회란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로 통일되어 있는 특수한 곳입니다. 바울사도나 모든 사도가 전하는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서 한 발자국이라도 옮겨가는 것은 복음에서 심히 이탈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큰 교회당을 가지고 유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바알을 숭배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하나님의 살아있고 명백한 형상이기 때문에 그분만이 우리의 전 신앙의 대상이요 중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지혜를 찾는 것은 무모하고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들의 행태입니다(Calvin). 그리스도인들은 Warfield의 주장대로 초자연주의적(Supematurlistic) 구원개념과 자연주의적 구원개념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자연주의적 구원이란, ‘자력구원론’(Self-Salvation)이라 불리는 것으로서 교회는 이러한 사상을 최초로 주장한 5세기 초 영국의 수도사 Pelagius의 이름을 따라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라고 부릅니다. 이 사상은 사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타고난 능력으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초자연적 이해는 힙포의 주교인 Augustine의 이름을 따라 어거스틴주의라고 하는데, AugustinePelagius의 가르침을 신랄하게 반박했습니다. 절대로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며 영혼을 구원하는데 필요한 모든 권능은 하나님께로 부터라고 했습니다. 어거스틴주의는 제16차 카르타고회의에서 펠라기우스주의를 정죄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승리함으로써 기독교는 죄인을 위한 종교로 인식하였습니다. 그 결과 구원이 필요 없는 의인들에게만 적합한 완전한 윤리체계로 전락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점에 관해서 세계의 모든 종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만 초자연주의적이거나 어거스틴주의적이므로 이런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론적 신앙에서 어거스틴적이어야 합니다.

Augustine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한 구원교리와 교회와 성례전을 통해 베풀어지는 구원교리입니다. 전자는 그의고백록속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표현 속에서 그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제가 더 이상 이 세상의 어떤 약속을 추구하지 않고 당신을 향하도록 저를 이끄셨습니다(8.12). “당신의 은사에 의해 저는 스스로 품어온 뜻이 아니라 당신이 품어 오신 뜻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사역이었음을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와 성례전을 통해서 베풀어지는 구원교리도고백록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행위를 인정하면서 믿음으로 기뻐하면서 당신의 의지의 행위를 인정하면서 믿음으로 기뻐하면서 당신의 이름에 찬양을 돌립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저의 지난 죄에 대해 안심케 해주지 못하곤 했습니다.”(9.4). 그 후에 AugustineAmbrosius에게 세례를 받고나서야 과거의 삶에 대한 모든 걱정이 사라졌습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Warfield는 종교개혁에 대해 개혁교회 입장에서 공정하게 평가했습니다. Warfieldprotestant 종교개혁을 Augustine의 교회론에 대한 은총론의 반역이라고 보았습니다. “protestant 종교개혁은 성례(sacraments)를 통하여 은총이 전달된다고 보는 생각에 대한 반란이었고, 교회의식의 좁은 틈을 통해서만 예정이 조금씩 실현된다는 생각에 대한 반란이었다그 반대로 종교개혁은, 인간이 버림받아서 어두움과 악한 것에 매여 있는 상태에 처해 있으며, 따라서 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Augustine의 생각을 확언한 것이었습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펠라기우스주의가 418년에 열린 회의에서 정죄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멸되지는 않았습니다. 항상 사탄은 교회를 계속 공격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Pelagius의 가르침에 동조하면서 지하로 숨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형태를 바꾸거나 교회의 정죄를 피할 만큼만 수정하면서 교회를 괴롭혔습니다. 이단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유사하게 교회를 표방하면서 못된 교리를 전파했고 전파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행위를 강조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합니다. 이러한 못된 것들을 받아들여 구원을 위한 선행적 은총의 필수성을 거부하는 펠라기우스주의로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주의는 529년에 제2차 오렌지회의에서 거부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회의는 펠라기우스주의에서 교회를 건져낸 반면에, 교회를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선행적 은총의 불가항력성을 거부하는 반반(semi-semi) 펠라기우스주의로 인도했습니다. 이 신학사상은 Gottschalk/고트샬크, Bradwardine/브래드워딘, Wycliffe/위클리프, Hus/후스와 같은 사람들의 시대를 지날 때까지 계속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Aquinas에 의해 체계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트렌트공의회(1545)에서 반()종교개혁과 연합하여 Roman-Catholic의 공식적 입장으로 선포되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Roman-Catholic神人(신인) 공조적 구원론(synergistic)을 거부하고, 후기 어거스틴의 탁월한 통찰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영감어린 통찰로 돌아갔습니다.

펠라기우스주의는 어떤 형태를 취하든지, 근본적으로 오직 그리스도-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리에 대한 위협으로서, 인간은 누구나 적어도 자신을 구원시킬만한 분량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비록 처음부터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최초의 은혜에 협력하여 그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므로, 교회는 언제나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성경의 원리가 여전히 구원의 유일한 궁극적 근거라는 것을 보증하는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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