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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도마(사도행전28:30-31)

 

편견/偏見/prejudice이란 한쪽으로 치우친 공정하지 못한 생각이나 견해를 말합니다. 어떤 것을 보더라도 이미 선입관이 서 있어서 공정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 편견입니다. ‘저 인상 봐! 분명히 저 사람은 성격이 거칠 거야.’하고 미리 그 사람을 평가하게 됩니다. ‘저 여자 몸매와 얼굴 좀 봐. 저 여자는 분명히 착할 거야.’라고 평가합니다. 두 평가는 잘못된 평가입니다. 공정한 평가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입관을 가지고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편견의 대상이 된 사람은 아무런 이유 없이 피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피해자가 바로 도마입니다. 도마는 누명을 쓴 사도입니다. 웬만한 주석가나 설교자들은 그에 대해서 한 마디도 좋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도마는 의심하는 자, 도마는 불신앙 자, 도마는 열등한 사람, 도마는 우울한 사람, 도마는 믿음이 없었던 사도, 도마는 확인주의자 라고 도마에 대해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평가입니다.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6:25). 주님의 이 말씀에 ‘녜’하고 절대로 염려하지 않겠습니다. 말할 수 있습니까? 만일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사람일 수 없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셔도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도마는 회의주의자도 아닙니다. 물질주의적인 심성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상실한 사람은 더욱 아닙니다. 우울한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도마는 개성이 뚜렷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사람들의 한 면만 보고 잘못 평가한 것입니다.

도마는 히브리이름입니다. 아람어 !/aT;/thā’ôm/쌍동이란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따라서 Qwma'"/thomȃs란 쌍둥이란 말입니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에서 디두모는 헬라어로 역시 쌍둥이라는 뜻으로 ‘디두모’는 도마의 별명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총 여덟 군데에 도마가 나와 있습니다(마10:3, 막3:18, 눅6:15, 요11:16,14:5,20:24,26,27,28,29,요21:2, 행1:13). 공관복음에는 도마의 이름밖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도마의 면면을 약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14: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20:24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1: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사도행전1:11을 보면 도마는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도마는 제자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는지 어떤 말도 없습니다. 그의 이름은 주님께서 열 두 제자를 택하셔서 둘씩둘씩 보내실 때입니다. 누구나 그랬듯이 도마의 인생이 변화된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고서였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평범한 도마의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사자가 되었습니다. 사자는 사자로되 지존자(至尊者)의 사자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질병을 제어할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았습니다. 귀신들도 자신에게 항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은혜를 얻었습니다. 마태복음10:2-4절을 보면 열 두 사도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가룟 유다’ 이 배열은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배열입니다. 도마는 마태와 함께 묶여있습니다. 즉 마태와 도마는 공통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세리 마태입니다. 그런 자와 함께 묶여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세리는 유대사회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부류였습니다. 그들은 조국 유대를 생각하지 않았고, 오직 자신들의 안일만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 마태와 같이 묶여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주님께서 택하셨구나 하는 은혜입니다.

도마는 사도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열 두 사도 모두가 겪을지도 모르는 슬픈 일을 자기도 기꺼이 무릅쓰겠다는 뚜렷한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주님 죽을 때 같이 죽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일으키시려고 제자들더러 베다니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을 만류했습니다. 그곳의 종교지도자들이 주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설득하여 유대로 가지 못하도록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도마는 비록 죽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주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못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이 말로 인해서 도마는 온갖 못된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주님께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예수와 함께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 자신들 모두 거기서 죽을 수밖에 없 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유대로 올라갔습니다. 생명의 위협이 있을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겠다고 한 비장한 각오입니다. 물론 도마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적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베다니에 가셔서 무슨 일을 하실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러이러해서 저러저러하다’라고 브리핑을 하지 않으십니다. 가서 현장에서 보고 인식하기를 원하셨기에 웬만해선 out-line만 말씀하시지, 자세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도마의 생각은 살 수 있는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로 주님께서 U-turn하시는 것이 안타까워서 한 말이지, 회의주의자여서 죽으러가자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도마는 다만 주님의 마음을 언제나 빨리 알아차려서 행동하고자 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과의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과 헤어진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다시피했습니다. 제자들 모두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와 그가 그들을 위하여 예비할 처소의 기쁨을 말씀하시고, 자기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때 도마가 나서서 우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며, 거기로 가는 길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심히 슬퍼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 모두의 생각이었습니다. 이윽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거기 있지 않았습니다(요한복음20:24).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만났다고 하자 나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로 도마는 믿음이 없는 자라고 낙인이 찍혀버렸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라고 별명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를 만났을 때에 도마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감히 손을 넣지도 않고 확인도 하지 않고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을 너무 쉽게 비교분석합니다. 베드로는 어떻고 바울은 어떠하며 도마와 빌립은 어떻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편견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제자들 전원은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부활하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거기에서 거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다만 그러한 실망 투성이의 제자들을 사용하셔서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신 주님을 항상 찬양해야 합니다. 전혀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믿게 하시고 그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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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다대오(사도행전28:30-31)

 

다대오는 사도였지만 성경에서 역시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대오에 대해서

마태복음10: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마가복음3: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누가복음6:16 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사도행전1: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요한복음14: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다대오/Qaddai'o"/Thaddaȋos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과(KJV의 마10:3에는 "다대오라는 별명을 가진 렙베오”라고 했다) 질문을 한 적이 있는 것과 예수께 몇 마디의 질문을 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열 두 사도 중의 하나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랑스러움과 온유한 기질이라는 것입니다. 다대오는 열 둘 중에 가장 막내였습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것들은 자기 자신을 정의합니다. 자기자신을 현재의 모습으로 규정지으며, 자기 자신과 그 외의 모든 것 사이를 구별해주는 속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경역시 자기를 정의하고 현재의 모습으로 규정지으며 다른 모든 글들과 자기 자신을 구별해주는 속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는 과정의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성경적 신앙은 언제나 책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Robert L. Raymond 2004, 107).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자신의 교회를 위해 장차 있을 모든 복음전파를 위한 원천과 기준, 즉 사도의 직무가 될 공식적인 권위체계를 세우셨습니다. 주님은 사도들이 말하고 기록할 말씀들을 인정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크다 작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눈으로만 보고 인지한 것이지, 그 이상의 것들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볼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크다 작다는 표현은 단지 어떤 像(상)에 대한 것만 인지한 것이지, 그 외의 것에 대한 認知(인지)는 제외 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도들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성경 몇 줄 정도밖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도들을 선택하실 때 주님께서는 기도하신 후에 선택하셨습니다. 후세의 우리들은 이러한 것을 충분히 감안해야 합니다.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음을 우리들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사도들은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했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인명사전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는 오늘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유명한 사람들은 그 일부분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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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사도행전28:30-31)

 

세베대/는 Zebedai'o"/Zebedaȋos는 히브리어 hy:d]b'z]/zebad-iāh에서 유래했으며 ‘여호와께서 주셨다’입니다. 세베대는 갈릴리의 어부였습니다. 세베대는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입니다(마4:21,22, 마10:2,26:37, 막1:19,20, 눅5:10, 요21:2). 세베대는 살로메의 남편이었습니다(마27:56, 막15:40,16:1). 세베대와 살로메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는 그의 형제 요한과 함께 예수님을 따르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막1:19, 마4:21, 막1:29, 눅5:10). 마가복음3:17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와 그의 형제 요한에게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을 지어주셨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12제자 중에서 특별히 임원에 속했습니다. 중요한 곳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예수님께서 동행하게 하셨습니다.

반전/反轉이란 어떤 상황에서 완전히 뒤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세베대의 아내 살로메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을 앞두신 시점에 그의 두 아들 요한과 야고보를 위해서 청탁을 합니다.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 중에서 제일먼저 순교를 합니다. 이런 것을 놓고 볼 때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이 연결된 우리의 삶이기에 세상 사람들과 다른 시각(視覺)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으면 형벌 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살로메는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살로메는 성경에서 모범적인 인물입니다. 비록 자식들을 위해서 청탁은 했지만, 살로메의 믿음은 확실했습니다.

유대의 관습 중 하나는 아들이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는 일입니다. 따라서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았습니다. 야고보가 성경에 처음 나오는 것은 주님께서 기적으로 베드로가 고기 잡는 것을 도와주실 때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바로 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는 다시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요21:2). 세베대의 두 아들들은 참 특이했습니다. 그 중에서 요한은 항상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가장 친밀했습니다. 이렇게 주님과 더불어 친구로서, 동반자로서 지냈던 조건들이 야고보로 하여금 사도직에 올랐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도직의 권위보다는 그것의 자질에 더욱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성질이 꽤 급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한 사람은 먼저 순교하게 하시고, 또 한 사람은 오래도록 남게 하셔서 핍박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토록 하셨습니다.

야고보의 탁월함은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대략 14년 후에 헤롯 아그립바가 유대인들에게 인심을 얻기 위해서 교회 중 몇 사람을 죽이려 했을 때 야고보가 먼저 죽습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교회 중에서 눈에 띄고 열심을 내는 사람을 죽였을 것입니다. 당시에 교회에서 열렬하게 일하던 사도는 베드로와 야고보였습니다. 아마도 당국에서는 야고보가 더 유능한 사람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범적으로 야고보를 죽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야고보는 사도들 중에서 제일먼저 순교를 당합니다. 이 세상은 성도들을 죽이면 교회가 없어진다고 생각했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성도들을 죽였고, Roman-Catholic이 성도들을 죽였으며, 무슬림들이 성도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라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헤롯에 대한 적개심을 느끼는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헤롯은 야고보와 베드로를 죽으면 예루살렘교회가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야고보는 스데반에 이어 초대교회에서 두 번째로 순교자의 영예를 얻습니다. 야고보의 비참한 죽음이 유대인들을 기뻐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많이 변질되었습니다. 세속화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죽음을 성도들이 두려워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이 세상의 재물을 좋아하며, 이 세상의 것들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이 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사도들이나 성도들은 이 모든 것들을 주님을 위해서는 초개처럼 여겼습니다. 순교를 기뻐했습니다. 고난과 환란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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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바돌로매(사도행전28:30-31)

 

바돌로매/Barqolomai'o"/Bartholomaȋos는 아람어 바르탈메(탈메의 아들)의 음역입니다. 바돌로매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마10:3, 막3:18, 눅6:14, 행1:13). 바돌로매는 납달리 가문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원래 요한이었으나 주님께서 세베대의 아들인 그의 사랑하는 요한 때문에 바돌로매로 개명했습니다. 바돌로매는 나다나엘(하나님의 선물)과 동일인입니다.

탈메의 아들이란 이름은 예수그리스도 시대에 흔하지 않은 이름입니다. 바돌로매란 자신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그의 아버지를 나타내는 이름입니다(Herbert Lockyer 1982, 94). 웹스터 사전에서 부칭(父稱)은 아버지나 부계조상의 이름과 관련된 접두사(接頭辭)나 접미사(接尾辭)를 부가하여 형성된다고 했습니다. Johnson은 John의 아들(son)입니다. 바돌로매는 44년에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바돌로매를 보시고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1:48,50)고 하셨습니다. 바돌로매는 자신의 모든 생각들을 속속들이 읽히고 있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 양을 만납니다. 안드레와 요한이 그분을 따르며 안드레는 그의 형제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빌립을 만나십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빌립과 안드레가 주님과의 사제 간의 높은 단계로 맺어지기 전, 그들에게는 우정의 유대내지는 친척관계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두 사람은 모두 신실하고 올바른 유대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구세주로서 오신 그분을 기꺼이 맞이한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소개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빌립은 자기가 메시야에 대해서 얘기했던 것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있는 나다나엘에게 두려움과 망설임 없이 그가 보고 들을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은 귀를 기울이면서 듣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우리가 나사렛 예수를 만났다”고 외치면서 나다나엘을 찾아갔을 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는가?”(요1:46)라고 했습니다. 나사렛은 조그마한 벽지였습니다. 그리고 평판이 별로인 동네였습니다. 나사렛/Nazarevq/Nazarêth은 하부 갈릴리의 마을입니다.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지역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는 3일 길의 거리였습니다. 디베랴에서는 8시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나사렛은 탁월한 인물을 낼 수 없는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지역입니다. 즉 나사렛에서는 큰 인물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업신여기고 무시를 당하는 동네에서 나온 사람이 어떻게 우리의 주의를 끌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작은 동네였습니다. 메시야가 나사렛에서 나셨다는 소식은 우선 나다나엘에게 믿을 수 없는 느낌이 들게 하였습니다.

편견이나 선입관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커다란 장애가 됩니다. John Fitzgerald Kennedy를 미국의 자존심이라 불렀습니다. 미국인들이 Kennedy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을 큰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존재가 어디 있습니까? 어떤 특정한 사람, 특정한 지역이 유명한 것이 아닙니다. 편견입니다. 편견은 위험스러운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과 그의 진리에 대한 천박한 거부입니다. 이러한 거부는 진리에 이르는 길을 막습니다. 동서양의 역사에서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이 편견 때문에 우리나라가 지금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큰 상처를 입었었고, 또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편견은 나쁜 것입니다. 다행히 ‘와보라’는 빌립의 초청에 응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인생을 실패해서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서 그의 인간됨과 생활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맨 처음 뵈었을 때 그분의 ‘전지하심’에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나다나엘은 자기 주님의 ‘전능하심’에 깊은 경외를 느꼈을 것입니다.

사도들 중에 성경에 많은 활약이 나오지 않은 사도들이 많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바울 등은 성경에 지면을 많이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저희들을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들 보기에 약하고 강한 것입니다. 주님의 보시기에는 강하고 약한 사도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인식하기에 따라서 이 세상은 많은 편견에 사로잡히기 마련입니다. 열두 사도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졌지, 몇 명의 사도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진 것은 아닙니다. 복음의 역사에는 숨겨진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드러난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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