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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심정을 전하며(로마서1:1-7)
로마서1:1-7을 보면 먼저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전으로 즉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Roma교회에게 자신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주안에 종이요 사도로 부르신 목적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택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1절). 그런데 그 복음은 구약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복음이었습니다. 구약성경 곳곳마다 그의(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수천 년 전부터 약속된 복음이었습니다(2절).
바울사도는 다시 이 아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 아들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고 했습니다. 즉 모세와 선지자들의 예언대로(구약), 메시야는 다윗의 혈통이라는 것입니다. 성결의 영으로는(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나사렛의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4절). 그(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자신도 은혜의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직분을 주신 이유는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들로 하여금 믿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5절). 따라서 너희(로마교회)도 그들 중에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입니다(6절). 그리고 Roma의 모든 교회들에게 삼위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기원했습니다(7절).
Roma시는 로마제국의 중심지요 수도로서 사도 바울시대에 약 주민이 100만 명이 넘었다. 이들 가운데 유대인이 약 5만 명 있었습니다. 이들은 Roma시의 경제적 가능성에 이끌려 와서 정착하게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집회 장소는 유대교 회당이었습니다. Roma시에는 여남은 개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거대한 인구 층에 속했습니다. 주후 l세기의 40년대에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이주해 옴으로써 이 도시에 그리스도교가 또한 발을 붙이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유대인 사회에서 유대교인과 그리스도교인 사이에 종교적 소요가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이 때문에 주후49년 글라디우스 황제 때에 유대인들은 Roma시에서 추방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추방을 당한 사람들 가운데 아굴라와 브리스길라(행18:2)도 끼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Nero황제가 등극할 때에(54년) 추방령은 해제되었습니다. 그래서 추방당한 자들이 대량으로 귀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에 비유대인들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50년대 중반부터는 Roma시의 그리스도 교회의 인적구성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소수였습니다. 여기에 교회가 아무런 알력과 충돌이 없기를 기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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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라는 나라
주전753년에 로물루스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는 Roma. 로마는 서양문명을 대표하는 도시입니다. 원래 로마는 로마 중심부에서 시작된 작은 도시국가였습니다. 하지만 차츰 세력을 넓혀갔습니다. 서쪽으로는 영국, 동쪽으로는 중동 지역,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사하라 지역까지, 북쪽으로는 북유럽 대부분을 정복하여 Roma제국을 건설했습니다. Roma인들은 민족이나 국가에 상관없이 좋은 문화를 모두 받아들여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스, 에트루리아, 이집트, 페르시아, 지중해 연안 나라들의 문화를 전부 흡수했습니다. Roma인들은 자연신을 숭배했었습니다. 그들은 신들의 형상(우상)을 중심하여 제사와 특별한 연회에 의해서 소위 신들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모든 Roma인은 식사 때마다 농장과 식품창고의 정령들에게 봉헌물을 바쳤습니다. Roma인들은 공화정시기(주전509-27)에 Greece신화를 받아들이고 그 신들을 마치 고유의 신이었던 것처럼 섬겼습니다. (우상)을 중심한 제사와 특별한 연회에 의해서 “신들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Roma에서 Jupiter(Greece/Zeus)는 “가장 위대한 최고의 신”으로 여겼습니다. Roma의 Capitoline 언덕에 세워진 신전은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Jupiter는 번개와 천둥으로 그의 뜻을 알려 준다고 생각했으며, 승리한 장군이나 황제는 Jupiter신전을 향하여 개선행진을 하였습니다. 이 행진에서 포로와 약탈물 들을 과시하였습니다.
여신 Juno(Greece/Hera)는 여자들과 결혼의 신이었습니다. 6월하반기에 결혼시기로 적절하다고 여겼습니다.
軍神 Mars(Greece/Ares) 는 Jupiter 다음이었습니다.
海神 Neptune(Greece/Poseidon)은 바다와 강의 신이었습니다. 그 사제들은 “다리 건설자”(라틴어로pontifex)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대사제(pontifex maximus)는 선출된 인물로서 종교력(層)과 제사를 주관하였습니다. 그 호칭은 계속 존속하였고, 오늘날 교황주의자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Mercury(Greece/Hermes)는 상인과 도둑의 신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결합이었습니다.
Venus(Greece/Aphrodite)는 사랑과 미의 여신이었습니다. 고린도에는 수많은 신전 창기들이 종교의식의 일부로서 그들의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인간의 내면세계란 인간의 물리적인 실체를 외부로 보고, 그에 대하여 밖으로 나타내지지 않은 추상적인 속 부분을 말합니다. 내면세계란 주로 인간의 정신세계를 말합니다. 사람의 내면세계는 사람의 행동방식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어떤 내면세계가 있느냐에 따라서 외부로 나타나게 됩니다. 역사 속에서는 세 가지의 인간의 지성적 관념과 문화생활과 정치적 생활 속에 녹아있는 노선이 있었습니다. 철학적 노선, 과학적 노선, 종교적 노선입니다. 철학적 노선은 삶의 기본적 문제에 대한 지적해결을 추구합니다. 과학적 노선은 두 부분으로서 첫 번째는 물리적 우주의 얼개와 그리고 이 얼개가 발견한 것을 기술에 실재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과학이 나아갈 방향은 과학자들의 철학적 세계관이 결정합니다. 종교적 견해들도 역시 개인생활의 방향과 사회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이런 면에서 로마는 오늘날의 서구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서구의 문명이 미치는 곳에 로마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Roma는 모든 인간이 직면하는 기본적 문제에 대해서는 진정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Greece가 주전146년에 Roma의 통치를 받게 된 후에 로마의 사상과 문화는 대부분 Greece의 사고방식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Greece들은 도시 국가(polis)에 사회를 세우려 했습니다. 도시국가는 시민으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모든 가치는 polis와 관련되었습니다. 그래서 Sōcratēs(주전469?-399?)는 죽음이 아니면 자기에게 의미를 주었던 것(polis)에서 추방되는 것을 선택해야 했을 때, 죽음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polis는 한 사회를 세우기에 충분한 기반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무너졌습니다. Greece들과 그 후 로마인들은 또한 자기들의 신들을 기초로 삼아 사회를 세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한낱 사람들이 만들었던 것이었기에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Greco-Roman의 사고방식에서 신들은 인간들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인식하고 있는 신은 오늘날처럼 인간이 확대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엄밀하게는 신이 아니었습니다. Greece들이나 Roma인들에게 무한한 신은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지적으로 충분한 참조점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가치 계는 개인적, 정치적 삶의 긴장을 견뎌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많이 섬겼던 신들이 다 모여도 그들의 삶, 도덕, 윤리의 궁극적 결단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들 신들은 자기들을 만든 사회에 의존했고, 이 사회가 무너졌을 때, 신들도 함께 몰락했습니다. 그래서 엘리트주의적 공화국에 입각한) 사회의 조화를 노린 Greece와 Roma는 실패한 사회였습니다.
Julius Caesar(주전100-44) 시대에 로마는 씨저에 권력이 집중된 권위주의적 체제로 돌아섰습니다. 씨저 시대 이전에는 원로원이 질서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무장한 강도떼가 로마시를 공포에 떨게 했고, 권력을 노리는 경쟁자들 때문에 정부의 정상 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 이기심이 사회의 이해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좌절 속에서 권위주의적 정부를 받아들였습니다. 따라서 Roma가 씨저를 선택한 것은 공인된 독재였습니다.
Julius Caesar가 죽은 후에 Caesar Augustus라고 불린 Octavianus(주전63-주후14)는 씨저의 질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입양되어 씨저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Roma의 시인 버질(주전70-19)은 Augustus의 친구였는데, Augustus가 신에 의해 임명된 지도자이며 로마의 사명은 평화와 문명을 세상에 가져다주는 것임을 보일 심산으로 ‘Aeneid’를 기록했습니다. Augustus가 평화를 세우고 외부적으로는 입헌적 형식을 따랐으므로 로마와 모든 계층은 정치체계, 상업 그리고 일상생활의 일들의 기능을 회복하고 확고하게하기 위하여, 기꺼이 그에게 모든 권력을 주었습니다. 주전 12년 이후로 그는 국가종교의 수장이 되어 최고신관(Pontifax Maximus)의 칭호를 가지고 ‘로마의 정신과 황제의 수호신’을 숭배할 것을 모든 사람에게 촉구했습니다. 후에 이것을 제국의 모든 백성에게 강요했고, 그 이후의 황제들은 자신을 신처럼 여기고 제국의 백성을 지배하려 했습니다. Augustus는 도덕과 가정생활에 관하여 입법하려 했고, 그 뒤에 나타난 황제들은 법률적 개혁과 복지계획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신은 토대로 삼기에는 빈약하였고 따라셔 로마는 몰락했습니다.
Roma제국은 규모나 군사력이 대단했습니다. 로마의 도로는 모든 유럽, 근동 그리고 북부 아프리카에 뻗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군사력은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들처럼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적을 침략하기 위해서 도로부터 냈습니다. 그리고 노도처럼 밀어붙였습니다. 그리고 제국을 확장했습니다. 하지만 그 제국은 힘으로만 유지되는 제국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황제를 섬기지 않는 것에 매우 분개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무너졌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국가는 영원히 존재할 수가 없었습니다.
열 두 사도(사도행전28:30-31)
‘사도’/ajpovstolo"/apôstolos는 ‘보내다’를 뜻하는 동사 ajpostevllw/apostêllo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기본적 의미는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도라는 말이 관용화(慣用化) 되어서 아무데나 ‘사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칭 자신들이 ‘사도’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거기에 ‘사도직’을 실제로 계승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모두 틀린 말이며, 틀린 생각들이고, 망상에 사로잡힌 자들의 사상입니다. 왜냐하면 사도의 직책이란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시고 한정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란 계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끝나버린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기독교사상에 있어서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문학에 있어서 상당한 분량이 그들에게 할애되고 있으며, 복음이 전해지는 지역에 그들의 이름이 반드시 들어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이 사도들에 관해서 우리에게 전해 주지 못하는 내용이 더 많습니다.
사도들의 인척관계를 우리들이 훑어볼 때 다음과 같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는 요나 즉 요한의 아들들입니다(요1:42, 21:15). 야고보와 요한은 세베대와 살로메의 아들들이었습니다(마20:20, 27:56, 막15:40,16:1). 레위 마태는 알패오의 아들이었습니다(막2:14). 작은 야고보도 역시 알패오의 아들이라 불리고 있기 때문에 그와 마태는 형제인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9:25과 마가복음15:40절을 보면 글로바(눅24:18절의 글로바가 아님)의 아내 마리아는 작은 야고보의 모친이며, 따라서 글로바는 알패오로 추정합니다. 유다는 야고보의 형제가 아니라, 다른 야고보의 아들입니다(눅6:16). 가룟 유다는 시몬의 아들이었습니다(요6:71,13:26). 가룟이란 말은 유다에게 붙은 게 아니라 시몬에게 부속되었는데, 이는 아버지 시몬과 아들 유다가 유대의 가룟 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동일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거주 지역은 주로 갈릴리였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과 빌립은 벳세다에서 살았습니다(막1:16-24, 요1:44,12:21). 이들 넷은 나중에 가버나움에서 살았습니다(막1:21,29).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살다가 후에 에베소로 옮겼습니다(행3:1,15:6, 갈2:1,9). 마태는 벳세다에 속해 있었습니다(막 2:1,14). 나다나엘이라고도 하는 바돌로매는 갈릴리의 가나에서 살았습니다(요21:2). 도마, 작은 야고보, 유다 및 열심당원 시몬은 갈릴리에서 살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사도 중에서 유일하게 유대지방에서 살았습니다.
사도들의 직업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어부였습니다(막1:16,19). 마태는 세리였었습니다(마9:9). 다른 일곱 제자들의 직업은 성경에서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의 상호관계는 열 두 제자는 서로 관련되어 있었고, 갈릴리의 예수 그리스도와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형제지간이었고,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했으며, 또한 작은 야고보와 마태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빌립과 바돌로매도 아마 형제지간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안드레가 그의 형제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였었는데, 빌립도 그의 형제를 그분에게 인도하였던 것 같습니다(요1:40-45). 만약 세베대의 아내였던 살로메가 동정녀 마리아의 누이였다면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의 사촌입니다(요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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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사도는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면 공식적인 전도여행이 모두 끝나게 됩니다. 바울사도는 가장 늦게 사도가 되었지만, 어쩌면 가장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방인의 사도이고,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라고 딱 선을 그을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도 이방인을 위해서, 바울사도도 유대인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특히 로마서를 보면 전반부에 바울사도가 얼마나 유대인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먼저’여야 한다는 생각에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들만의 편협한 생각은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과 율법 중에서 그들은 율법의 우월만 생각했습니다. 복음이 우선이어야 했는데, 율법만을 생각하고 강조하고 지키려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만 바라보았지, 갈보리산은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바울이 위대하다고 생각했지만, 바울연구가 처음부터 열정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스위스의 신학자인 Franz Overbeck/1837-1905은 Marcion이 바울을 잘못 이해했지만, Marcion만큼 바울을 이해한 사람도 그때까지만 해도 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울연구가 빨리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종교개혁시대 이전에는 Roman Catholic으로 인해서 성경연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통만 강조했습니다. 성경보다 교황청이 위에 있었기 때문에 성경을 연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성경연구가 이러다보니 성경연구에 장애를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더구나 행위와 전통을 강조하는 때에 바울은 ‘믿음으로’를 강조하다보니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Augustine 이후로 황무지와 같았던 바울연구가 비로소 종교개혁으로 활발해졌습니다. 특히 Martin Luther의 바울의 해석 ‘오직 믿음으로’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사도는 가이사랴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숨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지만 예루살렘에 바울이 나타나기만 하면 살해하려고 하는 유대인이 허다했습니다. 어쨌든 사도바울의 일행은 여행의 마지막 단계에 돌입하였습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한지 며칠 만에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짐을 꾸렸습니다. 그들은 약 100km이상을 가야 했습니다. 갈 때 가이사랴의 그리스도인 몇 명이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편안하게 환대를 받을 수 있는 예루살렘의 어떤 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머물 집은, 구브로의 예루살렘 교회의 설립 멤버들 중 한 사람이었던 Mnason의 집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적 성격이 뚜렷한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무리를 자기들의 집에 맞아들일 준비를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사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일행은 예루살렘 교회의 헬라파에 속했을, 나손으로부터 환대를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에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부딪히는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도 그 부분에서는 왈칵 개방적이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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