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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Roma행(사도행전27:1-8)

 

1 우리의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행선할쌔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음을 허락하더니 4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5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성에 이르러 6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성에서 가깝더라

 

우리라는 것으로 보아 바울사도는 혼자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 곁에는 항상 바울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사도는 행복한 사도였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주님이 함께 하시며, 그리고 늘 그 곁에 누가와 그외 다른 성도들이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21:18에서 ‘우리’라는 말이 나온 후로 뚝 끊겼다가 다시 시작합니다.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아마도 바울이 구금되어 있었을 때 누가는 가이사랴 근처에서 바울사도의 동향을 살폈을 것입니다. 2년간은 바울사도가 구금되어 있을 때였습니다.

바울사도는 Roma의 황실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Roma의 행정관은 Roma에 보내기로 작정하여 모든 준비를 끝냈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죄수 몇 명과 함께 Roma로 출발했습니다. 바울사도를 호송할 책임자는 Augustan부대 소속의 백부장 Julius였습니다. 그는 Roma까지 가는 동안에 다수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출발하여 그들이 탄 배는 소아시아 북서쪽의 Lesbos섬의 맞은 편에 위치한 Mysia의 항구도시인 아드라뭇데노에 속한 배였습니다. 이 배는 연안을 항해하는 배로서 아시아 각도의 여러 항구에 머무를 예정이었습니다. 이 항구 중에서 Roma로 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중에 마케도니아의 데살로니가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승선했다고 했습니다. !Arivstarco"/Arîstarchos는 역시 바울의 신실한 여행 동반자였습니다. Arîstarchos는 에베소에서 소요에 연류되었습니다. Arîstarchos는 에베소에서 바울의 전도로 말미암아 자신의 사업에 위협을 느낀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폭동을 선동했을 때 흥분한 폭도들에게 잡혀 연극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폭동은 진정되고 그는 무사히 풀려났습니다. Arîstarchos는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에 동참했습니다(행20:4). Arîstarchos는 바울과 함께 로마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습니다(골4:10). 이런 신실한 동역자들이 항상 바울 곁에 있었습니다.

바울의 Roma행은 결코 외롭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열악한 교역자들은 인물난입니다. 대형교회에는 일할 사람이 넘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형교회, 어려운 교회는 사람이 없어서 인물난입니다. 참 아이러니 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점점 현대교회는 멀어져 가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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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이미’와 ‘아직’의 구속적 긴장(사도행전26:1-3)

 

박형용 교수는 바울과 오늘날 신학자들은 바울과 똑같은 구속역사의 긴장 속에 처해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구속사역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되돌아보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는 형편에 있었고, 오늘날의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되돌아보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는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 무려 2000이란 간격이 있지만 아직도 똑같습니다. 따라서 바울사도와 우리는 같은 긴장 속에 있습니다. 바울사도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된 구원사건이 어떻게 인간과 세상에 적용되느냐에 관심을 기울여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오늘날도 같습니다. 바울사도와 함께 ‘말세를 만난’(고전10:11)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의 사건을 되돌아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리는’(살전1:10) 사람들로서 미래를 내다보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사도와 우리는 ‘이미’와 ‘아직’/already-not yet 이라는 구속역사적 긴장 속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사도는 현실만의 말을 하지 않고, 미래적인 요소를 반드시 말했습니다. 우리 역시 구속의 성취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효과가 있느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만 미래적인 요소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순례자(pilgrim)로 살아가야 합니다. pilgrim은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짐이 가벼워야 빨리 옮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성도들은 그러지를 못하게 됐습니다. 이 땅에 너무나 많은 미련을 두고 있습니다. 이 땅에 좋은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어서 천국으로 떠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mammoth 교회당, 상아궁전과 같은 집들, 화려한 agit, 최고급 승용차 등이 너무나 좋아서 쉽게 떠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마치 절대로 천국이 없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오늘의 우리들은 천국과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과 천국이 불연속선에 있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뒤돌아보고 재림을 기다리는 구속역사의 입장으로 볼 때 긴장이 되지 않습니다. 즉 바울시대보다 현시대는 많이 세속화되었습니다. 성도들은 현실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임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이세상과 오는 세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현실에 너무나 미련을 두고 이 세상을 천국처럼 여긴다고 하면 큰 문제입니다. ‘이미’와 ‘아직’사이를 모르고 현실에만 안주하고 있다면 더는 성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어떻게든지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는 Roma에 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말한 죄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의 사정에 밝은 Agrîppa왕 앞에서 변명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그의 원수들이 격렬하게 비난을 퍼부었을 때도 담대하게 조용히 변명했고, 지혜와 능력으로 그들의 고소내용을 반증했으며, 그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 깨끗한 양심으로 그들을 대하였습니다. 아직 그의 사명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사명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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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ce인과 유대인(사도행전25:6-12)

 

Greece에서 조국을 떠나 의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의미하는 diaspora는 오늘날에는 유대인만의 전용어처럼 여기고 있지만, 조국을 떠나 외국으로 이주하는 일에서는 Greece족이 유대인들보다 먼저였습니다. 하지만 Greece인의 이주와 db대인의 이주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Greece인은 아무것도 없는 땅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을 기지로 하여 수공업이나 무역업으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미 존재하거나 번영하고 있는 도시로 이주하여 수공업이나 무역업, 금융업으로 부를 축적했습니다. 주전1000년에 시작된 그리스인들의 이주로 지중해 세계는 서방과 동방을 막론하고 곳곳에 Greece인 도시가 건설되었지만, 유대인이 건설한 도시는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통일왕국이었기 때문에 굳이 가나안을 떠나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주전주후를 아우르는 시대에도 지중해의 동방에 있는 여러 도시에는 대규모 유태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Roma를 비롯한 서방도시에는 동방만큼 규모 가 큰 유태인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Pax Romana의 확립과 사회간접자본의 보급은 서방의 경제력을 향상시켰습니다. 그때까지는 불균형했던 동방과 서방의 경제력이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지배자인 로마로 부가 집중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실제로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로마 제정시대에 제국의 3대 도시는 Roma와 Alexandria와 그리고 Antioch이었습니다. 그러나 서방은 Roma였고, Alexandria와 Antioch은 동방이었습니다. 지배자인 Roma인 자신이 제국전역의 부의 흐름은 중요시했지만, Roma에만 부가 집중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속주세도 피지배자가 지배자 Roma에 바치는 상납금이 아니라 그들의 거주지역을 포함한 제국전역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안전보장비였습니다. Augustus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서방의 경제력향상은 유대인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민족의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는 조건이 서방에도 갖추어진 것입니다. 이 시기에 황제에 즉위한 사람이 Tiberius였습니다.

불신자들 편에서 보면 유대인들이 편협하게 보였습니다. 물론 당시의 그리스도인과 유대인들을 비교할 때도 역시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섬겼고, 돈을 좋아했으며, 하나님을 수시로 떠난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헬라인과 유대인들은 서방에서 양대 산맥처럼 행세하였습니다. 유대인은 유대인대로, 헬라인은 헬라인대로 서로 자신들이 잘났다고 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Roma내에서 많은 충돌이 있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지식이나 권력, 그리고 재물들은 바람 앞에 겨와 같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Roma의 영광, 헬라의 영광, 유대의 영광은 지금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 영원한 것을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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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시민권(사도행전22:24-29)

 

오늘날 우리나라는 주민등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민등록이란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가지고 있는 증명서입니다. 주민등록은 보호와 통제입니다. 따라서 주민등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헌법에 따라야 하고, 반면에 외국인과 달리 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나라의 국민이 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피’와 ‘귀화’입니다. 그 나라 국민에게서 태어나면 태어나자마자 그 나라의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귀화’는 외국이면서 한국의 국적을 갖고 싶을 때 귀화법에 적용된 사람들을 절차에 의해서 국민으로 받아들인 사람을 말합니다. 태어나기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귀화를 했다면 한국민의 적용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시대의 시민은 주로 Greece와 Roma의 시민권에 대해서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Greece와 Roma의 시민권을 적용시키는데 달랐습니다. Greece의 도시국가인 Athens는 ‘피’가 시민권을 가늠했으며, 반면에 Roma는 ‘뜻을 같이하는 자’에게 시민권을 부여했습니다.

로마인이야기를 쓴 Shiono Nanami에 의하면 Athens인들은 Athens 영토 안에서 둘 다 Athens 태생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만 ‘아테네 시민’이었습니다. Athens의 황금시대를 쌓아올린 대정치가 페리클레스(Perikles/주전495-주전429)도 두 번째 배우자가 Miletus 태생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Athens시민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Perikles가 세운 업적에 보답한다는 이유로 특별대우를 받아서 겨우 시민권을 얻었다고 합니다.

부모가 둘 다 Athens 태생인 Socrates는 Athens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 Macedonia 태생인 Aristoteles는 뤼케이온이라는 학교를 창설하는 등 Athens 문화 창달에 크게 이바지했는데도 시민권이 없었습니다. Athens가 이렇게 폐쇄적인 이유는 Athens가 민주정체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주정체는 모든 유권자가 평등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외국 출신에게도 평등한 권리를 주면 기존시민들의 반발을사서 언젠가는 사회불안의 원인이 될 게 뻔합니다. 그래도 민주정체를 시행하는 한. 시민은 모두 평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따라서 Athens는 쇄국노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Athens의 선착장에서 일하는 육체노동자도 시민이었는데, 서양 철학사의 거봉인 Aristoteles는 Athens에서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모두 같은 Greece어를 사용하는데도 Sparta나 Corinth 태생에게는 시민권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Athens 태생은 Sparta나 Corinth 시민이 될 수 없었습니다.

Roma인의 정책은 동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Roma인은 정복한 족속들을 몰살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Roma인으로 동화시켰습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씨저가 정복한 갈리아 부족장들을 원로원에 들여놓았습니다. 의료나 교육에 종사하는 자라면 피정복민족이든 피부색이 다르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시민권을 주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속주민 병사들이 25년의 병역을 마치면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도록 법을 제정했습니다. 황제들은 제국전역의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서 Roma시민권을 주는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주후212년에 Caracalla 황제는 Roma제국에 살고 있는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시민권을 준다는 법령을 발포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Roma의 시민권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Roma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은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인들은 십자가형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정죄 즉 재판을 받지 않고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사도는 날 때부터 로마시민이었습니다. 천부장은 돈으로 Roma시민권을 샀습니다. Roma시민권이 없는 줄 알고 채찍질을 하다가 천부장에게 보고하고, 천부장은 곧 달려와서 결박을 풀었습니다. 그만큼 Roma시민권은 위력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Roma시민권은 부모가 Roma시민이면 그 자녀도 Roma시민이었습니다. 또한 Roma를 위해 크게 기여한 사람들에게 그 대가로 Roma시민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주고서 Roma시민권을 샀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 사람들은 미국의 국적을 얻으려고 안달입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고위직과 돈 있는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미국의 국적을 얻으려고 야단법석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시민권은 사람을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곳에 붙잡혀있든지 최선을 다해서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복음을 위해서 시민권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미국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영달과 안녕을 위해서입니다. 시민권을 가지되 사용처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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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받은 대로(사도행전22:4-16)

 

사도행전22:17-21 17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줄 저희도 아나이다 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바울사도는 회심하자마자 바로 전도를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3년간 아라비아사막에서 주님과 교제를 했습니다. 바울사도의 회심직후는 다음과 같습니다.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파함(9:19-22)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쌔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아라비아에 3년간 머물렀다가 다메섹으로 돌아옴/ 갈라디아서1: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핍박으로 다메섹을 탈출함/사도행전9:23-25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내리니라

고린도후서11:32-33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쌔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15일간 예루살렘을 방문함/사도행전9: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갈라디아서1:18-19 그후 삼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일을 유할쌔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바울사도는 회심 후에 예루살렘에 있는 헬라파 유대인들과 격렬한 논쟁을 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바울사도에게 많은 적의가 있었습니다. 바울사도가 유대인의 대표로서 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열심히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변절자로 여기며 심히 공격했습니다. 바울에게 심한 적의를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사도는 예루살렘에 머물러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렸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도를 전한다고 해도 듣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의 일과 다메섹의 일을 주님께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예루살렘사람들은 듣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사도는 예루살렘의 전도를 접어야 했습니다.

오늘의 우리들은 각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해외선교사로, 어떤 사람은 국내의 목회자로, 어떤 사람들은 직장의 선교사 등으로 각각의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의 사정을 가장 잘 아시는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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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사도행전22:4-16)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14절)

아나니아는 바울사도가 다메섹에서 제일먼저 만난 사람입니다. 이미 성령께로부터 사울에 대하여 들었기 때문에 사울에 대한 루머를 일축하고 사울에게 하나님의 사명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하나님을 바울에게 그냥 하나님으로 말하지 아니하고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묘사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바울)에게 우리조상들의 하나님으로 묘사함에 따라 그리스도의 도가 신흥종교가 아닌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만들어진 종교가 아니고 구약시대부터 약속된 도(道)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그리스도의 도를 믿는 우리들을 유대인들은 심히 오해를 했습니다. 마치 신약시대에 처음으로 생긴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아브라함과 다윗과 선지자들을 말씀하셨어도 그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했던 것입니다. 또한 ‘천주교는 큰 집이고 기독교는 작은 집이다’고 하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오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과 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온갖 미신들을 혼합시키고 살을 불렸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멀리 갔었습니다. 따라서 로마 카톨릭 또는 로마교라고 불러야 맞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로마 카톨릭에 있었다가 종교개혁을 해서 마치 로마 카톨릭은 구교, 개신교는 신교로 그들(로마 카톨릭)이 조롱하는 말로 썼던 용어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루터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심하게 오염되고 변질된 로마교를 떼어내고 홀로서기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큰집, 작은집 하고 운운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이후 모든 성도들은 ‘저 의인’을 보는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말한 ‘저 의인’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저 의인입니다. 이 의인 때문에 예루살렘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권자들이 난리법석을 떨었습니다. 관원들이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권자들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왜 스데반이 기쁨으로 그 의인을 위해서 순교를 당했는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에서 막강하게 종교권을 행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을 전혀 몰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이 모세의 자리에 올라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교권주의자들은 모세의 자리에 많이 앉아있습니다. 분명히 다른 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에게 면책권을 주기도 하고, 자기마음대로 전횡을 휘두르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두렵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두렵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은혜에서 배제를 당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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