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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맛디아(사도행전28:30-31)

 

사도행전1:13-26 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15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맛디아를 과연 사도라 할 수 있는가? Calvin은 그리스도께서 일찍이 제정하시고 엄명하셨던 일이 한 사람의 부정한 행위로 인하여 부서져 버리게 되지 않기 위해서 맛디아가 유다를 대신하여 선택되어야 하는 일은 옳았다고 했습니다(Calvin 1980, 56). 결원된 사도자리를 보충하는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 완수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로 여겼을 것이라는 것입니다(변종길 2007,115). 베드로는 시편 두절을 인용하는데, 시편69:25과 109:8입니다. 시편69:25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시편109:8 ‘그 년 수를 단촉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원수들이 거하는 거처가 황폐하게 해달라’는 간구와 원수가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죽어 그 원수가 맡았던 막중한 임무를 타인이 취하게 해달라는 기도인데, 이 두 구절은 유다의 계승자를 임명하는데, 한 사람의 결손으로 인하여 사도의 전체성이 무너지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석했습니다(F. F. Bruce 1986, 66). 베드로가 제시한 사도 선택계획은 유다의 죽음으로 인한 사도직의 공백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특이한 방법으로 그 일이 성경말씀의 성취였고, 맛디아도 인간의 수단에 의해서 사도가 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Matthew Henry 1981, 52-60). 그를 사도로 선택하는 사용된 구약에 그 전례가 있으며(삼상14:4), 그 근거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 사람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에 있다고 했습니다(Derrik Williams 1996, 145), 가룟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은 이유는 가룟 유다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그의 배신과 죄악 때문이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가 죽은 뒤에 다시 열둘을 채우기 위해서 사도를 뽑지는 않았다(open Bible).

Herbert Lockyer는 사도들이 유다의 계승자를 선택하는 과정에 있어서 다윗으로 하여금 사도직에 필요한 모든 자격을 갖춘 자가 배신자의 계승자로 선택되어야 한다고 예언하게 만들었던 주격(主格)은 바로 성령이었다는 점이다. 맛디아는 누가에 의해 열 두 제자 중에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문제는 그가 하나님에 의해 열두 번째 사도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베드로에 의한 의사진행의 타당성이 여러 가지 점에서 문제시된다. 비교적 소수의 신자들만이 모여서 계승자는 제비뽑기로 선택되어야 한다는 베드로의 제안을 승인하였고, 결과적으로 맛디아가 뽑혔다. 그러나 그 직책의 선출이 공정한 절차에 따랐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계승자의 임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열 한 사도에 의해 이루어진 인간적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도들은 자신이 독자적으로 선택한 자들임’을 계속 강조했던 것을 보면, 그 열 한 사도가 그들의 선택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에 의해 인도되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결여되어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Herbert Lockyer 1982, 350).

이스라엘에 있어서 12이란 참으로 매력적인 숫자입니다. 이름 못지않게 성경에서는 심오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3,7,10,12 등의 숫자는 ‘완전한 숫자’의 개념이 있습니다. 3은 하나님의 완전하심(perfection)을 상징합니다. 7은 영적인 완전성(perfection)을 의미합니다. 10은 서수적 완전성(ordinal perfection)을 의미합니다. 12는 완전한 통치(Governmental perfection)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12을 부르셨는데, 그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고 가룟 유다가 배신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12을 채우기 위해서 맛디아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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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도마(사도행전28:30-31)

 

편견/偏見/prejudice이란 한쪽으로 치우친 공정하지 못한 생각이나 견해를 말합니다. 어떤 것을 보더라도 이미 선입관이 서 있어서 공정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 편견입니다. ‘저 인상 봐! 분명히 저 사람은 성격이 거칠 거야.’하고 미리 그 사람을 평가하게 됩니다. ‘저 여자 몸매와 얼굴 좀 봐. 저 여자는 분명히 착할 거야.’라고 평가합니다. 두 평가는 잘못된 평가입니다. 공정한 평가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입관을 가지고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편견의 대상이 된 사람은 아무런 이유 없이 피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피해자가 바로 도마입니다. 도마는 누명을 쓴 사도입니다. 웬만한 주석가나 설교자들은 그에 대해서 한 마디도 좋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도마는 의심하는 자, 도마는 불신앙 자, 도마는 열등한 사람, 도마는 우울한 사람, 도마는 믿음이 없었던 사도, 도마는 확인주의자 라고 도마에 대해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평가입니다.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6:25). 주님의 이 말씀에 ‘녜’하고 절대로 염려하지 않겠습니다. 말할 수 있습니까? 만일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사람일 수 없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셔도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도마는 회의주의자도 아닙니다. 물질주의적인 심성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상실한 사람은 더욱 아닙니다. 우울한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도마는 개성이 뚜렷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사람들의 한 면만 보고 잘못 평가한 것입니다.

도마는 히브리이름입니다. 아람어 !/aT;/thā’ôm/쌍동이란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따라서 Qwma'"/thomȃs란 쌍둥이란 말입니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에서 디두모는 헬라어로 역시 쌍둥이라는 뜻으로 ‘디두모’는 도마의 별명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총 여덟 군데에 도마가 나와 있습니다(마10:3, 막3:18, 눅6:15, 요11:16,14:5,20:24,26,27,28,29,요21:2, 행1:13). 공관복음에는 도마의 이름밖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도마의 면면을 약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14: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20:24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1: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사도행전1:11을 보면 도마는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도마는 제자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는지 어떤 말도 없습니다. 그의 이름은 주님께서 열 두 제자를 택하셔서 둘씩둘씩 보내실 때입니다. 누구나 그랬듯이 도마의 인생이 변화된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고서였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평범한 도마의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사자가 되었습니다. 사자는 사자로되 지존자(至尊者)의 사자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질병을 제어할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았습니다. 귀신들도 자신에게 항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은혜를 얻었습니다. 마태복음10:2-4절을 보면 열 두 사도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가룟 유다’ 이 배열은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배열입니다. 도마는 마태와 함께 묶여있습니다. 즉 마태와 도마는 공통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세리 마태입니다. 그런 자와 함께 묶여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세리는 유대사회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부류였습니다. 그들은 조국 유대를 생각하지 않았고, 오직 자신들의 안일만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 마태와 같이 묶여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주님께서 택하셨구나 하는 은혜입니다.

도마는 사도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열 두 사도 모두가 겪을지도 모르는 슬픈 일을 자기도 기꺼이 무릅쓰겠다는 뚜렷한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주님 죽을 때 같이 죽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일으키시려고 제자들더러 베다니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을 만류했습니다. 그곳의 종교지도자들이 주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설득하여 유대로 가지 못하도록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도마는 비록 죽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주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못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이 말로 인해서 도마는 온갖 못된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주님께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예수와 함께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 자신들 모두 거기서 죽을 수밖에 없 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유대로 올라갔습니다. 생명의 위협이 있을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겠다고 한 비장한 각오입니다. 물론 도마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적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베다니에 가셔서 무슨 일을 하실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러이러해서 저러저러하다’라고 브리핑을 하지 않으십니다. 가서 현장에서 보고 인식하기를 원하셨기에 웬만해선 out-line만 말씀하시지, 자세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도마의 생각은 살 수 있는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로 주님께서 U-turn하시는 것이 안타까워서 한 말이지, 회의주의자여서 죽으러가자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도마는 다만 주님의 마음을 언제나 빨리 알아차려서 행동하고자 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과의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과 헤어진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다시피했습니다. 제자들 모두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와 그가 그들을 위하여 예비할 처소의 기쁨을 말씀하시고, 자기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때 도마가 나서서 우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며, 거기로 가는 길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심히 슬퍼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 모두의 생각이었습니다. 이윽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거기 있지 않았습니다(요한복음20:24).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만났다고 하자 나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로 도마는 믿음이 없는 자라고 낙인이 찍혀버렸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라고 별명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를 만났을 때에 도마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감히 손을 넣지도 않고 확인도 하지 않고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을 너무 쉽게 비교분석합니다. 베드로는 어떻고 바울은 어떠하며 도마와 빌립은 어떻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편견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제자들 전원은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부활하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거기에서 거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다만 그러한 실망 투성이의 제자들을 사용하셔서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신 주님을 항상 찬양해야 합니다. 전혀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믿게 하시고 그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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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가나안인 시몬(사도행전28:30-31)

 

12사도 중에도 같은 이름들이 있습니다. 야고보와 시몬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알패오와 세베대로 구분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로 구분한 것입니다. 시몬 역시 둘 있습니다. 베드로와 가나안인 시몬입니다. 베드로라는 시몬과 구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 “가나안인”이라는 명칭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인이라고 하니까 가나안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인은 ‘가나’나 ‘가나안’이란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Kananai'o"/Kananaȋos는 an:q;/qānā’/히브리어에서 유래한 말로, ‘열심인’이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Zhlwthv"/Zelotês/열심당원으로 나오는데 이들은 민족주의자들로 팔레스틴 지방을 다스리던 로마정권에 반대하여 싸웠습니다. 이들은 민족주의자들로 팔레스틴지방을 다스리던 로마정권에 반기를 들며 속박에 대한 증오심을 폭동으로 획책하였습니다. 따라서 요새 소위 보수라는 일부 목사들은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을 종북자로 몰면서 척결해야 한다고 설치고 있는데, 예수님은 열심당원이었던 시몬까지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열심당원”이라는 시온의 별명은 열광적인 애국자였다는 것입니다. 열심당은 마카비 시대부터로 추정합니다. 당시는 종교적 영역에서 이방의 영향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있었던 해였습니다. 열심당원들은 바리새인들 중의 바리새인들이었는데, 바리새인들은 랍비들 중에서도 가장 엄격한 이들로서 전해 내려오는 율법의 문자적 준수를 주장하였습니다. 열심당원들은 옛날 전성기의 다윗왕국의 영광을 꿈꾸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왕국을 회복시켜 줄 멋지고 힘있는 메시야를 고대하였다.. 열렬한 이스라엘의 애국자들은 Uudas of Samala/유다 사말라의 지휘아래 한데 뭉쳐 유대지방을 로마의 통치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애국이라는 명목 하에 너무나도 많은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 광적인 유대인들은 로마가 이스라엘의 독립을 파괴했을 뿐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여러 의식들을 준수하지 못하게 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들은 갈릴리에 본부를 두고 기회만 있으면 소요와 반란을 선동하였습니다. 조그만 구실만 있어도 이것으로 동족의 정복자에 대한 적개심에 불을 지르고자 했습니다. Elder Cumming은 열심당은 특수한 단체라고 하면서

바리새인도 아니다. 바리새인은 예배에 간섭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대체로 무관심했다. 사두개인도 아니다. 사두개인은 율법의 해석에 있어서 그들보다는 훨씬 회의적이고 염격하지 않았다. 엣세네파도 아니다. 엣세네파는 어떤 대중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헤롯당도 아니다. 헤롯당은 헤롯과 한패였다.

 

따라서 열심 당원들은 독불장군식으로 로마의 요구에 대항하였습니다. 언제든지 무기를 들고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시대에도 그들 중 몇몇 지도자들이 잡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한 때 예루살렘에 큰 세력을 구축하고 국사(國事)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들은 법도 없이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법이었습니다. 바라바도 열심당의 일원으로써 소요와 살인의 혐의로 투옥되었었습니다. 결국 70년에 Titus 휘하의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약탈했습니다. 이로보건데 시몬도 팔레스틴의 해방을 위해 기꺼이 칼을 뽑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주님을 만나자 전혀 다른 길을 갔습니다. 그의 대적이 로마군이 아니었습니다. 시몬의 대적은 사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마귀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순교를 했습니다. 그것이 열심당원이었던 시몬의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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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사도행전28:30-31)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성경에서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사도이면서 성경에 많은 정보가 없기 때문에 후세의 우리들이 야고보를 알려고 할 때 힘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마가복음15:40의 작은 야고보와 동일한 사람입니다. 아마도 마가는 야고보가 키가 작았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해서 작은 야고보라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우리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아닙니다. 바울이 언급한 야고보도 아닙니다. 사도 공회시기에 예루살렘 교회를 인도했던 야고보가 아닙니다. 야고보는 사도들의 명단 속에 어울려 나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성경에서 그렇게 많이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많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사도 야고보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를 부르신 분이 전능하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택하실 때 기도하시고 선택하셨습니다. 따라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신실한 사도였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봉사를 했을 것입니다. 다반 우리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야고보는 보편적인 인정을 받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바란 것은 그늘에 가린 제자로서의 직분이었습니다. 그는 그러한 직분을 얻음으로 만족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주님께서 보내시면 갔고, 주님께서 지시하시면 말없이 행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선한 일을 위해 분투했습니다. 사도로서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자기의 도리를 다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특이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에 관해서 어떤 것을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훌륭한 일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야고보가 최선을 다하여 살아갈 사도라고 기대하셨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유명한 사람들보다 무명인들이 훨씬 많습니다. 유명한 교회보다 무명의 교회들이 훨씬 많습니다. 유명한 목사보다 무명의 목사들이 훨씬 많습니다. 알려진 장로보다 알려지지 않은 장로, 알려지지 않은 집사, 알려지지 않은 성도들이 훨씬 많습니다. 오히려 무명의 성도들 중에서 훌륭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몰라줍니다. 그리고 유명인들만 알아줍니다. 일반사회에서 그러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마저 세상과 똑같습니다. 주님은 이름 없이 섬기라고 하셨는데, 사람들은 그러한 것이 대단히 싫은 것 같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많이 회개해야 합니다. 메가 처치에 다니는 사람들은 더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름 있는 교회에 나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섬기라고 하셨지, 섬김을 받으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숨김 있는 섬김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알려지지 않은 교회에 숨기는 섬김, 아마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것입니다. 지금 전국에 이름 없는 작은 교회는 일꾼들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큰 교회에만 성도들이 몰려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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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사도행전28:30-31)

 

‘사도’/ajpovstolo"/apôstolos는 ‘보내다’를 뜻하는 동사 ajpostevllw/apostêllo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기본적 의미는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도라는 말이 관용화(慣用化) 되어서 아무데나 ‘사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칭 자신들이 ‘사도’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거기에 ‘사도직’을 실제로 계승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모두 틀린 말이며, 틀린 생각들이고, 망상에 사로잡힌 자들의 사상입니다. 왜냐하면 사도의 직책이란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시고 한정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란 계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끝나버린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기독교사상에 있어서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문학에 있어서 상당한 분량이 그들에게 할애되고 있으며, 복음이 전해지는 지역에 그들의 이름이 반드시 들어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이 사도들에 관해서 우리에게 전해 주지 못하는 내용이 더 많습니다.

사도들의 인척관계를 우리들이 훑어볼 때 다음과 같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는 요나 즉 요한의 아들들입니다(요1:42, 21:15). 야고보와 요한은 세베대와 살로메의 아들들이었습니다(마20:20, 27:56, 막15:40,16:1). 레위 마태는 알패오의 아들이었습니다(막2:14). 작은 야고보도 역시 알패오의 아들이라 불리고 있기 때문에 그와 마태는 형제인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9:25과 마가복음15:40절을 보면 글로바(눅24:18절의 글로바가 아님)의 아내 마리아는 작은 야고보의 모친이며, 따라서 글로바는 알패오로 추정합니다. 유다는 야고보의 형제가 아니라, 다른 야고보의 아들입니다(눅6:16). 가룟 유다는 시몬의 아들이었습니다(요6:71,13:26). 가룟이란 말은 유다에게 붙은 게 아니라 시몬에게 부속되었는데, 이는 아버지 시몬과 아들 유다가 유대의 가룟 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동일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거주 지역은 주로 갈릴리였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과 빌립은 벳세다에서 살았습니다(막1:16-24, 요1:44,12:21). 이들 넷은 나중에 가버나움에서 살았습니다(막1:21,29).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살다가 후에 에베소로 옮겼습니다(행3:1,15:6, 갈2:1,9). 마태는 벳세다에 속해 있었습니다(막 2:1,14). 나다나엘이라고도 하는 바돌로매는 갈릴리의 가나에서 살았습니다(요21:2). 도마, 작은 야고보, 유다 및 열심당원 시몬은 갈릴리에서 살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사도 중에서 유일하게 유대지방에서 살았습니다.

사도들의 직업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어부였습니다(막1:16,19). 마태는 세리였었습니다(마9:9). 다른 일곱 제자들의 직업은 성경에서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의 상호관계는 열 두 제자는 서로 관련되어 있었고, 갈릴리의 예수 그리스도와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형제지간이었고,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했으며, 또한 작은 야고보와 마태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빌립과 바돌로매도 아마 형제지간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안드레가 그의 형제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였었는데, 빌립도 그의 형제를 그분에게 인도하였던 것 같습니다(요1:40-45). 만약 세베대의 아내였던 살로메가 동정녀 마리아의 누이였다면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의 사촌입니다(요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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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위한 갇힘(사도행전28:17-22)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바울사도는 Roma에 들어가는 즉시 황제의 재판을 받지 않았습니다. 황제의 재판을 받기까지 한 군사와 함께 다른 죄수들과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따로 있게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감금된 장소는 주위에 웅대한 건물들이 있었습니다. 이 건물들은 공화국의 말기에 세워졌습니다. 초기 황제들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전면에는 Capitoline Hill이 있었습니다. Gauls가 침공하기 오래전부터 유명한 건물이었습니다. 정상에 Jupiter 신전이 있었습니다. 왼쪽 가까이에는 그 언덕을 덮고 있는 넓은 구역의 궁전이었습니다. ‘가이사의 집’에는 Gauls의 이름이 황실의 찬란함과 함께 현대의 온갖 유럽언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궁전에는 궁궐에 소속된 근위대에 宿營(숙영)하는 황실부대가 있었습니다. 율리오는 그의 죄수들을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도록 되어 있는 모든 피고들을 감금하는 것을 공식임무로 하고 있는 집정관 Burrus에게 넘겼습니다.

바울사도는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곳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의 속박은 custodia libera/자유로운 감금이었습니다. 하지만 통상 이런 죄수는 그를 지키는 한 군사에게 사슬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감금을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

 

빌립보서1:17,13,17 7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13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7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에베소서3:1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6: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골로새서4: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경비원의 끊임없는 교체는 그 군사들로 하여금 바울사도의 감화를 받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황실에서 복음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많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대한민국의 Mega-church는 고난에서 제외됩니다. 이들은 고난을 받을 이유도 없고, 고난을 절대적으로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소형교회들은 엄청난 고난을 받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많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위한 자율적 감금입니다. 하지만 이 고난을 성도들은 달게 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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