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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35-39

 

Russian-Ukraine War 20222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사건입니다. 21세기 유럽 대륙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대규모 전면전입니다. 푸틴의 야욕으로 인해서 우크라이나에 약 600만 명이 피난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인 약 1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부상자가 약 10만 명입니다. 사망자들과 부상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2022년 현재 전 세계 물가가 폭등했습니다. 전 세계 식량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이것이 불안한 국제상황입니다.

2022년 국내상황은 제가 말 안 해도 우리가 잘 압니다. 엄청 뛰어나고 명석하다고 하는 자가 대통령이 되다 보니 모든 것을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국민은 모두 답답합니다. 불안불안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 철이 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고 질문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나를 비워야 한다. 베풀어야 한다. 그러나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착하지 않습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비우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들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Russian-Ukraine War 을 멈추게 할 나라가 없습니다. 모두 푸틴의 형편만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른 새벽에 베드로의 집에서 나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한적한 곳 곧 광야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온 갈릴리 백성들이 환영하게 되자 즉시 한적한 곳 곧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사단이 주님을 기적만 행하는 Messiah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즉시 처음에 사단과 싸우시던 광야로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도를 통해서 다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어두운 새벽에 나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마음을 쏟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기도였을 것입니다. 이제 시작한 갈릴리 대사역에 필요한 힘과 능력 주시기를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한편 베드로는 일어나보니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은 부지런히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찾은 목적은 지극히 세상적입니다. 그를 다시 가버나움으로 모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곳에는 가버나움의 큰 무리가 베드로의 집 앞에 모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은 제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이 사실을 예수님께 알려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자신들의 터전인 가버나움에 예수님이 오래 계시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사역 곧 그의 전도 여행에 제자들을 함께 데리고 계속 다니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죄인의 구원과 그들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널리 선포하는 일에 역점을 두셨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구원에 대한 여러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후세계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두 자신들은 자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도 영혼 불멸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혼불멸을 믿는 사람들도 엉터리입니다. 자신의 알량한 행위가 자신을 틀림없이 구원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일을 강조하셨습니다. 전도하심이 목적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자신 구주로서 하늘로부터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 사는 갈릴리까지 가셔서 전도하시고 귀신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38절에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는 말씀은 사람에 대한 구원의 message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사렛이나 가버나움에서 오셨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나는 하늘에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왔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일을 하시려고 오신 예수님께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제자들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받으실 때 기도하셨습니다(3:21). 열두 제자를 택하시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풀 때와 베푸신 후에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시고자 할 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없이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는 성도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합니다. 기도는 성도에게 있어서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면서도 기도를 차일피일 미룹니다. 기도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기도를 싫어합니다. 기도는 해야만 하는데 하고 싶은데, 뭔지 모르게 우리와 실제로 기도하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사이에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 고통을 체험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기도하지 못하도록 막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해야 할 일들과 가정사들 때문에 분주하게 생활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쁘다고 해서 먹지 않거나 잠자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는 데에는 더 깊고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기도를 막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대인들에게 거의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기도하기 위해 기도에 관한 모든 것을 먼저 완전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기도할 수 있으려면 먼저 우리의 삶이 멋지게 조율되어야 하고, 기도하는 법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기도에 따르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유창하게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구비되고 채워져야만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부질없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영원의 이편에서는 순수한 것들과 불순한 것들을 나누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세금을 부과하거나 어떤 짐을 우리에게 메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이중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납하실 만큼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꼭 현명하거나 순수하거나 믿음이 충만하거나 어떤 것을 갖추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은혜로 살아가며 또한 은혜로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어린아이들이 부모님께 나아오는 것과 유사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무조건 맹렬하게 요구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요구가 이기적이거나 저속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동기가 어찌 되었건 그들이 우리에게 나아온다는 그 자체입니다. 기도의 문제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기도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순수한 동기를 충분히 갖고 있지 않다거나 충분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제쳐 두고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실제로 기도하는 바로 그 행위 속에서, 즉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이 문제들이 때가 되면 해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또 우리의 기도를 있는 그대로 들어 주십니다. 어린아이가 나쁜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는 나쁜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단순하게 해야 합니다. 단순한 기도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숨김없이 하나님께 내놓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가려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런 가식 없이 우리의 관심을 나누고 간청할 뿐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직장동료나 이웃 사람들로 인해서 얼마나 마음이 상했는지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또는 좋은 날씨나 먹을 양식과 건강 따위를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한 기도는 그 초점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필요와 욕구와 관심이 우리의 기도를 지배합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수많은 교만, 자만, 허영, 가식, 등 전반적으로 이기주의가 가득 차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량도 있고, 관대함도 있으며, 이타심 그리고 보편적인 호의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리고 죄를 지으면서 삽니다. 그러다가 종종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일어서서 다시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다시 하나님을 따르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시 우리의 교만함과 방종함에 굴복하고 맙니다. 이런 일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자백하고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단순한 기도는 때때로 다시 시작하는 기도입니다. 단순한 기도는 성경에 나오는 기도 중에서 가장 흔한 기도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 가운데 고상하거나 아량이 넓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 옛날 목이 곧은 백성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불평하던 모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 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11:11-12). 또 자기를 대머리라고 놀린 아이들에 대한 엘리사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왕하2:24).

 

이러한 자기중심적 기도의 한복판에는 사람들의 가장 고상하고 숭고한 기도 내용도 있습니다. 불순종하고 완고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모세가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32:32). 엘리사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수넴 여인여인에게 돌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왕하4:16). 시편 기자는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119:97)라고 했습니다. 단순한 기도에는 좋은 것, 나쁜 것 그리고 흉한 것 모두가 섞여 있습니다. 기도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일상적인 문제를 가지고 사랑하는 아버지 앞에 아뢰는 것입니다. 그 기도에는 가식이 조금도 없습니다. 실제 우리의 모습보다 더 거룩하고, 더 순결하고, 더 성스러운 체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자세로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 놓읍시다(요일3:20). 어쩌면 기도는 항상 초보적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기도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John Dalrymple 존 달림플우리는 이런 기도 이상은 드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는 부족함과 필요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기본적인 기도를 멸시하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보다 성숙한 기도를 드리겠다는 소망으로 단순한 기도를 건너뛰려고 합니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이기적인 요구의 기도를 경멸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기도는, 그것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뛰어넘는 길은 그것을 피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기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십중팔구 그들은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기도에 대해서 논의해 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진심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 상태는 온전히 드러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있는 곳에서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기도는 이론으로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바로 시작해야 합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이웃 사람들과 친구들과 더불어 시작하면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가볍게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있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진리가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상적인 삶 속에서 복을 주신다고 믿는 것이 바로 기도의 재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처소로 들어오신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그런 기도를 멸시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내게 복을 주실 수 없다.”고 우리는 신음합니다. 내가 졸업하면, 내가 이 일을 끝내면내가 CEO가 되면.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 장소는 우리가 있는 바로 그 장소뿐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불붙는 떨기나무 앞에 있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자신이 거룩한 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현재 있는 곳이 거룩한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곳이 직장이든 가정이든 동료, 친구, 가족 그 누구와 함께 있는 그곳이 바로 기도를 배우는 곳입니다. 가장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일상의 경험들을 기도하려면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사건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밤잠을 못 잘 만큼 엄청난 시련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우리의 상처와 고통과 실망을 느끼며, “왜 접니까? 왜 제가 이 아픔을 당해야 합니까?" 이렇게 좌절과 슬픔과 분노에 대하여 호소하는 것이 단순한 기도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길을 잃고 상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동행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이웃 사람이 무심코 내뱉는 한마디가 우리 속에 있는 분노, 시기, 두려움 따위의 감정을 모두 폭발시키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솔직하고 정직하게 그 일을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감정 뒤에 숨어 있는 상처를 치료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유로이 불평도 하고 따지기도 하고 외치기도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20:7). 예레미야의 기도입니다. Clive Staples Lewis우리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아 니라 우리 안에 있는 바로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삶의 자질구레한 것들은 기도의 올바른 내용이 아니라고 하는 속임수를 믿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기도가 숭고하고 이 세상 것이 아닌 활동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믿지 마십시오. 기도할 때는 하나님에 관해서만 하나님께 말해야 한다고 배웠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우리는 일상의 체험들이 올바른 기도를 방해하고 주의를 산만하게 한다고 쉽게 단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영성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께서는 냄새 나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서 피와 땀과 눈물로 이 땅 위를 다니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한시도 벗어남이 없이 살아가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적인 생활들에 관해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해야 합니다. 단지 하나님께 이야기해야 합니다. 자유롭고 숨김없이 상처를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의 슬픔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올 때 그러하듯이 하나님도 사랑과 긍휼로 우리의 말을 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귀중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단지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기도를 배울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입니다.

 

Closing 청교도 William Gurnal은 어린아이가 우는 것과 새로운 피조물이 기도하는 것은 똑같다. 어린아이는 우는 법을 누구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알게 된다. 어린아이는 울면서 세상에 태어난다. 마찬가지로 기도도 그 양식이나 규칙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새 생명의 원리 자체로부터 자동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기도는 유한한 우리가 무한한 하나님께 채워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And
3차 전도여행을 끝내며(사도행전21:15-16)

바울사도는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면 공식적인 전도여행이 모두 끝나게 됩니다. 바울사도는 가장 늦게 사도가 되었지만, 어쩌면 가장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방인의 사도이고,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라고 딱 선을 그을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도 이방인을 위해서, 바울사도도 유대인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특히 로마서를 보면 전반부에 바울사도가 얼마나 유대인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먼저’여야 한다는 생각에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들만의 편협한 생각은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과 율법 중에서 그들은 율법의 우월만 생각했습니다. 복음이 우선이어야 했는데, 율법만을 생각하고 강조하고 지키려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만 바라보았지, 갈보리산은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바울이 위대하다고 생각했지만, 바울연구가 처음부터 열정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스위스의 신학자인 Franz Overbeck/1837-1905은 Marcion이 바울을 잘못 이해했지만, Marcion만큼 바울을 이해한 사람도 그때까지만 해도 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울연구가 빨리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종교개혁시대 이전에는 Roman Catholic으로 인해서 성경연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통만 강조했습니다. 성경보다 교황청이 위에 있었기 때문에 성경을 연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성경연구가 이러다보니 성경연구에 장애를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더구나 행위와 전통을 강조하는 때에 바울은 ‘믿음으로’를 강조하다보니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Augustine 이후로 황무지와 같았던 바울연구가 비로소 종교개혁으로 활발해졌습니다. 특히 Martin Luther의 바울의 해석 ‘오직 믿음으로’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사도는 가이사랴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숨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지만 예루살렘에 바울이 나타나기만 하면 살해하려고 하는 유대인이 허다했습니다. 어쨌든 사도바울의 일행은 여행의 마지막 단계에 돌입하였습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한지 며칠 만에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짐을 꾸렸습니다. 그들은 약 100km이상을 가야 했습니다. 갈 때 가이사랴의 그리스도인 몇 명이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편안하게 환대를 받을 수 있는 예루살렘의 어떤 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머물 집은, 구브로의 예루살렘 교회의 설립 멤버들 중 한 사람이었던 Mnason의 집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적 성격이 뚜렷한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무리를 자기들의 집에 맞아들일 준비를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사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일행은 예루살렘 교회의 헬라파에 속했을, 나손으로부터 환대를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에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부딪히는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도 그 부분에서는 왈칵 개방적이지는 않았습니다.

 

 

 

 

And

밀레도에서 바울의 설교/겸손(사도행전20:17-35) 

바울은 요샛말로 말하면 엘리트입니다.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졌으며, 신분 또한 대단한 사림이었습니다. 유대사회에나 로마사회의 어디에 내놓아도 별로 빠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빌립보서3:4-6절을 보면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이 투철해서 다른 사람들을 심히 무시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바울의 이력을 내놓으면 그들은 입을 다물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지키지 못할 자기들만의 율법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예단하여 거의 죽여 놓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겸손했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겸손하게 주를 섬겼습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이 바르게 전파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겸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겸손해지기로 작정했습니다. 빌립보서2:3을 보면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의 본을 직접 보여준 것입니다.

성도들이 왜 겸손해야 합니까?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눅18:13-14). 그래서 우리는 죄인임을 느껴야 합니다(눅18:14). 자기의 죄를 느끼고,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끼는 사람들은(눅15:17-21) 겸손합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압니다(왕상3:6-14). 겸손한 사람들은 자신은 추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느끼기 때문에 겸손합니다(사6:1-8). 하나님의 의를 느낍니다(빌3:4-7).

우리들을 겸손하게 하는 요인들이 있는데, 우리들을 고생하게 합니다(신8:3). 그리고 환난이 우리들을 겸손하게 합니다(대하12:2-12).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라고 합니다.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신15:15). 스스로 높은 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잠25:6-7).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전5:2). 큰 일을 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렘45:5). 스스로 칭찬하지 말것입니다(잠27:2).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미6:8).

사람들은 심히 겸손하지 않습니다. 특히 정치인들 중에 교만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신이 아니면 이 나라가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해서 얻어지는 것보다 겸손해서 얻어지는 것이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겸손한다고 해서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만한 사람이 비굴해질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겸손은 교만의 회개를 낳습니다. 따라서 겸손은 온총이면서 동시에 은총을 담는 그릇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못나서 겸손했던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겸손했습니다. 겸손은 성도들이 가져할 기본적인 덕목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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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대한 사도들의 사기(사도행전14:1-7)

사도행전 전면에 흐르고 있는 기본적인 기류가 있습니다. 1:8에 주님의 명령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1:14에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2:4에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최소한 말이 다른 16개국에 흩어졌던 사람들이 자신의 방언으로 사도들의 말을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대표로 베드로의 설교가 이어집니다(2:14-36). 그리고 그 말을 듣고 3000명의 제자가 늘어났습니다. 계속해서 사도들에게 기사와 표적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 결과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또 설교후에 5000명의 제자가 더 늘어납니다(4:4). 이에 예루살렘의 실세들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려고 심히 핍박을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전해졌고(4:31), 예루살렘교회가 든든히 서갔습니다(4:33). 핍박하고 별 짓을 다해도 말씀이 더해가고 제자들이 더해갔다고 했습니다. 5:42절을 보면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6장을 보면 교회는 성도들이 더해져서 일곱 집사를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을 본보기로 삼아서 예루살렘에 대박해가 일어납니다. 이 일을 계기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이방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복음이 멈추지 않습니다.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2:47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4:31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4: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5:12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5:1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6:15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7:2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8: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8:25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8:34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8: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9:19-20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쌔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9: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9: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10: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11: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11:18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11:26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11: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12: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13: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13:48,49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14:6,7 저희가…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14:27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15: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15: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16: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16: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6:14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16:34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17: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17:12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7:34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18: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18: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19: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9:17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23:11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28: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28: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사도들은 순교하기까지 사기가 절대로 떨어지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러한 열정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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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에서 총독에게 복음전함(사도행전13:6-12

사울과 바나바는 살라미의 중심부로 이동했습니다. 거기에는 로마의 총독부가자리 잡고 있는 ‘바보’(Pavfo"/Pâphos)에 이르렀습니다. 바보는 구바보(Old Pâphos)와 신바보(New Pâphos)가 있었습니다. 구바보는 페니키아인이 건설했고, 신바보는 그리이스인이 건설했습니다. 살라미에는 바보가 중심지이며, 로마의 총독부가 있을 만큼 번화한 지역이었습니다. 구바보나 신바보는 종교적으로 ‘파비안느’라는 여신을 숭배했습니다. 파비안느는 시리아에서 기원한 신입니다. 파비안느는 그리이스의 아프로디테(Aphrosite)이며, 로마의 Venus(비너스)입니다. 바보는 Venus를 깊게 숭배하는 본거지였습니다. Venus의 신봉자들은 Venus가 바다에서 태어났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원뿔형의 운석을 중심에 두는 감각적인 의식으로 그녀를 숭배했습니다. Venus 신전은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였습니다. 사울과 바나바는 이곳에서 총독을 만났습니다. 구브로의 총독은 세르기우스 파울루스(Sergius Paullus/서기오 바울)였습니다. 총독은 사울과 바나바를 초대하였습니다. 총독은 사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말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복음에 대해서 관심까지 가졌습니다. 누가는 서기오 바울에 대해서 ‘지혜있는 자’라고 했습니다(7). 그런데 항상 총독의 옆에서 마술을 부리던 무당 ‘바예수’가 적극적으로 방해를 했습니다. 이 자는 총독의 마음이 사도들의 교훈에 이끌리지 않도록 하기위해 방해하고 반대하였습니다. 만일에 경우 총독이 사도들의 말을 들으면 자신의 궁중마술사직이 위태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사도바울이 그를 제지하면서 궤계(기만)와 악행(분별력이 없는 행동)이 가득한자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자식이며, 의의 원수이고, 주의 바른 길을 왜곡시키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10). 그리고 얼마동안 네가 소경이 될 것이라고 하자마자 곧 바로 소경이 되었습니다. 총독은 그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총독이 믿었습니다(ejpivsteusen /epîsteusen). 또한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겼습니다( ejkplhssovmeno"/ekpllēssômenos).

이것을 볼 때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음을 우리는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철저하게 막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잔하는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서 순탄하게 전해지지 않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대사도인 바울사도가 전하는데도 그러니 우리들은 당연히 더 인식하여야 합니다. 지상에는 두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측과 그 반대 측이 있다는 것을. 그러나 결국은 마귀와 그 일당들은 손을 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9절에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사울과 바나바와 마가요한만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신 것입니다.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비록 우리들이 부족하고 연약해도 성령께서 함께 하심을 우리는 늘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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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의 선포(사도행전2:14-21)

사도(ajpovstolo"/아포스톨로스)보내다라는 동사 ajpostevllw(아포스텔로)에서 유래했습니다. 기본적 의미는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아포스톨로스는 해양언어였습니다. 화물선이나 보낸 선단, 후에는 원정 함대의 함장이나 해외로 임무를 위해 파견된 자나 원정대, 또는 일단의 식민 개척자들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아포스톨로스는 파피루스에서 나일강의 배로 운반되는 정부의 곡물 창고로부터 알렉산드리아로 보내는 곡식의 선적량을 지시하는 공식 서류인 나타내는 전문용어였습니다. ‘아포스톨로스는 여권, 안전 통행증, 또는 심부름꾼이 떠나려 할 경우의 출국 허가서, 수출 면허장을 말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고전 헬라어의 경우와는 달리, ‘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이 오직 사자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의 특정한 직무로 원() 사도직에 대한 확고한 명칭으로 사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기간의 사도들과 부활후의 사도들은 180도로 변했습니다. 이전에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영광의 자리에 서려 했고, 십자가 사건 때에는 겁쟁이였었으나 부활 후에는 엄청나게 달라졌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죽기를 각오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22절부터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주님이시요, 메시야이심을 선포합니다. 초대교회 사도적 khvrugma(케뤼그마)1. 성취의 날이 도래했다. 2. 예수님의 사역, 죽음과 승리. 3.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을 증명하기 위해 구약을 인용, 4. 회개요청입니다. 16절에서 21절을 보면 요엘 선지자가 말한 것이 오순절에 성취되었다는 말을 합니다. 22절에서 24절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 즉 탄생, 죽음, 부활을 말합니다. 25절에서 28절을 보면 구약을 역시 인용합니다. 38절을 보면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 대한 궁극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멸망하게 됩니다. 그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최고인줄 알고, 이 세상의 것에 목숨을 겁니다. 모든 것을 all-in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영혼은 손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들은 초대교회 때부터 사도적 선포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편향, 강제종교행사 금지 등 사탄적인 것들로 인해서 막상 자신들의 영혼을 헌신짝 버리듯 유기시켜 버립니다. 육신을 위해서는 엄청난 투자를 하면서도, 영원을 위한 영혼의 투자는 전혀 하지 않는, 아이러니한 일들이 있기 때문에 복음은 오늘날도 여전히 전해져야 합니다. 복음에 대한 반응이 어떻든지 간에 우리들은 초대교회와 같이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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