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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사도행전28:1-6)
그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6절)
고대 헬라세계에서 신개념은 본질적으로 다신론적입니다. 많은 개개의 신들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신들의 질서정연한 전체성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신들에 대한 다수 개념에서부터 신들의 계보와 계급이 발전되었습니다. 높고 낮은 신들, 신들의 집안, 그리고 만신전이 그 예입니다. Zeus Apollo 등을 신이라고 하며, 우주도 신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Greco-Roman시대에는 원시적인 힘들에 대해서도 신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의 신 개념으로서 신들은 하나의 주어진 요인(factor)입니다. 신들은 비록 영원한 것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신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존재하게된 것들로 인식했습니다. 그들은 신들이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혼돈과 투쟁하여 원시적으로 존재하는 거대한 힘들을 통제하여 다스리는 질서요 형태(그러므로 세상의 의미)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신 개념은 신들은 국가에서의 질서와 같은 인간적 질서와 동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신들은 우월한 능력과 지복을 누리지만 도덕적 진지성은 결여합니다. 신들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그들의 감정과 관습도 인간의 것과 비슷하다고 인식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유일하시고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역사 이래로 다양한 神觀念들을 형성시켜 왔습니다. 어릴 때에 무슨 신이 이 땅에 많은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신이란 무엇일까? 무덤에 가서 절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에게 신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죽음의 저 너머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을 믿어야 정상인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통상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精靈信仰/animism / 인간의 육체를 떠난 亡靈들이 떠돌아다니며 인간생활에 좋고 나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 영혼들을 달래거나 숭배하는 신앙입니다. 즉 Shamanism입니다. 샤머니즘은 샤먼에 의하여 주도되어 생겨나는 종교현상입니다. 샤먼(Shaman)이란 병자를 고치고 저 세상과 교통할 수 있는 힘을 소유한 것입니다. Shamanism은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에서 두드러졌습니다.
2. 多神論/polytheism / 여러 신들의 존재를 신용하는 것으로 Greece 신화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대개 여러 신들은 영웅들이나 자연의 대상들 즉 행성이나 호수, 산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나 로마의 신화들을 보면 신과 인간의 불륜들이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따라서 신인가 하면 인간이고, 인간인가 하면 신인 것이 그리스 로마 신관입니다.
3. 汎神論/pantheism / 대표적인 예가 인도의 브라만교입니다. 우주를 지배하는 제l원인을 신으로 생각하며 신과 만유를 통일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모든 것이 신입니다. 개구리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나 소를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별과 태양 달도 신으로 착각합니다.
4. 理神論/deism / 17, 18세기에 주로 영국의 자유사상가나 과학자들에 의해 제창된 바 있는 합리주의적 유신론으로서 역사 속의 초자연적인 것들 일체를 배격하는 신사상입니다.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을 초월적 존재로서만 파악하며 내재하셔서 인간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을 강력히 부인합니다.
이상과 같이 사람들은 신도 아닌 것을 믿고 있습니다. 신이라고 하면 창조하고 거룩하며 인간들의 모든 것을 섭리하고 관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신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신이라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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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나교회를 격려하시는 주님
요한계시록2:8-11
개인의 유익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자기와 자신의 가족의 안녕만을 위해서 삽니다. 그래서 자신과 자신들의 가족을 위한다면 역사와 민족 앞에서 비굴한 삶을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굴욕의 시대에 자신들만 살겠다고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를 총독부에 팔다시피 했습니다. 교회의 헌금으로 일본에 비행기를 헌납했습니다. 그리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목사들을 회유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빼앗았습니다. 자신들은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와 자신의 가족들을 뛰어넘어 교회와 국가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자들이 일본에 협력하느라고 정신이 없을 때, 이들은 만주벌판에서, 백두산에서, 지리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어떻게 해서든지 일본인들을 몰아내고자 했습니다. 이런 분들이 있어서 그래도 우리나라가 희망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당시에도 이런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유익만 생각하는 사람들과 공동의 유익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8절에서 9절을 보면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주님은 사도요한에게 서머나 교회에게 편지를 쓰라고 했습니다.
I.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주님(8-9절)
Smuvrna/Smyrna는 ‘몰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머나 市는 인도와 페르시아에서 로마로 가는 통상로였습니다. 서머나는 과학이 발전했던 도시였습니다. 서머나에는 의학학교가 있었습니다. 멋지고 웅장한 건축물이 있었습니다. 2000년 전에 넓은 포장도로로 유명했습니다. 서머나에는 술의 신(酒神) 박카스(Bacchus)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시인 호머(Homer)의 출생지가 바로 서머나였다고 합니다. 서머나는 에베소와 같은 항구도시로서 경쟁하다가 결국에는 에베소를 누르고 아시아 제일의 항구도시였습니다.
서머나는 우상숭배가 극심한 지역이었습니다. 서머나 사람들은 소아시아 도시 중 최고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로마제국은 황제숭배를 위한 신전건축 후보지 12곳을 놓고서 박빙의 경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서머나 市는 신전건축을 유치했습니다. 소아시아 제1도시라는 호칭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서머나 市는 항상 처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서머나는 에베소, 버가모 등과 항상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그 결과 황제의 흉상이 있는 화폐를 주조하는 특권을 부여받았던 극성스런 도시였습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을 괴롭히는 유대 배교자들이 서머나에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서머나에 있는 성도들을 무척이나 괴롭혔습니다.
이러므로 서머나 교회는 안 좋은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심한 환난 속에 있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또한 견딜 수 없는 궁핍 속에 있었습니다. 서머나의 성도들은 로마제국의 시민으로서 황제숭배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심한 제재를 받아야 했습니다. ‘너희들 때문에 우리들이 피해를 본다.’ ‘서머나 사람이라면 황제를 모두 섬겨야 하는데 너희들은 왜 그러냐?’하면서 모든 혜택을 끊어버렸습니다. 성도들은 모든 일자리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서머나의 성도들은 카드에 ‘요주의 인물들’이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굶주려야 했습니다. 심한 환난과 압박과 빈곤과 굶주림, 투옥, 화형, 사나운 짐승의 위험이 언제 올지 몰랐습니다. 이러므로 여간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꺼려했습니다.
거기에 유대인의 탈을 쓴 자들이 성도들을 항상 훼방했습니다. 이름만 유대인이지, 실상은 사단의 자식들인 이들은 성도들에게 늘 적개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법정에다 성도들을 열심히 고발했습니다. 그래서 언제 죽을지, 언제 고발당할지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듯 했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당하며 성도들이 매일 위험 속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환난과 궁핍의 끝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볼 때 안개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주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알고 있다(ei[dw)고 했습니다. 네가 황제숭배를 거부한 것을 안다. 네가 그것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난 것을 안다. 다른 사람들은 진수성찬의 밥을 먹는데, 너희는 매일 끼니를 걱정하고 있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 유대인들의 고소고발도 알고, 로마의 행정관이 너희를 압박하는 것도 알고 있다. 너희가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사람들은 서머나 교회를 별로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작고 가난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성도로서 여러 어려운 일들을 만납니다.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처럼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힘든 일들을 견디고 만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울 때는옆에서 누가 알아주기만 해도 힘이 납니다. 따끈한 위로의 말 한마디가 힘을 내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다 알고 있다.” 우리의 형편을 주님께서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민들이 무엇입니까? 힘들지 않게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아니 ‘다른 사람들처럼만 살게 해주십시요’입니다. ‘더도 덜도 말고 다른 사람들처럼만 같게 해주십시오.’가 우리들의 소원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내가 다 알고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주님께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우리의 형편을 아신다면 좀 도와주십시오. 지금 죽을 지경입니다.’ ‘지금 안 도와주고 언제 도우시려 하십니까?’
1절을 보면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붙잡고’의 “kratw'n/크라톤”은 “kravto"/크라토스/권능”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어떤 것을 지배하는 힘이 ‘붙잡고’입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시는 분이 붙잡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들을 붙잡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모든 상황을 정확히 아시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켜주시고, 인도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처럼 유명한 사람들만 붙잡으시는 것이 아니라, 작고 낮은 우리들을 꼭 붙잡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권능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잡고 있는 한 누구도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의 주님께서 우리를 몰라주신다면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아신다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신 주님께 모든 고통과 어려움들을 모두 맡겨버립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을 모두 주님의 수레에 옮겨 실읍시다.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주님께 우리의 수고의 짐들을 모두 맡겨버립시다. 가정문제도 맡기고, 사업문제도, 맡기며, 자녀들 문제도 모두 주님께 맡기십시다. 한 사람도 주님께 맡기지 않은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오늘 두 번째로 아시는 주님께서
II. 우리에게 두려워말라고 하신 주님(10-11절)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성도들 모두 100%가 편안하고, 교회에 사람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목회자의 꿈이기도 하고, 성도들의 바램이기도 합니다. 에베소교회와 서머나 교회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머나교회에서의 문제는 에베소교회에서는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굶는다, 환난을 당한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는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재정적인 문제가 원활했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재정적인 문제가 대두가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후 107년에 순교한 ‘이그나티우스’라는 교부가 있습니다. ‘이그나티우스’가 에베소에 보낸 편지에 의하면 선행과 화목한 사랑을 가진 사랑의 사람, Oneimus 목사아래에서 훌륭한 지도를 받은 에베소 교회는 ‘정말 행복한 교회’(deservedly happy church)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그런 여력이 없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작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외부적인 압박에 서머나 교회는 많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싶어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성도들이 앞으로도 계속 우리교회에서 지켜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대체적으로 교회가 편안해지면 목회자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시합니다. 교회에 어려움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려고 합니다. 본질이 아닌 것에 신경을 씁니다. 교회가 편안해지고 어려움이 없어지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보다 행사나 하고 사업에 뛰어들려고 합니다. 노인사업, 어린이 사업, 교도소사업 등입니다. 이러한 사업들이 순수하고 복음의 진보를 위한다면 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의 돈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들은 이러한 것들을 경계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부탁하신 것을 발목을 잡는다는 것입니다. 시작은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했는데, 끝이 항상 돈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정말 신앙상 어려움이 오면 하루아침에 무너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앙생활이 제일 좋은가는 성경을 사랑하는 신앙이 제일 좋은 신앙입니다. 이것을 배제하면 위기의 때에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왜 일본의 침략시대에 교회가 부흥했습니까? 왜 초대교회가 부흥했습니까? 왜 종교개혁시대에 교회가 부흥했습니까? 대적들이 성경을 믿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로부터 일차적으로 빼앗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만 없으면 넘어지는 것은 하루아침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 곧 말씀의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은 넘어지려고 하다가 곧 일어서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모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줄입니다. 말씀을 믿고 기도하고, 또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말씀으로 위안을 받고 응답을 받으면서 뜨겁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때 이상한 면이 많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서머나 교회에게 즉시 은혜를 베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가 무한하고, 영원하며, 불변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하고 영원하며, 불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너희들에게 곧 고난이 온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너희 중 몇 사람을 시험하려고 감옥에 넣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너희가 10일간 환난을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givnou pisto;"
a[cri qanavtou/기누 피스토스 악슬리 싸나투 ’하셨습니다. 직역하면 ‘네가 죽기까지 믿어라’입니다. 우리말로는 ‘충성’과 ‘믿음’이 뉘앙스가 다릅니다. 그러나 헬라어는 같은 말입니다. 즉 네가 죽기까지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에 굳게 서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 대가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서머나의 행정관들은 로마황제에게 잘 보이려고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황제를 위한 신전도 유치했습니다. 아시아 제일의 관광명소로 만들었습니다. 마치 그와 같이 너희 서머나 교회는 죽기까지 믿으라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환난과 고난을 한정해 놓으셨습니다.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계속 고난과 환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십일 동안’입니다. ‘열흘’이란 정확하게 10일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 이상의 기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열흘이라는 것은 제한된 짧은 기간입니다.환난이 짧은 기간만 있다는 것은 성도들에게 인내할 용기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54:8을 보면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도여러분! 자비로운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오래도록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오랜 날을 환난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역경때문에 조금이라도 낙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고통은 항상 순간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나놓고 보면 고난이 가벼운 것을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영원하고 긴 편에 비해서 고난은 순간적이라는 것입니다. 열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영원한 복에 비하면 아부 짧은 것입니다.
주후 80년에 태어나 165년 경에 순교한 폴리갑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사도들과 후 사도시대를 연결해주는 교량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시도요한의 가르침을 후대에 전달했던 교부입니다. 그는 선생인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을 보존하였습니다. 이그나티우스가 로마로 순교행을 떠났을 때 20대였습니다. 그때 서머나의 감독이었습니다. 자신도 언제인가는 반드시 순교할 줄로 믿고 신앙을 항상 바르게 했습니다.
폴리갑은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때에 로마군에 체포되었습니다. 로마군은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된다고 본보기를 보이고자 일부러 먼 길로 폴리갑을 끌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구경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형장에서도 온갖 유혹을 다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총독은 황제에게 맹세하시오, 그러면 풀어 주겠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은 86년간 한 번도 나를 부인한 적이 없는데 당신은 나더러 무어라고 하는거요? 하면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서머나 교회에게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 그대로 그는 순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형편을 내가 모두 안다. 너의 고통도 알고, 네가 받는 환난도 알며, 네가 어떤 형편에 처해져 있는지 안다. 그러나 그 기간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를 계속 믿고 충성하기 바란다. 그러면 네가 결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꼭 믿음을 지켜 세상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서머나 교회처럼 환난과 고통이 적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두려운 것은 죄를 지을 확률이 높은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머나에서 활동했던 마귀가 이 시대에 우리를 무차별공격을 감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타락해 가는데도 목숨을 걸고서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은 목숨과 바꾸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빼앗기면 우리들의 모든 것을 뺏기는 것입니다. 끝까지 주님께로부터 온 진리, 그 말씀을 지키고 끝까지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전문가인가? (사도행전27:9-11)
사람들은 흔히 전문가(professional)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전문가라는 말을 너무나 많이 사용하고 있어서 어떤 사람이 전문가인지, 어떤 사람이 비전문가인지 구별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이 사람도 전문가, 저 사람도 전문가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전문가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가가 본문에서 묘사한 바울의 항해와 난파의 기록은 생생하게 고전적인 필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단순하게 파선에 대한 기록만이 아닙니다. 본문은 “고대 항해에 대한 지식을 제공해 주는 매우 시사적인 문서 중의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9-11절을 보면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고 누가는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죄수 아닌 죄수로 Roma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호송책임자는 역시 Roma의 백부장 율리오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백부장들은 모두 괜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리오도 Roma로 가는 길에 바울사도가 성도들에게 대접받음을 허락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음을 허락하더니/3절). 바울일행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항해하였습니다(4절). 소아시아와 고대 시리아 지방의 지중해 연안지방에서는 여름에 서쪽에서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습니다. 이 바람을 맞으면 항해가 곤란했기에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면을 타고 항해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순조롭게 소아시아의 한 동쪽지점에 도착해서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무라는 애굽과 로마사이를 왕래하는 곡물선단의 주요항구입니다. 거기에서 율리오는 아드라뭇데노라는 배를 만났습니다. 그 곡물선단은 Roma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Ramsay는 ‘그 배는 정규항로로 운행하여 아마도 빨리 Roma로 가기위해 빨리 달렸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을에는 바람의 방향이 북풍으로 바뀔 위험이 항상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항해하기가 점점 어려웠습니다. 7절을 보면 무라에서부터는 강한 북서풍이 불어와서 천천히 그리고 어려운 항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니도에 도착한 배는 잠깐 생각할 시간을 가졌습니다. 니도항은 애굽으로부터의 상선이 자주 드나들기 때문에 백부장은 니도항에서 알렉산드리아호에 올라타고서 순항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때 바울이 말합니다. 금식하는 절기가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보통 금식하는 절기는 9-10월 10경이었습니다. 금식하는 절기는 9월 중순경이었습니다. 9월 중순경이후에는 지중해를 항해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11월11일 이후에는 아예 항해가 불가능했습니다. 이것을 바울사도는 여행을 하면서 익히 알고 있었기에 백부장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위험한 일을 결국 자초한 것입니다. 소위말해서 자격들을 많이 따지는데, 자격이 꼭 능사는 아닙니다.
바울의 출생과 배경(사도행전22:2-4)
22:2-21은 3-4절은 바울의 출생과 배경, 5-16절은 바울의 회심, 17-21절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경위를 변증하고 있습니다.
어떤 타국인이 우리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데 유창한 한국어로 말을 한다면 아마도 말할 동안에는 조용히 할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바울을 죽이려 했던 폭도들이 잠시 조용해졌습니다. 바울사도의 말을 일단 들어보자는 것입니다.
바울은 ‘길리기아’Kilikiiva/Killikiîa ‘다소’tarsov"/tarsôs 출신이었습니다. 길리기아는 소아시아의 한 지역입니다. 다소는 길리기아의 수도입니다. 바울이 다소에서 출생했습니다. 다소는 유속이 빠른 키드누스 강변의 도시입니다. 지중해에서 16km, 타우루스 산맥에서 남쪽으로 48km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했습니다. 다소는 소아시아의 산맥의 녹은 눈으로 이루어진 차가운 강물이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평원 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해수면 위로 21m되는 지점에 위치한 이 도시 아래에 항구호수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지중해 선박이 접근하기 용이하고 안전한 곳입니다. 이 독특한 수로 때문에 다소 내륙은 해상 무역이 번창하였습니다.
주전41년에 이 내륙 호수에서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를 만나 사랑에 빠진 장소입니다. 유브라테스로부터 시작되는 고대 무역로가 안디옥 및 다소에서 동쪽으로 80km 되는 동지중해의 대로와 결합하여 길리기아 중앙을 통과하여 북으로 돌아 다소산맥을 통과 소아시아의 고지에 이릅니다. 다소인들과 그 이웃들은 주전1,000년에 이 고지대로 가는 자연상태의 협소한 통로를 넓히기 위해 암벽을 깎아서 뚫는 위대한 공학적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이 성문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산악 통로 중 하나입니다. 육지의 대로와 바다의 길로 인해 다소는 동과 서가 만나는 가장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페르시아 제국 아래서 다소는 총독의 지배권이었습니다. 크세노폰은 다소를 “위대하고 번영한 도시”라고 했습니다. 주전334년 알렉산더 대왕이 다소를 점령하고 헬라적 요소들을 더욱 가미시켰습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가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주전171년 길리기아에 체류했습니다. 그는 동양적 영향보다 헬라적 요소를 고무하기 위해 다소를 헬라 자치도시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통치초기에 다소에 산업과 상업을 육성시키려고 유대 식민자들을 이주시키고 헬라인과 동등한 권리를 주었습니다.
폼페이가 주전64년에 길리기아 속주(Province)를 재편성하였을 때 다소는 로마 정부의 사령부였습니다. 안토니는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모든 다소 주민에게 하사하고 세금을 면제해주고 자치권을 주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특권을 더욱 확실히 보장했습니다. 다소에서 화폐가 주조되었습니다. 이웃의 길리기아 성읍들은 이러한 면에서 동과 서의 혼합지역이었습니다.
다소에는 그 밖의 Greco-Roman 도시처럼 정부의 지원을 받는 대학이 있었습니다. 스트라보(주전63년)는 다소인들의 교육과 철학에 대한 열정은 아테네 사람과 알렉산드리아인들을 능가하였다고 했습니다. 또한 길리기아 생도들은 토착민이었지 위의 두 도시의 경우에서처럼 타지에서 온 자들이 아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정치적 성향을 가진 스토아 철학자 아데노도루스(주전74년-주후7년)는 Augustus의 고문이자 교사로서 길리기아 태생이었는데, 그의 지도 아래 다소는 플라톤의 이상적인 정부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주전15년 아데노도루스(Athenodorus)가 황제와의 오랜 관계를 유지한 명성을 지닌 채 다소로 내려왔을 때 다소의 몇몇 민주적 절차들을 복원하라는 임무가 이 유능한 철학자이자 지도자에게 떨어졌습니다.
따라서 다소는 많은 시민들이 소중하게 여겼던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을 발전시켰습니다(행 21:39). 바울은 다소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였습니다. 개종 후 약 10년간을 그곳에서 지냈습니다(행9:30/갈1:21). 다소의 복합적인 문화는 바울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엄격한 교육방침 때문에 바울은 다소의 대학에 다닐 수 없었습니다. 청년기 바울에게 바리새적 교육이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행22:3).
사도바울은 ‘가말리엘’Gamalihvl/Gamalliêl은 그들의 미쉬나(Mishnah)에 인용되어 있는 탁월한 타니임, 즉 교사들의 대가족 우두머리였습니다. 사도행전에 언급된 한 사람은 가말리엘 하자켄(Gamaliel ha-saqen)입니다. “장로 가말리엘”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의 조부는 원로원 의원 힐렐(Hillel)이었다고 합니다. 장로 가말리엘은 Torah에 관한 랍비의 주석서 미쉬나의 많은 구절에 인용되었습니다. 가말리엘은 교사에게 주어지는 모든 유대식 칭호 중에서 가장 높은 Rabba/on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요20:16). 그에 대한 기억은 랍비의 전승에서 가장 큰 찬사와 존경의 하나가 되어왔습니다. 초기 기독교 교회에 관하여 말한 그의 정확한 의견은 교계에서 많은 토론의 주제가 되어왔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가말리엘은 사로잡힌 사도들에 관하여 온건한 실용주의자의 입장을 주장하였습니다. 가말리엘은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의 군중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면서 가말리엘이 자기의 선생이라고 주장할 때에 언급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이름을 자기 자신의 경우 가말리엘의 방침이 군중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은근한 암시로서 언급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바울사도는 출신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으로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앞길이 푸르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복음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의 설교/그리스도를 예비함(사도행전13:16-22)
왕은 좋은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 국가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백성들의 머리요, 한 국가의 최고통치자이기 때문에 왕을 하려고 과거에도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임기가 매우 짧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왕을 선호하다보니까 궁중에서 암투가 심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왕자들은 왕의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자리는 하나고, 왕을 하기는 해야겠고, 해서 쿠데타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왕의 임기가 짧았습니다. 왕을 한번 하면 죽을 때까지 하는 자리인데 그렇게 주변에서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물론 오래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오래 하지 못했습니다. 국가조차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전란과 변란으로 인해서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 두 부류의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사도는 설교를 합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내용을 다윗 왕까지 말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오랜 세월을 섭리하셨는가를 말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많은 나라 중에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선택하실 때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이 세상을 치료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에덴에서 파괴된 이 세상을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치료하고자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에서 양육하셨습니다. 250만-300만 명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키우셨습니다. 애굽에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큰 권능(meta; bracivono" uJyhlou'/메타 브라키오노스 휩셀루)으로 빼내셨습니다. 문제는 광야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보내주신다고 해도 이스라엘은 믿지 않았습니다. 돌다리도 두드려서 건너야한다고 하면서 스파이를 보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의 스파이보고를 받고 좌절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40년을 방황하다가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1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인내하셨습니다. 결국 믿음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가나안의 강한 족속들을 멸하시고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약450년간). 사무엘 선지자때까지 사사를 주셨습니다. 그들이 왕을 구하자 하나님께서 기스의 아들 사울을 왕으로 40년간 세우셨다가 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새의 아들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며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삼상13:14, 시89:20)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의 선택에서 다윗의 선택까지의 요지를 보면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요약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 땅에 오셔서 역사하셨음을 말하고자 회당장이 읽은 성경에 답을 한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전하는 것이 곧 예수그리스도요, 복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예수를 전하고자 말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복음이요, 복음이신 예수님은 이 세상의 구원자요, 사람을 살리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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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에서 그리스도인으로(사도행전9:19-22)
다메섹의 유대인들은 신이 났었을 것입니다. 보기 싫은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체포해서 본국으로 송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정통유대인으로 각광을 받고, 촉망을 받는 인물이라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그렇게 살아왔고, 다메섹에 그러한 이유로 왔기 때문입니다. 다메섹에 있는 유대들은 아직 사울의 상황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사흘이나 식음을 전폐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성령과 아나니아로부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점점 음식을 먹고 기력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여러 날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각 회당을 다니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습니다. 사울의 이 말은 유대인들이 인정하지 않는 말이요, 인정하기 싫은 말입니다. 따라서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22절을 보면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이 말하는 것에 대해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임무가 무엇인데, 이 사람이 사울이 맞아? 다메섹에 온 이유가 뭐야, 저들을 잡아가려고 오지 않았나?’ 주님께 잡힌 사울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울은 자신을 부른 주님의 이름을 힘있게 전파했습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다메섹에서는 사울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정작 도착해서 하는 말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메시아) 전파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과 달리 교회는 이로써 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교회라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主(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크고 작음이 없이 모두 교회입니다. 사실 사람들보기에 크고 작은 것이지, 교회는 대소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교회자랑이 아닙니다. 교회표어의 자랑이 아닙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축복, 복이 교회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보여지는 물질의 복이 전부였다면, 열 두 제자들은 최고로 복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도 부자가 없었고, 모두 순교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님의 제자들을 복된 자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계속 전파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위해 사울이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명을 위해 우리들이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명을 위해 교회를 이 땅에 세우셨습니다. 이 사명을 위해 오늘 우리들을 이 땅에 존재케 하십니다. 우리를 반대하든지 안하든지, 어디에서나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끝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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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 없는 산헤드린(사도행전4:13-22)
예루살렘의 공회(산헤드린)는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했습니다. 그들을 체포한 죄명은 불법집회였습니다. 백성들을 가르치고 부활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도를 전한 것이 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잡아놓고 보니 審問(심문)할 말이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막힘없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본래 베드로와 요한을 학문 없는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조리 있게 말하고, 베드로와 요한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베드로와 요한은 틀림없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너무나 변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병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더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들을 공회에서 내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은 과거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새롭게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sunevdrion/sanhedrin)은 예루살렘최고의회기구였습니다. 그러나 산헤드린은 로마의 세나투스(Senatus/원로원회의)의 번역어로서 법정, 의회를 가리켰습니다. 70인 역본과 유대 헬레니즘 문헌에서 산헤드린은 히브리어 d/s(çôwd/쏘드/의논, 회의/잠언11:13), tm'(/math/마트/사람), @yDI(dîyn/딘/심판/잠22:10), lh;q;(카할/집회/잠 26:26)의 번역어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산헤드린은 유대의 산헤드린과 같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역사적으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산 적이 별로 없습니다. 포로기 후에 유대는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지배했습니다. 제사장 신분의 귀족들과 여러 지파의 우두머리들은 예루살렘에 원로회의를 구성했습니다. 그 회의의 의장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의회는 시리아왕 안티오쿠스 Ⅲ세의 칙령에 의해 게루시아(gerousia/원로회의)로 칭했습니다. 그러나 이 의회는 하스몬 왕가에 의해서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전76-67년에 여왕 알렉산드라 치하에서 바리새파 서기관들이 그 권한을 부여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의회에 대해 최초로 사용된 것은 로마황제 가비니우스(Gabinus, 주전57-55) 통치 아래 있을 때입니다. 가비니우스는 팔레스타인을 5개의 산헤드린으로 나누었습니다. 그 후 씨저에 의해 예루살렘 회의는 다시 이스라엘 전체를 지배했습니다.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구성은 71명의 의원들이었습니다. 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중 지도급 인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의장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시대와 사도시대에 이들은 이름에 걸맞게 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기구였지만(자신들의 생각에), 하나님을 오히려 배반한 기구로서 ‘산헤드린’하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관용어로 쓰일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성경시대에 끝까지 교회를 대적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마귀가 좋아하는 짓들만 골라서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우리들도 늘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때로는 그 반대가 되지 않을까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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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한 자들이 받을 복(사도행전3:11-16)
회사에서 안전사고가 나면 참으로 복잡합니다. 바로 감사가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인명피해가 최소여야 하는데 대체적으로 그렇지를 못합니다. 상급기관에서 감사가 나오면 제일먼저 조사하는 것이 안전교육일지입니다. 교육을 제대로 했느냐? 교육을 제대로 시켰느냐? 받았느냐를 따집니다. 그러니 교육을 시키는 사람도 사고를 당한 사람도 기관도 복잡합니다. 따라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려면 계속 반복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반복교육으로 사고를 방지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사도들은 회개(Repentance/metanoevw)의 메시지를 계속 전합니다(2:38,3:19,8:22,17:30). 회개의 메시지는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계속 전한 메시지입니다(신32:29, 대하30:7-9, 욥36:10, 시34:14,18, 잠1:23, 사22:12,31:6,44:22,55:6,7, 렘3:4,1214,19,22,6:16,17,18,7:3,18:11,25:5,6, 26:3,13, 겔12:1
3,5, 18:30,31,32,33:10-12,19, 단4:27, 호6:1,10;12,14:1,2, 욜1:14,2;12,13,15,16,17, 암4:12, 5:4,5,6 욘3:8,9, 학1:7, 슥1:3). 왜 사도들이 회개의 메시지를 전합니까? 죄없이함입니다(to; ejxaleifqh'nai uJmw'n aJmartiva")/토 엑살레이프쎄나이 휘몬 하말티아스/너희의 [그들]죄들을 지워버림을 당하라). 이 죄는 어떤 죄입니까? 영생을 하게 하는데 있어서 막고 있는 죄들입니다. 이 죄는 영혼과 육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죄입니다. 이 죄를 회개함으로 영생을 하지 못하게 하는 바리게이트를 제거해버립니다. 즉 회개함으로 죄에서 해방되게 된다는 것입니다(유쾌하게 되는 날).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영생을 성도들이 전할 때 믿음으로 죄 없이 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레26:40, 신4:29,31,30:3). 회개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받습니다(레26:40-42, 대하7:14, 사57:15).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행11:18). 성령을 받습니다(행2:38-39).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구원을 받습니다(사59:20, 겔18:21-23,2728). 그래서 사람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영원히 죽기 때문에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회개의 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이전의 죄를 용서받습니다.
왜 회개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역을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머레이는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사역의 완전성을 네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역사적 객관성(historc objetvit), 궁극성(finality), 독특성(uniquenss), 본질적인 효능성(intrinsic efficacy). 역사적 객관성이란 그리스도께서 은혜의 수혜자들이 조금이라도 참여하거나 거들어주는 것 없이 2천 년 전에 세계역사 가운데서 객관적인 사역을 성취하셨다는 의미이고, 궁극성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객관적사역이 “결코 되풀이되거나 반복될 수 없는 완성된 사역이며, 독특성은 그리스도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로,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본질적인 효능성이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우리의 죄로 인한 긴급한 사정을 해결해주는데 본질적으로 적당하며 선택받은 백성이 온전히 구원받는데 필요한 모든 은혜를 마련해주었다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회개한 자들이 받는 복은 다양합니다. 제일먼저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혜를 얻습니다.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받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영생하는 사람은 복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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