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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하시는 하나님
에스겔1:15-21 2026.4.12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실 때 거룩한 곳에서만 만나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라든지, 성소라든지. 예루살렘 같은 도시에서만 만나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소 아닌 곳, 기도원 아닌 곳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꿈도 꾸지 말라고 하는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여호와를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은 한낮에 샘 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에스겔은 그발 강가에 있었습니다. 그발 강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갈라져 나와 닙불[남바베벨론의 고대도시] 성을 거쳐 다시 합쳐진 150㎞의 관개용 운하입니다. 이곳은 에스겔 선지자를 비롯한 유다 포로 들이 정착했습니다. 그발 강은 바벨론에 끌려온 유대인들의 노역장이었습니다. 노역장에서 일하고 있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을 보았을 때 30살이었습니다[바퀴의 환상].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년이었습니다. 주전593년 오월에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네 생물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네 생물의 환상 중에 바퀴의 환상이 나옵니다. 에스겔은 네 생물의 곁에서 바퀴 하나를 보았습니다. 네 바퀴의 색깔은 황옥색입니다. 연한 푸른 바다색입니다. 바퀴 안에 또 바퀴들이 있었습니다. 네 생물이 행하는데 제한을 받지 않는 것을 상징합니다. 또한 세상일과 하나님의 섭리가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 안에 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레는 높고 무서웠습니다. 돌아가며 눈이 가득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고思考의 폭이 광대하심을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다 지켜보심을 상징합니다. 바퀴의 움직임은 신이 가는 데로 따라갑니다. 생물의 신이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힘에 의해 모든 것이 행동함을 상징합니다. 네 생물의 모든 바퀴가 사방을 향해 있었습니다. 어느 곳을 향해 가더라도 유턴U-turn하지 않았습니다. 직선으로 그대로 나아갔습니다. 바퀴들의 동작은 전적으로 생물들의 동작을 따라갔습니다. 이유는 생물의 영이 네 생물과 바퀴들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섭리의 바퀴 곧 생물들은 땅 위를 나는 날개를 가졌습니다. 바퀴는 땅을 따라 행하도록 구성되었습니다. 각 바퀴는 그 안에 다른 바퀴를 가졌기에 어디로 가든지 자유로웠습니다. 또한 [섭리의] 바퀴는 언제나 이동(motion)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중대한 완성을 향해 움직이는 신적 진행입니다. 이 운동은 매우 자유로웠습니다. 바퀴 안에 바퀴는 어느 방향으로든지 행할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이 세상은 스스로 제멋대로 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운행하게 하시는 우주입니다. 그래서 사건의 방향을 그가 원하시는 방향으로 운행하게 하십니다.
선지자가 본 바퀴의 둘레는 굉장히 무서웠습니다. 온통 바퀴 둘레에 눈이 가득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눈이 있다는 것은 다 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말합니다. 많은 눈이 있는 바퀴는 어디로 가든지 잘 볼 수 있어서, 목표를 향해 똑바로 행할 수 있습니다. 바퀴는 생물들의 뒤를 따르지 않습니다. 생물이나 바퀴들은 성령에 의해 움직입니다.
창세기11:1-9을 보면
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노아의 홍수는 어떤 한 지역의 부분적인 홍수가 아닙니다.[섭리하시는 하나님] 전 지구적인 홍수였습니다. 홍수 후에 엄청난 사람이 한곳에 모여 살았습니다. 이때는 발음[입술에서 나는 소리]과 말이 하나였습니다. “이리 와, 저리 가”하면 다 알아들었습니다. 이들이 모여서 하는 소리가 성과 탑을 쌓아서 이름을 내자는 것입니다. 홍수가 난다고 하더라도 더 높이 쌓아서 피해 보자고 소리를 모았습니다. 그리하여 곧바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벽돌로 돌을 대신하여 구웠습니다.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여 사용했습니다.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발음과 말이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삼위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니 가관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모여있는 사람들의 말을 혼잡하게 했습니다. 갑자기 [벽돌을 가져와] 하는데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역청을 많이 퍼와] 못알아들었습니다. 말 따라 소리 따라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경영이 파破하게 되었습니다.
언어를 혼잡하게 했는데도 세상은 이러한데 만일 세상이 그때부터 단일언어를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벨탑은 니므롯이 중심이 되어 그의 명령과 지휘로 건설되었습니다. 바벨탑을 쌓는 목적은 인간의 교만이었습니다. 바벨탑을 쌓는 목적의 하나는 “우리 이름을 내고”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만해져서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인간의 정책으로 탑을 쌓는 목적 중 또 하나는,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정책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인간의 반역이었습니다. 바벨탑은 하나의 단순한 탑이 아니라 지그랏(Ziggrat)이라고 불리는 제단의 일종이었습니다. 그 꼭대기에는 달신月神인 나나Nana를 섬기는 제단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을 종합해볼 때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을 배반하려 했습니다.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셨습니다.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지구가 몇 번 망할 짓들을 골라서만 했을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5장 1-4.7항[A/S하시는 하나님] 만물의 위대한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언행심사를 보존하시고 감독하시며 처리하시고 통치하신다. 그는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하시며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에 의하여 그의 무오한 예지와 그 자신의 의지의 자유롭고 불변하는 계획을 따라서 하신다. 이로써 그의 지혜. 능 여력, 공의 선하심 그리고 자비의 영광을 찬미케 하신다.
제1원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예지와 작정에 따라 모든 일들이 변함이나 틀림이 없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동일한 섭리에 의해서 하나님은 제2원인들의 성질에 따라 그 모든 일들이 필연적으로 자유롭게 또는 우발적으로 일어나도록 작정해 두셨다.
하나님은 그의 일반적 섭리에 여러 수단들을 사용하신다. 그렇지만 그는 그 수단들 없 이 그것들을 초월하여, 그리고 역행하여서도 그의 기쁘신 뜻대로 자유롭게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무한하신 선하심이 그의 섭리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섭리는 아담의 첫 번째 타락과 천사들과 사람들의 모든 죄까지도 포함한다. 그런데 그러한 죄들은 단순한 허용에 의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허용하시되 여러 세대에 가장 지혜롭고 강력하게 제한하시고, 그 밖에도 명하시며 주관하시어 그 자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도록 하신다. 그러나 죄악성은 오직 피조물에게서 나온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가장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의 조성자이거나 승인자가 아니시며 또한 그러실 리도 없다. 하나님의 섭리가 일반적으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미치는 것처럼. 하나님은 가장 특별한 방식을 따라 그의 섭리로 자기 교회를 돌보시며, 모든 일들을 교회에 유익이 되게 처리하신다.
시편145:9,13,15-17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
시편 기자가 선포하고 있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신중한 예지豫知foresight로 그분의 창조 세계 모든 부분을 섭리하십니다. 만물을 지탱하십니다. 만물을 보존하십니다.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9: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사도행전17:25,28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히브리서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섭리라는 말은 성경에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providentia] 하지만 그 단어가 의미하는 개념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시136:25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성경이 주장하는 바는 전 우주가 그것을 창조하신 분의 사랑과 보호하시는 능력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따뜻한 사랑과 자비로 그분의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시고 돌보심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구원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특별은총을 내리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섭리에 대해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독립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의 관계없이 그분의 피조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은 그리스도 안에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를 그리스도와 분리하여 이해하는 것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의 목적을 최종적인 승리의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시고 실행해 가십니다.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예수님 안에서입니다. 아담과의 최초의 관계,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새롭게 갱신된 노아와의 관계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와의 언약 관계와 비교할 때 동일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성육신하신 말씀인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관계를 세우시며, 그분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서의 존재를 책임지십니다.
천지창조가 우주에 관한 하나님의 사역의 시작이라면, 섭리는 우주에 대해 끊임없는 관계를 갖고 그것을 지속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다시 말해, 섭리란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보존하시며 그 세상을 자신이 의도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역입니다.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의 관점에서 보면, 섭리는 창조론보다 여러 가지 점에서 더욱 실제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섭리는 문자적으로는 예견한다는 의미이지만, 이 말은 단순히 미래에 대해 안다는 것 이상의 의미입니다. 섭리란 신자들이 삶 속에서 하는 행동에 있어 핵심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삶 속에서 친히 역사하고 계시다는 확신을 갖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살고, 또 세상만사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모르신다거나 무관심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위험에 과감히 맞설 수 있습니다.
섭리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붙드시고 보존하시는 사역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의도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인도하시고 지도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보존과 섭리는 하나님의 총체적인 사역 가운데 구별될 수 있는 측면입니다.
보존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유지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파괴시키려 하고 해하려 하는 것들로부터 보호하시는 것과 세상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보존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합니다. 느헤미야 9:6에서 에스라는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 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 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바울도 창조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 언급한 후에,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창조된 세상을 위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7)”. 히브리서 저자도 그리스도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 자(1:3)”로 말합니다.
성경 저자들은 도처에서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손길을 보았습니다. 시편 기자들의 찬양 시들은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사역을 강조했습니다. 시편104편을 보면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두셔서 그것이 결코 흔들리지 않게 하셨습니다(5절). 그분은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셨습니다(10절). 산에 물을 주셨습니다(13절). 또한 흑암을 지으셔서 삼림의 모든 짐승이 그 먹이를 찾아다닐 수 있게 하셨습니다(20-21절).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이 자신들의 음식을 하나님께 받습니다(24-30절). 우리가 지금 인용하고 있는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는 피조물 가운데 어떤 부분도 스스로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의 시작과 계속이 하나님의 뜻과 활동하심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특별히 이스라엘의 보존을 통해 뚜렷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엄청난 기근을 당할 때 하나님의 돌보시는 손이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근 당할 때 자기 백성을 먹이시기 위해 요셉을 애굽에 보내셨습니다.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걸어갔습니다. 뒤쫓던 애굽의 군사들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주신 양식을 먹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을 차지하려 할 때는 때로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가 하셨습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놀랍도록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볼 수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세워 놓은 금신상에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풀무불에 던져져 태워지도록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그 불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을 던진 자들은 그 뜨거운 열에 죽었습니다. 다니엘도 하나님께 기도드린다는 이유로 사자굴에 들어가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보 존하신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명백하게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부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사역을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 즉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데 관심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들을 먹이시고 들의 꽃들을 입히신다는 사실을 재확인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서도 그와 똑같은 일을 분명히 행하실 거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극히 작은 것들을 위해서도 공급해 주시는데, 인간은 새나 꽃보다 훨씬 더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면, 이러한 모든 것들을 그 들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이 지은 피조물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이 시간에도 이 지구는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패권覇權다툼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명분도 없습니다. 국제사회에 어떤 실익實益도 없습니다. 오직 사람들이 살아가기가 힘들 뿐입니다. 당장 유가로 인해서 전 세계의 경제가 주저앉을 정도입니다. 이것 역시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것입니다.
섭리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강조점이 있습니다.[그리스도와 연관어 있는 섭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에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10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양 떼들이 자신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메시아 됨을 믿고 오직 예수를 따른다고 했습니다. 그의 양들은 그의 음성을 알고 그를 따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바울도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리요?(롬8:35)”라고 물었습니다.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나열하고 나서 그 모든 것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요약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우리를 보존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 한 가지 두드러진 면은 신자라고 해서 위험이나 시험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서 보존된다는 점입니다. 핍박이나 고통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은 없습니다. 다만 그것들이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약속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의 풍성한 대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기뻐하였습니다(빌4:19). 감옥에서 바울의 이러한 글들은 그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그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12절). 그는 그에게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13절).
Closing 네 생물과 바퀴, 바퀴 안의 바퀴의 구동력驅動力은 최첨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절대 스스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어디든지 신이 가려 하면 그들도 행하였습니다. 네 생물이 따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바퀴도 스스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바퀴 안의 바퀴도 스스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신이 가려 하면 그대로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섭리의 지혜는 우리에게 공급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허탄한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실제적인 필요에 부응합니다. 우리의 사치가 아니라 우리의 쓸 것을 고려하여, 분량을 균형 잡히게 하는 데서 섭리하심이 나타납니다.
| 우리 중에 계시는 하나님 (2) | 2021.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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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그렇게 생각해? 아닌데
로마서2:1-12
로마교회의 건립자는 아직까지 알 수 없습니다. Roman-Catholic에서는 베드로가 건립했다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 배경을 마태복음16:18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그리고 교회사를 쓴 유세비우스(263년경-339년)의 기록과 그 외에 여러 가짜 서신들에 두었습니다. 유세비우스는 교회사에서 클라우디우스가 통치하던 시기인 (41년-54년)에 베드로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교회사”,ii.14). 유세비우스는 교회사에서 그 시기를 클라우디우스 2년부터 20년간 로마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새빨간 거짓입니다. 그 기간은 예루살렘 총회가 있던 시기(52년)였고, 그때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로마를 방문하여 로마교회를 세웠다면, 바울이 로마서와 여러 서신에서 반드시 언급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전설은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만나 함께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모두 순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거짓입니다. 로마는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하여 기독교가 매우 일찍 로마에 정착하였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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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의 창시자인 크리스투스는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에서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에 의해 처형당했다. 그 치명적인 미신은 당시에는 억압되었으나, 다시금 유대라는 그 악의 근원지뿐만 아니라, 온갖 추잡하고 수치스러운 것들이 사방에서 모여들고 유행하는 도시 로마에서도 다시 터져 나왔다.
고 했습니다. 로마인들의 관점에서 기독교는 공인된 종교가 아닌 이방적이고 퇴폐적인 '미신'으로 간주했습니다. 타키투스가 기독교를 바라보는 편견이었습니다. 타키투스는 56년에 출생하여 120년경에 죽었습니다. 그의 생애에 이미 로마에 그리스도교가 전해졌습니다.
바울사도는 복음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습니다. 복음에 대한 그의 핵심적 개념은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여러 지역에 심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회심 이후 계속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건립을 구상하고 실행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롬15:19).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바울은 이제 로마에 갈 계획을 구상했습니다. 로마에서 복음을 더욱 서쪽으로 전파하고자 계획했습니다(롬10:18).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편지를 이방인 세계의 수도요, 이방인 사상의 중심지인 로마로 보냈습니다. 왜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했습니까? 인간에게 복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먼저 로마교회의 안부를 묻습니다. 사도로서의 자신의 소명과 그 권위의 궁극적 근거가 하나님임을 말합니다. 즉 자기 편지가 영적 권위가 있음을 밝힙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저자들이 수없이 한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니라”는 말을 반복 사용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원저자는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핵심 주제인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먼저 요약 제시합니다. 편지를 읽는 사람에게 주의를 환기시켜 준 것입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한마디로 “믿음으로 얻은 의”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 품성을 올바로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이방인들은 윤리적·도덕적 퇴폐를 일삼는 죄를 범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피조물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종교적인 죄를 저지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비정상적인 관계는 사회와 사회,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를 변질시킨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혼란은 필연적으로 사회 도덕적 부패를 초래합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주의를 지향하여 여러 지역의 외래 문명을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문화적 통일을 꾀하였습니다. 로마인들은 동방으로부터 여러 가지 문화와 종교를 수입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매우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소아시아의 여신 키벨레(kybele/大地母女神), 애굽의 이시스(Isis), 페르샤의 미트라(Mithras/계약과 맹세의 신이자 광명의 신) 등의 이방 신들이 수입되어 우상숭배를 계속 늘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양상을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세계주의를 지향하는 문화적 혼합주의입니다. 하지만 신앙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을 이방의 것과 동일시하므로 결국 하나님을 비하시키는 죄악이었습니다. 로마에 들어온 대부분의 종교는 극도의 부패와 타락을 부채질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을 거스르고 더욱 추잡한 개인적 사회적 혼란을 야기 시켰습니다.
1장을 보면 바울사도가 이방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다른 지역과 달라서 로마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많이 섞여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를 로마교회에 보내는 서신 속에서 논하고 있습니다. 2:1을 보면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남을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면 이 세상에 그처럼 추악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먼저 언론인들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계엄 한 나쁜 사람이야.” “저 사람들은 계엄에 힘을 실어준 나쁜 당이야.”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조문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자기에게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판단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모든 사건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세상의 존속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로마서 2장에서의 판단은 세상사에서 판단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판단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판단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 이방인의 운명을 1장에서 신랄하게 경고했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은 새로운 청중에게로 관심을 돌립니다. 바울 사도는 당시에 널리 쓰인 diatribe디아트리베 문체로 자신의 생각을 설파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골목 구석에서 청소년들을 붙잡고 '디아트리베'를 하고 있다.” 디아트리베란 말로서 상대방의 사상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디아트리베는 본래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철학자들이 사용하던 날카롭고 공격적인 논박 방식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비판을 넘어, 대중을 상대로 상대방의 주장을 난도질하듯이 파헤치고 논파하는 일종의 언변적 공격술입니다. 소크라테스, 디오게네스, 세네카, 키케로 등이 디아트리베를 사용했습니다.
로마교회의 구성원들은 여러 부류였습니다. 로마 시민들, 이주한 유대인들, 유대인 개종자들, 다양한 유형의 노예들. 다른 혈통의 이방인들, 그리고 불신자들이었습니다. 로마 교회가 바울의 편지를 읽었을 때 많은 사람이 그가 우상숭배나 동성애 그리고 폭력 행위들에 대해 정죄하는 것에 수긍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사도가 자신들을 향해 실제로 “당신들도 핑계할 수 없다. 당신들 역시 나쁜 사람들이다”라고 말했을 때 독자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대상이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있을 만큼 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형벌을 피하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기를 바란다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 상대적으로 다른 죄보다 더 심각한 죄가 있는지를 논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누구든지 우리로 구원과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아트리베’의 문체로 말합니다.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의 대상은 유대인입니다(2:17). 이제 바울은 유대인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의 끔찍한 죄악과 그들의 우상숭배와 동성애 같은 죄들과 그들의 전반적인 삶의 방식을 비판했습니다(1장). 유대인들은 바울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1:32)고 말했을 때 동의했습니다. “당연히 그렇지.” “암 옳은 말씀이야.”라고 했습니다. 유대인 자기들은 그러한 죄악들을 범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자기들은 죄악들에 합당한 심판에서도 자유롭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도 역시 죄인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을 판단할 권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같은 죄들을 범하지 않았기에 스스로 의롭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죄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은 우상숭배자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도 자신을 의롭게 여김으로써 자신을 또 하나의 우상으로 만들었습니다. 많은 이방인이 회개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 역시 회개를 거부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자기 방식으로 많은 죄를 범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소유한 사실만으로 자신들이 다른 백성들보다 우월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자신들이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자랑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소유했기에 우월한 백성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아트리베 문체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자기를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백성은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로마서 2장에서의 판단은 심판입니다. 너희 유대인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안도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유대인에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 길이 참으심은 유대인이 자기만족에 빠지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로 회개케 하려 하심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악을 하나도 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의 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로 심판받아야 할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가 유대인들에게 말하는 요지가 무엇입니까? “너희들 그렇게 생각해? 아닌데”입니다. 로마서1:17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 기록되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주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죄 용서를 받습니다. 죄를 용서받으므로 죄에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행15:9). 죄를 용서받은 것은 바로 罪責죄책이 제거되었음을 뜻합니다. 죄가 죄로 정죄되는 것이 아니고, 죄책이 제거되었으므로 벌 받을 근거가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 믿음이 곧 의입니다(롬3:28).❚ 주 예수를 믿으므로 죄를 완전히 용서받아 의롭다고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우리는 주 예수님을 믿는 것뿐입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하나님이 의로 여기셨습니다(롬3:30).❚❚ 의로 인정받는 것은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처럼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도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뿐입니다. 우리의 의는 전적으로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의는 본래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생존권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을 반역하므로 생존권을 상실하여 다 죽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죽게 되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 의를 얻어 다시 살 수 있는 길은 전혀 없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넘치신 하나님은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들을 다시 살리기로 하셨습니다. 그것은 죗값을 지불함으로 반역죄를 무효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이 일을 할 수 없기에 하나님 자신이 값을 대신 지불하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incarnation)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믿기만 하면 죽지 않고 생명을 얻어 영생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 앞에 사는 생존권을 주기로 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믿으면 됩니다(요3:16). 이런 하나님의 구원경륜 때문에 믿음이 바로 의가 됩니다. 믿음만이 의가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이 대신 갚은 죗값을 내가 갚은 것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 외에 다른 방식 곧 인간의 선행으로 의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깨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으로 가는 첩경입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을 지킴 없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었습니다(롬4:9-11). 우리도 율법을 지킴 없이 오직 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죄인은 도저히 율법과 계명들을 지킬 수 없습니다(롬3:20,28).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 대신해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다 속량하셨습니다(갈3:10-13 4:5).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된다고 하셨습니다(갈2:16, 3:11). 예수 믿음은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죗값을 갚은 것을 내가 갚은 것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의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롬5:1).
또한 주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갈4:4-6). 자녀가 되면 하나님의 상속을 받습니다(롬 8:17). 상속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주 예수를 믿음으로 되었습니다(갈4:7).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아 구원을 얻었습니다(엡2:8-9).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주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까지 되었습니다. 오직 주 예수를 믿는 믿음만이 바로 의입니다.
유대인들이 혼동하고 잘못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과 행함의 문제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믿음과 행함의 문제를 잘못 알고 있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종교개혁교회 중 알미니안 신학 계통의 교회들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以信稱義이신칭의 교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거의 Roman-Catholic의 교리 곧 믿음과 행함의 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으려면 믿음에 善行(good works) 선행을 더해야 완전해진다고 주장합니다. 믿음만으로는 결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믿음에 선행을 더하여 完全聖化완전성화를 이루어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주장은 성경을 허무는 것이며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교리를 뿌리부터 파버리는 것입니다.
Roman-Catholic은 처음 믿는 신앙을 잠재신앙(fides implicita)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잠재신앙이 구원하는 믿음(fides salvifica)이 되려면 교회의 교리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사랑의 선행을 더해야 된다고 가르칩니다. 로마교회의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의 가르침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구원은 이루셨어도 그 구원을 내 것이 되게 하는 일은 내가 선행을 행하여 공적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구원에 참여하는 것은 전적으로 은혜의 역사가 아닙니다. 사람이 합당한 몫(?)을 해야 구원에 동참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가르침이 중세에 수많은 사람을 괴롭혔습니다. 그리하여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는 교리로(롬1:16-17; 3:21-22; 갈2:16 합2:4)교회를 개혁하였습니다.
하박국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1:16-17,3:21-22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그런데도 아직까지 일부 교회들은 이신칭의 교리를 버리고 믿음과 선행으로 구원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毒독을 먹이는 것이며, 痲藥마약을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 곧 의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죗값을 지불하시어 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지식이라고 말하면 사람이 스스로 얻는 지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신앙지식은 충분하고 확실한 복음의 내용을 선포함에서 옵니다. 신앙대상의 지식항목은 확실한 복음선포입니다. 복음선포에서 바르고 확실한 신앙지식이 오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선포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그리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선포 곧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를 듣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선포함이 복음입니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선포를 들음이고 복음선포를 들음으로 믿음이 나옵니다.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음에서 나옵니다. 그 외의 다른 방법으로 얻는 지식은 성경적 믿음지식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믿음지식은 그리스도의 복음선포를 들음에서 나옵니다. 그 지식만이 바르고 정당한 믿음의 대상지식입니다.
믿음의 대상에 대한 바른 선포를 받으면 믿음의 대상을 확실히 알게 되어 믿음고백을 합니다. 믿음의 대상에 대한 확실한 지식은 복음선포에서 받았으므로 믿기로 작정하고 결단합니다. 이 결단은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지만 복음을 선포 받은 사람이 결단해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 받아 그 내용을 알면 선포의 내용대로 믿음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Closing 하나님의 의는 죄인들을 의롭게 합니다. 의롭게 된 자들을 거룩하게 합니다. 자기 백성들을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교회가 누리는 기쁨 중 가장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 (0) | 2012.06.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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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
Pearl’s Kim
작은 자를 쓰시는 하나님
사사기6:11-15/2025.4.27
사람들은 큰(great) 것이라는 데에 묘한 매력을 느낍니다. 그래서 ‘大’자라는 말을 이름이나 상호 앞에 넣습니다. 대한민국, 대일본, 대왕, 대예배, 대인, 대 교단, 큰 교회 등 큰 대자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동부에서 서부까지 비행기로 5시간 이상을 가는 미국이나 하루 종일 기차로 달리고 있어도, 미처 성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중국 사람들이 볼 때 가관이라 할 것입니다. 조그마한 나라에서 그것도 절반 나누어진, 거기에 동서로 분열 되다시피한 이 나라를 본다면, 대자를 쓰는 것은 겸연쩍은 일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또한 사람들은 나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을 만나면, 왠지 모르게 기가 죽기도 합니다. 물론 禮儀 면에서는 그렇게 해야겠지만, 스스로를 너무나 비하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러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천지에 자신이 제일 못났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전란 속에서도 나서지 못했습니다. 전란에 처한 이스라엘을 누군가 나서서 구원하기는 해야 하는데,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11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2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13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14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15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하나님의 일은 누가 합니까? 돈 많은 재벌들이 합니까? 수완이 좋다고 하는 정치인들이 합니까? 소위 지성인들이라고 하는 elite들이 합니까? 국가의 모든 걸 책임진다고 하는 행정부에서 합니까? 아닙니다. 이들 중 소수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편에 대부분 서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까? elite들입니까? 지성인들입니까? 잘나가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아주 작은 자들, 자신이 한참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을 더러 부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가리지 않으시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부르시기 전에 한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현 상황을 말씀하셨습니다.
사사기6:7-10 7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은고로 8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9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10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 너희의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에게 고통받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기에 받는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디안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압박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애굽 사람들의 손에서 그리고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모든 나라들의 손에서 거뜬히 구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도무지 말씀을 듣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 가운데 우리는 사사기 시대 기드온을 만나야 합니다.
흔히 기드온의 300용사라고 곧잘 말합니다. 어린이 주일학교 때부터 기드온과 300명은 無敵의 용사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그런가? 기드온과 300명이 Roma시대 때 갈리아 지방을 평정한 시저와 그의 군대만큼 용사였는가? 우리가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은 저로서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11절을 보면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들이 무서워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있는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는 것을 접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이러한 행동은 용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Samson삼손이나 Spartacus스파르타쿠스, 그리고 Alexander알렉산더 등의 용맹과 기드온은 전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의 ‘미’자 소리만 들어도 깜짝깜짝 놀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미’자만 들어도 간이 콩알만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바로 봐야 합니다. 기드온이 여호와를 만나기 전까지 아주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큰 용사여!”(lyIj;h, r/BGI/깁보르 해아일)라고 했습니다. 바로 뒤이어 *M][i hw:hy]/예흐바(아도나이)이므카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했습니다. 기드온은 기가 막혔습니다.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대답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말씀 잘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과거 출애굽 때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적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미디안에게 엄청난 압제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닙니까? 이제 우리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미디안의 손에 붙이신 것 아닙니까? 이제 우리는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기드온은 계속 여호와의 사자에게 들이댑니다.
그런데 14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로 바뀝니다. 12절에서는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와 대화를 했습니다.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14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14절을 보면 바로 여호와로 바뀝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기를 ‘너는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보낸다고 하십니다. 기드온은 더 기가 막혔습니다. ‘내가 무엇인데’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지파, 그중에서도 가장 약한 사람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합니다. 그래서 아예 그런 말씀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할 말씀이 따로 있지, 어떻게 그런 말씀을 쉽게 하십니까? 기드온의 이 말은 절대 겸손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약하디약한 사람이었습니다. 36절에서 40절을 보면,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큰 전쟁이 터져서 무서워 깊이 숨어있는 자에게 미디안과 전쟁을 하라니 말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기드온의 생각은 넓은 gap(간격)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설교가 도덕적인 설교, 윤리적인 설교입니다. 들으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도덕과 윤리는 세상 사람들도, 다른 종교에서도 전유물로 삼고 있는 항목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修養의 종교가 아닙니다. 修行의 종교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展示宗敎는 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살리며,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만들어 낸 어떤 doctrine교리을 퍼뜨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의지해서 앞으로 나아가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구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람들,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 성령님께 속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소유하신 분이 삼위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시시한 사람들의 윤리적인 doctrine을 끌어다 쓰지 않습니다. 만일에 그렇게 할 경우 귀만 즐겁습니다. 그리고 自家撞着자가당착에 빠져버립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데 지금 교회들이 하는 꼬라지를 보십시오. 범죄를 넘어서 무법천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척결해야 한다고 광장에서 떠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역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교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해석되어질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그 말씀을 믿을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시오. 저렇게 사시요’라는 윤리적인 설교는 전혀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끼어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공자와 맹자와 철학자들의 角逐戰場각축전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모토로 삼아야 합니다. 그 말씀을 우리의 기본으로, 그 말씀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가야 합니다. 사람의 경영은 매우 뻔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권을 잡자마자 정적을 제가하려다가 사형을 당할만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권을 잡자마자 다른 나라에 경제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관세25%, 50%는 죽이자는 것이지, 살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경영은 이토록 뻔합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을 돌아볼 때, 너무나 무력하다고 생각합니다. 출신성분 따지니까 더 무력합니다. 지금 상황을 보면 더 무력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만 무력하냐?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나이에, 나 같은 것이 뭐, 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정없이 깎아버립니다. 그리고는 어려워도 아예 일어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일어날 힘이 있는데도 일어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11절과 12절의 여호와의 사자가 14절을 보면 여호와로 바뀝니다. 이분이 도대체 누구십니까? 다니엘의 세 친구가 용광로에 들어갔을 때, 거기 계신 분, 하갈이 사라의 학대에 쫓겨나 물이 없어 금방 죽으려고 할 때 나타나신 분, 삼손의 부모에게 나타나신 분, 그분이 누구십니까?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구약시대 때 수시로 이 땅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성자이신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함께 하시겠다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제이위이신 창조주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미국을 우방으로 두려고 여러 나라에서 무한 애를 쓰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댈만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우산 밑에 있으면 비를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께 속하기를 원합니까?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장군은 함경도에 있다가 이일의 죄를 뒤집어쓰고 백의종군하였습니다. 선조는 그것을 알고도 신립 장군 때문에 묵과했습니다. 그러나 1591년 2월 이순신을 종6품 정읍현감(현재5급)에 제수하였습니다. 곧이어 珍島郡守진도군수로 승진시켰습니다. 이순신이 부임지에 부임하기도 전에 종3품(현 이사관)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습니다. 이어 선조는 이순신이 가리포에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정3품 전라좌수사(현 중장)에 전임하게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지만, 선조는 굳건하게 이순신을 밀어붙여 전라좌수사에 임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용사여! 라고 하시면 큰 용사입니다. 우리가 비록 모자라고 부족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할 만합니다.
성도여러분! 오늘의 우리들은 우리의 약한 생각들을 접어야 합니다. 기드온이 전쟁에서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전쟁 소집 나팔을 불었을 때 3,2000명이 모였습니다. 미디안은 그 수가 엄청 많았습니다. 메뚜기 떼 같다고 했습니다. 8장10절을 보면 13,5000명이 넘었습니다. 따라서 3,2000명:13,5000명은 이미 끝난 전쟁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굳이 물어보십니다. 몇 명이냐? 3,2000명입니다. 뭐 몇 명? 3,2000명! 주님께서 깜짝 놀라십니다. 기드온은 생각하기를 그러면 그렇지! 아마도 군사를 더 오게 하시려나 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현재 인원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를 핑계를 대서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집으로 돌아간 사람이 2,2000명입니다. 이제 1,0000:13,5000명입니다. 이제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또 물으십니다. 이번에는 물가로 가서 사람을 고릅니다. 거기서 선택된 자들이 300명입니다. 나머지 9700명은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기드온이 어떻게 생각한지는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황당했을 것입니다. 3,2000명에 1,0000명, 1,0000명에서 300명으로 줄어들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뻔합니다. 300:13,5000(1:450)명 생각만 해도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승리합니까? 13,5000명의 정예병들이 300명의 민병들에게 패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쟁(War of YHWH)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전쟁이고, 우리들의 전쟁입니다.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전쟁이 우리들의 전쟁입니다. 숫자상으로 볼 때 전혀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전쟁은 사람이 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이 세상은 무엇을 따지기 좋아합니다. 학벌, 지연, 실력, 돈, 외모, 스펙이 탁월해야 좋은 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약하고, 어리석고, 부족해야 ‘사람 괜찮구나!’ 하십니다. 좀 모자란 사람이면 ‘쓸 만한 사람이구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의 ‘다만 신앙’을 보십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 그것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좀 약하다 하시는 분, 희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가슴이 두 근반 세 근반 하는 사람들이 혹 있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은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전쟁이 아니고, 교회의 전쟁이 아니고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망각하고 우리가 덤빌 때 큰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습니까?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목사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회개가 없습니다. 회개가 없다보니 교회에 힘이 없습니다. 교회에 웬 조직이 그렇게 많습니까? 하나님께서는 3,2000명에서 1,0000명으로, 1,0000명에서 300명으로 줄이셨습니다. 조직이 많으면 사람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조직이 없으면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자, 간이 콩알만 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기드온의 300용사라고 할 때 하나님 자리는 없습니다. 300용사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 같이 그런 사람들을 썼습니다. 우리가 우선해서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입니다. [m'v;/shāmaʽ/사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했는지 짚어봐야 합니다. 우리는 곧잘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 혹시 내 뜻대로 살았는지 짚어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할 때 나타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명기28:1-14절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의 복들입니다. 그러나 28:15-68절은 순종하지 않았을 때 받는 저주들입니다.
사람들의 속성은 내 의무와 책임은 다하지 않으면서도 내게 유익될 것은 바로 챙기려 합니다. 신명기28:1-14절은 나에게 맞지만, 15-68절은 나와 관계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책임은 뒷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은 악착같이 받아내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대로 해주시지 않습니다. ‘네가 내 말을 청종하라’ ‘너희가 내 말에 순종하라’ ‘그리하면 너희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힘이 없어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고, 사람들이 순종하지 않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기드온의 기적만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모리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미디안사람들이 쳐들어온 이유가 자명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강조점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곤혹스러운 일들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에 정체성을 부여하셨습니다. 나라를 형성케 하시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철저하게 열 재앙을 통해서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가나안의 신들보다 우월하신 분임을 입증하셨습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는 말씀은 이스라엘과의 언약관계를 확인하는 표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이 모든 것을 저버린다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과 억압은 레위기26장과 신명기28장에 나타나는 언약의 저주의 내용으로 그들이 ‘언약 파기’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기드온이 어떻게 적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했는가만 바라봐선 안 됩니다. 선지자 메시지에 초점을 둬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향한 배교와 불순종을 지적하는데 있습니다. 여호와만이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고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Closing 선지자의 메시지가 끝나자 ‘여호와의 사자’가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상수리나무 아래 앉았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가나안 신들을 예배하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음으로 가나안의 신들을 우습게 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상수리나무아래에서 바알과 아스다롯을 흠모하면서 숭배했습니다. 그런데 상수리나무에 앉음으로 가나안의 신들은 존재하지 않음을 그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만일에 바알과 아스다롯이 살아 있는 신이라면 여호와의 사자와 전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만들어 낸 신, 깎아서 만들고 부어서 만든 것들이기 때문에 허상입니다. 우상은 허상입니다. 그런대도 사람들은 우상에 열을 올립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들에게 우상에 빠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우상에 빠집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목회자가 세속화에 깊이 빠져 있는 것 우상입니다. Martin Luther는 우상숭배는 자기의 의로움과 업적과 장점들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들은 우리 역시 우상숭배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선하지 않으면 우상숭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이 없고 작을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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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로 옮겨가서는 제도가 되었다.
그다음 유럽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다.
마침내 미국으로 왔을 때 교회는 기업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한 영화감독이 이 말에 한 문장을 덧붙였는데,
교회는 한국으로 와서 대기업이 되었다.
리처드 핼버슨 목사. 어떤 영화감독의 말
https://www.inews24.com/view/1823515
윤석열 비상계엄→미국 "충격적"→美, 한국 '민감국가'로 지정
한미동맹 굳건하다더니⋯첨단 과학 기술 분야 협력 제한받아 미국이 지난 1월 협력을 제한하는 '민감국가 리스트'에 한국을 추가했단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부의 늑장 대응 논란이 불거지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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