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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Roma행(사도행전27:1-8)
1 우리의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행선할쌔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음을 허락하더니 4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5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성에 이르러 6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성에서 가깝더라
우리라는 것으로 보아 바울사도는 혼자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 곁에는 항상 바울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사도는 행복한 사도였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주님이 함께 하시며, 그리고 늘 그 곁에 누가와 그외 다른 성도들이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21:18에서 ‘우리’라는 말이 나온 후로 뚝 끊겼다가 다시 시작합니다.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아마도 바울이 구금되어 있었을 때 누가는 가이사랴 근처에서 바울사도의 동향을 살폈을 것입니다. 2년간은 바울사도가 구금되어 있을 때였습니다.
바울사도는 Roma의 황실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Roma의 행정관은 Roma에 보내기로 작정하여 모든 준비를 끝냈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죄수 몇 명과 함께 Roma로 출발했습니다. 바울사도를 호송할 책임자는 Augustan부대 소속의 백부장 Julius였습니다. 그는 Roma까지 가는 동안에 다수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출발하여 그들이 탄 배는 소아시아 북서쪽의 Lesbos섬의 맞은 편에 위치한 Mysia의 항구도시인 아드라뭇데노에 속한 배였습니다. 이 배는 연안을 항해하는 배로서 아시아 각도의 여러 항구에 머무를 예정이었습니다. 이 항구 중에서 Roma로 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중에 마케도니아의 데살로니가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승선했다고 했습니다. !Arivstarco"/Arîstarchos는 역시 바울의 신실한 여행 동반자였습니다. Arîstarchos는 에베소에서 소요에 연류되었습니다. Arîstarchos는 에베소에서 바울의 전도로 말미암아 자신의 사업에 위협을 느낀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폭동을 선동했을 때 흥분한 폭도들에게 잡혀 연극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폭동은 진정되고 그는 무사히 풀려났습니다. Arîstarchos는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에 동참했습니다(행20:4). Arîstarchos는 바울과 함께 로마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습니다(골4:10). 이런 신실한 동역자들이 항상 바울 곁에 있었습니다.
바울의 Roma행은 결코 외롭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열악한 교역자들은 인물난입니다. 대형교회에는 일할 사람이 넘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형교회, 어려운 교회는 사람이 없어서 인물난입니다. 참 아이러니 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점점 현대교회는 멀어져 가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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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사도는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면 공식적인 전도여행이 모두 끝나게 됩니다. 바울사도는 가장 늦게 사도가 되었지만, 어쩌면 가장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방인의 사도이고,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라고 딱 선을 그을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도 이방인을 위해서, 바울사도도 유대인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특히 로마서를 보면 전반부에 바울사도가 얼마나 유대인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먼저’여야 한다는 생각에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들만의 편협한 생각은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과 율법 중에서 그들은 율법의 우월만 생각했습니다. 복음이 우선이어야 했는데, 율법만을 생각하고 강조하고 지키려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만 바라보았지, 갈보리산은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바울이 위대하다고 생각했지만, 바울연구가 처음부터 열정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스위스의 신학자인 Franz Overbeck/1837-1905은 Marcion이 바울을 잘못 이해했지만, Marcion만큼 바울을 이해한 사람도 그때까지만 해도 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울연구가 빨리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종교개혁시대 이전에는 Roman Catholic으로 인해서 성경연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통만 강조했습니다. 성경보다 교황청이 위에 있었기 때문에 성경을 연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성경연구가 이러다보니 성경연구에 장애를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더구나 행위와 전통을 강조하는 때에 바울은 ‘믿음으로’를 강조하다보니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Augustine 이후로 황무지와 같았던 바울연구가 비로소 종교개혁으로 활발해졌습니다. 특히 Martin Luther의 바울의 해석 ‘오직 믿음으로’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사도는 가이사랴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숨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지만 예루살렘에 바울이 나타나기만 하면 살해하려고 하는 유대인이 허다했습니다. 어쨌든 사도바울의 일행은 여행의 마지막 단계에 돌입하였습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한지 며칠 만에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짐을 꾸렸습니다. 그들은 약 100km이상을 가야 했습니다. 갈 때 가이사랴의 그리스도인 몇 명이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편안하게 환대를 받을 수 있는 예루살렘의 어떤 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머물 집은, 구브로의 예루살렘 교회의 설립 멤버들 중 한 사람이었던 Mnason의 집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적 성격이 뚜렷한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무리를 자기들의 집에 맞아들일 준비를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사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일행은 예루살렘 교회의 헬라파에 속했을, 나손으로부터 환대를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에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부딪히는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도 그 부분에서는 왈칵 개방적이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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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도에서 바울의 설교/겸손(사도행전20:17-35)
바울은 요샛말로 말하면 엘리트입니다.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졌으며, 신분 또한 대단한 사림이었습니다. 유대사회에나 로마사회의 어디에 내놓아도 별로 빠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빌립보서3:4-6절을 보면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이 투철해서 다른 사람들을 심히 무시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바울의 이력을 내놓으면 그들은 입을 다물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지키지 못할 자기들만의 율법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예단하여 거의 죽여 놓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겸손했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겸손하게 주를 섬겼습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이 바르게 전파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겸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겸손해지기로 작정했습니다. 빌립보서2:3을 보면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의 본을 직접 보여준 것입니다.
성도들이 왜 겸손해야 합니까?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눅18:13-14). 그래서 우리는 죄인임을 느껴야 합니다(눅18:14). 자기의 죄를 느끼고,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끼는 사람들은(눅15:17-21) 겸손합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압니다(왕상3:6-14). 겸손한 사람들은 자신은 추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느끼기 때문에 겸손합니다(사6:1-8). 하나님의 의를 느낍니다(빌3:4-7).
우리들을 겸손하게 하는 요인들이 있는데, 우리들을 고생하게 합니다(신8:3). 그리고 환난이 우리들을 겸손하게 합니다(대하12:2-12).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라고 합니다.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신15:15). 스스로 높은 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잠25:6-7).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전5:2). 큰 일을 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렘45:5). 스스로 칭찬하지 말것입니다(잠27:2).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미6:8).
사람들은 심히 겸손하지 않습니다. 특히 정치인들 중에 교만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신이 아니면 이 나라가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해서 얻어지는 것보다 겸손해서 얻어지는 것이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겸손한다고 해서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만한 사람이 비굴해질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겸손은 교만의 회개를 낳습니다. 따라서 겸손은 온총이면서 동시에 은총을 담는 그릇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못나서 겸손했던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겸손했습니다. 겸손은 성도들이 가져할 기본적인 덕목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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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의 주역들(사도행전13:13:15)
사도행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누가, 데오빌로, 사도들, 예수그리스도, 갈릴리 사람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 바돌로매,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 예수의 아우들, 백이십 명의 성도들, 가룟 유다, 요셉(바사바/유스도), 맛디아, 경건한 유대인들(바대인/메대인/엘림인/메소보다미아/유대/가바도기아/ 본도/아시아/브루기아/밤빌리아/애굽/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로마인/그레데인/아라비아인들), 바나바, 헬라파 유대인들, 히브리파 사람들,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 사울(바울), 아나니아(다메섹), 고넬료, 시몬(피장이), 스데반의 박해로 흩어진 자들, 아가보, 마가요한, 로데, 시몬(니게르), 구레네 사람 루기오,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야고보(주의 형제), 유다, 실라,디모데, 루디아, 야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디도 유스도, 회당장 그리스보, 회당장 소스데네, 아볼로, 에라스도, 부로의 아들 소바더, 아리스다고, 세군도, 가이오, 두기고, 드로비모, 바울의 생질 등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람들은 복움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 사도행전1장에서 12장에서는 거의 베드로가 많이 지면을 차지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1장에서 12장까지는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에 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13,15, 2:14,37,38, 3:1,3,4,6,11,12, 4:8,13,19, 5:3,8,9,1015,29, 8:14,20, 9:32,34,38,39,40,41,43, 10:5,9,13,14,17,18,19,21,23,25,26,32,34,44,45,47,48, 11:2,4,7
13, 12:3,5,6,7,8,9,11,13,14,16,17,18,
그래서 12장까지는 바울의 예수 믿기 전의 상태와 바울의 소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사도행전 7:58, 8:1,3, 9:1,3,4,8,11,17,18,19,22,23,24,25,28, 11:25,30, 12:25
그러다가 개종 후에 안디옥에서 사역을 했을 때는 바나바가 바울보다 먼저 거론됩니다.
사도행전 11:25,30, 12:25, 13:1,2,7,
13:9부터는 바울이 먼저 등장합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사울과 바나바’로 바뀝니다.
이들의 도움으로 복음이 빠른 속도로 이방에 전해졌습니다. 어쩌면 이름도 없이 기록된 사람들도 있지만, 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복음이 아직도 우리나라까지 오는데 시간이 더 걸렸을지 모릅니다. 이들은 복음 때문에 순교를 당한 사람들도 있고, 사회와 국가에서 많은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면 반드시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정말 본받아야 할 일들입니다. 나라가 부강해지고, 살기가 편안해지니까 복음에는 안중에도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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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교회의 구성원들/바나바(사도행전13:1)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들을 미리 아는 선지자들, 그리고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가르치는 면에 있어서 성령의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Calvin). 선지자의 원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이상을 보거나 환상, 또는 꿈 그리고 말씀으로 선지자에게 임했습니다. 교사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었습니다. 1절에서 누가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안디옥교회에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사울 등입니다.
바나바(Barnavba"/barnâbas/바르나바스)는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바나바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름대로 ‘위안의 아들’입니다. 누가의 기록처럼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입니다. 거기에 바나바는 설득력까지 있었습니다.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들’이라 칭하였습니다(사도행전14:1-14). 전승에 의하면 그는 예수님이 파송한 70인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누가복음10:1). 초대 교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eria)는 바나바가 70인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으며, 그의 지상전도 사업에서 그를 수행했었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12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초기기독교 사도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중심적인 인물입니다(사도행전11:19-15:41). 바나바는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지상에 내려오신다면 바나바와 같은 형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나바는 예수가 죽은 직후 예루살렘교회에 들어온 구브로인 가정에서 태어난 유대계 헬라인으로 추정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구브로 섬에 정착해 살고 있었는데, 성령강림절에 사도들이 제각기 여러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바나바는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구브로에서 왔다가, 베드로가 자기 민족의 방언으로 복음을 설교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나바의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바나바는 기독교인이 된 이후 사도들에 의해 붙여진 별칭입니다(행4:36). 유대인 태생으로 레위족속이었던 요셉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권고의 아들” 혹은 “훈계의 아들”,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었습니다. 사도들이 그에게 그런 이름을 부여했던 것은 그의 마음과 생활이 친절했고, 관대한 마음과 돕고자 하는 사랑으로 충만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바울 간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의 헌신적이고, 고귀한 정신은 조금도 시기심이나 질투심이 없었습니다. 바나바의 생애의 경력을 보면 인정 많고 친절한 성향입니다. 바나바는 동료 바울과 같이 탁월한 지성이나 독창적이거나 창조적인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초대교회에서 마치 천사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사랑과 신뢰를 받으며 항상 널리 인간의 이익을 구하는 입장에 서있어, 사회적 영향력을 얻어 초대 교회에서 탁월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자신의 깃 아래 보호하고 바울의 첫 동료가 되어주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언급될 경우 바나바가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를 파송한 안디옥교회가 그에게 그만한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점차 두각을 드러내게 되면서 바나바는 서서히 뒷자리로 물러나 이야기의 전면에서 사라집니다. 오늘의 교회에서 바나바 같은 사람들은 필히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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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교회(사도행전11:20-21)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피하여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들은 헬라파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전함을 받는 사람들 역시 헬라파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 몇이 중요한 일을 했습니다. 안디옥에 사는 많은 헬라인들에게 예수를 전파한 것입니다.
안디옥은 오론테스 강변의 도시입니다. 현재 터키 동남쪽의 안타카이입니다. 셀레우쿠스1세 니카토르가 주전300년경에 건설했습니다. 이곳에 항구인 셀레 우키아 피에리아가 있었습니다. 셀레우쿠스인들은 유대 이주자들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주전64년에 폼페이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폼페이는 인디옥을 자유로운 도시가 되게 했습니다. 안디옥은 웅장한 신전들과 다른 건물들을 가진 로마의 수리아속주의 수도이자 로마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습니다. 안디옥의 거주민들은 여러 번 로마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킴으로서 정치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안디옥의 근교에는 다프네의 작은 숲과 아폴로 신전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주신제 의식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은 후에 기독교의 시작과 밀접하게 되었습니다.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니골라가 안디옥 출신입니다(행6:5). 스데반의 순교 후에 있었던 핍박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일부가 이곳에 왔습니다(11:19). 그들은 안디옥에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안디옥에 많은 회심자들이 생기자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했습니다. 바나바는 사람들에게 확고한 신앙을 가지도록 권했습니다. 바나바는 혼자 안디옥에서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갔습니다(11:22). 안디옥에서그리스도인(Cristianouv"/Christianoûs)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11:26). 안디옥교회는 기근으로 고통당하는 예루살렘 교회에 부조를 보냈습니다(11:27-30). 최초로 이방에 선교를 시작한 교회였습니다(13:1-3). 그러나 어떤 유대 출신의 신자들이 안디옥에 와서 이방출신의 회심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선행조건으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주장에 반대하는 안디옥교회는 이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바울과 바나바를 대표로 파송하였습니다(15장).
안디옥교회는 사도들이 가서 복음을 전한 교회가 아닙니다. 헬라파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복음이 유대인에게 좋은 것이라면 이방인들에게도 유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잘 받아들였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들은 물론 안디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들에게도 주예수를 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놀라운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안디옥교회의 전도는 사실 특이했습니다. 처음 안디옥에 도착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 전도에만 힘썼습니다. 이때에는 부흥이 없었습니다. 후에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으로 예루살렘에 살다가 스데반 박해 때 흩어져 떠돌던 사람들도 안디옥에 왔는데 이들은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때 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성장의 근원에는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차별 없이 전해졌던 비밀이 있었습니다. 안디옥교회의 성장은 이방인에게도 차별 없이 복음이 전파되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을 섬길 때 큰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안디옥교회가 성장함에 있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오늘 많은 교회들이 안디옥교회의 모델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모델이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같이 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실적위주의 선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동남아시아에 선교했네. 우리교회의 선교부가 아프리카에 선교부를 냈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쟁으로 선교하는 것, 지양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사람을 살리는 선교여야 합니다.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선교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음 (0) | 2015.05.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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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교회에 보고한 베드로 (0) | 2015.04.26 |
고넬료의 가정에 임하신 성령님 (0) | 2015.04.25 |
베드로를 기다리는 고넬료의 자세(사도행전10:24-33)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구약시대에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를 철저하게 막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방인과의 교제를 막으셨습니까? 섞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니까 하나님께서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베드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보고 이해가 가기 시작했습니다. 고넬료를 만나고서 확실해졌습니다.
고넬료는 전술한 바와 같이 거룩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는 고넬료를 칭찬합니다. 고넬료는 성령의 말씀을 듣고 사람을 베드로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도착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집안의 하인 둘과 경건한 부하 중에 경건한 사람 하나를 보냈습니다(7절). 베드로가 오는 사이에 고넬료는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렸습니다. 심지어는 베드로가 들어오니까 그의 발 앞에 절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바로 저지했습니다. 그만큼 고넬료는 경건하여 유대인들보다 더욱 하나님의 백성다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한 덕목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사무엘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겠습니까?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은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원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유혹에 물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반드시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순종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과(신13:4, 삼상28:18), 주의 명령과 경계의 말씀입니다(느9:34, 신30:8).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세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롬6:17,19). 마음과 성품을 다해야 하며(신26:16, 30:2,10).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민32:11,12,신1:36). 하나님께서 명한대로 순종해야 합니다(왕상9:4,11:38). 즐겨 순종해야 합니다(사1:19).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롬 6:17, 엡6:5).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합니다(고후2:9, 골3:20).
하나님께 우리가 왜 순종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자손과 땅의 복을 받으며(창26:4,5),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신30:2,3),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약1:25). 그리스도 사랑 안에 거합니다(요15:10).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출19:5,6), 자손까지 복을 받습니다(신5:29).
우리는 하루 중에 수십 가지의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의 어려운 일에 처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들에서 우리는 날마다 벗어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지나갑니다. 어쩌면 하나님께 배은망덕한 행동입니다. 당연한 것처럼 여깁니다. 고넬료는 지배국의 군인으로서 피지배국의 사람들을 긍휼히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들을 고넬료는 해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이래서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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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의 선포(사도행전2:14-21)
사도(ajpovstolo"/아포스톨로스)는 ‘보내다’라는 동사 ajpostevllw(아포스텔로)에서 유래했습니다. 기본적 의미는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아포스톨로스’는 해양언어였습니다. 화물선이나 보낸 선단, 후에는 원정 함대의 함장이나 해외로 임무를 위해 ‘파견된 자’나 원정대, 또는 일단의 식민 개척자들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아포스톨로스’는 파피루스에서 나일강의 배로 운반되는 정부의 곡물 창고로부터 알렉산드리아로 보내는 곡식의 선적량을 지시하는 공식 서류인 나타내는 전문용어였습니다. ‘아포스톨로스’는 여권, 안전 통행증, 또는 심부름꾼이 떠나려 할 경우의 출국 허가서, 수출 면허장을 말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고전 헬라어의 경우와는 달리, ‘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이 오직 ‘사자’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의 특정한 직무로 원(原) 사도직에 대한 확고한 명칭으로 사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기간의 사도들과 부활후의 사도들은 180도로 변했습니다. 이전에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영광의 자리에 서려 했고, 십자가 사건 때에는 겁쟁이였었으나 부활 후에는 엄청나게 달라졌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죽기를 각오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22절부터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주님이시요, 메시야이심을 선포합니다. 초대교회 사도적 khvrugma(케뤼그마)는 1. 성취의 날이 도래했다. 2. 예수님의 사역, 죽음과 승리. 3.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을 증명하기 위해 구약을 인용, 4. 회개요청입니다. 16절에서 21절을 보면 요엘 선지자가 말한 것이 오순절에 성취되었다는 말을 합니다. 22절에서 24절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 즉 탄생, 죽음, 부활을 말합니다. 25절에서 28절을 보면 구약을 역시 인용합니다. 38절을 보면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 대한 궁극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멸망하게 됩니다. 그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최고인줄 알고, 이 세상의 것에 목숨을 겁니다. 모든 것을 all-in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영혼은 손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들은 초대교회 때부터 사도적 선포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편향, 강제종교행사 금지 등 사탄적인 것들로 인해서 막상 자신들의 영혼을 헌신짝 버리듯 유기시켜 버립니다. 육신을 위해서는 엄청난 투자를 하면서도, 영원을 위한 영혼의 투자는 전혀 하지 않는, 아이러니한 일들이 있기 때문에 복음은 오늘날도 여전히 전해져야 합니다. 복음에 대한 반응이 어떻든지 간에 우리들은 초대교회와 같이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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