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471)
교회소개 (1)
교회약도 (1)
후원계좌 (1)
대요리문답1 (2)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4)
소요리문답 (1)
좋은글들모음 (48)
설교자료 (8)
연관 블로그 (2)
성경의 공인 (1)
홍수까지의 연표 (1)
이스라엘 분열사 (1)
10대 박해 (1)
성경숫자의 상징 (1)
-------------------- (0)
창세기새벽강해 (142)
출애굽기 새벽강해 (262)
마태복음 새벽강해 (267)
사도행전 새벽강해 (366)
로마서새벽기도 (216)
빌립보서 (0)
- 에베소교회 (1)
- 서머나교회 (1)
- 버가모교회 (1)
- 두아디라교회 (1)
- 사데교회 (0)
- 빌라델비아교회 (0)
- 라오디게아교회 (1)
성경 개관 (0)
- 에스라, 느헤미야 (1)
- 학개 개관 (1)
- 스가랴 개관 (1)
- 사도행전 (1)
- 고린도전서 (2)
- 고린도후서 (2)
- 빌레몬서 (1)
- 야고보서 (1)
기도 (1)
성경 각 권의 주제 (1)
예배순서 (4)
예화 (2)
찬양 (0)
- 온전히 (1)
- 창세기 (4)
- 출애굽기 (1)
- 레위기 (2)
- 민수기 (1)
- 신명기 (1)
- 여호수아 (1)
- 사사기 (1)
- 룻기 (1)
- 사무엘상 (1)
- 사무엘하 (1)
- 열왕기상 (1)
- 열왕기하 (1)
- 역대상 (1)
- 역대하 (1)
- 에스라 (1)
- 느헤미야 (2)
- 에스더 (1)
- 욥기 (3)
- 시편 (1)
- 잠언 (1)
- 전도서 (1)
- 아가 (1)
- 이사야 (2)
- 예레미야 (1)
- 예레미야애가 (1)
에스겔 (1)
- 다니엘 (1)
- 호세아 (1)
- 요엘 (1)
- 아모스 (1)
- 오바댜 (1)
- 요나 (1)
- 미가 (1)
- 나훔 (1)
- 하박국 (3)
- 스바냐 (1)
- 학개 (2)
- 스가랴 (1)
- 말라기 (1)
- 마태복음 (3)
- 마가복음 (6)
- 누가복음 (1)
- 요한복음 (3)
- 사도행전2 (2)
- 로마서 (1)
고린도전서 (0)
고린도후서 (0)
- 갈라디아서 (1)
에베소서 (0)
빌립보서2 (0)
골로새서 (0)
데살로니가전서 (0)
데살로니가후서 (0)
디모데전서 (1)
디모데후서 (0)
디도서 (0)
빌레몬서 (0)
히브리서 (0)
야고보서 (0)
베드로전서 (0)
베드로후서 (0)
요한일서 (0)
- 요한이서 (1)
- 요한삼서 (1)
- 유다서 (1)
- 요한계시록 (1)
붓글씨 (9)
수채화 (1)
공지사항 (0)
- 게시판 (29)
철학.인문학 (7)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ARCHIVE

LINK



  1. 2018.12.31
    구속과 인간의 관계
  2. 2018.12.27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3. 2018.12.21
    참된 교회의 속성/교회의 사도성
  4. 2018.12.08
    참된 교회의 속성/교회의 거룩성
  5. 2018.08.02
    다시 생각해보는 로마서
  6. 2018.07.21
    로마서 개략
  7. 2018.06.23
    열 두 사도/바울
  8. 2018.06.16
    열 두 사도/도마

구속과 인간의 관계(로마서1:15-17)

 

사람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향방이 결정됩니다. 왜냐하면 심판이든지, 구원이든지가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여러 종교를 신봉하면서 안심하고 있지만, 결국에 가서는 심판대에 서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심판대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방송이나 신문, 그리고 여타 언론과 직접적인 전도를 하고 있어도 도무지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음은 전해져야 하고 퍼져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그리스도십자가 사역은 구속의 사역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사역을 말할 때 구속의 사역이 완성되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부정과거 시제로 사용했습니다.

 

마태복음20:28 인자가 온 것은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주려(동사, 부정사, 과거, 능동)

마가복음10:45 인자의 온 것은주려함이니라(동사, 부정사, 과거, 능동)

베드로전서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동사, 직설, 과거, 수동)

히브리서9:12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동사, 분사, 과거, 중간)

히브리서9:15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동사, 분사, 과거 중간디포)

디모데전서2:6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동사, 분사, 과거, 능동)

디도서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동사, 직설, 과거, 능동)

고린도전서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동사, 직설, 과거, 수동)

고린도전서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동사, 직설, 과거, 수동)

갈라디아서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속량하셨으니(동사, 직설, 과거, 능동)

갈라디아서4:5 속량하시고(동사, 직설, 과거, 능동)

요한계시록5:9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동사, 직설, 과거, 능동)

요한계시록14:3-4 3구속함을 얻은(동사, 분사, 완료, 수동) 4구속을 받아(동사, 직설, 과거, 수동)

사도행전20:28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동사, 직설, 과거, 중간)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현재 진행 중이 아닙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의 공로로 쌓아지는 것이 아니고 완성입니다. 단번에 구원받은 것이지, 점차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택하심을 통해서, 선택에 관계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가르침을 통해 소명에 관계하시며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성령님은 인침을 통해서 칭의에 관계하셨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And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로마서1:15-17)

 

하박국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갈라디아서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히브리서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소위 기도 많이 한다고 하는 사람들, 사람 많은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들에게서 더러 나타나는 현상이 자신들은 완전한 줄 압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목회의 폭이 넓으면 비례해서 자신들의 모든 것들이 완전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혹 있다면 세상의 종교에서나 생각할 법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칭 의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신성모독을 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절대로 의인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롭다 하심이란 말을 사용한 구약의 주된 단어군은 qd'x;/tsâdaq에서 왔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dikaiovw/dikaiôo입니다. Murray는 법적인 의미를 갖는 기본형 qd'x;/tsâdaqQal(능동형) Hiphil(사역형) Piel(강의형)으로 널리 쓰인다고 했습니다. 또한 Hihpael(재귀형)으로 한번 쓰이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70인역 성경과 신약성경에서 dikaiovw가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Leon Morris“-ovw(오오)로 끝나며 도덕적 특질을 언급하는 동사들은 선언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선언적인 의미이지, ‘-게 만든다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지, ‘의인되게 만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의롭다 하심이 주관적인 변화에 반대되는 객관적인 법정적 심판이라는 사실을 다음의 구절에서 증명합니다.

 

신명기25: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Hiphil)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 의인을 의롭다 함에 있어서 재판장들이 그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기32:2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Piel) / 엘리후에 따르면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의롭다 했다는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인데 즉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잠언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Hiphil)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이것은 분명히 그 땅의 재판장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뇌물 때문에 악인을 의롭다고 선언하거나 의인을 정죄하는 그 재판장은 여호와를 분노케 했습니다.

누가복음7:29 하나님을 의롭다하되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고 선언하거나 인정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의롭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의롭다하심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죄인들을 의롭다 하신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래서 의롭다 하심은 복음의 본질이요 핵심입니다. 의롭다하심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지, ‘어떤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는 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말은 조심해야 합니다. “마치 내가 죄를 짓지도 않은 것처럼 나를 보신다라는 말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Roman-Catholic의 교리를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Roman-Catholic은 트렌트 공회(Council of Trient/1547)를 인용하는 Catholic교리문답(1994)의롭다 하심은 죄의 속함일 뿐만 아니라 내적인 사람의 거룩하게 하심과 새롭게 하심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그것은 의롭다 하심은 세례에서 시여되며(para. 1989)”그것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비의 능력에 의해 우리를 내부적으로 의롭게 하신다(para. 1992)”라고 말합니다. 즉 이들이 말하는 의란 하나님의 의와 어느 정도 있는 인간자신의 의가 합해져 인간을 의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있어서 의란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우리와는 동떨어진 우리 밖의 의입니다. 우리의 노력 대가로 얻은 의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And

참된 교회의 속성/교회의 사도성(로마서1:11-15)

 

J. C. Lambert사도의 권위는 영적이며, 윤리적이고, 인격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공공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에게 양도될 수 없었다. 바울은 스스로 초기 사도들 전체가 지녔던 견해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였으며(2:6,11),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을 감화시키기 위해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려고 노력하였다(고후4:2). 사도들이 집단적으로 독자적이고 독재적인 권위를 행사하였었다는 증거는 없다고 했습니다(Herbert Lockyer, 1982, 30). 사도는 예수님께 택함을 받은 12제자입니다. 사도의 자격은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 보낸 12제자로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이어야 했습니다. 예외로 바울은 특별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Gospel Serve, 2005, 577). “사도적이란 말은 사도적 과거를 강하게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사도적이란 역사적 측면이 가시화되는 말입니다. “사도성에서는 교회의 인간적 측면이 강하게 부각됩니다(G. C. Berkouwer, 2006, 256). 그래서 다른 속성들과는 많이 논쟁이 붙었었습니다. 지금도 사도권이 계승되었다느니, 자신이 사도라느니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Karl Barth사도적이라는 것을 사도들의 가르침과 지시를 따르며, 그들의 규범적 권위 아래에 있는 것이며 그들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이고, 그들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전하는 message를 듣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성은 반드시 사도들의 교리를 충실하게 따르는 것과 연관됩니다. 그 교리는 초자연적인 계시로 사도들에게 주어졌고, 초자연적인 영감을 통해 그들에 의해서 문서로 기록되었습니다. Roman-Catholic이 말하는 것처럼 교황이 사도권을 계승했다고 하는데, 비성경적며, 아무런 연고도 없는데 Roman-Catholic과 교회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고 그런 말을 하는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사도성은 사도들의 교리를 충실히 따르는 것입니다. 그 교리는 초자연적인 계시로 주어졌습니다. 초자연적인 영감을 통하여 그들에 의해서 문서로 기록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참된 후손이 혈통과 상관없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쫓는 사람들인 것처럼, 사도적인 교회는 연속되는 승계의 문제와 관계없이 사도들의 믿음의 자취를 좇는 교회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교리에 순복하는 것만이 교회의 사도성을 보장합니다. 사도성은 결코 사도들로부터 이어지는 교회 조직의 승계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승계는 사도들로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해도, 교리적인 순수성을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속성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0:40 너희(사도들)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가복음10:16 너희(뽑힌 72)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요한복음13:20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3:1)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그분이 지명하신 사도들이 그분의 권위를 입고 능력을 받은 대리인들이며 대변인들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분의 사도들의 말을 듣거나 거절하는 것은 곧 그분의 말씀을 듣거나 거절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사도들)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사도행전2:42 저희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갈라디아서1:6-9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에베소서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히브리서1:1-2: 21-3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먼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요한계시록21: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Reymond는 교회가 사도적이라고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원래의 기초인 사도들의 복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라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분의 교회가 사도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거짓된 선지자들이 장차 교회 안에 나타날 것을 자신의 지상사역 기간 동안에 경고하셨습니다(24:11,24, 13:22).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셨는데, 그 교회가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2:2).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시험을 위한 시금석은 구약성경에 이미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 선지자가 예언한 것들이 실제로 일어났는가, 그리고 그가 선언한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해 주신 신앙과 일치하는가(13:1-3, 18:20-22) 하는 것입니다. 이 기준들에 덧붙여 신약성경의 교회에서는 사도로 자신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증언자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1:22). 또 그가 다른 사도들이 가르친 동일한 복음을 가르치고 동일한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한다고 합니다(1:8-9, 고전15:11, 고후 11:4).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요일4:1-3). 사도임을 입증하는 기적과 기사들, 표적들을 행해야 합니다(고후12:12).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들을 위하여 고난과 박해를 기꺼이 감내해야 합니다(고후12:13-13:13).

따라서 자신이 사도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도를 계승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미 탈교회화 한 사람들입니다.

And

참된 교회의 속성/교회의 거룩성(로마서1:11-15)

 

Roman-Catholic은 교회가 성례와 미사와 여타 선행으로 인해서 거룩해진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수많은 이단들이 얼마나 많이 소위 예배하고 선행을 행하며 성례의식을 하는데도 거룩하지 못하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사야6:1-4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요한계시록4: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거룩하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구약에서 거룩하다는 말을 vd,qo/로 표현합니다. 즉 거룩함이란 분리된, 신성한 것입니다. 따라서 ‘qôdesh’거룩함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qôdesh’는 거룩한 영역에 속하는 사물로 凡俗(범속)한 것과는 구별되는 사물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이스라엘은 신성의 영역과 범속의 영역 간의 상호불가침적 구별을 유지시켜야 했습니다(18:32). 고유적으로 거룩한 것, 또한 하나님의 법률이나 종교의식에 의해 거룩하다고 명명된 대상은 범속한 것으로 취급하면 안 되었습니다. 예로 안식일은 거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날과 관련된 금지 사항들은, 그날의 독특한 성격을 유지시켜 주고 그 날이 범속한 날로 취급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거룩한것을 a{gio"/hâgios라고 했습니다. 신에게 바친이라는 뜻입니다. 신에게 바친 것은 거룩하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룩하다는 것과 성경이 생각하는 거룩한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은 아무것이나 거룩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로 聖火奉送(성화봉송)이라고 말합니다. 과거 귀신들에게 바쳤던 불을 거룩한 불이라고 명명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불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이라는 단어를 아무데나 붙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연관이 있을 때만 붙여야 합니다. 관련도 없으면서 聖地(성지), 聖人(성인)이다, 聖女(성녀) 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Reymond는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있는 공동체라는 절대적인 관점에서 확정적으로 거룩하고, 교회는 그 성화(聖化)가 사람의 내면에서 시작되어 점진적으로 삶 전체에 표현된다는 상대적인 관점에서 거룩해져 가는 과정에 있다고 했습니다. 칼빈(Calvin)교회는 매일 전진하면서도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 즉 하루하루 전진하지만 아직은 거룩이라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그리스도께 헌신된 공동체라는 점에서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John Murray는 성도는 확정적인 성화와 점진적인 성화를 소유했다고 했습니다(John Murray, 2001, 289-318). 어떻게 그렇습니까?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요한복음17:15-19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고린도전서3:16-17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린도후서6:14-7:1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에베소서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5:25-27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5:23-24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베드로전서1:15-16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따라서 교회의 거룩함은 확정적인 동시에 점진적입니다. 교회의 거룩함이 확정적인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와 더러움으로부터 급격하게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고, 그 거룩함이 점진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의롭다고 선언하심으로 인해 이제 성화의 과정이 반드시 따라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And

다시 생각해보는 로마서

 

로마서는 바울서신입니다(1:1). 로마서는 바울의 다른 책보다 분량이 많습니다. 로마서는 다른 바울서신보다 전망에 있어서 사색적입니다. 로마서는 稱義(칭의)와 율법에 대한 주된 문제를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논하는 편지입니다. 로마서는 Augustinus, Abélard,1 Martin Luther, John Calvin을 거쳐서 Karl Barth에 이르기까지 로마서는 신학의 발전에 주된 역할을 했습니다.2

로마서는 고대로부터 중세, 근세,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쳐 온 책들 중 하나입니다. 로마서는 종교개혁시대에 개혁자들에게 큰 영감과 신학적 통찰들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신학적으로 로마서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전 세계 도서관에 바울에 관한 수많은 로마서 연구서들과 articles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3

로마서의 저작목적은 보른캄(Gunter Bornkamrm)에 의하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주장하고자 했던 messageRoma에서, 바울이 Roma로부터 Spain에 이르는 여정에서 계속적으로 선포하려고 했던 메시지와 동일한 것으로 로마서는 바울복음 전체의 강령이며, 이후의 여러 세대들도 로마서를 바울의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4 William Handrixon5은 사랑이 많은 바울은 동료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고(1:10,11), 그들과 함께 편히 쉬기 위하여(15:32) Roma에 가기를 원한다는 것이 첫째의 목적이고, 바울이 직접 Roma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로마서를 통하여 Roma교회와 교제를 갖기 원하는 것이다. 바울이 그들을 사랑하기에 로마서를 쓰는데, 자신의 사랑을 나누어주고 그들을 칭찬하며(1:8), 그들을 위해 자신이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음을 알리고(1:9)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며(15:30), 자신의 여행계획을 그들에게 알리고 있다(1:10-12; 15:24). 바울은 반 율법주의자인 오류를 정정하기를 원했고, RomaSpain 선교의 본부로 삼기를 원했다. 무엇보다도 바울은 본 서신을 써야 할 필요와 이것을 통하여 로마교회가 기도 가운데 그를 기억해 줄 것을 요청할 필요를 느꼈다.6

로마서의 주제는 바울이 그의 사도권을 입증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복음을 소개하는 데로 방향을 바꿉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소개는 불가피하게 믿음에 관한 논쟁을 수반합니다. 바울은 성경원문을 안내자로 삼아 이 문제로 넘어가 전체서신의 주요한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그 주제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바울은 5장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1-5까지는 인간의 유일한 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임. 그 은혜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제공되고 믿음으로 수납된다고 말합니다. 3의 끝부분에서 인간의 자만심의 만행을 진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히 거슬리지 못하게 합니다. 4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았지 행위가 아님을 강조했습니다. 5은 믿음의 의의 열매와 결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6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성화에 대해서 논합니다. 7에서 율법의 효용에 관하여 공명정대하게 논합니다. 8에서는 많은 위로의 말씀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9에서는 바울이 자기 자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이 계속 거부하는 안타까움을 말합니다. 10-11에서 유대인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간증함으로 그들이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하등의 유익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12에서는 기독교인의 생활에 대한 일반적은 법칙들을 담고 있으며, 13에서는 위정자들의 권위에 대해서 말하고 14에서는 유대인들의 미신적인 행위를 타파하고 또한 유대인들을 지나치게 경멸하지 못하도록 권고합니다. 15에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의 믿음을 굳게 하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공히 모두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에 달렸음을 말합니다. 16은 안부들을 묻고 기도로 결론을 맺습니다.7

 

1.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élard, 1079~1142421)는 중세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신학자로, 중세 철학사 전체를 지배한 보편 논쟁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라틴어 이름은 Petrus Abaelardus였다. 흔히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2.레이몬드 E. 브라운,신약개론김근수·이은순 공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5), 791.

3.김정훈, “로마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로마서와 하나님의 의프로에클레시아 신학회 (서울: 도서출판 그리심, 2003), 2.

4.페터 슈틀마허, “바울은 왜 로마서를 썼는가로마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목회와신학편집팀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2006), 13.

5.William Handrixon: 헨드릭슨은 화란계 미국인으로서 철저한 개혁주의자요, 복음주의자이며 매우 근면하고 경건한 언어학자이다. 또한 고금의 모든 신학사상과 그 동향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신학자인 그는 오랫동안 강단에 서서 강의와 설교를 통해 많은 영적 감화를 끼쳐 왔고, 또 미국 칼빈 신학교에서 신약학 강의를 맡아 많은 후진을 길러내다가 1982년 로마서 주석을 마지막으로 집필한 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6.William Handrixon,헨드릭슨聖經註釋/로마서ꃏ』손종국 옮김(서울: 아가페출판사, 1984), 42.

7.존 칼빈.新約聖經註釋7/로마서·빌립보서·칼빈聖經註釋出版委員會 譯 (서울: 聖書敎材刊行社, 1980), 26-34.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된 교회의 속성  (0) 2018.12.03
바울의 소원  (0) 2018.11.06
열 두 사도였던 가룟 유다  (0) 2018.07.07
열 두 사도/맛디아  (0) 2018.07.01
열 두 사도/바울  (0) 2018.06.23
And

PAULOU TOU APOSTOLOU H PROS RWMAIOUS EPISTOLH

/파울루 투 아포스툴루 헤 프로스 로마이우스 에피스툴레/바울 사도가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로마서는 그리스도 신앙의 위대한 교리들을 거의 언급하고 있다. 가장 교리성이 짙은 서신이다. William Tyndale은 로마서를 가리켜 전체 성서의 빛이요, 이라 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바울은 이 위대한 저작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유명한 근본진리를 다루고 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논점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구원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며, 모든 사람을 위해 예비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주어진다는 것이다. 로마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룬 서신이며, 또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했던, 서신이다.

'로마서새벽기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울의 편지  (0) 2018.09.01
약속된 복음  (0) 2018.08.24
예수그리스도의 종 바울  (0) 2018.08.15
Roma라는 나라  (0) 2018.08.08
로마서 개관  (0) 2018.07.25
And

열 두 사도/바울(사도행전28:30-31)

바울만큼 성경에서 많은 정보와 많은 면을 보여준 인물도 드뭅니다. 물론 신약성경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또한 심히 박해했던 자가 dramatic하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바로 개종하여 이방에 하나님의 전도자가 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누구보다 유망했던 사람인 바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던 인물도 역시 바울사도입니다. 신약성경의 절반을 쓴 사도바울, 그에 대해서 쓰려면 아마도 시간과 지면과 자료출처가 너무 많아 제약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빌레몬서까지 신약성경의 상당부분을 썼습니다. 그는 사울/Sau'lo"/Saȗlos이라는 히브리 본명을 쓰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박해자였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것에 열렬히 지지했던 것으로부터 최대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사형을 시키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울이 유대교에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항상 살기등등하다고 했습니다(행9:1).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것을 이단이자 신성모독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개종자들을 많이 체포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바울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성도들을 잡으려고 체포영장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즉시 U-tern을 했습니다. 예전에 그렇게 증오하던 도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아라비아사막에 들어갔습니다. 삼년 후에 모습을 드러낸 바울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핍박했던 열심히 이제는 섬기는 열심히 변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그를 위험스러운 배반자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바울을 암살이나 모살을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렇게 개종한 바울사도는 로마제국의 동부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전도여행을 했습니다(J. Stenphen Lang 2007, 150).

바울사도는 길리기아의 다소출생이었습니다(행9:11,21:39,22:3). 유대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베냐민 지파였습니다(롬11:1, 빌3:5). 왜 베냐민 지파를 자랑스럽게 여깁니까? 여로보암이 열 지파를 끌고나가 예루살렘의 가말리엘 학교에서 배웠습니다(행22:3). 로마시민권을 소유했습니다(행16:37, 22:25-28). 천막제조의 기술도 가지고 있었습니다(행18:1,3).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갈1:14, 빌3:5, 행9:18,19). 유대인으로 있을 때 바리새파였습니다(행23:6, 26:5, 빌3:5,6).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습니다(고전9:5). 누가 뭐라고 해도 사도로 부름 받았습니다(행9:15,16, 22:13-18, 롬1:1, 고전1:1,9:1,2,15:9, 갈1:15,16, 엡1:1, 골1:1, 딤전1:1,2:7, 딤후1:1,11, 딛1:1,3).

바울사도는 온유했습니다(딤후4:16). 양심이 깨끗했습니다(고후1:12, 6:3). 사려가 깊었습니다(빌2:25,26, 몬1:8-14). 그러면서도 담대한 사도였습니다(행9:29, 엡6:20, 살전2:2). 결단성이 있었습니다(행20:22-24, 21:4,5, 10,11).

사도행전의 끝 부분에서 바울사도는 가택 연금된 상태로 신앙을 증언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풀려난 뒤 로마제국의 서쪽 끝인 에스파냐까지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후에 폭군 네로의 박해 때 네로의 후궁들을 개종시키려 했다가 참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신약성서의 상당 부분을 쓴 바울은 그리스도교 최초의 신학자로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사도들은 여러 계층에서 부름을 받아 여러 상황에 맞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 두 사도였던 가룟 유다  (0) 2018.07.07
열 두 사도/맛디아  (0) 2018.07.01
열 두 사도/도마  (0) 2018.06.16
열 두 사도/다대오  (0) 2018.06.08
열 두 사도/가나안인 시몬  (0) 2018.06.02
And

열 두 사도/도마(사도행전28:30-31)

 

편견/偏見/prejudice이란 한쪽으로 치우친 공정하지 못한 생각이나 견해를 말합니다. 어떤 것을 보더라도 이미 선입관이 서 있어서 공정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 편견입니다. ‘저 인상 봐! 분명히 저 사람은 성격이 거칠 거야.’하고 미리 그 사람을 평가하게 됩니다. ‘저 여자 몸매와 얼굴 좀 봐. 저 여자는 분명히 착할 거야.’라고 평가합니다. 두 평가는 잘못된 평가입니다. 공정한 평가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입관을 가지고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편견의 대상이 된 사람은 아무런 이유 없이 피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피해자가 바로 도마입니다. 도마는 누명을 쓴 사도입니다. 웬만한 주석가나 설교자들은 그에 대해서 한 마디도 좋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도마는 의심하는 자, 도마는 불신앙 자, 도마는 열등한 사람, 도마는 우울한 사람, 도마는 믿음이 없었던 사도, 도마는 확인주의자 라고 도마에 대해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평가입니다.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6:25). 주님의 이 말씀에 ‘녜’하고 절대로 염려하지 않겠습니다. 말할 수 있습니까? 만일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사람일 수 없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셔도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도마는 회의주의자도 아닙니다. 물질주의적인 심성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상실한 사람은 더욱 아닙니다. 우울한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도마는 개성이 뚜렷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사람들의 한 면만 보고 잘못 평가한 것입니다.

도마는 히브리이름입니다. 아람어 !/aT;/thā’ôm/쌍동이란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따라서 Qwma'"/thomȃs란 쌍둥이란 말입니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에서 디두모는 헬라어로 역시 쌍둥이라는 뜻으로 ‘디두모’는 도마의 별명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총 여덟 군데에 도마가 나와 있습니다(마10:3, 막3:18, 눅6:15, 요11:16,14:5,20:24,26,27,28,29,요21:2, 행1:13). 공관복음에는 도마의 이름밖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도마의 면면을 약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14: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20:24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1: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사도행전1:11을 보면 도마는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도마는 제자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는지 어떤 말도 없습니다. 그의 이름은 주님께서 열 두 제자를 택하셔서 둘씩둘씩 보내실 때입니다. 누구나 그랬듯이 도마의 인생이 변화된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고서였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평범한 도마의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사자가 되었습니다. 사자는 사자로되 지존자(至尊者)의 사자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질병을 제어할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았습니다. 귀신들도 자신에게 항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은혜를 얻었습니다. 마태복음10:2-4절을 보면 열 두 사도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가룟 유다’ 이 배열은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배열입니다. 도마는 마태와 함께 묶여있습니다. 즉 마태와 도마는 공통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세리 마태입니다. 그런 자와 함께 묶여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세리는 유대사회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부류였습니다. 그들은 조국 유대를 생각하지 않았고, 오직 자신들의 안일만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 마태와 같이 묶여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주님께서 택하셨구나 하는 은혜입니다.

도마는 사도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열 두 사도 모두가 겪을지도 모르는 슬픈 일을 자기도 기꺼이 무릅쓰겠다는 뚜렷한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주님 죽을 때 같이 죽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일으키시려고 제자들더러 베다니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을 만류했습니다. 그곳의 종교지도자들이 주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설득하여 유대로 가지 못하도록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도마는 비록 죽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주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못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이 말로 인해서 도마는 온갖 못된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주님께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예수와 함께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 자신들 모두 거기서 죽을 수밖에 없 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유대로 올라갔습니다. 생명의 위협이 있을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겠다고 한 비장한 각오입니다. 물론 도마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적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베다니에 가셔서 무슨 일을 하실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러이러해서 저러저러하다’라고 브리핑을 하지 않으십니다. 가서 현장에서 보고 인식하기를 원하셨기에 웬만해선 out-line만 말씀하시지, 자세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도마의 생각은 살 수 있는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로 주님께서 U-turn하시는 것이 안타까워서 한 말이지, 회의주의자여서 죽으러가자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도마는 다만 주님의 마음을 언제나 빨리 알아차려서 행동하고자 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과의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과 헤어진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다시피했습니다. 제자들 모두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와 그가 그들을 위하여 예비할 처소의 기쁨을 말씀하시고, 자기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때 도마가 나서서 우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며, 거기로 가는 길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심히 슬퍼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 모두의 생각이었습니다. 이윽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거기 있지 않았습니다(요한복음20:24).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만났다고 하자 나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로 도마는 믿음이 없는 자라고 낙인이 찍혀버렸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라고 별명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를 만났을 때에 도마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감히 손을 넣지도 않고 확인도 하지 않고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을 너무 쉽게 비교분석합니다. 베드로는 어떻고 바울은 어떠하며 도마와 빌립은 어떻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편견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제자들 전원은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부활하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거기에서 거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다만 그러한 실망 투성이의 제자들을 사용하셔서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신 주님을 항상 찬양해야 합니다. 전혀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믿게 하시고 그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 두 사도/맛디아  (0) 2018.07.01
열 두 사도/바울  (0) 2018.06.23
열 두 사도/다대오  (0) 2018.06.08
열 두 사도/가나안인 시몬  (0) 2018.06.02
열 두 사도/빌립  (2) 2018.05.19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