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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3
세속화를 책망하시는 주님
요한계시록2:12-17
유사참기름이 있습니다. 이 유사참기름은 진짜 참기름보다 값이 훨씬 덜합니다. 인심이 좋아서 값이 저렴한 것이 아니고, 참기름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기름에 다른 것을 많이 섞기 때문에 값을 적게 받는 것입니다. 참기름 30%에 여러 가지 물질을 섞어서 값이 싼 것입니다. 문제는 이 참기름을 먹으면 인체에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상적인 참기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사휘발유가 지금도 심심찮게 나돌고 있습니다. 유사휘발유 역시 값이 저렴합니다. 휘발유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휘발유에 다른 것을 넣기에 값이 싼 것입니다. 이것을 자동차에 넣으면 자동차가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정상적인 휘발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드리는 버가모교회가 이와 유사한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12절과 17절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명령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I. 말씀에 순종을 요구하시는 주님(12,17).
12절의 ‘편지하기를’(gravyon)이라는 말은 ‘내가 너에게 편지했다.’입니다. 2:1절의 에베소 교회에도, 2:8절의 서머나 교회에도 그리고 버가모 교회에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말씀입니다. 17절에 ‘들을찌어다’(ajkousavtw)도 명령형입니다. ‘너는 들어야 한다’입니다. 역시 2:7의 에베소교회에, 2:11에서 서머나 교회에, 그리고 17절에 버가모 교회에 명령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각 교회에 편지를 하고, 반드시 들어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대가를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어떤 대가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을 잃었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첫사랑을 잃어 버렸는가? 회개하고 반드시 회복시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서 주님이 떠나가신다 하셨습니다. 회개하고 첫사랑을 회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서머나 교회에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난을 이기는 자에게는 지옥의 형벌을 除去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버가모 교회에도 역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기고 지키는 자에게 감추었던 만나를 주신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흰 돌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감추었던 만나는 메시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 옛날의 흰 돌은 어느 집에 들어갈 때 주는 pass와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시는 이 흰 돌은 능력의 카드입니다. 언제어디서나 이 흰 돌을 받은 성도는,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청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곧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실재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들은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에베소교회나, 서머나교회, 버가모 교회가 주님의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침상을 들고 가라’(마9:6)고 하셨을 때 병이 이미 나았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항아리의 물을 떠다 주라고 했습니다(요2:8). 말씀대로 떠다주었을 때 좋은 포도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한 말씀, 한 말씀대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명령하셨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면 말씀대로 하십시다. 따라서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우리들이 하지 않으면 불충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크고 작은 것이 없습니다. 모두 중요합니다. 이점을 우리들이 명심해야 합니다. 이왕 주님께 헌신하려면 확실히 하자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믿음이 없든지, 불순종하든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틀을 반드시 깨야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품으신 뜻이 있는데, 우리가 믿지 못하거나 순종하지 못해서 못 받는다면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것은 빠짐없이 해보는 겁니다. 예배도 빠짐없이 드리고, 믿음도 upgrade 시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모두 우리의 생활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도들에게 예배 때마다 말씀드립니다. 예배에 목숨을 걸자고 말합니다. 왜 예배가 우리 인생에서 중요합니까?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공식적으로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배 때문에 우리의 선배들이 수없이 죽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박해 때문에 예배를 드릴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카타콤에서 드렸습니다. 무덤 속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정한 시간에 모든 성도들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잡히면 죽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드렸습니다. 예배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배를 너무 소홀하게 생각합니다. 복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예배를 모두 잘 드린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오자마자 예배를 드렸습니다. 애굽에서 올라와 바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삭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야곱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모세가 예배드렸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모두 주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영국의 Westminster 대사원의 헨리 예배실에서 1643년7월1일에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기 위해 소집된 사람들은 예루살렘 회의실로 옮겨 정기적으로 모였습니다. 무려 5년7개월에 걸쳐 1163회나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으며 성경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작성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대로 해야 합니다. 아무 때라도 한 번가서 얼굴을 들이미는 예배는 예배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등한히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최고지도자인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그 앞에 우리의 억울한 일, 바라는 일들을 모두 맡깁시다. 예배를 제대로 드려봅시다. 예배를 정말 잘 드리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예배를 제대로 드리고 주님께 요구하십시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요구를 예배 때 간절히 바랍시다. 간절히 요구하십시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명령을 하시고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오늘 두 번째로
II. 세속화된 것을 회개하라고 하시는 주님(13-16).
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디 살고 있는지 내가 안다고 하셨습니다. Pevrgamo"/Pêrgamos는 소아시아에 있는 大 무시아(Mysia)의 한 고대 도시였습니다. 버가모에는 사단의 신당이 있었습니다. Roma는 버가모를 아시아 지방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버가모에는 의료의 신 에스쿠라피우스(Aesculapius)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Aesculapius는 뱀의 형상입니다. 이후로 의학logo는 뱀의 형상을 했습니다. 버가모 사람들이 뱀의 형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신전들이 버가모에 있었습니다. 제우스의 대 제단이 버가모에 있었습니다. 버가모는 또한 황제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주전29년에 건립). 바로 사단의 위가 있었던 곳입니다.
신전이 건립될 때 사람들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신전청소부라고 합니다. 그 청소부를 네오코로스(neokovro")라고 합니다. 왜 그 직업을 가지기 원했을까요? 신에게 가장 성심껏 봉사하는 직임입니다. 굉장한 특권을 누리는 직임이었습니다. ‘저 사람이 황제숭배신전을 지키는 사람이다.’.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을 봅니다. 직위는 그리 높지 않습니다. 그러나 왕이 마시는 술을 먼저 마시는 사람입니다. 독이 들어있나, 들어있지 않나 검증하는 사람입니다. 왕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사람입니다.
버가모는 다른 도시에 비해서 황제숭배신전의 네오코로스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그만큼 우상숭배가 극심했던 지역입니다. 따라서 우상의 묘판에 있었던 성도들의 상황은 항상 위험했습니다. 그래서 버가모교회의 성도인 안디바(!Antivpa")가 순교를 당합니다. 그럼에도 버가모 교회는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신앙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신앙은 accessory가 아닙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안하는 option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 인생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버가모 교회에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구원은 강조했는데, 성도의 본분을 희생시켰습니다. 성도들 중 몇몇이 우상 섬기는 장소에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우상의 제물도 먹었습니다. 그리고 신전의 여인들과 관계까지 했습니다. 갈 데까지 다 가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발람과 니골라는 언어유희입니다. “니골라당”이라는 말은 ‘지배한다’는 ‘nikan’이라는 단어와 백성을 뜻하는 ‘laos’의 합성단어입니다. 발람도 bela(지배하다)와 ha'am(백성)이란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니골라와 발람은 같은 이름의 헬라어와 히브리어로써 어느 편이나 백성들에게 영향을 주어 이단의 노예가 되게 하는 악한 교사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백성들에게 못된 영향을 주어 이단의 노예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불륜과 죄악으로 이끈 악당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니골라당도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로마의 이교도 사회와 타협을 시도했습니다. 니골라당은 믿음을 파괴하려고 하는 외부의 적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진보적으로 나아가기를 원했던 사람들입니다. 즉 버가모의 일부 신자들은 교회가 세상과 타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세상을 선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Martin Luther(1483-1546)가 1517년 10월31일에 로마-카톨릭의 잘못된 점 95개 조항을 그의 직장이던 비텐베르그 대학 게시판에 부착했습니다. 왜 95개조를 부착했습니까? 그들은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300년). 십자가형상을 만들어 그것을 숭배했습니다(300년). 성자와 천사들을 숭배했습니다(375년). 미사예식을 했습니다(395년). 431년부터 마리아를 숭배했습니다. 마리아가 부활 승천했다고 했습니다. Roman-Catholic은 성경을 엄청나게 희석시켰습니다. 66권외에 7개의 가경(도비아서, 유딧서, 마카비상하,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을 합해서 73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천국과 지옥 사이 중간에 방을 만들었습니다. 연옥을 만든 것입니다. 또한 교황을 신격화했습니다. 교황의 말이 성경보다 권위가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누구든지 Roman-Catholic에 들어오면 Roman-Catholic에 쌓여 있는 공덕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면해주는 면죄부가 있습니다.
기독교 박해령을 해제시킨 콘스탄틴은 모든 회심자에게 금화와 흰옷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교도들이 그들의 신을 버리지 않고, 수천 명씩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곧 버가모 교회처럼 우상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긴 것입니다. 교회는 곧 세속화되었습니다. 세상은 교회 화 되었습니다. 세상과 교회 간에 차이가 없었습니다. 교회가 곧 세상이고, 세상이 곧 교회였습니다. 행위와 의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잘못 가르쳤습니다. 세상에서 구원을 우습게보았습니다. 구원은 돈 주고 사면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세상에서 선한 일 좀 하면 구원을 받을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거지들에게 돈 몇 푼 던져주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구원받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Sola Fide, Sola Christus, Sola Gratia를 부르짖으며, 초대교회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그 운동이 종교개혁입니다. Luther가 개혁했고, Calvin이 개혁했습니다. 교회는 교회다워야 했기 때문에 개혁한 것입니다. 우리는 改革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계속 혁신하고 고쳐나가는 것이 교회의 개혁이 아닙니다. 초대교회로 회귀하는 것이 개혁입니다. 누가복음13:18-21을 보면
18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20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21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Gerrymandering이라는 말은 선거 시 자신의 당에게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획정하는 것입니다. Gerrymandering이라는 용어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지사였던 엘브리지 게리(E. Gerry)가 1812년의 선거에서 자기 당에게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연스러운 형태가 샐러맨더(salamander) 즉 불속에 산다는 Greece신화의 불도마뱀과 비슷하더라는 것입니다. 1812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지사 게리(E. Gerry)는 공화당에게 유리한 상원의원 선거구 개정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때 새로 획정된 선거구는 자연적인 형태나 문화ㆍ관습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이상야릇한 모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지역신문기자가 그것을 도마뱀(salamander)에 비유하였습니다. 게리 주지사의 이름과 합성하여 게리맨더(Gerrymander)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당시 공화당은 5,0164표를 얻어 29명의 당선자를 냈습니다. 그러나 야당은 5,1766표를 얻고도 11명의 당선자밖에 내지 못했습니다. 굉장히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겨자나무와 누룩의 발전성만 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겨자나무에 새가 둥지를 튼다고 했습니다. 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넣었습니다. 성경에서 가루 서 말은 소제를 드릴 때 사용했습니다. 창세기18장에서도 사라가 하나님을 대접했을 때 가루 서 말이 나옵니다. 이때에도 누룩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새가 무엇이고 누룩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잘 나가고 있는데 새가 둥지를 틉니다. 교회가 커지고 성도들이 많으면 목사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교회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정상적인 성장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성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최고수준의 교제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어떠한 것이 들어왔을 때, 일어나는 일이 누룩입니다. 조금의 누룩이 가루 서말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좋은 말로 부푼 것이지, 부패한 것입니다. 교회사에서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철학자들에 의해서 천국이 거부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은 쓰레기와 전쟁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겨자씨가 성장을 할 때, 새가 들어왔습니다. 교회에 누룩이 들어와서 교만해졌습니다. 빨리 우리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콜라에 물을 타면 그 콜라는 마시지 못합니다. 사이다에 역시 물을 타면 사이다를 마시지 못합니다. 휘발유에 다른 것을 타면 안 됩니다. 참기름에 다른 것을 타면 참기름이 아닙니다. 휘발유라고 하지만 휘발유가 아니며, 참기름이라고 하지만, 참기름이 아닙니다. 그런 휘발유를 사용하는 자동차는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유사 참기름을 먹으면 몸을 망치게 됩니다. 순수한 휘발유를 주입해야 자동차가 정상입니다. 순수한 참기름을 먹어야 몸이 망가지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버가모 교회의 일부 성도들은 교회를 우습게 봤습니다. 교회에서는 예배를 드리고, 에스크라피우스 신전이나 황제숭배신전에서 초대장이 날아오면 지체 없이 갔습니다. 그리고 우상의 신전에 분향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한 입술로, 우상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우상에게 절을 하고 그 앞에서 먹었습니다. 다음에는 신전의 여인들과 관계를 했습니다. 그 묘한 매력을 끊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버가모 교회의 감독은 그들을 징계하지 못했습니다. 왜 징계하지 못했습니까? 교회의 중직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세 명의 장로들이 대통령을 했습니다. 어떤 장로는 절에 가서 분향을 했습니다. 어떤 두 권사들은 절에 가서 법명까지 받았습니다. 어떤 장로는 폭탄주를 좋아한답니다. 그렇다고 그 장로가 속한 교회에서 제재할 수 있습니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교회가 세속화가 됩니다. 재벌성도들이 교회를 세속화시키는 겁니다. 높은 관직에 있는 성도들이 교회를 세속화시킵니다. 결국 세속화시키는 교회나 세속화시키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주님의 검이 용서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검을 교회가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좌우에 날선 검을 무서워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속화시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먼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 무엇을 섞으면 세속화되는 것입니다. 예배에 무엇을 섞으면 세속화됩니다. 주님의 날에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세속화됩니다. 하나님의 것에 무엇을 섞으면 세속화입니다. 하나님의 것인 우리의 생각에 무엇을 자꾸 섞으면 세속화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세속화되면 교회에 사람들이 많아지더라는 것입니다. 요새 교회에서 잘못된 프로그램이 유행처럼 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안 믿는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술집에서 모임을 갖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얼마든지 세속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에 회개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기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이겨야 합니까? 교회를 세속화시키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교회를 세속화시키지 않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감추었던 만나를 주십니다. 순수한 신앙을 지키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꾸준하게 제공됩니다.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어디든지 계산할 수 있는 거침없는 흰 돌, 즉 무조건의 패스카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순수한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그 순수한 신앙으로 이 세상을 이기도록 하십니다. 오직 주님, 오직 말씀, 오직 은혜의 삶으로 이 세상을 정복해야 합니다.
서머나교회를 격려하시는 주님
요한계시록2:8-11
개인의 유익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자기와 자신의 가족의 안녕만을 위해서 삽니다. 그래서 자신과 자신들의 가족을 위한다면 역사와 민족 앞에서 비굴한 삶을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굴욕의 시대에 자신들만 살겠다고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를 총독부에 팔다시피 했습니다. 교회의 헌금으로 일본에 비행기를 헌납했습니다. 그리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목사들을 회유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빼앗았습니다. 자신들은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와 자신의 가족들을 뛰어넘어 교회와 국가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자들이 일본에 협력하느라고 정신이 없을 때, 이들은 만주벌판에서, 백두산에서, 지리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어떻게 해서든지 일본인들을 몰아내고자 했습니다. 이런 분들이 있어서 그래도 우리나라가 희망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당시에도 이런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유익만 생각하는 사람들과 공동의 유익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8절에서 9절을 보면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주님은 사도요한에게 서머나 교회에게 편지를 쓰라고 했습니다.
I.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주님(8-9절)
Smuvrna/Smyrna는 ‘몰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머나 市는 인도와 페르시아에서 로마로 가는 통상로였습니다. 서머나는 과학이 발전했던 도시였습니다. 서머나에는 의학학교가 있었습니다. 멋지고 웅장한 건축물이 있었습니다. 2000년 전에 넓은 포장도로로 유명했습니다. 서머나에는 술의 신(酒神) 박카스(Bacchus)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시인 호머(Homer)의 출생지가 바로 서머나였다고 합니다. 서머나는 에베소와 같은 항구도시로서 경쟁하다가 결국에는 에베소를 누르고 아시아 제일의 항구도시였습니다.
서머나는 우상숭배가 극심한 지역이었습니다. 서머나 사람들은 소아시아 도시 중 최고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로마제국은 황제숭배를 위한 신전건축 후보지 12곳을 놓고서 박빙의 경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서머나 市는 신전건축을 유치했습니다. 소아시아 제1도시라는 호칭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서머나 市는 항상 처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서머나는 에베소, 버가모 등과 항상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그 결과 황제의 흉상이 있는 화폐를 주조하는 특권을 부여받았던 극성스런 도시였습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을 괴롭히는 유대 배교자들이 서머나에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서머나에 있는 성도들을 무척이나 괴롭혔습니다.
이러므로 서머나 교회는 안 좋은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심한 환난 속에 있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또한 견딜 수 없는 궁핍 속에 있었습니다. 서머나의 성도들은 로마제국의 시민으로서 황제숭배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심한 제재를 받아야 했습니다. ‘너희들 때문에 우리들이 피해를 본다.’ ‘서머나 사람이라면 황제를 모두 섬겨야 하는데 너희들은 왜 그러냐?’하면서 모든 혜택을 끊어버렸습니다. 성도들은 모든 일자리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서머나의 성도들은 카드에 ‘요주의 인물들’이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굶주려야 했습니다. 심한 환난과 압박과 빈곤과 굶주림, 투옥, 화형, 사나운 짐승의 위험이 언제 올지 몰랐습니다. 이러므로 여간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꺼려했습니다.
거기에 유대인의 탈을 쓴 자들이 성도들을 항상 훼방했습니다. 이름만 유대인이지, 실상은 사단의 자식들인 이들은 성도들에게 늘 적개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법정에다 성도들을 열심히 고발했습니다. 그래서 언제 죽을지, 언제 고발당할지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듯 했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당하며 성도들이 매일 위험 속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환난과 궁핍의 끝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볼 때 안개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주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알고 있다(ei[dw)고 했습니다. 네가 황제숭배를 거부한 것을 안다. 네가 그것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난 것을 안다. 다른 사람들은 진수성찬의 밥을 먹는데, 너희는 매일 끼니를 걱정하고 있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 유대인들의 고소고발도 알고, 로마의 행정관이 너희를 압박하는 것도 알고 있다. 너희가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사람들은 서머나 교회를 별로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작고 가난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성도로서 여러 어려운 일들을 만납니다.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처럼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힘든 일들을 견디고 만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울 때는옆에서 누가 알아주기만 해도 힘이 납니다. 따끈한 위로의 말 한마디가 힘을 내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다 알고 있다.” 우리의 형편을 주님께서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민들이 무엇입니까? 힘들지 않게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아니 ‘다른 사람들처럼만 살게 해주십시요’입니다. ‘더도 덜도 말고 다른 사람들처럼만 같게 해주십시오.’가 우리들의 소원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내가 다 알고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주님께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우리의 형편을 아신다면 좀 도와주십시오. 지금 죽을 지경입니다.’ ‘지금 안 도와주고 언제 도우시려 하십니까?’
1절을 보면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붙잡고’의 “kratw'n/크라톤”은 “kravto"/크라토스/권능”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어떤 것을 지배하는 힘이 ‘붙잡고’입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시는 분이 붙잡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들을 붙잡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모든 상황을 정확히 아시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켜주시고, 인도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처럼 유명한 사람들만 붙잡으시는 것이 아니라, 작고 낮은 우리들을 꼭 붙잡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권능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잡고 있는 한 누구도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의 주님께서 우리를 몰라주신다면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아신다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신 주님께 모든 고통과 어려움들을 모두 맡겨버립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을 모두 주님의 수레에 옮겨 실읍시다.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주님께 우리의 수고의 짐들을 모두 맡겨버립시다. 가정문제도 맡기고, 사업문제도, 맡기며, 자녀들 문제도 모두 주님께 맡기십시다. 한 사람도 주님께 맡기지 않은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오늘 두 번째로 아시는 주님께서
II. 우리에게 두려워말라고 하신 주님(10-11절)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성도들 모두 100%가 편안하고, 교회에 사람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목회자의 꿈이기도 하고, 성도들의 바램이기도 합니다. 에베소교회와 서머나 교회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머나교회에서의 문제는 에베소교회에서는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굶는다, 환난을 당한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는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재정적인 문제가 원활했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재정적인 문제가 대두가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후 107년에 순교한 ‘이그나티우스’라는 교부가 있습니다. ‘이그나티우스’가 에베소에 보낸 편지에 의하면 선행과 화목한 사랑을 가진 사랑의 사람, Oneimus 목사아래에서 훌륭한 지도를 받은 에베소 교회는 ‘정말 행복한 교회’(deservedly happy church)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그런 여력이 없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작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외부적인 압박에 서머나 교회는 많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싶어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성도들이 앞으로도 계속 우리교회에서 지켜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대체적으로 교회가 편안해지면 목회자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시합니다. 교회에 어려움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려고 합니다. 본질이 아닌 것에 신경을 씁니다. 교회가 편안해지고 어려움이 없어지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보다 행사나 하고 사업에 뛰어들려고 합니다. 노인사업, 어린이 사업, 교도소사업 등입니다. 이러한 사업들이 순수하고 복음의 진보를 위한다면 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의 돈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들은 이러한 것들을 경계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부탁하신 것을 발목을 잡는다는 것입니다. 시작은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했는데, 끝이 항상 돈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정말 신앙상 어려움이 오면 하루아침에 무너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앙생활이 제일 좋은가는 성경을 사랑하는 신앙이 제일 좋은 신앙입니다. 이것을 배제하면 위기의 때에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왜 일본의 침략시대에 교회가 부흥했습니까? 왜 초대교회가 부흥했습니까? 왜 종교개혁시대에 교회가 부흥했습니까? 대적들이 성경을 믿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로부터 일차적으로 빼앗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만 없으면 넘어지는 것은 하루아침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 곧 말씀의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은 넘어지려고 하다가 곧 일어서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모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줄입니다. 말씀을 믿고 기도하고, 또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말씀으로 위안을 받고 응답을 받으면서 뜨겁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때 이상한 면이 많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서머나 교회에게 즉시 은혜를 베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가 무한하고, 영원하며, 불변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하고 영원하며, 불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너희들에게 곧 고난이 온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너희 중 몇 사람을 시험하려고 감옥에 넣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너희가 10일간 환난을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givnou pisto;"
a[cri qanavtou/기누 피스토스 악슬리 싸나투 ’하셨습니다. 직역하면 ‘네가 죽기까지 믿어라’입니다. 우리말로는 ‘충성’과 ‘믿음’이 뉘앙스가 다릅니다. 그러나 헬라어는 같은 말입니다. 즉 네가 죽기까지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에 굳게 서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 대가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서머나의 행정관들은 로마황제에게 잘 보이려고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황제를 위한 신전도 유치했습니다. 아시아 제일의 관광명소로 만들었습니다. 마치 그와 같이 너희 서머나 교회는 죽기까지 믿으라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환난과 고난을 한정해 놓으셨습니다.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계속 고난과 환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십일 동안’입니다. ‘열흘’이란 정확하게 10일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 이상의 기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열흘이라는 것은 제한된 짧은 기간입니다.환난이 짧은 기간만 있다는 것은 성도들에게 인내할 용기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54:8을 보면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도여러분! 자비로운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오래도록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오랜 날을 환난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역경때문에 조금이라도 낙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고통은 항상 순간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나놓고 보면 고난이 가벼운 것을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영원하고 긴 편에 비해서 고난은 순간적이라는 것입니다. 열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영원한 복에 비하면 아부 짧은 것입니다.
주후 80년에 태어나 165년 경에 순교한 폴리갑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사도들과 후 사도시대를 연결해주는 교량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시도요한의 가르침을 후대에 전달했던 교부입니다. 그는 선생인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을 보존하였습니다. 이그나티우스가 로마로 순교행을 떠났을 때 20대였습니다. 그때 서머나의 감독이었습니다. 자신도 언제인가는 반드시 순교할 줄로 믿고 신앙을 항상 바르게 했습니다.
폴리갑은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때에 로마군에 체포되었습니다. 로마군은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된다고 본보기를 보이고자 일부러 먼 길로 폴리갑을 끌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구경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형장에서도 온갖 유혹을 다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총독은 황제에게 맹세하시오, 그러면 풀어 주겠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은 86년간 한 번도 나를 부인한 적이 없는데 당신은 나더러 무어라고 하는거요? 하면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서머나 교회에게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 그대로 그는 순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형편을 내가 모두 안다. 너의 고통도 알고, 네가 받는 환난도 알며, 네가 어떤 형편에 처해져 있는지 안다. 그러나 그 기간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를 계속 믿고 충성하기 바란다. 그러면 네가 결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꼭 믿음을 지켜 세상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서머나 교회처럼 환난과 고통이 적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두려운 것은 죄를 지을 확률이 높은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머나에서 활동했던 마귀가 이 시대에 우리를 무차별공격을 감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타락해 가는데도 목숨을 걸고서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은 목숨과 바꾸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빼앗기면 우리들의 모든 것을 뺏기는 것입니다. 끝까지 주님께로부터 온 진리, 그 말씀을 지키고 끝까지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