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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길은 오직 하나님께

미가1:1 

 

행복감이란 현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마음. 또는 그런 느낌입니다. 몇 년 전 우리나라 아이들의 주관적 행복감을 조사했습니다. 조사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행복감 성적이 71.6점이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최하위였습니다. 1위는 Greece였습니다. 114.2점으로 우리나라보다 40점 이상이나 높았습니다. 주관적 행복감은 건강 만족도, 학교생활 만족도, 주관적 행복도로 조사했습니다. 이에 비해 학업열망, 교육 참여 등 교육열의는 2위였습니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부모나 사회의 요구에 따라 거의 맹목적으로 학업성취를 높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아이들은 건강이나 취미활동 등은 아예 포기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현재 느끼고 있는 생활만족도는 거의 zero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회가 얼굴을 맞대고 소통하면 해결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경제구조나 정치적인 구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우리나라사람들이 현재보다 수입은 배나 많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출은 배나 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휘발유 값이 최소한 1000원은 인하해야 합니다. 통신비도 현재보다 1/3수준이어야 합니다. 전기요금도 1/3수준이어야 합니다. 그 외 생활지출비 등이 역시 1/2로 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꿈은 그냥 꿈일 뿐입니다. 매우 요원하기만 합니다. 즉 밝은 미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답답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700년 전인 유대에 미가 시대도 그랬습니다. 양상은 다르지만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정치지도자들과 하나님과의 소통이 없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과 백성들이 소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유다와 예루살렘이 혼란했습니다. 1절 상반 절을 보면

 

유다 열 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I. 어두운 세상 안에 서 있는 우리들(1a).

 

Greece 사람들에게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깜깜한 밤에 소경이 등불을 들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소경에게는 등불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가다가 다른 사람하고 부딪히면 괴롭습니다. 그러므로 소경이 등불을 켜고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등불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 불이 간다.’라고 광고하는 다른 사람을 위한 등불입니다. 그런데, 얼마를 가다가 어떤 사람과 부딪혔습니다. 이 때 소경이 자신 있게 한마디 합니다. “여보시오, 눈이 없소? 이 등불이 보이지도 않소?” 그 때 맞은 편 사람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등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라도 불이 이미 꺼져 있소.”

 

오늘 이 시대가 그렇습니다. 이 소경의 모습이 우리들의 시대와 大同小異합니다. 아주 어두운 시대입니다. 자신의 불들은 이미 꺼진지 오래인데, 문제가 생기다보니 다른 사람들이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해서 현재 이런 꼴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있다고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좌파는 반드시 척결해야 한다고 강 우파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좌파를 먼저 척결해야 경제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생각하는 좌파는 이 나라의 50%가 넘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좌우파로 나누는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미가시대 유대도 역시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미가는 유다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입니다. 요담 왕은 유대의 14대왕이었습니다. 선한 왕으로서 분류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겼습니다(왕하15:32-36).

 

32 이스라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 이년에 유다 왕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니 33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륙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루사라 사독의 딸이더라 34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35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 36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행한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아하스 왕은 요담의 다음 왕입니다. 아하스 왕은 악한 왕입니다. 우상숭배에 친앗수르 정책자였습니다(왕하16:1-16).

 

2아하스가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3···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4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7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컨대 올라와서 나를 그 손에서 구원하소서 하고 8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취하여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내었더니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반앗수르 정책을 편 왕이었습니다(왕하18:1-7).

 

3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4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5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6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7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히스기야 왕을 제외하고 다른 왕들은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왕들이었습니다. 이목구비 번듯하고 왕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상을 미치도록 섬겼습니다. 우상을 섬기다보니 여호와를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요담과 아하스가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인기가 있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자들과, 여호와를 싫어하는 국제주의자들이었는데 인기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절대로 국제사회에 얼굴을 들이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국제화를 아예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왕들이 국제사회에 얼굴을 들이밀었습니다. 왜 국제연맹에 얼굴을 들이밀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당시에는 교역의 조건으로 자기들의 신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교역의 조건으로 다른 나라의 신들을 마구 들여왔습니다. 이 신도 수입하고 저 신도 수입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 신들을 믿고 번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국제주의자이고, 우상을 섬기다보니 사회의 곳곳이 엉망이었습니다. 극악한 사회범죄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살리는 것이 아니고, 강대국들이 자신들을 살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번영케 하는 것이 아니라, 바알과 아스다롯이 번영케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강대국들의 사신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강대국들의 우상을 극진히 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색칠하고 금옷 은옷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우상의 제사장들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제도를 본떠서 그대로 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이미 멀리 떠났습니다. 우상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제사장들보다 계급이 높았습니다. 여호와의 제사장이 우상의 제사장들의 지시를 받게 만들었습니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유다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일체 무시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니까 종교적인 생명력이 사라졌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모두 다 하나님의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서 죄만 저질렀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을 진노케 했습니다. 이들의 죄는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죄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추악한 죄를 저지르는 죄였습니다. 하나님의 직원들이 하나님의 길을 몽땅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버리면서도 안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모시고 섬길 때 안전한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절대로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하나님을 떠나고도 안전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이들이 안전감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여호와의 도움 없이도 우리는 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왕과 왕족들이 강대국들과 친하니까(Friendly)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왕이 강대국의 Friendly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안위는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이스라엘이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무조건 복되다고 광고했습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이 우리에게 비를 주고 풍년이 들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거짓 자들은 입만 열면 평강이었습니다. 입만 열면 복되다였습니다. 왕이 하나님을 떠나도 평강,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도 평강,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떠나도 평강이었습니다. 매우 잘못된 신앙이 이들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Micah 때의 유대 지도자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택하여, 여호와의 백성으로 삼으셨고, 예루살렘에 그의 성전을 세우셨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재앙도 당하지 않을 것이며, 절대로 안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실은 없고 외형만 있었던 그들이 절대 안전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이런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혼란의 시대에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비취는 빛을 보아야 합니다. 칠흑같이 어두움에서도 우리는 빛을 보아야 합니다. 절망의 밤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비취는 빛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떠나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도래합니다. 사회정의에 무관심해버립니다. 교회 안에 거룩함()과 속됨()이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로인해 교회와 국가와 사회는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총체적으로 부패하게 됩니다. 결국 그 국가와 사회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죄를 정화하기 위해서 Micah를 보낸 것입니다. Micah는 총체적으로 죄 속에 파묻힌 이스라엘과 유다를 구하기 위해서는 예수그리스도가 와야 한다는 해결책을 제시합니다(5:4).

 

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3 그러므로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4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성도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Friendly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Friendly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상의 Friendly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Friendly여야 합니다. 잘못했을 때는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잘못된 신앙을 소유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과감히 주님 앞에 회개하고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온전해집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앞날이 밝습니다. 어둠속에서도 빛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에 내 신앙이 젖어있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전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에게 미래가 있고, 미래가 밝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를 괴롭혀도 정말 우리들은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영역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늘 하나님의 지역 안에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언제나 하나님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두 번 째로

 

II. 이 세상 안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1a).

 

Moresheth 사람 Micah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SamariaJerusalem에 관한 묵시라.

 

미가는 Moresheth사람입니다. Moresheth은 그다지 유명한 지역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백리 떨어진 지역입니다. Micah에게 보여준 환상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미래였습니다. Micah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환상은 심판의 환상이었습니다. Samaria를 심판하시는 말씀입니다(1:2-7). Jerusalem을 심판하시는 말씀입니다(1:8-16). Samaria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입니다. Jerusalem은 남왕국 유다의 수도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전체를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Micah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를 심판하신다고 통지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인데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방의 백성들이 와서 짓밟아도 침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안 들으시고, 모른 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을 심판하십니까?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한 대로 최고 통치자는 하나님의 Friendly가 아니고 강대국의 Friendly였습니다. 왕족들은 왕의 Friendly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우상의 Friendly였습니다. 백성들도 하나님의 Friendly가 아니고 우상들의 열혈 Friendly였습니다. 이러다보니 이들이 심판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상황인데 거짓 자들은 사람들에게 거짓희망을 불어넣었습니다. ‘걱정 없다’, ‘염려하지 마라’ ‘잘 될 것이다’ ‘절대로 우리는 망하지 않는다우리를 좋아하는 Friendly들이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망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말들이 먹혀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은 자격증이 있는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누가보아도 예루살렘의 선지자의 말이 맞겠지, 이름도 없는 Moresheth 출신 선지자가 맞겠냐는 것입니다. 서울에, 또는 대도시 그리고 이름 있는 목사가 그래도 낫지, 시골교회의 목사, 개척교회의 목사, 소형교회의 목사가 낫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지도를 보라는 것입니다. 방송설교 팡팡 나오고, 부흥회를 수백 번 인도한 목사인데, 까불지 말라는 것입니다. 같은 복을 빌어도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급이 낮아도 새카만데 저런게 목사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에 목사들이 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신 양 말하고 생각하며, 자신들을 높입니다.

 

인지도란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알아보는 정도입니다. 과연 사람의 인지도를 얼마나 바르게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인지도를 어떻게 측정합니까? 신문과 방송이 측정합니다. 과연 신문과 방송이 정확하게 사람을 검증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유명한 목회자들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우리들이 보고 있습니다. 유명한 사람들이 범죄에 연루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법무부 장관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위장전입을 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을 했습니다. 국토해양부장관을 하겠다는 사람이 부동산 투기를 해서 엄청난 차익을 챙겼습니다. 이것이 인지도입니다. 그래서 인지도란 믿을 것이 못됩니다.

 

미가는 Moresheth 사람이라 했습니다. 즉 인지도가 없는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미가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환상을 보게 하셨습니다.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예루살렘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서 말씀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모하는 자에게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 살아 있는 자에게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에게 옵니다. 미가는 예루살렘에서 100리나 떨어진 이름 없는 선지자입니다. 이 이름 없는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전체를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어야 합니까? 믿지 말아야 합니까? 믿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인증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 자들은 입만 열면 축복입니다. 그래서 신년대축복성회, 축복교회, 축복기도회등입니다. 입만 열면 잘 될거야’, 입만 열면 평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과 종들은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죽인다고 하신다입니다. 그러니 인기가 없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성도들이 적은 것은 당연합니다. 이왕이면 교회가 긍정적이어야지 맨 날 하나님이 너희들 가만 안 둔다.”고 하니, 교회를 가면 답답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Micah 역시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답답한 사람이었습니다.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고 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혼란의 시대에 말 한 마디라도 긍정적이어야지, 부정적으로 하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Micah의 예언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모두 부정적으로 예언을 했습니다. 예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오므리와 아합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탄탄대로에 올려놓을 일을 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유명한지, 근동에서 오므리 왕은 팔레스타인을 오므리의 집이라고 할 만큼 유명했습니다. 모압과의 전쟁에서 외교적으로 탁월하게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13절의 짧은 사적만 할애했습니다(왕상16:16-28). 아합은 시리아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했지만,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부정적으로 표현합니다. 참으로 능력 있는 통치자였지만(오므리의 행한 권세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왕상16:27), 그는 사악한 통치자라고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왕상16:25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왕상16:26 그가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

미가 6:16 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행위를 지키고 그들의 꾀를 좇으니.

 

성경과 선지자들은 오므리와 아합을 죽어야 할 자, 벌을 받아야 할 자로 묘사했습니다. 사람들은 원래 죄인이기 때문에, 늘 책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기자들이며, 선지자이며, 선견자들의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아담의 타락이후로 너희들은 이 세상의 사람들과 같이 살지 마입니다. ‘너희들이 이대로라면 가만두지 않겠다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부정적인 말을 싫어합니다. 이왕이면 하나님께서 위로하는 말씀, 격려하는 말씀만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을 격려하는 것보다 살길을 택하시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부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창세기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3:16-24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를 모른다면,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는데, 이것을 왜곡하여 엉뚱하게 해석하면, 하나님의 의도와 우리와는 전연 무관한 관계로 발전하고 맙니다. 왜 부정적으로 이름 없었던 모레셋의 작은 선지자 미가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까?

 

여호야김이 유다 왕이었을 때의 일입니다. 제사장들과 거짓선지자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입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한 마디도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입만 열면 심판이었습니다. 늘 부정적으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것입니다(27:6-11). 그러니 왕이며 방백들, 신하들이 좋아할 리 없었습니다. 적국과 목숨을 걸어서라도 싸워야 하지, 어떻게 항복을 할 수 있느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삯군목자들이 긍정적이었습니다. 예레미야28:1-4절을 보면 거짓자 하나냐가 예례미야에 맞서서 유다 왕과 신하들에게 말합니다.

 

1 이 해, 유다 왕 시드기야의 즉위한지 오래지 않은 해 곧 사년 오월에 기브온 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집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 앞에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3 내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이곳에서 바벨론으로 옮겨간 여호와의 집 모든 기구를 두 해가 차기 전에 다시 이곳으로 가져오게 하겠고 4 내가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는지라

 

듣는 입장에서는 예레미야의 말보다 하나냐의 말이 훨씬 좋습니다. 품위가 있고 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변개할 수 없습니다. 하나냐의 긍정적인 말은 거짓말입니다. 예레미야의 부정적인 말이 진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목에 있었던 멍에를 부러뜨리자 하나님께서는 쇠멍에를 대신 주셨습니다. 그리고 거짓을 말했던 하나냐를 그 해에 죽였습니다.

 

성도여러분! 신앙은 긍정/affirmative이 아니고 믿음/faith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축복축복만을 외치는 사람들은 결코 성경의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은 복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죄도 말하고 심판도 말합니다. 예레미야의 편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장로들은 예레미야를 변호했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이 맞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장로들은 그 근거로 미가의 사역을 언급했습니다. 예레미야26:18을 보면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시온은 밭 같이 경작함을 당하며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며 이 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들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니 예레미야를 죽이면 하나님의 재앙이 곧바로 임할 것이라 했습니다. 미가의 이 말에 히스기야는 크게 회개를 했습니다. 미가의 사역을 통해서 히스기야는 회개하고 또 근신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 때 예루살렘을 남겨주셨습니다. 그럼에도 히스기야가 죽자 유다의 통치자들이 하나님께 바로 등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미가도 바벨론에 의해서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라 했습니다. 미가의 말대로, 예레미야의 말대로, 이사야의 말대로, 선지자들의 말대로 유다와 예루살렘이 주전586년에 망했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가 연구하고 믿는 성경은 다른 세계로부터 온 말씀(A Word from Another World)입니다. 다른 세계로부터 온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만족해야 합니다. 성경은 과학자들이 쓸데없는 연구를 하고 있는 우주 밖으로부터 온 말씀입니다. 우주를 초월해서 우리에게 왔습니다. 성경은 전적으로 인간에 의해 기록되었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항상 견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대할 때 항상 수납적인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는다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믿지 않을 때, 문제가 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제하고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믿을 때 우리들의 신앙은 곤두박질합니다. 오늘의 이 나라 상황은 어떻습니까? 미가의 시대 곧 유다와 예루살렘이 망해가는 시대와 똑같습니다. 나라의 통치자가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느 교회의 목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서 평강을 외치고 있습니다. 국무위원 중에 단 한 사람도 깨끗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범법자들입니다. 병역문제, 부동산문제, 자녀문제, 위장전입 등의 전과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합니까? 평강입니까? 안전입니까? 우리들의 경제 살리기입니까?

 

성도여러분! 형통만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는 아닙니다. 긍정만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긍정으로, 때로는 부정으로, 때로는 자비로, 때로는 심판을 사용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은 사울이나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우에도 인간에게 미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손길은 욥과 에브라임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경우에도 인간을 치는 야속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외적인 자비나 비참만 보고 사랑이나 미움을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은 의로운 자에게나 불의한 자에게나,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깨끗한 자에게나 불결한 자에게나 다 똑같이 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통의 태양은 과수원의 과일나무만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의 가시나무 위에도 내려쬡니다. 고난의 눈보라는 광야나 언덕의 불모지에만 몰아치는 것이 아닙니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도 몰아칩니다. 아합과 요시야의 종말이 아주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이 동시에 임했습니다. 건강, 재산, 명예, 고난, 질병, 손해는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차별없이 주어집니다. 모세는 불평한 대가로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나발은 아브라함 못지않은 부자였습니다. 아히도벨은 솔로몬만큼 지혜로웠습니다. 도엑은 사울만큼 영화를 누렸습니다. 요셉은 바로와 함께 권세를 향유하였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 중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의문만 잔뜩 지고 있다가 이 세상을 끝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때라도 길을 하나님께서 찾습니다. 성경에서 그 길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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