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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호세아1:1-9 ○ 2009.1.11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 명연설이 나옵니다. 부루터스의 연설입니다. 부루터스는 다른 원로들과 함께 시저를 암살하였습니다. 시저는 파르티아 원정을 앞두고 원로원 회의를 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시저는 자신을 암살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을 경호하는 사람들을 모두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 극장의 회랑을 암살자들과 같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전혀 시저의 의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암살자들은 시저를 단독으로 경호하는 안토니우스를 할 이야기가 있다고 미리 따돌렸습니다. 그리하여 시저는 극장의 회랑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 신임하던 부루터스에게 배반을 당해 암살당했습니다. “부루터스 너머저”는 시저가 칼에 찔렸을 때 한말로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부루터스는 자신이 시저를 죽인 것은 시저보다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시저의 암살을 정당화하는 그의 배반적인 말입니다. 씨저는 철저하게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행위가 주전 750년경에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일어났습니다. 1절에서 3절을 봅시다.

1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3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엄청 사랑했는데도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오늘 첫 번째로

I. 결혼명령을 받는 선지자(2-3절).

기독교인의 결혼은 세 가지의 목적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생애를 풍요하게 하는 것이며, 또한 가족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을 넓히는 거룩한 목적이 있습니다. 결혼이란 신불신간에 굉장히 중요한 의식입니다. 결혼을 통해서 새로운 가정이 탄생하고, 결혼을 통해서 사회가 형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국가의 기본입니다. 모든 사회의 인적자본이기도 하고 가정의 인적 자원이기도 합니다. 결혼은 두 가정의 자녀들이 새롭게 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기에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한번 하고나면 물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더 신중하게 하라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에서 직분을 가진 자라면 신성한 결혼만 허락되었습니다. 레위기21:13-15을 보면 제사장은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으라 했습니다. 과부나 이혼된 여자나, 더러운 여인이나, 기생을 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순결한 결혼이 전제조건이었습니다. 결혼으로 인해서 선지자가 비웃음을 받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만일에 잘못된 결혼을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백성들에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너나 잘하라’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이상한 결혼명령을 내리십니다. 너는 가서(&le),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Ajq *|l] tv,ae !~ynIWnz]),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ydEl]y"w] !ynIWnz])하셨습니다. 누구보다 순결해야 할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무리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인 호세아에게 가장 음란한 여자를 찾아서 그와 결혼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음란한 자녀를 낳으라는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뒤에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했다(h~n<z]ti hnOz:)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를 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눈물을 머금고 고멜과 결혼을 했습니다. 고멜은 이미 결혼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음란한 자녀를 데리고 있었습니다. 2절에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와 음란한 자녀들을 취하라”(바른성경)하였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낳으라”는 말이지만 원문에는 “낳으라”는 말이 없습니다. ‘취하라’는 말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여자를 아내삼고 그에게 딸린 자녀들은 입양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왜 가혹한 명령을 하십니까? 이스라엘의 죄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호세아가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분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장한 모습이 호세아의 결혼입니다. 그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전에 그들이 알도록 음란한 여자와 결혼을 하여 자녀를 낳으라는 것입니다. 이때의 이스라엘은 한창 번영의 시기였습니다. 북쪽에서 괴롭히던 앗수르와 아람이 다른 나라와의 전쟁으로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을 더 잘 섬겨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번영은 하나님을 떠난 번영이었습니다.

성도여러분, Calvin은 하나님의 순결한 백성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수행할 각오와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교훈하신대로 주님을 바라보고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전체를 주님께 맡기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같이 일생을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음란하다, 음란하다.’하면 사람들은 성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떠나면 음란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떠나면 불안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체하는 무엇을 찾습니다. 즉 거짓된 교훈에 귀를 기울입니다. 거짓 것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멀쩡한 사람들도 바보가 됩니다. 서울의 어떤 사람이 무당의 말을 듣고 수 십 억원을 뜯겼습니다. 귀신이 씌워서 그것을 떼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하는 바람에 돈을 몇 차례 준 것입니다. 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도 4억 원을 뜯겼습니다. 귀신이 씌었다고 하니까 귀신을 떼어달라고 하고 돈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도록 하나님을 떠나면 거짓말에 쉬 넘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거짓된 우상을 섬겨야 합니다. 우상은 사람들의 생각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의 가르침을 따르게 됩니다. “소띠는 닭띠와 결혼하면 안 된다.” “명당을 찾아서 조상을 이장하라. 그러면 후손들이 잘 될 것이다.” “날을 받아서 이사를 가야 한다.” “택일을 받아서 결혼을 해야 한다.”, “굿을 하면 취직이 된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승진이 된다”는 등의 소리를 듣습니다. 하나님께 있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섬기다보니, 그 말들이 참말 같이 들립니다. 그래서 이장하고, 고사지내고, 굿을 하고, 제사지내고, 시제지내고 온갖 잡신들을 다 불러들입니다. 안하니까 께름칙합니다. 정월에는 토정비결을 보아야 한 해를 맞는 것 같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우상을 섬깁니다. 무당들의 통장에 돈을 두둑하게 넣어줍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그 영혼이 망하고 그 육신마저 지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우상은 인간적인 것을 하나님의 것이라 속입니다. 거짓 것을 참으로 속여 사람들의 영혼을 강도질합니다. 우상은 예배의 참뜻을 떠나 성공을 참배하게 만듭니다. 번영만 외치다가 사람들을 지옥으로 떨어지게 만듭니다. 인간을 하늘까지 높이다가 결국은 추락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나가면 우상을 섬기게 되고, 우상을 섬기다보면 멸망 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지 맙시다.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합시다. 하나님께서 같이 있자고 하실 때 같이 있읍시다. 하나님이 쉬자고 할 때 쉬고, 일하자 하실 때 일합시다. 기도하라 하실 때 기도하고, 믿으라 하실 때 믿읍시다. 나랑 같이 있자고 할 때 같이 있읍시다. 내 말씀 안으로 들어오라고 할 때 우리가 들어갑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은혜를 비같이 쏟으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떠나지 않기를 결단합시다. 영원히 하나님과 같이 있기를 결단하십시다.

호세아는 말도 안 되는 결혼명령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더 기막힌 명령을 받습니다. 4절에서 9절을 보면

4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5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6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7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8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오늘 두 번째로

II. 기막힌 자녀들의 이름(4-9절).

사람은 항상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11년 전에 IMF를 맞았습니다. 온 국민들이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그때 재벌 및 일부 부자들은 시늉만 했습니다. 힘을 합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두 명의 대통령은 국민들과 똑같이 했습니다. 국민들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했습니다. 낮아져서 국민들을 섬겼고, 섬기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일부의 사람들은 못 마땅해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자신들의 담이 무너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재벌들은 재산의 담이 허물어짐을 느꼈습니다. 서울의 부자들은 자신의 재물이 허물어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가진 자들이 위험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언론을 시켜서 툴툴거리게 하도록 했습니다. 못된 일부 언론들이 연일 불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여론화가 되니까 국민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동조했습니다. 서민들은 바른 정치, 올바른 민주화를 몰랐습니다. 주가는 올라가고, 국민경제는 좋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경제, 경제하고 외치니까 사람들이 그 말을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배나 더 잘살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선거에서 자신을 바꾸었습니다. 바꾸면 모두에게 요술램프를 정부에서 하나씩 쥐어 줄줄 믿었습니다. 너도나도 나와서 신정부를 지지한다고 앞을 다투어 방송에 얼굴을 비쳤습니다. 그리고 현재 2년째를 맞고 있습니다. 정권 바뀌기 전에 붕어빵을 먹었다면, 경제경제 했던 정부에서는 단팥빵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습니까? 단팥빵은커녕 붕어빵도 제대로 굽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뒤늦게 가슴을 치고 후회하고 있지만, 때늦은 후회일 뿐입니다. 그래서 잘나가고 있을 때 우리가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무섭습니다. 한번 작정하시면 돌이키지를 않으십니다. 누가 말릴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막을 사람이 없습니다. 인간세상에서 전쟁이 나면 중재자가 나서면 전쟁을 멈출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누구도 중재하지 못합니다. 절대주권자인 하나님의 뜻대로 하실 뿐입니다.

호세아가 고멜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이스르엘”로 지으라고 하십니다. 딸을 낳으니까 “로루하마”로 부르라 하십니다. 다음에 아들을 낳았는데, “로암미”라고 이름을 지으라 하셨습니다. 아들딸을 낳으면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이름을 지어주시는데 온몸에 힘이 쭉 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연거푸 3남매의 이름이 한 결 같이 심판과 관계되는 이름이었습니다.

열왕기하 10장을 보면 예후가 아합의 집을 쑥대밭을 만듭니다. 그 이유는 아합이 바알을 섬겨 이스라엘을 어지럽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후 자신이 왕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상을 믿는 아합을 심판했으면 우상을 섬기지 않아야 했는데, 똑같았습니다(왕하10:31). 그래서 하나님은 예후의 죄를 묻겠다는 것입니다. 아합을 죽이고 심판할 때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것 같더니, 목적을 이루고 나니까 더 하더라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 하지 말고, ‘이스르엘’이라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이스르엘”은 철자 하나 차이입니다. 그런데 뜻은 완전히 다릅니다. “이스라엘”(laer:c]yI)은 ‘하나님과 더불어 힘을 얻어 강하게 된 자’입니다. ‘이스르엘’(la[er]z]y)은 “하나님이 흩으신다”입니다. 이스라엘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이스르엘 계곡에서는 항상 싸움터였습니다. 거기에서 이스라엘을 무력화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둘재 딸의 이름에서는 더한 내용이 나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로루하마”는 절대로 이스라엘을 못 본체 할 것이라는 암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왕국 유다는 불쌍히 여기는데 비해서 ‘북왕국은 절대 모른 체 할 것이다’입니다. 세 번째 태어난 아들의 이름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철저하게 심판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호세아에게 전하신 이 말씀은 주전721년 앗수르에 의해서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을 무력화시켜 그들을 모두 망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북왕국은 영원히 멸망을 받을거라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한정적입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면 호세아에게 말씀을 전하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심판의 말씀을 전하라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우상을 섬기고 있는 자리에서 지금이라도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들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망해가고 있지만, 너희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다스리기 위해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죄에서 돌이켜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가 무한하고 영원불변하십니다. 악한 자들을 공의로 판단하셔서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심이 무한하고 영원불변하십니다. 의인들뿐만 아니라 악한 자들에게까지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펼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금기시한 사마리아를 들르셨습니다. 거기에서 저주받은 한 여자를 구해내셨습니다(요4:39).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고가라고 하시니까 두말없이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요4:40).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라 하셨습니다(행1:8). 그 말씀에 의지하여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8:14을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사도시대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회개를 했습니다. 우상에서 돌아섰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을 도저히 버리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시대에 전한 말씀이 사도시대에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을 회개시키고 그들을 교회 안에 불러들이신 것입니다.

1940년 작품의 애수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비극으로 끝나는 영화입니다. 제1차 대전의 소용돌이 속의 어느 날, 워털루 다리 위를 산책하던 25살의 젊은 대위 로이 크로닌은 때마침 공습경보로 지나가던 사람들과 함께 지하철도로 피신합니다. 그는 프랑스 전선에서 휴가를 받고 나와 있다가 내일 부대 귀환을 앞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핸드백을 떨어뜨려 쩔쩔매고 있는 한 처녀를 도와주고 함께 대피합니다. 마이라 레스터라는 발레리나였습니다. 그날 밤 극장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던 마이러는 객석을 바라보다 로이를 발견하고는 둘이 만납니다. 그러나 발레단장에게 발각됩니다. 그리고 이별의 편지를 씁니다. 하지만 로이는 그에게 청혼을 하고 바로 그날 저녁에 전쟁터로 떠나갑니다. 로이를 마중하러 워터루 브릿지역으로 나가고 공연시간을 못 맞춘 그녀는 발레단에서 쫓겨납니다. 살길이 막막해진 마이라는 직업을 구하려고 하지만 구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로이 어머니를 만나러 나간 장소에서 우연히 전사자 명단에 들어있는 로이 이름을 발견합니다. 마이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거리의 여자로 전락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워터루역에 나갔던 마이라는 건강하게 살아 돌아온 로이를 귀국하는 군인들 사이에서 발견합니다. 그러나 로이를 사랑하지만 육체가 허락하지 못하는 몸이 된 마이라는 회한의 눈물만을 흘립니다. 결국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사랑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행복해야할 둘의 사랑은 무너지고 마이라는 워터루 브릿지에서 자살하고 맙니다.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박차고 나가서 다음부터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그것이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교회를 떠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제일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나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이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바른 교회를 말하는데, 예배에 신경을 쓰지 않고, 믿음을 가지지 않는 것이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마음으로는 이미 하나님을 떠났으면서 겉으로는 열심인척 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심중을 헤아리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겉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는 것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은 버린 자식이지만 사랑하시는데, 자꾸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은 다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고멜이 누구입니까? 우리들입니다. 이 세상이 너무나 좋아서 자꾸 이 세상을 동경하는 우리들이 고멜입니다. 현시대는 참으로 살기 좋은 때입니다. 물질이 풍요로운 시대입니다. 부족을 모르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서 성도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에는 그러한 것들이 없다고 떠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고멜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것들을 없게 하시는지, 그 원인을 모르면서 눈에 보이는 것들 때문에 떠납니다. 결국은 그 인생은 파탄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풍요를 위해서 떠났지만, 그 풍요가 떠나버립니다. 그래서 고멜과 같은 우리들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무지함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데, 그것을 모른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모든 것이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떠나려고 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회개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모르는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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