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성하게 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1:1-7
오는 10월31일이 종교개혁일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Martin Luther가 종교개혁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Luther는 종교개혁을 일으킬 목적이 없었습니다. Luther는 애초에 종교개혁을 하려고 나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Luther는 종교를 개혁할 의사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Luther는 95개조 논제를 게시하였을 때 Roman-Catholic에 반기를 들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Roman-Catholic에 충실하려고 했습니다. 95개조를 비텐베르그 성당 정문에 붙였을 때도, Luther는 면죄부 판매 등 당시 Roman-Catholic이 가르치는 잘못된 주장들에 대해서 학문적인 토론만 할 계획이었습니다. 교회를 개혁하려는 의지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95개 조항을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독일어가 아니라 당시 10% 미만의 사람들만 읽을 수 있는 Latin語로 작성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Luther자신은 종교개혁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1517년 10월 31일의 95개조 사건은 Luther 자신도 예견하지 못했던 사건으로, 1000년 동안 썩었던 Roman-Catholic에 핵폭탄을 던진 사건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작은 행동이 전 세계를 움직이게 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1절에서 5절을 보면
1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2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3 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4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5 이미 애굽에 있는 요셉까지 야곱의 혈속이 모두 칠십인이었더라
야곱이 그의 권속을 데리고 요셉이 총리로 있는 애굽에 갔습니다. 애굽에 들어간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들이 이러하다고 출애굽기의 문을 열고 있습니다. 오늘 첫 번째로
1. 애굽에 들어간 야곱의 아들들(1-5절).
성경의 첫 책을 우리는 창세기라 부릅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은 창세기라 부르지 않습니다. “태초에”(tyviarEB]; 베레쉬트)라고 부릅니다. 출애굽기 역시 히브리 사람들은 “그리고 이것들이 그 이름들이다”(t~/mv] hL,ae%w]; 베엘레 세모트)라고 부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신명기까지 레위기만 제외하고 첫 글자가 성경의 제목입니다. 출애굽기의 Exodus라는 이름은 19:1에 나타난 헬라어 LXX의 “떠남, 출발”의 뜻에서 나왔습니다.
1절에서 5절까지는 창세기 46:8-27에 있는 말씀입니다. 애굽에 있는 요셉은 흉년 때문에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각국으로부터 식량을 사러오는 과정에 형제들을 우여곡절 끝에 만나게 됩니다. 요셉은 형들을 시켜서 가나안에 있는 야곱의 모든 가족들을 애굽에 오게 했습니다. 이때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들어간 야곱의 가족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입니다. 연장자순으로 레아의 소생 6명과 라헬의 소생 2명, 라헬의 종 빌하의 소생 2명, 레아의 종 실바의 소생이 2명으로 12명의 아들들이 기록되었습니다. 창세기46:8-27절을 보면 레아의 소생이 6아들, 23명의 손자들, 2명의 증손자들로 야곱까지 33명입니다. 레아의 여종 실바의 소생이 2명의 아들, 11손자, 증손자2, 딸 1명으로 16명입니다. 라헬의 소생은 2명의 아들, 10명의 손자, 증손자 2명으로 14명입니다. 라헬의 여종 빌하의 소생이 2명의 아들, 5명의 손자로 7명입니다. 야곱의 열한 아들과 손자들, 증손자들을 합하여 이미 애굽에 있는 요셉을 합하여 70명이 들어갔다고 모세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70명입니다. 70명의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7:14을 보면 스데반은 75명이라고 말합니다. 모세와 스데반 간에 5명이 착오가 납니다. 히브리 성경(MT)에서 70명을 LXX에서는 75명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성경(MT)은 야곱, 요셉, 요셉의 두 아들까지 포함했습니다. 그러나 LXX은 야곱과 요셉을 빼는 대신 요셉의 아홉 아들을 포함시켰습니다. LXX은 요셉이 후에 낳은 아들들을 더 계산해 넣은 것 같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바로 LXX역을 인용한 것입니다. 야곱의 가족들은 여자들을 합치면 150명은 넘을 것입니다.
사실 70명이면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닙니다. 요새 장수하는 사람들의 자손을 보면 100명이 넘는 자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70명이라면 많지 않은데 이들이 애굽에 들어갔습니다. 왜 하필 70명입니까? 모세가 제유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제유법이란, 같은 종류의 사물 중 어느 한 부분을 들어 전체를 나타내는 비유법입니다. 제유법에 의해 70명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7이라는 숫자를 완전성에 두고 있습니다. 10도 마찬가지입니다. 10은 역시 충만한 숫자입니다. 따라서 7과 10의 만남은 크고 완전한 숫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70인은 무시 못 할 큰 존재들입니다. 애굽에서는 요셉의 총리대신의 가족들이 들어왔나 보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으로서는 후일에 이들로 인해서 국가적인 정책을 썼습니다.
출애굽에 첫 번째 등장하는 야곱은 잘난 사람이 아닙니다. 야곱은 에서 대신 이삭의 축복을 받고서 하란으로 달아났습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한 일은 오직 아내를 얻는 일과 재산 증식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삭이나 아브라함처럼 단을 쌓았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가나안에 돌아와 요셉을 잃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야곱의 가족들을 요셉이 살려냅니다. 그 가족들의 이름을 모세는 세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사실 이들은 성경에 기록될만한 인물들이 아닙니다. 용기가 있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도덕적인 사람들도 아닙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그 형제를 팔아먹은 사람들입니다(창37:28). 스캔들이 있는 사람들입니다(창37:2).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죽인 살인자들입니다(창34:26-31). 흠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대로 의로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당대에 유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는 행위로 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tyriB]/berîyth)이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피로 맺은 언약이 있었습니다. 이 언약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하십니다. 이 언약이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뒤를 보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의 교회들은 힘을 키우고 있습니다. 모두 백두장사, 한라장사, 태백장사가 되려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같은 교회들은 game이 되지 않습니다. 씨름판에 나가겠다고 하면 아예 받아주지 않습니다. 등급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씨름판에 등장한 선수들은 모두 장사가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game을 해서 이겨야 합니다. 따라서 보장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씨름판에 등장하지 않아도 우리는 더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한라장사, 백두장사는 경기가 끝나야 천하장사가 되지만 우리는 이미 한라장사, 백두장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메달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점검을 해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는 삶은 이미 game이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가나안을 비우라고 하셨습니다. 대신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결속시켰습니다. 애굽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단일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을 성장시키는 밭이었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의 물줄기였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의 식량원이었으며,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경호원들이었습니다.
애굽은 흔히 세상으로 비유됩니다. 예수님도 헤롯을 피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애굽에 갔었습니다. 애굽은 세상인 반면 성도들을 자라게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애굽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도 계셨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애굽 행은 뜻밖이었습니다. 가나안에 있다가 하란으로 갔었습니다. 하란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올 때에 하나님의 인증을 받았습니다(창31:3). 그래서 가나안에서 생을 마치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가라는 명을 받았습니다(창46:3).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반대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애굽에 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는 어디고 무엇이고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두 번째로
II. 애굽에서 번성한 야곱의 아들들(6-7절).
6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
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제가 물옥잠화를 장재동의 어떤 교회에서 몇 개 가져왔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물옥잠화 한 개를 집안의 연못에 던져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름이 되자 엄청나게 번성했다는 것입니다. 한 개에서 여러 개가 나와서 번성하더니, 한 여름이 되자 상당히 넓은 연못을 온통 물옥잠화가 모두 차지하였습니다. 거기에 예쁜 꽃까지 계속 피고 있었습니다.
식물이든지 동물이든지 환경과 여건만 좋으면 기하급수로 번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천적이 있고 재해가 있어서 번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만 없으면 얼마든지 번성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장면이 바뀝니다. 애굽에 70명이 들어간 오랜 후에 야곱은 물론이고 요셉의 형제들이 모두 죽었다고 말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했습니다. 이제 그 전후 세대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애굽에 거주기간을 430년이라고 했습니다(출12:40). 여기에서 모세의 성장기간 40년과 미디안으로 도피생활 40년을 제외해야 합니다. 그러면 대략 350여년 째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Thompson Bible, 82).
그 사이에 이스라엘은 엄청나게 번성했습니다. 애굽을 떠났을 때는 약 25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70명이 25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번성했습니다. 만배 이상으로 번성한 것입니다. 모세는 히브리사람들의 번성을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번성(WrP;)했다고 말합니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넘쳐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번식했다(Wxr]v]YIw")고 합니다. 연령별로 사람들이 우글거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창성했다(WBr]YIw")고 말합니다. 고센 땅이 모자랄 정도로 계속 늘어갔습니다.
그리고 심히 강대(daom] daom]Bi Wmx]['Y"w")하였습니다. 건강치 못한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요셉당시의 애굽 사람들은 70명의 야곱의 가족들이 왔을 때 하찮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때 7000명이나, 7,0000명이라면 받아들이기를 꺼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겨우 70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약 400년 동안에 엄청나게 번성했습니다. 거리마다 사람들이 넘쳤습니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습니다. 청장년들이 넘쳤습니다. 히브리사람들은 병에도 강했습니다. 웬만한 병이 들어와도 자고나면 나았습니다. 산파들이 바빴습니다. 매일 출산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낳고 자라고, 낳고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정확한 숫자를 말하지 않고 그냥 온 땅에 가득하였더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로 보아서는 뿌듯했습니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이 볼 때는 걱정이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에 비하여 신체도 건강했습니다. 계속 인구는 증가하였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이스라엘이 계속 번성하고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번성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번성은 하나님께로부터 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자손을 주십니다. 또한 거두시기도 합니다. 가족을 번창케 하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번성은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입니다.
시편 127:5절을 보면 “화살이 전통에 가득한자는 복이 있다”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화살은 자녀들을 말합니다.
예레미야 30:19을 보면 국가적으로 번성케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9:31을 보면 교회를 번성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능히 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애굽의 궁중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인공인줄 알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센지방은 애굽의 관할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살고 있지만 고센지방이 애굽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셨을 때는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top-star입니다. 애굽은 extra에 불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70은 60,0000이다(70=60,0000)는 공식을 어디에서고 볼 수 없습니다. 오직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공식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 등식이 성립되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의 우리들을 볼 때 이 등식을 성립시킬만한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잘난 것도 아닙니다. 잘 생긴 것도 아닙니다. 힘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능력도 우리에게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야곱의 70명과 같습니다. 온통 상처투성이입니다. 세상에서 많이 얻어맞았습니다. 세월에 씻김을 당했습니다. 큰소리 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참으로 irony입니다. 할 수는 없는데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등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한 염려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계약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못난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시내산으로 데려와서 계약을 맺었습니다. 계약 당사자들은 계약을 깨뜨릴 때 계약적 저주를 감수해야 합니다. 계약당사자들은 책임과 의무를 규정하는 계약서를 작성합니다. 그리고 계약식을 체결하는 의식을 하였습니다. 이미 아브라함과 하나님께서 이 의식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후손을 시내산으로 데려와 장로들 70인을 불러서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습니다(출24:9-11). 이 의식이 계약을 인치며 축하하는 계약식사(covenant meal)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누구를 통해서 계약식을 거행하였습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과 이미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신뢰하면 됩니다. 야곱의 아들들을 번성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을 번성하게 하십니다.
1666년에 런던에 큰 화제가 있었습니다. 무역으로 부자가 되었던 사람들이 하룻밤에 가난해졌습니다. 국민 대다수가 곤궁해졌습니다. 그로부터 47년 후에, 청교도인 존 플래블은 연설 중에 “런던을 휩쓸었던 전염병과 화재는 능력 있고 충성된 많은 그리스도의 목회자들이 도시와 국가로부터 내쫓김과 묵살을 당한 결과였습니다.”
당시에 영국에 ‘5마일 법령’이라는 법을 영국국교가 발효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법이 시행된 지 6개월이 지나지 않아서 화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5마일 법령이란 그리스도의 목회자들이 도시로부터 5마일 밖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법이었습니다. 그 법령으로 인해 영국국교회로부터 쫓겨나고 집으로부터 잔인하게 내몰렸습니다. 모든 집단으로부터 5마일 이내에는 거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그들이 목회하던 곳에서도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화재가 일어나서 5마일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망했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많은 목회자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로, 심판이 임하기 전에 그들을 그 도시로부터 벗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참으로 약합니다. 마치 대제국인 애굽에 들어간 70명의 보잘것없는 야곱의 아들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은 하찮은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은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자녀들을 어디에서나 보호하시며, 언제나 인도하십니다. 70명을 600000만 명으로 번성케 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extra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코 우리는 extra가 아닙니다. top-star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