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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2.13
    우리 중에 계시는 하나님 2

우리 중에 계시는 하나님

에스겔1:1-14

 

 

프랑스의 철학자 ‘Descartes’는 인식론자입니다. ‘인식론/Erkenntnistheorie’이란 사람의 앎을 근거로 모든 문제를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일단 모든 것을 나 자신이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Descartes의 “나는 생각(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말은 자신 이외에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Descartes는 “나”라는 것을 항상 강조하고 있습니다. 의심의 철학자이기도 한 그는 먼저 모든 것을 인식할 “나”를 확실하게 세웁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을 분명히 알고 깨닫기 위해서는 의심할 수 없는 “나”를 먼저 확실하게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의심할 수 있어도 “나”라는 실존을 의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없고는 다른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내가 인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Descartes(1596-1650) 이전의 철학자들은 그래도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계시고”였습니다. 그런데 ‘Descartes’가 이것을 깼습니다. 합리론자요, 경험주의자인 Descartes는 “하나님도 내가 인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인식을 해야 하나님도 존재하는 것이지, 내가 인식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Descartes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현 세상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비웃습니다. 오늘 말씀 1절에서 3절을 보면

 

1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2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 지 오년 그 달 오일이라 3갈대아 땅 그발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오늘 첫 번째로

 

I. 그발 강가에 나타나신 하나님(1-3).

 

사람들은 지식(knowledge)을 재산이라고 합니다. 지식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경제력의 디딤돌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살면서 얻어지기도 하고, 배워서 얻어지기도 합니다. 지식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이러한 지식을 어떤 사람에게서 습득했느냐에 따라 지식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안중근의사를 일본인들은 terrorist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안중근의사를 한국 사람들은 독립투사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같은 한국인이면서, 안중근의사를 terrorist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본을 사모하는 못된 친일파들입니다. 따라서 한국인이지만, 친일파들에게 안중근의사에 대해서 배운 사람하고, 애국지사들에게서 배운 것하고는 아주 다릅니다. 어떤 것이 제대로 된 지식입니까? 안중근의사를 애국지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지식이 제대로 된 지식일 것입니다.

 

Greece 수학자 Archimedes는 지레 기구를 사용하면서 ‘내가 설 수 있는 한 지점(pou' stw')을 달라 그리하면 내가 세상을 움직일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지식과 의미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지구 외계 기점 (extracosmic base)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말씀을 주셨을 때, 단순히 자신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훨씬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점(pou' stw') 혹은 우리의 지식요구와 인격의 중요성요구 모두를 입증해주는 기반을 주셨습니다.

 

모든 사물들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이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지식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인식론적인 원리입니다. 이는 모든 지식들이 풀릴 수 없을 만큼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조사할 수 없습니다. 우주에 있는 자료를 우리가 어떻게 조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최근까지 모든 철학사(哲學史)는, 다른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우주의 충분한 어떤 선택된 특별한 것들을 “조사하고” 이러한 특수성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반 개념들을 발견하기 위한 인간의 합리적인 노력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람들은 지식에 도달하기를 시도해 왔습니다. 합리주의나 경험주의와 같은 인식론적 방법을 통해서 지식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를 옹호하려 했습니다.

합리주의자들은 모든 지식이 先驗的인 진리들로부터 시작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진리들로부터 연역적인 과정을 통해 또 다른 진리들이 이끌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역적인 방법을 통해 확실한 지식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이 되는 선험적인 개념에 논리의 법칙, 우리들 자신의 정신상태, 객관적인 진리의 존재 등이 포함된다 하더라도,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프레임(Frame)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선험적인 개념으로부터 연역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분명히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인간지식의 전체구조를 이끌어낼 수 없으며, 의미 있는 철학을 형성할 만큼의 충분한 지식조차도 추론해낼 수 없다. 홀로 떨어져서는 어떠한 것도 논리의 법칙으로부터 따라 나오지 않으며, 아마 더 많은 논리의 법칙들만 따라 나올 것이다. 우리의 정신 상태에 관한 또 다른 명제들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우리의 정신 상태에 관한 명제들로부터 따라 나오지 않는다. “객관적인 진리들이 존재 한다’라는 진술로부터는 어떠한 구체적인 것도 나오지 않는다. 우리에게 어떠한 구체적인 것도 말해 주지 않는 진술은 의미 있는 진술이 아니다. 이와 같이 만약 우리가 조사했던 얼마간의 명제들에 지식이 제한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만 알게 될 것이지, 실재하는 세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것인데 이는 우리의 정신 상태가 종종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합리주의는 우리들을 Platon이나 Descartes가 꿈꿨던 확실성에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세계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얻지 못하게 되는 상태에 놓아두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계신다. 안 계신다.” 논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시기 때문입니다. 계시면서도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실 뿐입니다. 그렇다고 전혀 하나님은 나타나시지 않으셨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조와 섭리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에녹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세계와 인간세상 안에 항상 계셨습니다. 지금도 계십니다.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도 활동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거의 죽어가고 있을 때에 호렙산에 나타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절체절명의 위기인 홍해 앞에 있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지구에 있다는 것으로도 믿을 수 있습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달이나 火星이나 木星이나, 金星이나 다른 별들도 똑같이 大氣圈이 있어야 합니다. 지구와 똑같은 대기권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하늘 전체가 대기에 가득 쌓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유독 우리들이 사는 지구에만 대기권이 있습니까? 약 1000km의 두께를 가진 대기권은 지구의 생명체가 사는 데 필요한 역할을 합니다. 태양이나 외계에서 지구로 들어오는 해로운 빛을 흡수합니다. 운석이 충돌하는 것을 막아 줍니다. 지구의 열의 일부를 흡수하여 지구를 보온합니다. 동식물이 호흡하는 데 필요한 기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이런 대기가 화성에는 없습니까? 왜 달에는 없으며 다른 별들에는 없습니까? 왜 유독 지구에만 이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예루살렘에 계십니까? 유대 땅에 계십니까? 이스라엘이 대대로 살던 유대 땅에만 하나님은 계십니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하늘아래 첫 번째 성소였던 예루살렘이 아니었습니다. 에스겔이 사로잡혀 간곳 바벨론이었습니다. 바벨론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곳은 이스라엘의 포로들의 노역 장소였습니다. 예루살렘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곳 고통의 장소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크고 화려해야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곳에 임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나타나십니까? 그를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에녹을 보거나(창5:21-24), 노아를 보면(창6:9-13)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에게 나타나십니다. 온유한 자 즉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자에게 나타나십니다(시25:9).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고자 애쓰는 사람에게 나타나십니다(잠23:19).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어디에 나타나십니까? 성도들이 고통 하는 곳에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람들이 고통 받는 것을 보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반드시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통의 장소에, 이삭이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산헤립에게 고통당할 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이 풍랑에 휩쓸릴 때에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가 잡힌 감옥에 주의 사자를 보내어 베드로를 구출해주셨습니다. 밧모섬에 있는 요한에게 하늘을 열어주셨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들으면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예루살렘교회처럼 웅장하지도 않습니다. 서울의 교회들처럼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웅장과 화려함과는 거리가 아주 먼 교회입니다. 마치 그발 강가의 에스겔이 있는 곳과 흡사합니다. 그래서 희망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이 심하게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또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고통의 현장에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의지할 뿐입니다.

 

그러나 모든 조건이 완전하게 구비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모두 허사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면,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의 역사하심을 간절히 바라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를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고통의 현장에 반드시 임하실 것을 믿으시고 그를 전심으로 찾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혼은 상한 심령입니다. 꺼져가는 심지입니다.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영혼입니다. 우리의 고통의 현장에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우는 현장에 하나님은 같이 계십니다. 누구도 나의 사정을 몰라 정말 답답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실망하지 말고 우리는 앞으로 전진 해야 합니다. 늘 우리 곁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잊지 않고 좌절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항상 백만장자와 동업한다는 생각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발 강가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에스겔에게 나타나셨습니까? 4절에서 14절을 읽어보면

 

4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5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6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7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 같이 빛나며 8그 사면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그 네 생물의 얼굴과 날개가 이러하니 9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10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11그 얼굴은 이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리웠으며 12신이 어느 편으로 가려면 그 생물들이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13또 생물의 모양은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서는 번개가 나며 14그 생물의 왕래가 번개 같이 빠르더라

 

오늘 두 번째로

 

II. 교회를 심판하시는 하나님(4-14)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본 모습이 무엇입니까? 지상에 없는 이상한 형체입니다. 네 생물을 보았습니다. 폭풍과 큰 구름이 밀려오는 속에 불이 번쩍번쩍했습니다. 빛이 사면에 비치고, 그 불 가운데에 벌겋게 달구어진 쇠 같은 것이 나타났습니다.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났습니다. 네 생물의 형상(겔1:5,8)을 에스겔이 보았는데, 기묘한 모습이었습니다. 사람의 형상이었습니다(5). 네 얼굴과 네 날개를 가졌습니다(6). 다리는 구부러지지 않았고 곧았습니다.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았습니다(7).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이 있었습니다(8). 날개들은 모두 연결되었습니다(9절). 네 생물들은 앞으로 곧게 갔습니다(9). 얼굴들은 사방을 바라보았습니다. 앞은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었습니다.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었으며, 왼쪽은 소의 얼굴이었습니다(10). 날개들은 둘씩 연결되었고, 둘로는 몸을 가렸습니다(11). 날개는 신이 가고자 하는 대로 곧게 갔습니다(12). 생물의 모양은 숯불과도 같고 횃불과도 같았는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13). 네 생물의 빠르기가 빛의 속도였습니다(14). 네 생물은 사도요한도 밧모섬에서 보았습니다(계4:8, 5:6,8,14, 6:1,6, 7:11, 14:3, 15:7, 19:4).

 

에스겔이 어떤 이상(ha;r]m'/mar’âh)을 보았는데,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을 상징으로 본 것입니다. 네 생물은 각 분야의 대표입니다. 사람의 얼굴은 사람의 대표입니다. 사자의 얼굴은 짐승의 대표입니다. 소의 얼굴은 가축의 대표요 독수리의 얼굴은 날짐승의 대표입니다. 사면으로 향하여 있는 것은 이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고자 하는 대로 그대로 가는 것은 절대순종을 말합니다. 생물의 왕래가 신속하다는 것은 신속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곧은 다리 송아지 발바닥 같다고 하는 것은 명령받은 일을 반드시 관철한다는 뜻입니다. 에스겔이 이러한 모습을 이상으로 본 것입니다. 포로로 끌려온 피곤한 노역장에서 영광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얼마나 에스겔의 마음이 흡족했겠습니까?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영광스런 하나님의 상징된 모습을 보면서도 에스겔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에스겔에게 보여진 이상은 유대를 심판하시는 모양이었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라고 했습니다. 이 모습이 유대에 심판을 가져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집은 모악산 남서쪽에서 비가 들어올 때 틀림없이 비가 옵니다. 모악산 남서쪽 말고 다른 쪽에 검은 구름이 아무리 많이 끼어도 비는 오지 않습니다. 모악산 남서쪽에서 들어와야 정확하게 비가 옵니다. 성경에서의 북방은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서 언급하는 쪽입니다. 이스라엘이 불순종할 때 북방의 나라를 동원해서 심판하셨습니다. 수리아, 앗수르, 바벨론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보이신 기묘한 이상은 유다에게 심판을 행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불순종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순종해야 사는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해야 사는 땅이었습니다. 불순종하면 쫓겨나야 할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800년간이나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때그때 먹어버렸습니다. 귀로 듣고 흘려버렸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도, 도무지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다는 망하게 되어 바벨론에 70년간 포로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거짓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살했습니다.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믿은 왕족들과, 일부 잘못된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바벨론에게 대적할 음모를 꾸몄습니다. 항상 거짓자들은 좋은 말만 합니다. ‘평강, 평강’만을 외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짓자들은 ‘평강’을 말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거짓 소망을 주었습니다. 왕족들과 귀족들이 듣기 좋은 말만 했습니다. 금방 바벨론에서 풀려날 것이라 했습니다. 이들은 거짓자들의 말만 믿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죄를 져서 70년이 지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는 표징을 에스겔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순종([m'v;/shâmaʽ)이란 듣고, 경청하여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신명기28:1-2절을 보면 “1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으면 복 받는다.”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순종하면”입니다. “지켜 행하면”입니다. 회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회원의 의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 땅에 들어가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그러나 그의 계명을 순종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이지, “예수를 믿으면”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에 우리들이 실패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순종을 첫째로 삼아야 합니다. 순종을 연기해서도 안 됩니다. 바로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의 모양만 내서도 안 됩니다.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할까 말까 망설여서도 안 됩니다. 바로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는 걸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순종해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들이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肯定과 믿음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肯定이란 事物의 一般的 關係를 나타내고 判斷의 對象에 積極的 態度를 取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을 肯定的思考로 보는 개념입니다. 참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듣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부정적인 말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짓선지자들은 평강의 하나님께서 평강을 말하라고 했어’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긍정적입니다. 누가 들어도 거짓선지자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따릅니다. 긍정적사고의 결과는 믿음과는 무관합니다.

율곡 이이는 삼사나 춘추관에서 관직을 거쳐 1581년 이후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잇달아 맡았습니다. 이이는 선조에게 많은 개혁안을 올렸습니다. 그중 만언봉사와 시무육조(任賢能, 養軍民, 足財用, 固번병, 비전마, 명교화)가 대표적입니다. 시무육조에 10만 양병설이 들어 있었습니다.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10만 명의 병사를 길러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당쟁 때문에 무시당합니다. 이이는 서인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동인의 반대로 10만양병설은 무시당해버렸습니다. 누가 봐도 이이의 사고는 부정적입니다. 긍정적사고 ‘좋게좋게 더 좋게’가 아닙니다. 결국에 임진왜란으로 인해서 조선은 일본에 대패합니다.

 

삶을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곳에 나타나십니까? 고통의 현장에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에게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자들에게 복을 주십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무조건 복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계속해서 순종하여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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