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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7.30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

갈라디아서1:1-5

사람의 몸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비밀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아주 정교하게 만드셨습니다. 인간의 세포 안에는 DNA(deoxyribonucleic acid)가 있는데, 이것이 유전자를 형성합니다. 이 DNA를 보유한 작은 세포를 유(U)라고 합니다. 이 DNA 2/1,0000,0000,0000(조)로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느냐가 정해집니다. 따라서 지구상의 63억 인구가 태어나는데 필요한 DNA의 필요량은 아스피린 두 알 정도면 족하다고 합니다. “U”내의 첫 DNA가 인간의 신체 청사진 1,000권 분량을 가지고 있어서 머리와 눈의 색깔, 코의 모양, 발의 길이 등등 인간신체의 모든 기능을 형성하는 모든 청사진을 다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세포의 생의 주기가 매 2,3년마다 끝마친다고 합니다. 따라서 매 2,3년마다 인체가 재생되고 있습니다. 뇌세포를 제외한 모든 세포는 7년이면 완전히 새것으로 바뀝니다. 하지만 뇌세포는 수백만 개로 불어나지만 일생동안 계속 살아남아서 옛 일을 계속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1-3절을 보면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새 생명을 얻은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I.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1-3절).

갈라디아는 현재 터키의 남북방향의 가운데에 있는 로마의 속주였습니다. 주전278년경 고울인과 켈트족은 그리스와 마케도냐와 트라키아를 침략하고 소아시아를 향해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갈라디아 지방을 점령하여 탁월하게 통치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로마의 고위층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로마는 그들을 피정복국가로 생각하지 않고 동맹국으로 대우하였습니다. 더욱이 고울인들은 아민타스4세의 통치기간에 그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로마는 아민타스4세가 죽자 이 왕국을 폐하고 로마령 “갈라디아 주”로 편입시켰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누구를 위해 써졌습니까? 갈라디아교회를 위해서 썼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의 한 교회만을 위해서 쓴 것이 아닙니다. 2절을 보면 “여러 교회”(tai'" ejkklhsivai")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어느 교회인가를 잘 모릅니다. 또한 갈라디아지역이 한 곳만 있으면 알 수 있는데 “갈라디아 주”라는 것을 보아서 넓은 지역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갈라디아는 남쪽 갈라디아와 북쪽 갈라디아로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교부들로부터 18세기까지 북 갈라디아로 보낸 서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앙키라, 타비움, 페시누스 지역입니다.

그러나 남갈라디아로 보낸 서신이라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의 여러 교회들에게 보내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북부갈라디아의 페시누스, 안키라, 타비움 등의 교회들인가? 남갈라디아의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움, 루스드라, 더베와 그 주변의 교회들인가를 우리는 모릅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인들이란 말을 했을 때 민족의 의미였는가? 정치적인 의미인가? 를 두고 약 200년을 걸쳐서 대립을 했지만 그 의견이 팽팽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남부갈라디아 지방에 보낸 편지라는 견해가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즉 1차전도여행 때 바나바와 함께 세웠던 교회로 비시디아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라는 교회들에 썼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왜 갈라디아서를 썼는가?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의 권위를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거짓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첫 번째 선교여행 후에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교회회의를 할 때에 예루살렘교회와 이방의 교회가 맞서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조정하여 이방인의 성도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지 못하게 하고,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을 먹지 못하게 하며 음행을 멀리 하면 되는 것”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행15:29).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가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사이에 유대주의적 거짓자들이 갈라디아 지방을 다니면서 바울은 사도가 아니며, 구원받기 위해서는 할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사도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르신 사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이 유대인으로 있을 때 그리스도인들의 체포영장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갔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강한 빛이 바울을 에워쌓았습니다. 바울은 길에 엎드러져서 들으니 하늘에서 자신을 불렀습니다. 바울이 누구냐고 묻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깜짝 놀랐습니다. 바울은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소문을 을었지만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하늘에서 그를 불러세웠기 때문입니다. 이후로 바울은 180도 회전하여 핍박자가 아니라 예수를 전하는 사도였습니다. 바울은 이후로 자신을 사도라 불렀습니다.

로마카톨릭의 ‘교황청 연감’(Annuario Pontificio)에 의하면 베드로부터 요셉 라칭거에 이르기까지 265명의 교황이라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사도직을 계승했다는 것입니다. 카톨릭교회교리문답서를 보면

교회는 “사도들 위에 서 있고” 또 “그리스도의 재림하시는 때까지 사도들에 의해 그리고 목회의 임무에 있어서의 사도들의 승계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가르침을 받고 거룩해지며 인도받기 때문에” 사도적이다. 사도들의 승계자들은 신부들인 바 그들은 교회의 최고 목자인 베드로의 승계자(교황)와 연합되어 있다.

고 했습니다. 따라서 로마카톨릭에 의하면 사도들이 열두 명이 아닙니다. 현재까지 276(11+265)명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앞으로 계속 늘어나야 됩니다. 로마카톨릭은 교황이 사도권을 계승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요셉 라칭거도 사도의 반열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이 가는 곳마다 평화의 사도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순교하자마자 바로 계승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말이 안 되는 것이 교황제가 590년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순교하고 약 500년이나 있다가 초대교황이 사도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라는 것은 예수님이 직접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바울까지입니다. 그 이후로는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지방에 돌아다니면서 거짓자들은 “바울은 2급사도도 안 된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 따라서 그 가르침을 좇으면 너희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들을 믿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교회인들이 이 잘못된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에게 사도직을 주신 분이 예수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면 충분한데도 그리스도를 살리신 성부하나님까지 자신을 사도로 삼았다고 갈라디아교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이 바라는 것이 구원은 힘들어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가 왜 권위가 있습니까? 힘들게 공부해야 합격하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이 고시가 100명이 시험을 쳐서 100명 모두 합격한다면 고시가 아닙니다. 오늘날 아나운서가 왜 인기가 있습니까? 경쟁률이 약 1000:1입니다. 대통령의 경쟁률은 얼마입니까? 몇 십 명이 아닙니다. 5000만:1입니다. 어디든지 들어가기가 힘들어야 사람들이 알아줍니다. 마찬가지로 구원받는 것도 힘들고 어려워야 알아줍니다. 날마다 목사들이 생쌀을 먹고, 모든 교회들을 다 부수어 버리고 초라한 행색으로 가르친다면 사람들이 오히려 많이 믿을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습니까?”라고 물으면 비스듬히 쳐다보며 “기도하라!, 40일 금식기도를 10번하라”든지, “누워서 자면 안 되고, 눈은 감고 있으되 졸아서는 안 된다. 그러기를 10년 해야 되느니라”하면 오히려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들어가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부활시킨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1절도 예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도 예수님이 태초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도, 이사야도 성경 어디서든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성경의 주인공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만 구원하심의 특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성자라는 사람들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아담으로 더럽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는 깨끗하고 냄새나지 않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태초이래로 모든 사람들은 다 냄새나는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깨끗지 못합니다. 공자도, 석가도, 소크라테스도, 마호멧도, 교황들도 모두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은 깨끗하다고 했는데 세제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평생 더러운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믿는다면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마치 35·6도를 오르내릴 때에 부패하는 음식쓰레기와 같습니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맡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단계를 받아서 어렵게 받느냐, 쉽게 받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구원하심의 특권을 받는 자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요한복음14:6절 을 보면 사람들을 구원하는 특권이 그리스도 예수께만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levgei aujtw'/ oJ jIhsou'": ejgwv eijmi hJ oJdo;" kai; hJ ajlhvqeia kai; hJ zwhv: oujdei;" e[rcetai pro;" to;n patevra eij mh; di j ejmou'.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아(요3:16), 죄 용서함을 받고(롬5:19),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요1:12). 이 구원은 사람의 혈통(ai|ma)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뜻(qevlhma)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ajllav) 하나님께로서 온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서 더러운 옷을 입었습니다. 죄는 삼중적인 소외를 갖게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를 당했습니다. 이웃으로부터 소외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자아로부터 소외를 당했습니다. 이 소외가 사망을 가져오고, 정신병을 가져오며, 불안과 고난을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많이 배우고 적게 배워서의 문제가 아니고 근본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 비참함에 하나님이 구원을 준비하시고 예수님이 그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사람들에게 자꾸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자들처럼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행위가 아니고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4절과 5절을 보면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오늘 두 번 째로

II. 우리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신 그리스도(4-5절).

항상 정치권의 단체장이나 대통령입후보자들이 나와서 하는 말은 이렇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을 섬기고자 합니다. 내가 이 나라를 섬기러 나왔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자신이 권력을 누려보려고 나온 것이지, 헌신자가 되려고 나온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헌신자가 되려면 나오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있는 사람들 모두 자격이 없습니다. 헌신이란 자신이 제물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를 보면 각종 헌신의 제물의 목록이 나와 있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이 외에 요제도 있고 관제도 있습니다. 번제는 자신의 몸을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소제는 자신이 가루가 되어서 기름과 유향과 함께 태워져야 합니다. 화목제는 잡혀서 피를 단에다 뿌리고 일부는 하나님께 드리고 일부는 제사장들이 먹었습니다. 속죄제물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불태움을 당했습니다. 속건제는 사람들에게 변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져야 했습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을 위해서 제물이 죽어야 했습니까? 사람들의 죄(@/[;, aJmartiva)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죄 때문에 죄 없는 동물들이 죽어야 했습니다.

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原罪와 失行罪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닫아버린 죄가 원죄입니다. 실행죄는 원죄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죄입니다. 실행죄는 생각의 영역에서 오는 죄로 증오와 시기가 있습니다. 말에서 오는 죄로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욕을 하는 죄입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나타나는 죄가 있습니다. 생각에서 말로, 그리고 행동으로 죄가 발달할수록 파괴력이 큽니다. 뿐만 아니라 이 죄가 사람들을 사망으로 가게하고 영원한 멸망인 지옥으로 가게 합니다. 이 죄에서 벗어나고자 많은 사람들이 길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헛길로 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가라지를 뿌리는 사람들같이 또한 그것을 딱 곧이듣고 믿는 갈라디아인들 같이 거짓길을 가는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kata; to; qevlhma tou' qeou'), 현재의 악한 시대에서, 우리를 빼내시기 위하여(o{pw" ejxevlhtai hJma'"), 즉 우리 죄들에서(tw'n aJmartiw'n hJmw'n) 빼내시기 위하여 자신의 몸이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헌신이 없이는 누구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헌신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죽음에까지 가면서까지 전했습니다(행14:19).

죄 많은 인간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죄 값을 갚아야 했습니다. 그 죄 값은 얼마나 될까요? 마태복음 18:24에 갚아야 할 죄 값이 있습니다. “결산할 때에 만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ajrxamevnou de; aujtou' sunaivrein, proshnevcqh aujtw'/ ei|" ojfeilevth" murivwn talavntwn.) 종이 갚아야 할 빚이 일만달란트였습니다. 이 금액은 엄청난 양의 돈이었습니다. 한 달란트는 약 6000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품삯입니다. 따라서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20년 노임입니다. 그러므로 10000달란트는 노동자의 20만년의 노임입니다. 당시 노예의 최고가가 2000데나리온이었습니다. 최고가로 해도 30000명의 노예 값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갚을 수 없는 돈이 일만달란트입니다. 세상의 어떤 재벌도 이 돈을 갚을 수 없습니다. 당시에 최고의 돈이었고 갚지 못할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돈을 예수님께서 갚아주신 것입니다. 우리 집에서만 갚아야 할 돈이 100만년을 걸쳐서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돈을 예수님께서 갚아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교도들의 수행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힌두교도의 거지수행, 불교도들의 거친 생활의 수행, 중세수도원시대의 생활들을 동경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종교인들이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의 생활을 사람들이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수행이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신비한 감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보통사람들과는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험하게 먹고 험하게 생활하면 어딘지 모르게 사람들이 대우를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데 그들은 했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하는 과정에 무엇인가 깨달았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대우를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자신의 심신은 단련할지 모르나 구원과는 거리가 멉니다. 수행을 했다고 해서 사람을 구원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레위기 16:6-10절을 보면 두 염소가 죽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6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집안을 위하여 속죄하고 7 또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8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9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10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인 아론은 자신과 자신의 집안을 위해서 먼저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두 마리의 염소를 회막문 앞에 준비했다가 제비를 뽑으라 하셨습니다. 하나는 여호와를 위하여, 하나는 아사셀을 위하여 뽑았습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뽑힌 염소는 속죄제(ha:F;j')로 드렸습니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무인지경의 광야에 버렸습니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무인지대의 광야에서 맹수에 의해 죽임을 당하든지, 굶어서 죽든지 했습니다. 이 의식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했습니다. 이스라엘의 250만-300만 명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습니다. 이들의 죄를 속죄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model 삼아서 이 세상을 구원코자 하셨습니다. 매년마다 드려지는 속죄양으로서가 아니라 단번에 드리는 제물을 원하셨습니다. 이 제물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아사셀염소이고, 속죄염소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속죄염소가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하였듯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누구도 예수그리스도의 헌신을 흉내 내지 못합니다. 행위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수행이 우리들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행위나 수행은 자기하나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헌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는 길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믿고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나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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