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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1.05
열정이 없었던 라오디게아교회
요한계시록3:14-22 2009.11.29
사람들이 어떤 일들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 손해를 보는 예가 많습니다. 특히 더운 열대지방 사람들은 일을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산에 나가기만 하면 먹을 것이 있기 때문에, 먹을 것을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잘살지 못하는 나라가 많습니다. 이런 나라들을 추운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 가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거의 잠도 자지 않고 일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이들이 가서 누리게 됩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이와 비슷한 교회가 있습니다. 14절에서 19절을 보면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성경을 기록한지 2000년이 지난 오늘 읽기만 해도 라오디게아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오늘 첫 번째로
I. 열정을 가지라고 하신 예수님(14-19).
착하다고 하는 것들에 우리가 점수를 많이 줍니다. 왜냐하면 사회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물질이 많은 것을 사람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 착하게 행동하면 안 됩니다. 또한 너무나 물질이 많으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6ㆍ25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인민군들이 집집마다 사람들을 찾으려고 뒤지고 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밭에 쌓아놓은 짚더미에 숨어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그 집에 가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민군들에게 착하게 대한다고 숨은 곳을 알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는 모른 체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물질을 놓고서 많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물질을 가져도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은 점은 무엇입니까? 물질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도 강과 해안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상업이 번창했습니다. 주전133년에 로마의 순회재판소가 설치됨으로 해서 전략적으로, 행정상으로, 상업적으로 번창했습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의 은행을 예치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라오디게아는 유난히도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주후 17년에 소아시아에 대규모 지진이 있었습니다. 사데와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를 강타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는 이 도시에 복구비를 어느 정도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60년에 또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로마황궁은 복구비를 전액 지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도 능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라오디게아사람들은 너무나 부자라 사람이나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편안하다보니 신앙이 미지근했습니다. 얼마나 미지근했습니까? 역겨울 정도로 미지근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다른 것들은 모두 있었는데 물 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돈 많은 라오디게아는 물 부족을 위해서 수도관을 통해 다른 도시로부터 물을 끌어왔습니다. 남쪽으로 16km나 되는 골로새지방에서 찬물을 끌어왔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로 오는 동안에 물이 역겹게 미지근하였습니다. 북쪽으로 11km 지점에 히에라폴리스에서 뜨거운 온천물을 끌어왔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에 오는 동안에 역시 역겨울 만큼 미지근한 물이 되었습니다. 물은 차갑든지 뜨겁든지 해야 마실 수 있습니다. 미지근하면 마실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교회에 말씀하시기를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한 이유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열심을 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14절을 보면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즉 제대로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부러운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믿음을 채근하십니다. ‘열심을 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열정을 가지라’(zhleuvw/젤류오)는 말로서 조금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똑같은 단어를 사도행전7:9에서는 “시기하다”로 썼습니다. 남을 시기하듯이 신앙생활에 열정을 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4에서는 “투기한다”로 ‘젤류오’를 썼습니다. 남을 투기하듯이 신앙에 열정을 내라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어떤 열정을 가져야 합니까? 라오디게아교회는 세상의 부요함에 잔뜩 빠져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부자라고 했지만, 주님은 최고로 가난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양모와 의류사업으로 좋은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벌거벗었다고 했습니다. 안약의 공장이 있었던 그들은 좋은 눈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소경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신앙의 열정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돈이 많다고 했지만, 너희 영혼은 무척 가난하다고 했습니다. 너희영혼은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너희영혼의 눈은 어두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먼저 너희들이 가난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치지 않으면 토해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들은 부요해보지 않아서 부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부자가 되면 신앙생활에 가장 큰 장애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이 부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5:2에서 말씀하시기를 심령이 가난한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죄를 깨닫고 절망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물질이 부요하면 영적으로도 부요한줄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집에 살고 있으면, 천국으로 이어지는 줄 알고 있습니다. 좀 착하게 살면, 천국으로 이어지는 줄 압니다. 몸이 편안하면 신앙생활이 둔해집니다. 먹고살기가 편안해지면, 신앙생활이 게을러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열정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찬물과 뜨거운 물은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지근한 물은 마시지 못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의 흐리멍텅함은 주님으로부터 거절당하게 됩니다. ‘토해버리리라’는 뜻은 극도로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미지근한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그의 아버지 앞에서 그들을 부인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열정은 모닥불과 같습니다. 계속해서 열정을 지펴야 합니다. 제자들은 세상을 열정으로 뒤엎었습니다. 무한한 신앙의 열정이 있으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활할 타오릅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활활 타오릅시다.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합시다. 우리가 반드시 열정적인 신앙을 소유하십시다.
오늘 두 번째로 19절에서 22절을 읽어봅시다.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II. 회개하라고 하신 예수님(19-22).
사람들은 종교를 생각할 때 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믿는 종교마다, 가장 좋은 곳에 가게 하는 것이 ‘착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착해야 좋은 곳에 갈수 있지, 착하지 않으면 갈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종교들은 이 말에 긍정할지라도, 우리들은 ‘아니요’입니다. 만일에 그렇게 된다면 기독교의 진리는 헝클어져 버립니다. 성도들은 어떤 종교보다 착해야 하고, 윤리적이어야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기독교의 마크가 윤리라고 정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칸트(Immanuel Kant)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그리고 슐라이어마흐(Friedrich Schleiemacher)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도덕적 경험 속에 내재 하시고’ ‘윤리적인 문화 안에 내재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삶에서 종교적 부분을 하나의 특별한 영역으로 분리하려 했습니다. Kant는 ‘도덕’, Hegel은 ‘지성’, Schleiemacher는 ‘직관’이었습니다. 즉 이것이 없으면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후로 사람들은 기독교를 성경의 의도와는 다르게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모범을 보이려고 애를 썼습니다. 정확한 시간에 산책을 하고 사람들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후로 이들 신학자들로 인해서 기독교가 점점 세속화하는데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를 성경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두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가 시대에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의 신학이 그 자신을 잃지 않는 가운데 과학적, 철학적 경향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철학자들이 말하는 사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데카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코기토 에르고 숨’(Cōgitō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뒤엎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심할 이유가 있는 모든 사물의 존재를 의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러면 자신을 확고하게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의심할 수 있어도 그것들을 의심하고 있는 나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존재해야 하나님도 존재하는 것이지, 내가 없이는 하나님도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 곧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입니다. 이 말의 뜻을 알면 무서운 말입니다.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맞지 않으면 성경이라도 믿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성경의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사람들이 가진 것이 많으면 성경이 시시해집니다. 돈을 많이 가지거나 지식을 많이 가지거나 하면, 갑자기 성경이 시시해집니다. 특히 돈이 풍성하면 성경이 시시해집니다. 왜냐하면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돈이 많아지더라도 이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책망 받은 사항이 무엇입니까?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몸도 착해, 마음도 착해, 물질도 착해, 더 착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서 자신만만했습니다. 왜 이렇게 생각합니까? 넘어져도 스스로 일어날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으키려고 손을 내밀자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 스스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실 때, 이들의 말이 모두 틀렸습니다. 그들의 실상은 모든 것들이 부족했습니다. “비참했습니다.” “가련했습니다.” “궁핍했습니다.” “그들은 소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유하게 할 금 곧 신앙을 소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입을 흰 옷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증거를 사라고 했습니다. 눈을 뜨게 하는 안약 즉하나님의 용서함을 바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빨리 회개하고 문을 열어주기를 바라셨습니다. 너희들이 회개하고 문밖에 나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너희들이 산다는 것입니다. 20절과 22절을 보면
20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Holman Hunt의 ‘세상의 빛 되신 그리스도’(The Light of the World/1904작/1827- 1910)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헌트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가시면류관을 쓰고 인간의 마음을 상징하는 문밖에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처음 전시되었을 때 많은 비평가들이 작품평을 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헌트에게 말했습니다. ‘정말 걸작입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한 가지 잘못된 데가 있습니다. 헌트 당신은 문에 손잡이를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걸 당신이 빠트린 것입니다.’ 헌트는 ‘그건 실수가 아닙니다. 손잡이는 문 안쪽에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사람들이 일이 술술 잘 풀려갈 때 하나님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도저히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몰려올 때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성공했다는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야말로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보시기에 성공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보시기에 성공한 사람이 정녕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클레이의 예화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살았는데 이기주의자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었는데 그만 죽었습니다. 이 부자도 예수는 믿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천사의 안내로 자기가 거할 곳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가고 있는 중에 여러 아름다운 저택을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멸시하고 별로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 저 정도니 나는 어떨까?’하고 잔뜩 기대하고서 자신이 거할 집을 안내받았는데 기가 막혔습니다. 정말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이의제기를 했답니다. 그러자 그 앞에 그 여인의 행적이 자동으로 떴습니다. 우리는 네가 보낸 물질로 네 집을 지었단다.
우리가 현 세상에서 물질로 생활을 부유하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동시에 영혼을 메마르게 하기는 쉬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너무나 쉽게 생각합니다. 몸은 아끼면서 영혼은 아끼지 않습니다. 몸을 위해서는 초고층 빌딩도 아깝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사하라사막에 있는 줄을 모릅니다. 몸을 위해서는 최고급 음식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위해서는 차가운 물 한 컵도 생각지 않습니다. 자신을 자랑하는 여인이 자신의 영혼을 과연 생각할까요? 그 아름다운 몸이 무덤에 들어가 한줌 흙으로 변한다는 것을 생각할까요? 만일에 그것을 생각한다면, 이후의 삶들이 숙연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열정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기도도 열정적으로 하고, 말씀도 열정적으로 들으며, 신앙생활도 열정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음을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후에 마음의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이 먹자는 말씀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하루 세끼를 우리와 같이 먹었습니다. 아침은 간단히 포도주에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었다고 합니다. 점심은 집에서 먹지 않고 있는 곳에서 간단히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은 다릅니다. 그 날 중에 가장 잘 차려먹습니다. 일도 끝났습니다. 시간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이야기도 하며 식사시간을 보냅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먹을 것이다’할 때 저녁식사시간(deipnevw)을 말합니다.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그리고 지난 것들을 회개하면, 그리고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면, 우리와 함께 주님께서 같이 오래오래 먹겠다는 것입니다. 열정적인 신앙, 회개하는 신앙 우리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