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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6.11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

로마서1:1-7

Martin Luther는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그(Wittenberg) 성당 정문에 95개조 항의문을 붙이자 로마교황은 그의 견해를 공식으로 취소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Luther는 교황이 보낸 교서들을 모두 태워버렸습니다. 그러자 교황은 1521년 1월 3일에 Luther를 공식적으로 파문과 출교를 선포했습니다. 교황청에서 “파문”(excommunĭcátus)이란 금세와 내세에서의 영원한 사형선고를 말합니다. 교황의 권세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Luther는 3개의 논문을 냈습니다. ‘독일 크리스챤 귀족에게 보내는 글, 교회의 바벨론 감금, 크리스챤의 자유’입니다. 이중 독일 ‘크리스챤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 Luther는 Roman-Catholic이 자기들 주위에 세 가지 담을 쌓아놓고 방어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로, 로마교도들은 속권에 의하여 억압을 당하면 법령들을 만들어 속권은 그들에 대하여 아무 지배권도 없으며 오히려 영적인 권능이 속권 위에 있다고 말해왔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로마교도들을 성서에 의거하여 책망하려고 하면 그들은 교황 외에는 아무도 성서를 해석할 수 없다고 하여 이론을 제기한다고 했습니다. 셋째로, 로마교도들이 공의회에 의하여 위협을 받으면 교황 외에는 아무도 공의회를 소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Roman-Catholic은 이 세 가지 담의 안전한 요새 속에서 온갖 비행을 저지르고 악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Roman-Catholic은 복음을 1000년 동안이나 가두고 밖에 나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더는 그 안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가 그들의 입에 의해서 나왔습니다. 1-4절을 보면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 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I. 우리들을 위해 약속된 복음(1-4절)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복된 소리가 무엇일까요? 제대를 앞둔 형제에게 가장 좋은 소리는 제대특명입니다. 첫 휴가를 못나온 사람에게 좋은 소리는 휴가특명입니다. 입시를 앞둔 학생들에게는 대학입시든지 고등학교 입시에 넉넉하게 합격하는 것이 좋은 소리입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사람들은 괜찮은 직장에 좋은 점수로 합격한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사람들마다 좋은 소리는 평소의 제일 큰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좋은 소리일 것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성도들이 모두 넉넉한 생활을 했으면 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소식들은 한시적입니다. 오늘 좋은 소식일지 몰라도 얼마가지 못합니다. 길게 가야 우리세대에서 끝나는 좋은 소식들입니다. 영원하지 못합니다. 세대를 불문하고, 영원히 좋은 소식이어야 진짜로 기쁜 소식입니다.

1절을 보면 복음(eujaggevlion)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복음은 ‘전하는 자’(eujavggelo")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전쟁의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정치적으로 자국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람을 ‘복음을 가져온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도 세상적인 소식입니다. 진정한 복음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셨던 일이 진정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이 복음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proephggeivlato) 것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 아들의 이력사항은 인간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아들이 바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jIhsou' Cristou' tou' kurivou hJmw'n)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복음은 곧 예수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eij" eujaggevlion qeou') 선택함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곧 자신은 예수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역시 자신이 종이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종으로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성경에 미리 약속된 복음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택함을 받았다고 로마에 있는 교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전 복음이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Calvin은 그리스도안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옮기는 것은 복음에서 이탈했다고 주석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예수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태초에 하나님(!yhi=la>)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도 예수님이 함께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2:21에서도 “주예수(tou' kurivou jIhsou')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에서도 예수님입니다. 신약을 여는 마태복음에서도 예수님으로 성경을 열고 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전혀 다른 교훈을 전했다고 한다면 성경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전의 성경의 권위는 상실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복음의 신빙성을 역사성을 들어서 확립시키고 있습니다. 전혀 새로운 교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세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약속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복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오래된 것은 대체적으로 신빙성이 없습니다. 교훈을 주기 위해 이야기로 전락되어 내려오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복음에 신빙성을 확증하기 위해서 선지자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곰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굴속에서 마늘과 쑥으로만 100일을 견딘 곰이 여자가 되어서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 내용이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여러 책에 실려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확실하게 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신화라고 합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확증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은 신화적인 인물이 아니고 실재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또한 사도바울은 그 역사성을 더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윗의 후손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도바울이 의도적으로 말했습니다. 다윗에게 주어졌던 약속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메시야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던 것은 유대인들에게 일반화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어떠한 약속을 하셨습니까? 삼하 7:12-16을 보면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다윗의 평생소원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나단에게 그 의향을 묻습니다. 나단은 좋아서 바로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전건축은 아들인 솔로몬이 지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대신 그의 왕권을 견고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무엘하 7장은 하나님의 아들과 다윗의 아들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들이 이스라엘 왕위에 영원히 앉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4절의 다윗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은 “메시야가 올 때 완성 되었습니다” 이 메시야가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다윗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복음이신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부활해서 하늘에 오른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부활했다는 것은 영혼과 육신이 부활했다는 말입니다. 육신은 그대로 있고, 영혼만 부활한 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육신과 영혼이 함께 부활해야 하나님의 원하시는 부활입니다. 역사적으로 육신과 영혼이 함께 천국으로 올라간 사람은 에녹과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입니다. 에녹과 엘리야는 이 세상에서 살다가 들림을 받아 천국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었었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제대로 된 복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것은 유사하지만 복음에 너무나 많은 것들을 섞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인지 쓰레기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100% 복음이어야 하는데 90% 이상이 온갖 것을 섞었습니다. 어떤 것은 아예 복음의 근처에도 오지 못합니다. 어떤 것은 아주 까마득합니다. 이 복음이 우리들을 위해서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이미 복음 안으로 진입한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면 그 안에서 제공되는 음식을 돈을 내지 않습니다. stewardess가 음료와 다과를 가져오면 먹고 싶으면 요구만 하면 됩니다. 이미 그 돈은 항공료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돈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복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복음 안에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 복음은 우리들을 위해 성경에 오래전에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이 우리를 위해 약속했습니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성경에 약속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확증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 안으로 들어오면 안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이신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5절에서 7절을 보면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있기를 원하노라)

II. 우리들을 부르시는 복음(5-7절)

John Calvin은 1535년 바젤에서 그의 기독교 강요를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일 년 남짓 있다가 박해를 피해 스트라스부르크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프란시스I세와 카알5세 사이의 전쟁 때문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없이 돌아서 가려고 제네바에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 소식을 제네바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랑스의 개혁자 파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Calvin더러 제네바에서 같이 개혁을 하자고 했습니다. Calvin이 않는다고 하자 파렐은 Calvin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Calvi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남다른 열심이 불타던 파렐은 나를 붙잡기 위하여 정신이 없었다. 그는 내가 조용히 공부하는데 몰두하고 싶다고 말하자 자기의 간청이 허사가 된 줄 알고 만일 자기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앞길을 저주하실 것이며 내가 하려고 하는 공부도 순탄하지 못할 것이며, 내가 하려고 하는 공부도 순탄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너무도 겁에 질려 계획했던 여행을 포기했다. 그러나 나는 천성적으로 너무나 수줍어하는 성격이어서 어떤 특별한 직무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다.

이때 칼빈은 27세의 나이로 제네바에 발을 디디고 파렐과 함께 제네바를 개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Calvin으로 하여금 유럽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klhto;" ajpovstolo")고 했습니다. 6절에는 로마의 교회들에게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다(uJmei'" klhtoi)고 했습니다. 7절에도 로마의 교회들에게 성도로 부르심을 입었다(klhtoi'" aJgivoi")고 했습니다.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교회들의 사람들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과 로마의 성도들과의 부르심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사도의 직분을 주었습니다. “사도”(ajpovstolo")라는 직분은 “임무를 맡겨 파송된 자”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아서 전하는 사명을 바울은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믿어 순종케“(eij" uJpakoh;n pivstew")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기까지 이방은 순종치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믿어 순종케 하는 사명을 바울이 받은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우리에게 있어서 항상 같이 갑니다. 마치 우리 몸에 눈과 같습니다. 두 눈 중에서 한쪽 눈만 사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운전할 때에 한쪽 눈만 가지고 운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거리가 측정이 되지 않습니다. 두 눈을 다 사용해야 거리측정이 됩니다. 또한 운전할 때 백미러(back-mirror)만 가지고 사용할 수 없습니다. 룸미러(room-mirror)를 함께 사용해야 합니다. back-mirror는 뒷 차의 크기와 거리가 얼마인지 모릅니다. 실제보다 작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room-mirror는 실제의 크기와 거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운전할 때 back-mirror와 room-mirror를 함께 사용해야 합니다.

믿음과 순종이 그렇습니다. 믿음 없이 순종 없고, 순종 없이 믿음 없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항상 함께 합니다. 순종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믿음으로부터 솟아납니다. 순종하지 않고는 진실 된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또한 믿음 없이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순종하지 못한 결과 광야에서 약 300만 명이 죽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오직 믿음과 순종하는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믿음으로 순종하지 못함으로 400년 만에 가나안에서 쫓겨났습니다. 쫓겨날 뿐만 아니라 혹독한 노예생활로 전락했습니다. 70년 만에 돌아와서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철 이빨 같은 로마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케 하기 위함입니다. 모세, 여호수아, 사도들, 바울 등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어 순종케 하는 직무를 주시고자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로마교회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부르십니다(유효한 부르심). 이때 우리들이 믿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 삼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룩하다 하십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케 하시고 우리는 인내하면서 그를 따릅니다. 최종적으로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 기원이 하늘에 있습니다(히3:1). 살아계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르심의 특징이 거룩합니다(딤후1:9). 한 번 불렀으면 변경할 수 없습니다(롬11:29). 부르심의 목적지가 하늘을 향해 있습니다(빌3:14).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선택받은 죄인들입니다(고전1:26-30). 그런데 그리스도와의 교제(고전1:9)로 부르십니다.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하신 빛에 들어가게 하십니다(벧전2:9). 우리를 불러 그의 나라와 영광에 들어가게 하십니다(살전2:12). 마침내는 어린양의 종말론적인 혼인잔치를 베푸십니다(계19:9). 그것이 곧 영생입니다(딤전6:12).

하나님의 그 부르심으로 우리는 자유함을 얻습니다(갈5:13). 믿을 수 있는 소망을 가집니다(엡4:4). 죄인인데 거룩하다고 하십니다(살전4:7). 복을 위해 고난을 참으면 그 댓가를 지불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라갑니다(벧전2:21). 그리고 불화한 이 세상에서 화평한 사회관계로 만드십니다(고전7:15).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돌보거나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귀를 기울이거나 막을 수도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던가. 응답하지 않던가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심판과 상급이 있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면 하나님의 잔치상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으면 심판하는 단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지는 새로운 생애가 시작되는 提議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앞에 두면 두 가지 선택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은 우리를 위해서 태초 전부터 약속되었습니다. 그 복음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 복음에 응답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부르심에 믿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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