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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자를 쓰시는 하나님
사사기6:11-15/2025.4.27
사람들은 큰(great) 것이라는 데에 묘한 매력을 느낍니다. 그래서 ‘大’자라는 말을 이름이나 상호 앞에 넣습니다. 대한민국, 대일본, 대왕, 대예배, 대인, 대 교단, 큰 교회 등 큰 대자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동부에서 서부까지 비행기로 5시간 이상을 가는 미국이나 하루 종일 기차로 달리고 있어도, 미처 성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중국 사람들이 볼 때 가관이라 할 것입니다. 조그마한 나라에서 그것도 절반 나누어진, 거기에 동서로 분열 되다시피한 이 나라를 본다면, 대자를 쓰는 것은 겸연쩍은 일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또한 사람들은 나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을 만나면, 왠지 모르게 기가 죽기도 합니다. 물론 禮儀 면에서는 그렇게 해야겠지만, 스스로를 너무나 비하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러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천지에 자신이 제일 못났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전란 속에서도 나서지 못했습니다. 전란에 처한 이스라엘을 누군가 나서서 구원하기는 해야 하는데,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11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2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13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14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15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하나님의 일은 누가 합니까? 돈 많은 재벌들이 합니까? 수완이 좋다고 하는 정치인들이 합니까? 소위 지성인들이라고 하는 elite들이 합니까? 국가의 모든 걸 책임진다고 하는 행정부에서 합니까? 아닙니다. 이들 중 소수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편에 대부분 서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까? elite들입니까? 지성인들입니까? 잘나가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아주 작은 자들, 자신이 한참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을 더러 부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가리지 않으시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부르시기 전에 한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현 상황을 말씀하셨습니다.
사사기6:7-10 7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은고로 8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9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10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 너희의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에게 고통받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기에 받는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디안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압박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애굽 사람들의 손에서 그리고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모든 나라들의 손에서 거뜬히 구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도무지 말씀을 듣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 가운데 우리는 사사기 시대 기드온을 만나야 합니다.
흔히 기드온의 300용사라고 곧잘 말합니다. 어린이 주일학교 때부터 기드온과 300명은 無敵의 용사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그런가? 기드온과 300명이 Roma시대 때 갈리아 지방을 평정한 시저와 그의 군대만큼 용사였는가? 우리가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은 저로서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11절을 보면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들이 무서워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있는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는 것을 접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이러한 행동은 용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Samson삼손이나 Spartacus스파르타쿠스, 그리고 Alexander알렉산더 등의 용맹과 기드온은 전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의 ‘미’자 소리만 들어도 깜짝깜짝 놀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미’자만 들어도 간이 콩알만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바로 봐야 합니다. 기드온이 여호와를 만나기 전까지 아주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큰 용사여!”(lyIj;h, r/BGI/깁보르 해아일)라고 했습니다. 바로 뒤이어 *M][i hw:hy]/예흐바(아도나이)이므카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했습니다. 기드온은 기가 막혔습니다.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대답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말씀 잘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과거 출애굽 때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적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미디안에게 엄청난 압제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닙니까? 이제 우리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미디안의 손에 붙이신 것 아닙니까? 이제 우리는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기드온은 계속 여호와의 사자에게 들이댑니다.
그런데 14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로 바뀝니다. 12절에서는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와 대화를 했습니다.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14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14절을 보면 바로 여호와로 바뀝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기를 ‘너는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보낸다고 하십니다. 기드온은 더 기가 막혔습니다. ‘내가 무엇인데’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지파, 그중에서도 가장 약한 사람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합니다. 그래서 아예 그런 말씀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할 말씀이 따로 있지, 어떻게 그런 말씀을 쉽게 하십니까? 기드온의 이 말은 절대 겸손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약하디약한 사람이었습니다. 36절에서 40절을 보면,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큰 전쟁이 터져서 무서워 깊이 숨어있는 자에게 미디안과 전쟁을 하라니 말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기드온의 생각은 넓은 gap(간격)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설교가 도덕적인 설교, 윤리적인 설교입니다. 들으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도덕과 윤리는 세상 사람들도, 다른 종교에서도 전유물로 삼고 있는 항목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修養의 종교가 아닙니다. 修行의 종교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展示宗敎는 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살리며,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만들어 낸 어떤 doctrine교리을 퍼뜨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의지해서 앞으로 나아가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구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람들,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 성령님께 속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소유하신 분이 삼위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시시한 사람들의 윤리적인 doctrine을 끌어다 쓰지 않습니다. 만일에 그렇게 할 경우 귀만 즐겁습니다. 그리고 自家撞着자가당착에 빠져버립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데 지금 교회들이 하는 꼬라지를 보십시오. 범죄를 넘어서 무법천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척결해야 한다고 광장에서 떠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역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교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해석되어질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그 말씀을 믿을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시오. 저렇게 사시요’라는 윤리적인 설교는 전혀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끼어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공자와 맹자와 철학자들의 角逐戰場각축전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모토로 삼아야 합니다. 그 말씀을 우리의 기본으로, 그 말씀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가야 합니다. 사람의 경영은 매우 뻔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권을 잡자마자 정적을 제가하려다가 사형을 당할만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권을 잡자마자 다른 나라에 경제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관세25%, 50%는 죽이자는 것이지, 살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경영은 이토록 뻔합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을 돌아볼 때, 너무나 무력하다고 생각합니다. 출신성분 따지니까 더 무력합니다. 지금 상황을 보면 더 무력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만 무력하냐?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나이에, 나 같은 것이 뭐, 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정없이 깎아버립니다. 그리고는 어려워도 아예 일어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일어날 힘이 있는데도 일어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11절과 12절의 여호와의 사자가 14절을 보면 여호와로 바뀝니다. 이분이 도대체 누구십니까? 다니엘의 세 친구가 용광로에 들어갔을 때, 거기 계신 분, 하갈이 사라의 학대에 쫓겨나 물이 없어 금방 죽으려고 할 때 나타나신 분, 삼손의 부모에게 나타나신 분, 그분이 누구십니까?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구약시대 때 수시로 이 땅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성자이신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함께 하시겠다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제이위이신 창조주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미국을 우방으로 두려고 여러 나라에서 무한 애를 쓰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댈만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우산 밑에 있으면 비를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께 속하기를 원합니까?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장군은 함경도에 있다가 이일의 죄를 뒤집어쓰고 백의종군하였습니다. 선조는 그것을 알고도 신립 장군 때문에 묵과했습니다. 그러나 1591년 2월 이순신을 종6품 정읍현감(현재5급)에 제수하였습니다. 곧이어 珍島郡守진도군수로 승진시켰습니다. 이순신이 부임지에 부임하기도 전에 종3품(현 이사관)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습니다. 이어 선조는 이순신이 가리포에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정3품 전라좌수사(현 중장)에 전임하게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지만, 선조는 굳건하게 이순신을 밀어붙여 전라좌수사에 임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용사여! 라고 하시면 큰 용사입니다. 우리가 비록 모자라고 부족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할 만합니다.
성도여러분! 오늘의 우리들은 우리의 약한 생각들을 접어야 합니다. 기드온이 전쟁에서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전쟁 소집 나팔을 불었을 때 3,2000명이 모였습니다. 미디안은 그 수가 엄청 많았습니다. 메뚜기 떼 같다고 했습니다. 8장10절을 보면 13,5000명이 넘었습니다. 따라서 3,2000명:13,5000명은 이미 끝난 전쟁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굳이 물어보십니다. 몇 명이냐? 3,2000명입니다. 뭐 몇 명? 3,2000명! 주님께서 깜짝 놀라십니다. 기드온은 생각하기를 그러면 그렇지! 아마도 군사를 더 오게 하시려나 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현재 인원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를 핑계를 대서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집으로 돌아간 사람이 2,2000명입니다. 이제 1,0000:13,5000명입니다. 이제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또 물으십니다. 이번에는 물가로 가서 사람을 고릅니다. 거기서 선택된 자들이 300명입니다. 나머지 9700명은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기드온이 어떻게 생각한지는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황당했을 것입니다. 3,2000명에 1,0000명, 1,0000명에서 300명으로 줄어들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뻔합니다. 300:13,5000(1:450)명 생각만 해도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승리합니까? 13,5000명의 정예병들이 300명의 민병들에게 패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쟁(War of YHWH)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전쟁이고, 우리들의 전쟁입니다.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전쟁이 우리들의 전쟁입니다. 숫자상으로 볼 때 전혀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전쟁은 사람이 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이 세상은 무엇을 따지기 좋아합니다. 학벌, 지연, 실력, 돈, 외모, 스펙이 탁월해야 좋은 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약하고, 어리석고, 부족해야 ‘사람 괜찮구나!’ 하십니다. 좀 모자란 사람이면 ‘쓸 만한 사람이구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의 ‘다만 신앙’을 보십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 그것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좀 약하다 하시는 분, 희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가슴이 두 근반 세 근반 하는 사람들이 혹 있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은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전쟁이 아니고, 교회의 전쟁이 아니고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망각하고 우리가 덤빌 때 큰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습니까?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목사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회개가 없습니다. 회개가 없다보니 교회에 힘이 없습니다. 교회에 웬 조직이 그렇게 많습니까? 하나님께서는 3,2000명에서 1,0000명으로, 1,0000명에서 300명으로 줄이셨습니다. 조직이 많으면 사람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조직이 없으면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자, 간이 콩알만 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기드온의 300용사라고 할 때 하나님 자리는 없습니다. 300용사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 같이 그런 사람들을 썼습니다. 우리가 우선해서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입니다. [m'v;/shāmaʽ/사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했는지 짚어봐야 합니다. 우리는 곧잘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 혹시 내 뜻대로 살았는지 짚어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할 때 나타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명기28:1-14절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의 복들입니다. 그러나 28:15-68절은 순종하지 않았을 때 받는 저주들입니다.
사람들의 속성은 내 의무와 책임은 다하지 않으면서도 내게 유익될 것은 바로 챙기려 합니다. 신명기28:1-14절은 나에게 맞지만, 15-68절은 나와 관계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책임은 뒷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은 악착같이 받아내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대로 해주시지 않습니다. ‘네가 내 말을 청종하라’ ‘너희가 내 말에 순종하라’ ‘그리하면 너희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힘이 없어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고, 사람들이 순종하지 않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기드온의 기적만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모리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미디안사람들이 쳐들어온 이유가 자명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강조점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곤혹스러운 일들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에 정체성을 부여하셨습니다. 나라를 형성케 하시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철저하게 열 재앙을 통해서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가나안의 신들보다 우월하신 분임을 입증하셨습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는 말씀은 이스라엘과의 언약관계를 확인하는 표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이 모든 것을 저버린다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과 억압은 레위기26장과 신명기28장에 나타나는 언약의 저주의 내용으로 그들이 ‘언약 파기’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기드온이 어떻게 적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했는가만 바라봐선 안 됩니다. 선지자 메시지에 초점을 둬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향한 배교와 불순종을 지적하는데 있습니다. 여호와만이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고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Closing 선지자의 메시지가 끝나자 ‘여호와의 사자’가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상수리나무 아래 앉았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가나안 신들을 예배하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음으로 가나안의 신들을 우습게 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상수리나무아래에서 바알과 아스다롯을 흠모하면서 숭배했습니다. 그런데 상수리나무에 앉음으로 가나안의 신들은 존재하지 않음을 그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만일에 바알과 아스다롯이 살아 있는 신이라면 여호와의 사자와 전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만들어 낸 신, 깎아서 만들고 부어서 만든 것들이기 때문에 허상입니다. 우상은 허상입니다. 그런대도 사람들은 우상에 열을 올립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들에게 우상에 빠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우상에 빠집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목회자가 세속화에 깊이 빠져 있는 것 우상입니다. Martin Luther는 우상숭배는 자기의 의로움과 업적과 장점들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들은 우리 역시 우상숭배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선하지 않으면 우상숭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이 없고 작을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묻는 이스라엘 (0) | 201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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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1-7
설교 작성을 하기 위해서 어떤 단어를 사용하고자 할 때 사전을 종종 찾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상식과 사전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이런 뜻이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전을 찾아보면 전혀 다른 뜻이었을 때, ‘사전을 찾기를 잘 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묻는다는 것은 실수를 줄이기 위한 가장 좋은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직장인들은 결재권을 가진 자에게 결재를 얻은 후에 처리해야 합니다. 건축을 하는 사람들이 설계대로 짓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건축을 할 때에는 그 건물은 얼마 있지 않아 부숴야 합니다. 설계자가 설계한 것이 의심스러울 때는 설계자에게 물어서 시공해야 합니다. 건축자 마음대로 철근을 이렇게 많이 넣을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시공한다면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항상 물어서 일들을 원만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물론 일에 자신이 있어서 일일이 묻지 않아도 될 사항들은 묻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일이라든지 본인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일들은 반드시 물어서 처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괜찮겠지, 하는 자신만의 생각으로 일을 처리했다가 낭패를 본 사건들이 대단히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반드시 확인을 하고 모르는 것들은 물어서 처리해야 될 줄로 생각합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덥석 일을 처리하다가는 큰 낭패를 당하기 일수이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사사기를 여는 말씀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입니다. 상당히 암울함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느 지파가 올라가서 가나안과 싸울 것을 여호와께 물었습니다(1절).
성경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죽음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셋의 죽음을 비롯해서(창5:8), 노아의 죽음을 기록했습니다(창9:29). 데라의 죽음이 기록되었는가하면(창11:32), 아브라함의 죽음도 기록되었습니다(창25:7). 모세의 죽음이 기록되었습니다(신34:5).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들여놓은 여호수아도 죽었습니다(수24:29). 사람들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죽음 뒤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어떠한 상황으로 바뀌는가에 성경은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상당히 세력 있는 교회들이 전임자들은 잘했었는데, 후임이 잘못 들어와 교회가 상당히 시끄럽습니다. 이런 면에서 여호수아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앞날에 큰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홍수 후에 노아의 뒤를 셈이 잇습니다. 아브라함의 뒤를 이삭이 이어나갑니다. 요셉이 이스라엘을 돌보다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시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인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었습니다(수24:29). 여호수아의 뒤를 이을 하나님의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에게 큰 handicap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께 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묻고 의지해야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서 가나안 정복을 일단락 지었습니다. 그리고 각지파별로 가나안을 분배하였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정복된 땅이 아니었습니다. 未征服 상태였던 땅이 상당 했습니다(수13:1-7). 그러나 이 땅들은 각 지파들에게 맡겨진 mission의 땅이었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이끌어나갈 이렇다 할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모세나 여호수아는 이미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가나안을 정복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사람이 나올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현재 당면한 문제를 타계해나가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이제 가나안에 들어와서 뒤로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여호와께 묻는다는 것은 여호와의 의중을 묻는 것입니다. ‘우림과 둠밈’의 판결법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의중을 물었습니다. !yriWa/’ūrîm과 !yMiTu/thummhîm은 대제사장의 흉패 안에 넣어 휴대한 보석입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할 때 그것을 꺼내어 보았습니다(삼상14:41, 출28:39, 신33:8, 레8:7, 민27:21) 우림과 둠밈 둘 중 하나는 '가', 하나는 '부'로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인간적인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민수기27:21을 보면 여호수아가 대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사무엘상22:10을 보면 대제사장 아히멜렉이 여호와의 뜻을 묻고, 다윗에게 골리앗의 칼과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사무엘하2:1을 보면 다윗이 전쟁을 할 때마다 여호와의 의중을 물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를 물었던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맞는 것인가? 내가 하는 일들이 옳은 것인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괜찮은 일인가?를 물었던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묻습니까? 사람이 범죄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타락함으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해졌습니다. 죄는 아담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닙니다. 온 인류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전적으로 무능해졌습니다. 죄로 인해서 우리의 능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혹자들의 말대로 예수 믿는 사람이 덜 떨어져서 하나님께 묻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자신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많이 물을수록 은혜를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앙의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많이 물었습니다. 다윗이나, 솔로몬 그리고 여호사밧, 히스기야 왕 같은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본적인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충분히 할 수 있는데, 무엇이 모자라서 하나님께 묻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하늘과 땅 사이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매사를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처리하지 말고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내 고집대로 처리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내 의도대로 하지 말고 성령님의 의도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의 인생에 black hole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이 제 길을 찾아갑니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쳐도, 앞으로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의도를 먼저 물은 후에 처리해도 늦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감동하심과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한 인생입니다.
중공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헝다그룹(恒大集団, Evergrande Group)이 부도가 날 것 같기 때문입니다. 헝다는 연말까지 이자로만 6억8000만달러(7909억원)를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갚지 못할 상황입니다. 헝다그룹은 중공 광둥성 선전시에 본사를 두고 있습니다. 창업자 쉬자인은 미국 포브스에 따르면 2019년 3월 현재 362억 달러의 자산을 보유해 세계 22위, 현재 중국 2위의 부호였습니다. 헝다 부채는 1조9700억위안입니다. 약 355조원입니다. 우리나라 2022년 예산이 603조원입니다. 우리나라 예산의 약 69%입니다. 중공이 헝다그룹의 부도처리에 고심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경제가 휘청거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께 절대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할 수없이 많은 피를 흘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과 올바른 언약관계를 맺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염려와 근심은 엄청 합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irony한 일입니다. 우리가 기도한 뒤에는 기도한 것 이상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까지는 결코 기도한 이상으로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께 자주자주 물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모세를 잃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여호수아마저 잃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초비상사태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광야생활 40년 후에 가나안에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아직 mission의 땅이었습니다. 가나안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이 혼재하여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를 받는 지도자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없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같이 가나안에 들어온 갈렙이 있긴 했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이제 나이가 많았습니다. 유대정벌을 직접 지휘했던 그는 이제 나이로 인해서 헤브론에 정착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노심초사하여 하나님께 물을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2절에서 7절을 보면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찌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3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4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 그들이 베섹에서 일만 명을 죽이고 5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죽이니 6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으매 7 아도니 베섹이 가로되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응답하셨습니다(2-7절).
우리 선배들의 믿음은 대단했습니다. George Muller목사가 Canada 퀘벡(Quebec)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가 Newfoundland에 왔을 때 짙은 안개로 인해서 배가 22시간이나 꼼짝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Muller 목사는 선장을 찾아가 오늘이 수요일이므로 토요일까지는 여하한 일이 있어도 Quebec에 도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선장은 “안개가 이토록 짙은데 어떻게 갈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라고 했습니다. Muller 목사는 “나는 내50평생에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는 사람이요. 어떻게 해서라도 가야하오.”라고 하자 선장은“기꺼이 도와드리고 싶습니다만 저로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Muller 목사는 “그렇다면 우리 해도실로 들어가서 기도합시다.” “목사님 지금 안개가 얼마나 짙은지 아십니까?” “난 모르오, 나는 안개의 짙은 정도를 보는 게 아니라 나의 삶을 조정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고 있소.”라고 하자 선장은 못 마땅해 하며 해도실로 들어갔습니다. Muller목사는 “주님, 주님의 뜻이라면 이 안개를 5분 내로 치워 주십시요. 주님이 Quebec에 만들어 놓으신 약속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가 기도를 끝내자 선장이 기도할 차례였습니다. Muller목사는 “당신은 하나님께서 안개를 치워주실 것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이미 치우신 것을 믿습니다. 더 이상 기도하실 필요 없습니다.”하고 밖으로 나가자 안개는 곧 걷혔습니다.
전 이스라엘이 모여서 하나님께 기도하자 곧바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의 손에 이 땅을 붙였노라”하셨습니다. 문자적으로 표현하면 “나 여호와가 이 가나안 땅을 그 손에 쥐어주겠노라”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은 말들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보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대 하나님께서 내가 쥐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왜?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유다입니까? 창세기49:8-12절을 보면 야곱은 유다를 엄청나게 축복했습니다.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라 했습니다. 유다는 마치 사자 같아서 누구든지 유다를 무서워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처럼 유다지파는 가나안 정복 후에 요단 서편지역을 가장 먼저 분배받았습니다(15장). 그렇다고 유다지파가 여호수아처럼 이스라엘의 전체 선봉장은 아니었습니다. 유다지파 경내에 아직 몰아내지 않은 가나안을 정복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시므온지파에게 같이 전쟁을 하자고 부탁합니다. 3절을 보면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왜 유다가 시므온지파에게 같이 전쟁을 하자고 합니까? 시므온의 기업이 유다의 지역 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수19:1). “···시므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라” 시므온이 유다와 같이 전쟁에 가담한 것은 유다와 시므온의 기업에 아직 남아있는 가나안을 멸망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다와 시므온은 전쟁에 나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흔히 실현성이 없는 헛된 이론만 전개하는 것을 卓上空論이라 합니다. 즉 말뿐인 실천입니다. 이론은 좋습니다. 그러나 실천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탁상공론은 헛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유다와 시므온이 전쟁준비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올라가지 않았다면 가나안을 멸망시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유다가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유다경내에 있는 강력한 사람들을 멸망시켰습니다. 가나안사람과 브리스 사람 1,0000명을 죽였습니다. 이 시대에 말로만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로만 사탄을 정복하고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로만 정의를 외치고, 말로만 헌신합니다. 그리고 막상 실행에 옮기고자 할 때에는 쏙 빠져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탄이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사탄이 위로하고 그런 사람들을 심히 장려합니다. 강력한 우리 편이라고 자랑하면서 자기경내로 끌어들입니다.
당시 중동지방에서는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 연합전선을 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어느 날 풀무 같던 애굽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대로 놓아두었다가는 큰 일이 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사이가 좋지 않던 나라들이 뭉쳤습니다. 이들은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나라를 무척이나 싫어합니다. 그래서 연합전선을 펴서 이스라엘을 진멸코자 했습니다.
유다와 시므온이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을 치고 있을 때에 아도니베섹이 북쪽에서 유다와 베냐민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와 시므온은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를 치기 전에 먼저 아도니베섹을 쳤습니다. 그를 사로잡아 다시는 전쟁하지 못하도록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끊어버렸습니다. 아도니베섹을 먼저 잡지 못한다면 전쟁이 힘들어지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붙이시니까 마치 날선 낫으로 보리를 추수하는 것 같았습니다. 칼 한번만 휘둘렀는데 여러 명이 죽었습니다. 화살을 한 개 쏘았는데, 죽은 사람은 여럿이었습니다. 화살에 맞아죽고, 그것을 본 대적들이 심장마비로 죽고, 도망가다가 밟혀서 죽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붙이시니까 전쟁이 일방적이었습니다.
종교 중에 가장 강력한 종교가 그리스도교입니다. 왜냐하면 전능자이신 창조주를 주님으로 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동으로 모든 것을 해주셔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백성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자동(automatic)으로 처리하시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분담이 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기를 원해서는 안 됩니다. 일단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전쟁을 하시지만 우리도 action을 취해야 합니다. 앉아서 생각과 말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일어서야 합니다. 일어서서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 처음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험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묻는 일입니다. 다음으로는 전쟁준비입니다. 다음으로는 싸우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유다와 시므온이 싸우러 갈 때에 적들을 이스라엘에게 붙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건너뛸 것은 없습니다. 어떤 것 하나만 빠져도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일인데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이스라엘을 시험하는 책입니다. 시험에 합격할 때마다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나 불합격할 때마다 고난과 패배를 주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이 죽기 전에 이스라엘에게 순종할 것을 강력하게 피력했습니다. 만일에 너희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가나안을 너희들에게 붙이실 것이지만, 만일에 너희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한다면 너희들을 가나안의 손에 붙일 것이라 했습니다. 즉 순종하면 복이고, 불순종하면, 저주(수23:6-16)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할 때 우리가 그 혜택을 입습니다.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자녀라도, 은혜를 절대로 베푸시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을 이해한다면 복이 됩니다. 우리들의 복은 항상 긴장가운데 유지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무한한 약속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무조건적인 약속이 아닙니다. 그 약속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우리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한 것들을 기대하고 소유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우리들에게 성경의 언약을 보증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언약을 버리면 세상 사람들보다 오히려 못한 존재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성경의 언약들이 내 것이 되지만, 순종하지 않을 때는 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순종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한다면 하나님은 나의 모든 관심사를 돌보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나에게 엄습하는 갈등과 고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방법을 포기한다면, 우리의 고백은 헛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관심사는 불투명해질 것입니다.
사사기의 중점 내용이 무엇입니까? 언약을 받은 자의 자세입니다. 그들을 인도하던 여호수아가 죽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느냐는 자세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 이스라엘과 대적들 간의 관계가 긴장해야 함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중점내용이 무엇입니까? 언약을 받은 자의 자세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와 이 세상과 대적들 간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에서 혼란이 오면 모두 흩어져 버립니다. 우리와 세상과의 관계는 적대관계입니다. 우리와 대적의 관계는 싸워야 할 관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긴장관계입니다. 긴밀한 유대관계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바꾸어서 세상과는 긴밀하게 유대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소원하거나 적대관계를 맺으면 뻔한 인생이 됩니다.
우리에게 아도니 베섹 같은 강력한 대적들이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가나안과 브리스사람들과 같은 세상의 세력과 연합하여 우리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파김치가 되어 있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겨우 숨만 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들은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응답한 기도에 믿음과 순종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럴 때 아도니 베섹 같은 문제들을 힘을 쓰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같이하심을 잊지 마시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묻고 응답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한 우리는 절대 비참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과 같이 하십시다. (closing)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쉬지 맙시다. 우리는 미래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 미래를 붙들고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작은 자를 쓰시는 하나님 (2) | 2025.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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