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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8.13
    하나님께 묻는 이스라엘

사사기1:1-7 

 

설교 작성을 하기 위해서 어떤 단어를 사용하고자 할 때 사전을 종종 찾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상식과 사전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이런 뜻이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전을 찾아보면 전혀 다른 뜻이었을 때, ‘사전을 찾기를 잘 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묻는다는 것은 실수를 줄이기 위한 가장 좋은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직장인들은 결재권을 가진 자에게 결재를 얻은 후에 처리해야 합니다. 건축을 하는 사람들이 설계대로 짓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건축을 할 때에는 그 건물은 얼마 있지 않아 부숴야 합니다. 설계자가 설계한 것이 의심스러울 때는 설계자에게 물어서 시공해야 합니다. 건축자 마음대로 철근을 이렇게 많이 넣을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시공한다면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항상 물어서 일들을 원만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물론 일에 자신이 있어서 일일이 묻지 않아도 될 사항들은 묻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일이라든지 본인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일들은 반드시 물어서 처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괜찮겠지, 하는 자신만의 생각으로 일을 처리했다가 낭패를 본 사건들이 대단히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반드시 확인을 하고 모르는 것들은 물어서 처리해야 될 줄로 생각합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덥석 일을 처리하다가는 큰 낭패를 당하기 일수이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사사기를 여는 말씀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입니다. 상당히 암울함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느 지파가 올라가서 가나안과 싸울 것을 여호와께 물었습니다(1).

 

성경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죽음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셋의 죽음을 비롯해서(5:8), 노아의 죽음을 기록했습니다(9:29). 데라의 죽음이 기록되었는가하면(11:32), 아브라함의 죽음도 기록되었습니다(25:7). 모세의 죽음이 기록되었습니다(34:5).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들여놓은 여호수아도 죽었습니다(24:29). 사람들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죽음 뒤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어떠한 상황으로 바뀌는가에 성경은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상당히 세력 있는 교회들이 전임자들은 잘했었는데, 후임이 잘못 들어와 교회가 상당히 시끄럽습니다. 이런 면에서 여호수아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앞날에 큰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홍수 후에 노아의 뒤를 셈이 잇습니다. 아브라함의 뒤를 이삭이 이어나갑니다. 요셉이 이스라엘을 돌보다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시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인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었습니다(24:29). 여호수아의 뒤를 이을 하나님의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에게 큰 handicap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께 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묻고 의지해야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서 가나안 정복을 일단락 지었습니다. 그리고 각지파별로 가나안을 분배하였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정복된 땅이 아니었습니다. 未征服 상태였던 땅이 상당 했습니다(13:1-7). 그러나 이 땅들은 각 지파들에게 맡겨진 mission의 땅이었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이끌어나갈 이렇다 할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모세나 여호수아는 이미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가나안을 정복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사람이 나올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현재 당면한 문제를 타계해나가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이제 가나안에 들어와서 뒤로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여호와께 묻는다는 것은 여호와의 의중을 묻는 것입니다. ‘우림과 둠밈의 판결법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의중을 물었습니다. !yriWa/’ūrîm!yMiTu/thummhîm은 대제사장의 흉패 안에 넣어 휴대한 보석입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할 때 그것을 꺼내어 보았습니다(삼상14:41, 28:39, 33:8, 8:7, 27:21) 우림과 둠밈 둘 중 하나는 '', 하나는 ''로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인간적인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민수기27:21을 보면 여호수아가 대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사무엘상22:10을 보면 대제사장 아히멜렉이 여호와의 뜻을 묻고, 다윗에게 골리앗의 칼과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사무엘하2:1을 보면 다윗이 전쟁을 할 때마다 여호와의 의중을 물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를 물었던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맞는 것인가? 내가 하는 일들이 옳은 것인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괜찮은 일인가?를 물었던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묻습니까? 사람이 범죄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타락함으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해졌습니다. 죄는 아담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닙니다. 온 인류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전적으로 무능해졌습니다. 죄로 인해서 우리의 능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혹자들의 말대로 예수 믿는 사람이 덜 떨어져서 하나님께 묻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자신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많이 물을수록 은혜를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앙의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많이 물었습니다. 다윗이나, 솔로몬 그리고 여호사밧, 히스기야 왕 같은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본적인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충분히 할 수 있는데, 무엇이 모자라서 하나님께 묻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하늘과 땅 사이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매사를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처리하지 말고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내 고집대로 처리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내 의도대로 하지 말고 성령님의 의도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의 인생에 black hole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이 제 길을 찾아갑니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쳐도, 앞으로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의도를 먼저 물은 후에 처리해도 늦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감동하심과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한 인생입니다.

 

중공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헝다그룹(恒大集団, Evergrande Group)이 부도가 날 것 같기 때문입니다. 헝다는 연말까지 이자로만 68000만달러(7909억원)를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갚지 못할 상황입니다. 헝다그룹은 중공 광둥성 선전시에 본사를 두고 있습니다. 창업자 쉬자인은 미국 포브스에 따르면 20193월 현재 362억 달러의 자산을 보유해 세계 22, 현재 중국 2위의 부호였습니다. 헝다 부채는 19700억위안입니다. 355조원입니다. 우리나라 2022년 예산이 603조원입니다. 우리나라 예산의 약 69%입니다. 중공이 헝다그룹의 부도처리에 고심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경제가 휘청거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께 절대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할 수없이 많은 피를 흘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과 올바른 언약관계를 맺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염려와 근심은 엄청 합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irony한 일입니다. 우리가 기도한 뒤에는 기도한 것 이상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까지는 결코 기도한 이상으로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께 자주자주 물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모세를 잃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여호수아마저 잃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초비상사태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광야생활 40년 후에 가나안에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아직 mission의 땅이었습니다. 가나안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이 혼재하여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를 받는 지도자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없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같이 가나안에 들어온 갈렙이 있긴 했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이제 나이가 많았습니다. 유대정벌을 직접 지휘했던 그는 이제 나이로 인해서 헤브론에 정착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노심초사하여 하나님께 물을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2절에서 7절을 보면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찌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3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4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 그들이 베섹에서 일만 명을 죽이고 5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죽이니 6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으매 7 아도니 베섹이 가로되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응답하셨습니다(2-7).

 

우리 선배들의 믿음은 대단했습니다. George Muller목사가 Canada 퀘벡(Quebec)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가 Newfoundland에 왔을 때 짙은 안개로 인해서 배가 22시간이나 꼼짝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Muller 목사는 선장을 찾아가 오늘이 수요일이므로 토요일까지는 여하한 일이 있어도 Quebec에 도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선장은 안개가 이토록 짙은데 어떻게 갈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라고 했습니다. Muller 목사는 나는 내50평생에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는 사람이요. 어떻게 해서라도 가야하오.”라고 하자 선장은기꺼이 도와드리고 싶습니다만 저로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Muller 목사는 그렇다면 우리 해도실로 들어가서 기도합시다.” “목사님 지금 안개가 얼마나 짙은지 아십니까?” “난 모르오, 나는 안개의 짙은 정도를 보는 게 아니라 나의 삶을 조정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고 있소.”라고 하자 선장은 못 마땅해 하며 해도실로 들어갔습니다. Muller목사는 주님, 주님의 뜻이라면 이 안개를 5분 내로 치워 주십시요. 주님이 Quebec에 만들어 놓으신 약속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가 기도를 끝내자 선장이 기도할 차례였습니다. Muller목사는 당신은 하나님께서 안개를 치워주실 것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이미 치우신 것을 믿습니다. 더 이상 기도하실 필요 없습니다.”하고 밖으로 나가자 안개는 곧 걷혔습니다.

 

전 이스라엘이 모여서 하나님께 기도하자 곧바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의 손에 이 땅을 붙였노라하셨습니다. 문자적으로 표현하면 나 여호와가 이 가나안 땅을 그 손에 쥐어주겠노라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은 말들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보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대 하나님께서 내가 쥐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유다입니까? 창세기49:8-12절을 보면 야곱은 유다를 엄청나게 축복했습니다.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라 했습니다. 유다는 마치 사자 같아서 누구든지 유다를 무서워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처럼 유다지파는 가나안 정복 후에 요단 서편지역을 가장 먼저 분배받았습니다(15). 그렇다고 유다지파가 여호수아처럼 이스라엘의 전체 선봉장은 아니었습니다. 유다지파 경내에 아직 몰아내지 않은 가나안을 정복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시므온지파에게 같이 전쟁을 하자고 부탁합니다. 3절을 보면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왜 유다가 시므온지파에게 같이 전쟁을 하자고 합니까? 시므온의 기업이 유다의 지역 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19:1). “···시므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라시므온이 유다와 같이 전쟁에 가담한 것은 유다와 시므온의 기업에 아직 남아있는 가나안을 멸망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다와 시므온은 전쟁에 나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흔히 실현성이 없는 헛된 이론만 전개하는 것을 卓上空論이라 합니다. 즉 말뿐인 실천입니다. 이론은 좋습니다. 그러나 실천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탁상공론은 헛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유다와 시므온이 전쟁준비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올라가지 않았다면 가나안을 멸망시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유다가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유다경내에 있는 강력한 사람들을 멸망시켰습니다. 가나안사람과 브리스 사람 1,0000명을 죽였습니다. 이 시대에 말로만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로만 사탄을 정복하고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로만 정의를 외치고, 말로만 헌신합니다. 그리고 막상 실행에 옮기고자 할 때에는 쏙 빠져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탄이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사탄이 위로하고 그런 사람들을 심히 장려합니다. 강력한 우리 편이라고 자랑하면서 자기경내로 끌어들입니다.

 

당시 중동지방에서는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 연합전선을 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어느 날 풀무 같던 애굽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대로 놓아두었다가는 큰 일이 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사이가 좋지 않던 나라들이 뭉쳤습니다. 이들은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나라를 무척이나 싫어합니다. 그래서 연합전선을 펴서 이스라엘을 진멸코자 했습니다.

 

유다와 시므온이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을 치고 있을 때에 아도니베섹이 북쪽에서 유다와 베냐민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와 시므온은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를 치기 전에 먼저 아도니베섹을 쳤습니다. 그를 사로잡아 다시는 전쟁하지 못하도록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끊어버렸습니다. 아도니베섹을 먼저 잡지 못한다면 전쟁이 힘들어지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붙이시니까 마치 날선 낫으로 보리를 추수하는 것 같았습니다. 칼 한번만 휘둘렀는데 여러 명이 죽었습니다. 화살을 한 개 쏘았는데, 죽은 사람은 여럿이었습니다. 화살에 맞아죽고, 그것을 본 대적들이 심장마비로 죽고, 도망가다가 밟혀서 죽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붙이시니까 전쟁이 일방적이었습니다.

 

종교 중에 가장 강력한 종교가 그리스도교입니다. 왜냐하면 전능자이신 창조주를 주님으로 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동으로 모든 것을 해주셔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백성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자동(automatic)으로 처리하시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분담이 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기를 원해서는 안 됩니다. 일단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전쟁을 하시지만 우리도 action을 취해야 합니다. 앉아서 생각과 말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일어서야 합니다. 일어서서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 처음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험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묻는 일입니다. 다음으로는 전쟁준비입니다. 다음으로는 싸우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유다와 시므온이 싸우러 갈 때에 적들을 이스라엘에게 붙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건너뛸 것은 없습니다. 어떤 것 하나만 빠져도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일인데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이스라엘을 시험하는 책입니다. 시험에 합격할 때마다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나 불합격할 때마다 고난과 패배를 주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이 죽기 전에 이스라엘에게 순종할 것을 강력하게 피력했습니다. 만일에 너희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가나안을 너희들에게 붙이실 것이지만, 만일에 너희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한다면 너희들을 가나안의 손에 붙일 것이라 했습니다. 순종하면 복이고, 불순종하면, 저주(23:6-16)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할 때 우리가 그 혜택을 입습니다.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자녀라도, 은혜를 절대로 베푸시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을 이해한다면 복이 됩니다. 우리들의 복은 항상 긴장가운데 유지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무한한 약속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무조건적인 약속이 아닙니다. 그 약속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우리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한 것들을 기대하고 소유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우리들에게 성경의 언약을 보증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언약을 버리면 세상 사람들보다 오히려 못한 존재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성경의 언약들이 내 것이 되지만, 순종하지 않을 때는 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순종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한다면 하나님은 나의 모든 관심사를 돌보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나에게 엄습하는 갈등과 고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방법을 포기한다면, 우리의 고백은 헛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관심사는 불투명해질 것입니다.

 

사사기의 중점 내용이 무엇입니까? 언약을 받은 자의 자세입니다. 그들을 인도하던 여호수아가 죽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느냐는 자세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 이스라엘과 대적들 간의 관계가 긴장해야 함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중점내용이 무엇입니까? 언약을 받은 자의 자세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와 이 세상과 대적들 간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에서 혼란이 오면 모두 흩어져 버립니다. 우리와 세상과의 관계는 적대관계입니다. 우리와 대적의 관계는 싸워야 할 관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긴장관계입니다. 긴밀한 유대관계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바꾸어서 세상과는 긴밀하게 유대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소원하거나 적대관계를 맺으면 뻔한 인생이 됩니다.

우리에게 아도니 베섹 같은 강력한 대적들이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가나안과 브리스사람들과 같은 세상의 세력과 연합하여 우리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파김치가 되어 있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겨우 숨만 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들은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응답한 기도에 믿음과 순종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럴 때 아도니 베섹 같은 문제들을 힘을 쓰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같이하심을 잊지 마시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묻고 응답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한 우리는 절대 비참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과 같이 하십시다. (closing)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쉬지 맙시다. 우리는 미래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 미래를 붙들고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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