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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01
    하나님 자녀들이 힘써 할일

하나님 자녀들이 힘써 할일

역대상1:1-4

우리들은 이 세상에 영혼과 몸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영혼과 몸은 따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면 영혼 따로 몸 따로 있는 자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반드시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주어야 합니다. 추우면 불을 피우거나 덮어주어야 합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피할 곳이 필요합니다. 더우면 더운 것을 역시 피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많아도 귀찮아도 그 모든 것들을 다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몸이 요구하는 것들을 다 들어주지는 못합니다. 아마도 그러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재물이 많다고 해서 다 들어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요구는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몸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걱정하지 말고 나만 의지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약속을 하셨습니까? 1절과 2절을 보면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성경에는 족보가 많이 나옵니다. 전체적으로 나오기도 하고, 일부분만 나오기도 합니다. 창세기5장에서도 족보가 나옵니다(창5:4-32). 마태복음에도(마1:1-17), 누가복음에도(눅3:23-38) 족보가 나옵니다. 성경의 족보에 사람들이 나오는 이유는 하나님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첫 번째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I. 예배를 드리는 사람(1-2절).

역대기 저자는 노아까지 10명의 족보를 기록했습니다. 아담부터 시작해서 바로 셋으로 들어갑니다. 그 사이에 있는 가인과 아벨은 제외시켰습니다.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났기 때문에 제외시켰고, 아벨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제외시켰습니다. 그래서 아담 다음으로 셋이 등장합니다. 아담은 130세에 셋을 낳았습니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800년을 지냈습니다. 그간에 수많은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930세를 일기로 죽었습니다.

셋은 105세에 에노스(v/na>)를 낳았습니다. 셋도 에노스를 낳은 후 807년을 살았습니다. 그간에 수많은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912세에 죽었습니다. 셋은 아들의 이름을 “에노쉬”라고 붙였습니다. 사람마다 이름이 뜻이 있는데 “에노쉬”는 “인간”이란 뜻입니다. 에노쉬는 “약하다”(vn"a;)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인간은 약해서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는데, 이때 아담의 나이가 235세였습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서 이 땅과 사람들은,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약해진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셋 시대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인간은 저주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인간 혼자서 살아갈 수 없음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창세기12:8, 13:4을 보면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단을 쌓았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찬양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여호와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왜 드립니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신비(musthvrion)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시기도 하고, 억제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속에서 섭리하심으로 드러내십니다. 예배 속에서는 초월해(transcendence) 계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초월이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것이 초월입니다.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에도 계시며, 미래에도 계시는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분이십니다. 즉 “하나님은 무한하고, 영원하며, 불변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어디에나 동시에 계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도 초월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immanence)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초월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예배는 누가 드립니까? 자신의 약함을 아는 자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일단 예배를 드리러 온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복된 관계를 형성한 자세입니다. 다음으로 할 일은 우리가 예배의 가치입니다. 공중예배는 모든 사람이 다 참여해서 드려야 됩니다. 예배는 크고 작음이 없습니다. 낮예배는 대예배고, 오후예배는 소예배가 아닙니다. 똑같이 소중한 예배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파격해야 복을 받습니다. 예배를 우리가 고르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예배에 참석해서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드리는 만큼 하나님의 파격적인 복이 내려집니다. 또한 예배드리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예배는 참석하는데 의의가 있지 않습니다. 찬송을 할 때는 열심히 크게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시간에도 경건하게 해야 합니다. 설교는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 들은 뒤에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배에서 손님이 되지 말고,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정말 한 번이라도 바르게 정식으로 예배를 드립시다. 하나님의 뜻에 딱 맞는 예배를 드립시다. 내가 이렇게 예배를 드려서 주님께서 받으실까 스스로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이왕 우리가 예배드리러 왔으니 최선을 다해서 예배를 드립시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예배를 드립시다.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는” 예배를 드립시다. 예배를 드림으로 우리의 생활에 복된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시다. 오늘도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1-2절)일뿐만 아니라 두 번째로 우리는

II.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3절).

에녹, 므두셀라

여기에 나오는 두 인물은 각각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므두셀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입니다. 에녹은 아버지이고, 므두셀라는 그의 아들입니다. 성경은 에녹에 대해 다른 사람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창세기5:21-24을 보면

21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를 낳았으며

23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다른 사람들은 “몇 세에 누구를 낳고, 몇 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몇 세에 죽었더라”고 했는데 에녹은 설명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또한 히11:5에 에녹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22절).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죽지 않고 천국에 간 것입니다. 이때가 아담이 죽은 후 57년 후입니다. 그러나 셋을 비롯해서(857세) 에노스(752), 게난(662), 마할랄렐(592), 아렛(527) 므두셀라(365)는 모두 살아 있었습니다. 손자인 라멕도 살아 있었습니다(113세).그러나 그 시대의 사람들은 어느 날부터 에녹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에녹이 갑자기 실종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갈만한 곳을 찾아도 에녹은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에 의하면 에녹은 죽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갔습니다. 어떻게 에녹이 죽음 없이 천국에 갔습니까? 에녹은 300년간을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eujarestevw).

에녹은 365년을 이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므두셀라를 65세에 낳았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과 같이 걸었다고 했습니다. 아들의 출생으로 그 시대의 비극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보낸다)로 지었습니다. 즉 “그가 죽을 때에 심판의 홍수를 보내리라”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 므두셀라가 죽습니다. 이런 이유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300년간을 매일같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에녹시대의 사람들은 매우 악했습니다. 죄로 인해서 점점 약해지면서 악해졌습니다. 에녹의 선한 마음과 그들과 어울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에녹은 심히 마음이 상했을 것입니다. 또한 에녹의 일생이 편안했다면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저히 땅에 소망을 둘 수 없었기 때문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우리의 고난이 오히려 은혜가 됩니다. 내가 어렵지 않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힘들지 않으면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고난이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합니다.

서로 동행하려면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에 에녹이 맞았다는 것입니다. 에녹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랐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습니다. 그것을 어디에서 알 수 있습니까? “동행하며”(창5:22,24)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계속 걷고 있었다”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과 영적 친교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나 뜻을 따라 그를 기쁘게 하는 생활이 동행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참 지키기 어렵습니다. 어떤 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복을 기다리다가 지쳐 죽을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감수하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우리의 모든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우리의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강력하게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보이는 것들만 보고는 하나님을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 우리가 감각하는 것을 뒤집어엎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바쁜 중에서도 하나님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날마다 그를 만나야 합니다. 앉으나 서나 하나님 생각, 앉으나 서나 주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관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과 뜻을 같이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는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려는 노력과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에녹의 시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불완전했습니다. 아주 초보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폭력적인 사회였습니다. 악의 세력이 지배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런 때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친구였습니다. 하나님이 강에 가자고 하면 강에 갔고, 산에 가자고 하면 산으로 갔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에게 비위를 맞추는 것은 아첨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조조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면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께 큰 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취미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재미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래서 우리가 방관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을 방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충성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지금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힘들어도 동행해야 합니다. 기뻐도 동행해야 합니다. 동행이라는 것은 나의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것이 동행입니다.

어떤 그림이 한 박물관에 게시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구경하러 왔습니다. 그 때 독일의 젊은 백작 중의 한 사람이 여러 그림을 보다가 어떤 구석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림을 보았습니다. 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는데 그 날은 이상하게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림에 있는 예수님의 얼굴이 그 사람을 붙잡은 것입니다. 오래 동안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나는 너를 위하여 이 일을 하였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라는 글귀가 있었습니다. 그 글자가 예수님께서 친히 자기에게 말하는 것과 같이 생각되어 그 시간에 자신을 주님께 바치기로 했습니다. 이 사람이 모라비안 교회의 진젠도르프입니다. 당시에 카톨릭의 박해로 성도들이 피해야 했습니다. 이때 진젠도르프는 그많은 피난민들을 자기 성내에 살게 했습니다. 그 사람들과 같이 기도하며 그 사람들과 같이 교회를 조직하여 몇 사람 안 되지만 온 천하에 선교 운동과 경건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전도를 하는 것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사실 전도를 해도 잘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서 전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힘듭니까? 그래도 하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래도 우리교회는 내가 부흥시켜야 한다고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마음부터입니다. 우리교회가 내세울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교회처럼 교회가 화려하지 않습니다. 성도들도 보다시피 아주 적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 영광을 드리려는 소망이 있습니다. 성경대로 하려고 애쓰는 교회가 되고자 합니다. 이런 교회를 위해서 우리 모두 교회를 부흥시킵시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도합시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 죽음을 보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홍수이전에 천국으로 들려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헌신할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충성할 자를 찾으십니다. 헌신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주시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충성합시다. 우리가 헌신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을 받읍시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늘 기다리고 계십니다. 헌신하고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힘써 할 일은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과 항상 동행해야 할뿐만 아니라 오늘 세 번째로

III. 심판을 대비하는 사람(4)

라멕, 노아, 셈, 함과 야벳

우리가 똑같이 잔치 집과 상가에 초대를 받았을 경우에 어느 집에 가야 합니까? 물론 두 집에 다 가야 합니다. 그러나 사정이 있어서 한 집만 가야 할 경우에 어디에 가야 합니까? 초상집에 가야 합니다. 저는 지난주 작년에 목사안수를 받은 분의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 있을 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죽은 그 순간부터 이 세상 사람들과는 영원히 격리됩니다. 조금 전까지도 죽고 못 살 만큼 가까워도 죽음은 그 관계를 분리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생물들에게 있어서 아주 두려운 존재입니다. 사람이 이것을 이기려고 많은 연구를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라멕의 아버지는 므두셀라입니다. 므두셀라가 187세에 라멕을 낳았습니다. 라멕의 아들은 노아입니다. 182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라멕은 아들의 이름을 특이하게 지었습니다. 노아(j'nO)“안식”이라고 지었습니다. 창세기5:29을 보면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우리는 이 구절로 당시의 상황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당시의 족장들은 이 지상의 생활에서 극한 괴로움을 느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라멕은 할아버지인 에녹이 승천한 지 69년에 노아를 낳아서 노아의 이름에 소망을 걸었습니다. Lamech은 노아에게 이름을 지어주면서 더 좋은 변화를 바랐습니다. 저주로부터의 구속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원하던 방식으로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Lamech과 Noah는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하였습니다. 홍수를 기점으로 해서 Lamech과 Noah는 갈라집니다. Lamech은 홍수전 시대이고 Noah는 홍수이후시대로 대홍수를 실제 경험했습니다. Lamech은 대홍수가 일어나기 전 5년 전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Noah는 하나님의mission을 받습니다. 어떤 mission을 받습니까? 심판에 대비하라는 mission을 받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집이 미국에 있습니다. 미국의 동남부 플로리다 팜비치에 있는데 매종 드 라미티에(Maison de L'Amitie)라는 집입니다. 그 가격이 1억2500만 달러입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1300억원이 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집은 어디이겠습니까?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삼성그룹 회장의 집입니다. 2006년도 공시가격으로 85억2천만원입니다. 지금은 아마도 거의 1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뿐 아니라 지금 무섭게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 땅을 천국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이 땅에 투자하고 있습니까?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는 중국의 스촨성에서 지진이 일어나 10,0000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어제는 일본에서 지진이 나서 100여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6월9일에는 그리스에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댐이 무너지고 산이 무너졌습니다. 해일이 밀려와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태풍이나 허리케인으로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사고로도 죽고, 수명이 다 되어서 죽기도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사람들이 죽습니다. 방법만 다르지 죽음이라는 것이 사람들을 무차별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곧 죽음이 우리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은 심판을 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유대의 국회의원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나서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예루살렘의 국정에 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유대민족의 앞날에 대해서 묻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구원에 관한 말이 주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심판(krivsi")이 있다는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을 가른다는 말씀입니다. 현재는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는데 이것을 철저하게 골라낸다는 것입니다. 알곡은 모아서 곡간에 넣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버리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심판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습니다. 아예 심판을 받기로 작정하고 있습니다. 심판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심판에 대해서 말합니다. 심판을 경험하지도 않았으면서 심판이 없다고 말합니다. 심판을 받겠노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심판에 대한 참상을 적나라하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옥에 있는 상황을 꺼지지 않는 불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이 지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말의 대심판 때는 죽음이 사람들을 토해냅니다. 바다에서, 강물에서, 땅에서 죽었던 사람들을 다시 돌려줍니다. 심판을 하신다는 하나님의 뜻에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심판은 이론이 아닙니다. 심판은 현실입니다. 심판은 실제입니다. 심판은 올 수도 있고, 안 올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해져서 반드시 오는 실제적인 미래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심판을 대비했습니다. 무려 120년간이나 심판을 대비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우리가 힘써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항상 심판을 대비해야 합니다. 우리만 심판에 대비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웃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친지나 친구들 모두 심판을 대비시켜야 합니다. 차일피일 하다가 영원히 그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노아의 때 심판을 예고했습니다. 그대로 물심판으로 세상이 멸망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심판을 예고했습니다. 말씀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예루살렘이 A.D.70년에 멸망했습니다. 그래서 심판은 이론이 아니고 실제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에 대비하는 삶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심판의 대비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이 우리를 영원토록 살게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람들은 저마다 세상에서 힘써 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힘쓰는 것은 우리의 죽을 때까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 힘쓰는 것은 영원까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열심히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언제나 함께 동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심판을 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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