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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1.30
    예수님이 열어 주신 말씀

예수님이 열어 주신 말씀

요한계시록1:1-3

미술품이란 회화, 조각, 공예 따위의 작품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미술을 하는 목적은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술품이 완성되면 화가들은 그림을 gallery에 전시를 합니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인정받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그림을 돋보이게 하려고 여러 가지로 꾸밉니다. 이때는 다른 사람에게 공개하지 않습니다. 모두 다 가리고 전시회(show)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전시회 준비가 완전히 끝난 다음에 날짜를 정해서 전시회장을 열어놓습니다. 이때는 누구든지 전시된 그림을 마음대로 볼 수 있습니다. 오래오래 감상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시회장을 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가려진 전시회장을 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보고 잘 그렸다, 못 그렸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림마다 감상평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가려진 그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을 열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에게 자신과 하늘을 열어서 보여주십니다. 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I. 우리에게 보내신 예수님의 말씀(1)

우리는 성경의 마지막 책을 요한계시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첫머리에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근원(source)이 요한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쓰기는 요한이 썼지만 원저자가 예수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계시록은 예수그리스도에 관해서 요한이 쓴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지시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계시라는 말을 들으면 신비하게 생각합니다. 특히 누가 직접계시를 받았다고 하면 귀가 열리는 것 같고, 눈이 번쩍 뜨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는다는 것은 굉장한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계시라는 말은 그렇게 신비한 말이 아닙니다. 계시라는 말은 ‘이전에 감추어진 것을 나타내다’는 말입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이래로 사용된 말입니다. 원래는 kavub(오두막)에서 유래했는데 본래 의미는 ‘파묻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계시라는 뜻입니다.

이 계시를 누가 드러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그의 천사를 요한에게 보내어 알리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예수님께서 천사에게, 천사로부터 요한에게 보내어진 것은 교회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계시록의 주된 목적은 오늘날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주신 직접적인 환상이 아니라 악의 세력과 싸우는 전투적인 교회를 위로하는 말씀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핍박과 고통을 받는 성도를 위로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계시록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용(사단)과 용을 따르는 무리들과 싸워서 승리하는 것이 주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계시록을 대하면서 큰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염두에 꼭 두어야 합니다.

1절을 보면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모든 일들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의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요한을 끌어올려 그 일들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속히 될 일들이 무엇입니까? 복음서를 쓴 저자들은 우리에게 지나간 일들을 설명하여 줍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해서 설명하여 줍니다. 그러나 예언이라고 할 때에 우리가 주의할 것은 앞일을 점치듯 말하는 것이 예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해보니까 당신 집에 큰 재앙이 있으니 조심하라, 어느 때까지 우리 기도원이나 교회에 얼마를헌금하라”는 것은 예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당의 소리이지 예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언은 이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구원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어렵고 힘든 이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복된 말씀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천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천사는 요한에게 주셨습니다. 요한은 교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즉 계시록은 우리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계시록은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 당시에 이 계시록의 말씀을 받는 사람들은 로마에 의해서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바로 그들에게 주신 희망의 message가 바로 요한 계시록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바로 희망의 message라는 것입니다. 천둥치고, 지구가 멸망하며, 짐승들이 활개를 치는 것이 계시록의 message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소망을 주는 message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박해는 성도들을 화형을 시키거나 교수형에 처하지는 않습니다. 1세기의 성도들이나, 중세시대의 성도들처럼 피비린내 나는 박해는 없습니다. 그러나 박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양상은 달라도 박해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마귀는 이 세상과 야합하여 성도들을 지금 박해하고 있습니다.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여 성도들을 유혹하는 박해를 하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어떻게든지 우리들을 세상에 얽어매려고 합니다. 자꾸 교회에서 사람들을 세상으로 끌고 나가려고 합니다. 제도화를 시켜서 안가면 안 되게 만듭니다. 교회에서 빠져나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단의 궤계를 볼 수 있어야 하며, 사단의 궤계에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종말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우리로 준비된 자로 발견되게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보내신 긴급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절과 3절을 보면

2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II. 우리를 복되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2·3).

세상에 어떤 나라라도 복 받는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동양이나 서양을 물론하고 복받는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는 5복이란 것이 있습니다. 오복은 壽·富·康寧·攸好德·考終命을 말합니다. 오래 살고, 부유하고, 건강하고, 덕을 좋아하고, 제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는 것을 복이라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壽·富·康寧·貴·子孫衆多를 꼽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을 가진 사람들을 복이 있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현재까지 유효하여 누구나 이러한 복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복의 개념을 달리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일곱 가지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① 말씀을 읽는 자, 듣는 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1:3) ② 주 안에서 죽는 자들(14:13), ③ 재림을 준비하는 자들(16:15), ④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19:9), ⑤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자(20:6), ⑥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22:7), ⑦두루마기를 세탁하는 자(22:14)입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지시로 천사에게 이끌려 하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땅의 것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광야를 보았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이 환상들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모두 기록해서 교회들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요한은 모두 기 록해서 박해를 받고 있는 교회들에게 보내어서 그들로 주님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모두 기록해서 오픈을 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면 요한은 때가 가까웠다고 말함으로써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이 긴장하도록 했습니다. 여기에서 때가 가깝다는 것은 종말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말이라고 말할 때는 어떤 한 시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대심판의 때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심판의 때가 가까웠기 때문에 긴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말의 때라는 것은 예수님이 오실 때부터 예수님의 재림까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종말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Hendricksen은 우리가 세 가지 시제(tenses) 속에서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대체적으로 모든 신자들이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과거에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에도 그러한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께서는 변함이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의 도움이셨던 그는 현재에도 그의 힘이시며, 미래에 있어서도 그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73편을 보면 아삽이 이 논리를 말하였습니다. 자기가 살아왔던 놀라운 체험에 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 아삽은 자기가 걸어온 그 좁은 길을 되돌아보면서 거의 완전히 뒤집혀 넘어질뻔 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1절에서 3절을 보면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아삽의 일생에 하나님의 섭리가 혼란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의인이 형통하고 악인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삽은 “하나님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까지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의인의 결국과 악인의 결국을 보았습니다. 현재에 대하여 “내가 항상 주와 함께 있나이다.” 과거에 대하여 “주께서 내 오른 손을 붙드셨나이다.” 그리고 미래에 대하여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실 것이오며,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즉 우리들은 과거에 대해서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grateful). 현재에 대해서는 안식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restful). 미래에 대해서는 신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trustful). 바로 이 미래에 대한 온전한 신뢰심은 우리가 복 받는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을 통해서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복이 있는 자를 말했습니다. 요한은 마태처럼 복이라는 말을 맨 앞에 말했습니다. “Makavrio" oJ ajnaginwvskwn kai; oiJ ajkouvonte" tou;" lovgou" th'" profhteiva" kai; throu'nte" ta; ejn aujth'/ gegrammevna: oJ ga;r kairo;" ejgguv".복이 있다. 말씀을 읽고 있는 자. 복이 있다.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 복이 있다.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왜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과 차이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성경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애가 성경에 모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의 양식이 성경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신의 양식이 성경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성경 안에 있어서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성경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읽고, 들으며, 지킨 나라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세우시기 위해서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신뢰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통찰력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부지런히 읽고, 듣고, 실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설교를 수면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설교시간을 이용해서 졸게 됩니다. 어느 교회에 설교시간만 되면 졸고 있는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예배 시간에 목사님은 설교를 하다가 그 집사님을 우연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집사님이 전혀 졸지 않았습니다. 졸지 않는 것도 신기한데 무엇인가를 막 적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 집사님이 이제 정신을 차렸구나, 설교까지 적는 것을 보니 이제 믿음이 성장하겠구나.” 목사님의 마음은 참 흐뭇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목사님이 로비에 서서 성도들과 인사를 하는 중에 그 집사님이 앞으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집사님에게 다가가 “집사님! 오늘 말씀의 은혜가 넘쳤나봐요? 오늘은 설교 시간에 말씀을 받아 적기까지 하시는 것을 보니!” 이 때 집사님의 얼굴이 약간 붉어지면서 하는 말, “목사님, 그게 아니고요, 곗돈 순번 짜고 있었는데요?”

오늘 이 말씀은 저자가 편안한 가운데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늙은 몸으로 광산에 유배되어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들은 로마의 박해에 극심하게 고난과 환란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날에 요한이 천사에 이끌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은 지키면 복이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의 원리를 잡고 그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이 책에 있는 말씀을 공부하고 그것들을 기대해야 합니다. 성경 안에 있는 약속을 배우고 그 약속에 의지해야 합니다. 성경 안에 있는 교훈을 생각하고 그 교훈에 순종해야 합니다.

계시를 올바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좋은 지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승리합니다. 그리하여 좋은 안식처를 얻게 됩니다. 성경의 말씀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일어서도록 강건하게 해줍니다. 교회가운데 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서게 하십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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