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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8.22
    교회가 수호해야 할 진리

교회가 수호해야 할 진리

요한이서1:1-3

진리를 사전에서는 “참된 이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생각하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Eusebius의 교회사를 보면 우리 선배들이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순교한 모습은 진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사합니다.

성도들의 순교 장면을 둘러서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로마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채찍으로 맞아 찢어진 그들의 몸에서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으며, 속살과 창자까지 드러났다. 그 후에 그들은 조개껍질이나 땅 위에 놓인 창끝에 눕혀졌다 그리고 갖가지 고문을 받은 뒤에 사나운 짐승의 밥으로 던져졌다. 그 중에 게르마니쿠스(Geranicus)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순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힘을 얻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였다. 지방총독은 그를 설득하려 했다. 그에게 젊음을 생각하여 스스로를 긍휼히 여기라고 유혹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공격하는 사나운 짐승들을 자극하여 불의하고 무법한 세대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이 사람의 영광스러운 죽음을 본 군중들은 이 경건한 순교자의 용기, 그리고 모든 기독교인들의 강건한 믿음에 놀랐다.

사도요한은 진리를 수호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1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 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I.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1-2절)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한다고 했습니다. 생각 없이 읽어도, 자세하게 읽어도 장로가 어느 여성도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우리 머리에 언뜻 떠오르는 것은 신앙이 돈독한 어느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는 모습입니다. 13절을 보면 그 어머니의 조카가 그 여인에게 인사를 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과연 요한이서는 장로 요한의 개인적인 서신인가? 아닌가?

그런데 요한이 개인적으로 보냈다면 개인적인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4세기 이후로 ‘선택받은 부녀’를 단체적인 호칭으로 이해했습니다. 구약의 히브리어나 헬라어에서는 어떤 도시를 말할 때 반드시 성을 부여했습니다. 시혼 성(@joysi @/jysi/민21:28)이라 했을 때 그 도시를 여성형으로 표시했습니다. 고린도, 에베소 그리고 특히 교회를 표현할 때는 반드시 여성형으로 표시했습니다.

따라서 택하심을 입은 부녀(kuriva/)와 그의 자녀들(tevknoi")은 개인적인 가정이 아닙니다. 한 가정교회와 그곳에 속한 믿음의 식구들을 여성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우리교회에 헬라식으로 편지를 한다면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들 전체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장로인 사도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택하심을 받은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장로라는 직책도 오늘날의 장로의 직책이 아니라 당시 교회지도자들을 지칭하는 ‘사도적인 인물’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나 요한이 자신들을 장로라고 불렀음을 이해해야 합니다(벧전5:1/요이1:1).

장로인 사도요한은 교회를 향한 사랑을 ‘진리를 아는 자’(pavnte" oiJ ejgnwkovte" th;n ajlhvqeian)라 했습니다. 장로인 요한 자신이 교회에게 진리 안에서 무척 사랑하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들이 그 교회를 사랑하고 있다 했습니다. 즉 진리를 아는 모든 자들이 그 교회를 사랑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장로인 요한도 진리를 사랑합니다. 그 편지를 받는 교회도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진리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고 진리 때문에 서로 사랑하며, 진리 때문에 서로 교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성도들은 하나입니다. 전 세계에 퍼져 있지만 하나입니다. 모든 교회들이 하나입니다. 유럽에 있는 교회와 우리 교회와 하나입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교회와, 아메리카에 있는 교회와 우리 교회가 하나입니다. 아시아에 있든지, 오세아니아에 있든지 교회는 하나입니다. 왜 하나입니까? 우리가 진리로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라는 끈으로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의 교회와 연합되었습니다. 신약의 교회들과 연합되었습니다. 교회사의 모든 교회들과 연합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연합되었고, 에녹과 연합되었습니다. 셋을 우리의 조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사도를, 요한사도를 우리의 선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진리로 묶여진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라고 간판을 건다고 해서 다 교회는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행하여야 교회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수촌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촌교회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촌교회는 많은 교회중의 하나입니다. 많은 교회 중에 오로지 예수촌교회만 유일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는 어디서나 같습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나 미국장로교회, 스위스장로교회, 대한예수교장로교회나 같은 부류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에베소서1:23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같은 이유는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있기 때문에 통일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로만-카톨릭은 다르게 말합니다. 모든 교회가 교황에게 복종해야하기 때문에 통일성이 있다고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으면 전 세계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교회일 수 없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한 성령에 의하여 한 세례를 받아 한 머리와 한 주(主)를 가진 한 몸으로 접붙여지게 됩니다.

교회가 진리를 가지고 있어야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있어야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습니다. “택하심을 입은(ejklevkto") 부녀와 그의 자녀들”이란 하나님의 보호하에 있다는 말입니다. 원래 ‘택하심을 입었다’는 말은 가장 질이 좋은 것들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선택했다’는 것은 ‘많은 것 중에서 골라낸 것’입니다(겔19;12,14). 택하심을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는 백성들을 말합니다.

종말의 때에 천사들이 우리를 소집합니다(막13:27). 택하신 자들을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환란을 감하십니다(막13:20). 택함 받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왕국으로의 초대를 받습니다(계17:14).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들을 누구도 비난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성도여러분, 진리를 소유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도 우리를 대적하지 못합니다. Martin Luther는 ‘술은 강하다. 그러나 왕은 더 강하다. 하지만 여자는 왕보다 더 강하다. 그러나 최고로 강한 것은 진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한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들이 무너지고, 나라가 캄캄해도 주의 진리는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힘들어도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즐거워도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즐거우나 괴롭거나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성도이기를 바랍니다.

II. 주님과 함께 하는 교회의 본분(3절)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원래 말은 좋은 말인데 그 말이 어떤 잘못된 것에 쓰여질 때 왜곡된 말들이 있습니다. 그런 말 중에 낙하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낙하산은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때 땅에 부드럽게 떨어지도록 사용하는 기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해하기를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 낙하산이야’라고 말할 때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린 사람이 아닙니다. 권력의 비호를 받고 힘안 들이고 어떤 기관을 접수한 사람을 낙하산이라 말합니다.이들은 자격이 있어서 그 자리를 맡은 것이 아닙니다. 자격은 쥐뿔도 없는데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죽기보다 힘든 상황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들이 진리처럼 행세하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건물을 크게 하면 그 교회는 진리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처럼 소형교회는 진리가 없는 것처럼 사람들이 생각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교회를 건전한 종교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불신자들입니다.

불신자들은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유대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아시아로 급속히 확장해나갔습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 확장해나갔습니다. 그래서 지구촌은 거의 복음이 전해진 상태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선교 2세기가 채 되지 않아 교회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교회가 잘 나갈 때는 전 인구의 25%가 신자라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IMF이후 교회의 성도들은 급속히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성장이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마이너스 성장으로 가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일이 벌어졌습니까?

우리나라에 처음 선교가 되었을 때는 성도들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일제에 항거했고, 가난을 타파하려 했으며, 사회의 약자들과 함께 했었습니다. 특히 국민들이 기독교와 함께 하려 했었습니다. 국민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좋지 않은 조짐이 1970년대부터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대형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거기에 기독교가 사회약자를 보호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강자의 편에 섰습니다. 1960년 3월15일의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부정선거,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파동, 1970년대 1인 독재를 위해 제정한 유신헌법에 대하여 침묵했습니다. 전 재산 29만원밖에 없는 불우한 대통령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했는데도 교회는 그를 위해 조찬기도회를 열어 불법적인 군사정변을 정당화해주었습니다. 이제는 목사와 장로들이 정치의 맛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정치판에 뛰어들어 수많은 국민들과 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동기를 만들었습니다. 즉 불신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교회는 건전한 종교가 아니라 힘이 있는 종교로 기독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주후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되었습니다. 콘스탄틴이 막센티우스와의 밀비안다리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인해서 기독교를 로마제국에서 인정하였습니다. 이로써 교회는 약 300년의 피 뿌림에서 건짐을 받고 제국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때부터 문제가 되었습니다. 제국의 종교로 거듭난 기독교는 누가 크냐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크냐? 너냐? 나냐? 그래서 동방과 서방의 오랜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초대교회 때의 순수함이 사라졌습니다. 말씀이 예전으로 바뀌었고,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것에 더 신경을 썼습니다.

거기에 교회는 이단들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사도 시대부터 발흥한 이단과 계속해서 싸워야 했습니다. 교리를 세워야 했습니다. 삼위일체론, 기독론 등의 교리를 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밀물처럼 밀려오는 권력인 로마카톨릭과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전쟁을 치르고도 전열을 가다듬어야 했습니다. 독일에서부터 개혁의 기치를 든 기독교는 프랑스, 스위스를 휩쓸고는 영국에 착륙했습니다. 거기에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우리나라에 19세기에 들어왔습니다. 일제시대에 들어온 한국교회는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신사참배문제, 자유주의 신학과의 전쟁, WCC로 인한 분리, 교회의 대형화, 교단과의 수위권다툼, 정교유착으로 인한 타협 등으로 인해서 교인들이 이해하는 것도 별로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힘을 과시하고 세상사람보다 더 세상적인 것이 교회라는 인상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진리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장로요한이 말하는 진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계시한 말씀으로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요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요14:6). 그 예수님 안에 사는 것입니다(요8:31-36).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예수님과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입니다(요이1:9). 진리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아 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요14:16/요6:29). 그를 증거하며 그 안에서 서로 하나 되어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요17;20-26). 이것을 우리가 행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이 땅에서의 삶입니다.

성경대로 살려고 애쓴 사람 중에 애굽 출신 콥트인 성 안토니(256-356)가 있습니다. 이 안토니는 250년경에 이집트의 부유한 그리스도인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신앙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안토니는 20세가 되기 전 양친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누이 손에 맡겨졌습니다. 그러던 안토니가 교회에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마19:21)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즉시 자신의 유산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부동산을 팔아 자신의 누이를 돌볼만큼만 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그 후 안토니는 인간사회로부터 점점 멀리 떨어져 사회와 완전히 동떨어진 사막에서 마귀와 투쟁하며 금욕주의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 사도나 사도요한, 그리고 사도들은 교회가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 받아야 한다고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예수님과함께 죽으며, 함께 부활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어디에도 없는 기관입니다. 교회는 천국을 항상 맛보고, 미리 천국을 알게 하는 곳입니다. 비록 우리는 이 세상에 몸을 두고 있지만 항상 본향인 천국을 소망하며 나그네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시민권을 두고 있지만, 우리의 진정한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소망은 이 세상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교회가 이러한 것들을 수호해야 교회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진리를 수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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