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명령
어느 나라든지 국민들이 투표를 해서 국정수반에 당선되면, 국민들이 믿을 수 있는 국정철학을 발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임이 했던 일들이 옳으면, 그것을 반드시 계승해야 합니다. 만일에 옳은데도 계승하지 않고, 무조건 헐고, 새롭게 세운다면 국가가 이상하게 되어 국민들이 힘들게 됩니다. 지난 정권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국정전반에 걸쳐서 수정을 할 시에 국민들은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나라가 발전한다든지,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에는 지속적으로 좋은 정책이 필요한 것입니다. 별로 알지도 못하면서 국민들의 가는 길을 막아설 때, 그 정책은 대단히 나쁜 정책입니다. 우리나라의 혹자들은 정권만 잡으면 무조건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위한 대화도 막아버리고, 국민 중 일부, 그것도 그러한 사람들은 국가에 대한 철학도 없습니다. 따라서 국정철학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정권을 잡을 때 국민들이 엄청 고통을 당했습니다. 4대강공사라든지, 해외개발 사업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실익은 전혀 없으면서 마치 거대한 이익이 있는 것처럼, 과대포장을 했기 때문에 국가에 치명상을 입었음을 우리들이 아주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의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은 자신의 철학과 사명을 그의 제자들에게 맡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로 보고나서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복음이 전 세계에 퍼지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다시 하나님의 나라에 올라가셔야 했습니다. 누가는 그의 친구 데오빌로에게 그간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1절에서 3절을 보면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누가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둘 다 데오빌로에게라는 사람에게 써 보냈습니다(눅1:3,행1:1). 과연 데오빌로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3에서 누가는 그를 “데오빌로 각하”/Qeovfilo" kravtisto"라고 불렀습니다. 각하란 말을 쓰는 것을 보아 데오빌로는 로마정부의 한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총독을 “각하”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를 심히 박해했던 로마정부의 고관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그런 사람에게 목적을 가지고 편지를 쓴 것입니다. 누가는 기독교를 로마정부에 천거하고자 했습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여러 차례 반복하여 로마의 지방장관들이 바울에게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 주었는지를 보여 주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13:12에서는 구브로의 총독 서기오 바울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18:12에서 아가야 총독인 갈리오가 고린도 사건 때 철두철미하게 공평했던 것을 기록했습니다. 16:35절에서 빌립보의 관헌들이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은 후 바울에게 공개사과를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19:31절을 보면 에베소의 관현들이 바울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쓰기 전까지는 로마관헌들이 친하고 기독교에 대해 공정하고 공평한 태도를 취한 것을 여러 번 보여 주었습니다. 더 나아가 누가는 기독교인들은 신령하고 충성스러운 국민이며 항상 그렇게 인정되어 왔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노력했습니다, 18:14절에서 총독 갈리오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부정하거나 괴악한 일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19:37절에서 에베소의 서기장이 기독교인들에게 유리한 중언을 합니다. 23:29절에서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바울에게 불리한 말을 하지 않으려고 매우 조심합니다. 25:25절에서 베스도는 바울이 죽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고 진술했으며, 베스도와 아그립바는 같은 장소에서 만약 바울이 황제에게 호소하지만 않았다면 석방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는 이 글을 기독교인들이 증오와 박해를 받을 때 썼으므로 로마 관헌들이 기독교에 대해 항상 공평하게 대했으며, 기독교인들을 악한 사람들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으로 글을 썼습니다. 이토록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바칠 수 있던 가장 고귀한 것인 예수님의 이야기라고 써서 헌정한 것입니다.
I.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1-3)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단어적인 차이로는 “이”와 “저”의 차이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ejn tw'/ aijw'ni touvtw//en tô aiȏni toûto)은 우리가 살아 있을 때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저 세상 즉 오는 세상(ejn tw'/ mevllonti/en tô mêllonti)은 우리가 이 세상의 판단으로 죽었을 때의 세상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경험합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갑니다. 한번 ‘저 세상’으로 가면 다시는 ‘이 세상’으로 오지 못합니다.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는 절대로 올 수 없습니다. ‘저 세상’에 영원히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 세상’은 영원합니다. ‘이 세상’은 불과 100년 안팎입니다. 그러나 ‘저 세상’은 영원합니다. ‘이 세상’은 사람들의 육안으로 보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저 세상’은 사람들의 육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세상’은 우리들의 육안으로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 세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매우 소홀하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 세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직 이 세상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을 때는 모두 같이 있습니다. 가족과 같이 있고, 친지들과 같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 세상’에 갈 때는 나누어져서 가게 됩니다. 그때는 내 마음대로 가지 못합니다. 선택사항(option)이 아닙니다. 죽기 전에 “천국에 갈래?” “지옥에 갈래?”라고 묻지 않습니다. 각각 분리되어서 automatic으로 갑니다. ‘저 세상’에서 분리되는 기준은 사람들이 웃었겠지만,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영접했느냐, 안했느냐”입니다. 그 외의 다른 어떤 기준은 없습니다. “선한 행동, 윤리적인 행동”은 아예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 도덕적인 행위이지 ‘저 세상’에서는 전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과 ‘저 세상’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실(fact) 구약시대만 해도 ‘오는 세상’은 미래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이 세상에 들어오심으로 해서 ‘이 세상’과 ‘저 세상’은 긴장관계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이 공존하는 세대로 변했습니다. 어떻게 공존하는 세대로 만들었습니까?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헌정(presentation) 했다고 했습니다.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누가가 먼저 쓴 글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1:1-4절을 보면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써서 헌정한 복음이 누가복음인데 그 안에는 “예수님의 행하심, 예수님의 가르치심, 사도들을 택하시고 명하신 일, 그리고 승천하신 날까지”를 기록했습니다. 즉 누가복음 안에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일부터 다시 ‘가신 일까지’가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까지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은 ‘저 세상’의 약속을 가져다주는 세상인데, 곧 예수그리스도의 ‘행하심’과 ‘가르치심’에서 출발합니다.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저 세상’에서의 삶을 약속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사람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지금 당장 미국을 우리에게 준다 해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한다면 물려야 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 사면령을 내리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들은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화목하게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성취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 있는 우리들이 ‘저 세상’의 능력을 체험하고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저 세상’을 ‘이 세상’에서 확실하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했다는 것은 우리나라 전체를 선물 받은 것보다 더 기뻐해야 할 사건이며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에 대해서 늘 감사하며,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두 번째로 3절에서 5절을 보면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누가는 조용하지만 새롭게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데오빌로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II. 구원을 위해 제자들이 할 일(3-5)
프랑스사람들은 영어를 별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는 프랑스어를 반드시 씁니다. 영국 사람들도 미국의 영어를 별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국식 발음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미국식 영어에 죽습니다. 영어에 살고, 영어에 죽습니다. 어린쥐, 어미쥐 하면서 orange의 본토발음을 하려고 굉장히 애를 씁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 영어를 모른다고 해도 흉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어를 모르면 흉입니다. 우리가 영어를 모른다고 해서 그다지 불편하지 않습니다. 미국사람이나 영어를 잘해야지, 한국 사람이 영어를 미국사람보다 잘한다고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닙니다. 서울을 ‘서울’로 발음해야 하는데 ‘서우-’로 발음한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미국이 자국어를 왜 세계 공용어로 만들려고 합니까? 미국이 세계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식의 모든 것을 세계로 퍼뜨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강제로 자신들의 문화를 세계로 퍼뜨리려 한다고 해서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는 자발적으로 전해져야 합니다. 주전333년에 Alexander는 Hellas문화를 전 세계에 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죽었습니다. 주전 60년에 Caesar는 로마의 집정관이 되었습니다. 이후로 그의 정치철학을 전 Roma제국에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암살을 당했습니다. Napoleon이 Europe을 제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Hitler와 Mussolini(Benito Mussolini), 일본의 도조 같은 악한 자들이 세계제패를 하려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들이 왜 실패했습니까?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하려고 한 것들은 모두 자신들의 악한 발상들이었습니다. 무력적인 발상들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한 위험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실패해야 했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패하지 않았다면, 역사적으로 세계가 위험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Hitler나 일본의 흉악무도(凶惡無道)한 자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끔찍한 일입니다. 따라서 전 세계적으로 전할 일이라면 우선 그 발상이 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력성이 있으면 안 됩니다. 공정성이 있어야 하고, 인류를 살리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계화(globalization)가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것을 전한다 해도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전해지지 않습니다. 또한 전할 사람들이 있다하더라도 전할 내용이 시원찮으면 전할 수가 없습니다. 전할 내용이 좋다하더라도 그것을 잘 전하지 못하면 역시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적인 것들이 되고 세계화가 되려면 내용도 좋아야 하고, 전하는 사람들이 좋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주신 상품(commodity)은 극상품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상품은 나라전체를 주고서라도 구해야 할 상품이었습니다. 현재 국제적인 최고의 상품은 석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상품은 그보다 더 좋은 상품이었습니다. 꼭 구해야 할 극상품입니다. 얼마나 좋은가? ‘저 세상’에까지 소용되는 필요한 상품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품은 ‘이 세상’에서 꼭 구해야 할 상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드신 제품입니다. 누구도 이 상품을 만들지도 못하고 복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상품명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상품을 팔지 말라고 했습니다. 동행해야 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수님께 들었던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14:26을 봅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보혜사입니다. 보혜사를 NIV성경에서는 Counselor로 NKJV은 Helper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ASV(미표준역)과 Darby성경은 Comforter로 번역했습니다. 영어의 보혜사(comforter)란 단어는 Wycliffe(1320 –1384)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Wycliffe시대 1300년에서 1400년경에 comforter란 단어는 Latin語 용감하다는 fortis에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보혜사란 사람에게 용기와 힘을 불어 넣 어 주시는 분입니다. 곧 하나님이신 성령이십니다. 제자들이 가져갈 상품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만드시고 함께 하시는 상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너희들은 그가 오실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 나가라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란 어떤 사람이 물에 푹 잠기듯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지배받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은혜를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의식이었습니다. 실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성령세례는 실체였습니다.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을 때에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참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세례를 받을 때에 전하는 제자들이나 전함을 받는 사람들에게 성령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왜 기다리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의 복음을 열정적(passionate)으로 전하면 되는데 왜 기다리라고 하십니까? 열정(passion)을 앞세우고 가면 되는데 왜 말리십니까? 무장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마귀는 제자들이 나오자마자 잡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마귀와 세상은 무력을 앞세워서 공격해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 붙잡히지 않으면 그냥 나가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성령세례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마치 마력적인 체험을 하는 양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성령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셔서 우리와 우리의 전도를 받는다든지, 우리의 사역의 대상에게 함께 하심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지, 특별한 능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받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간 의심했던 제자들에게 40일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믿도록 독려하셨습니다. 믿음을 확실히 갖도록 사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로 올라가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에 또 한분의 하나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입니다.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의 구원을 모두 마련하셨습니다. 망하지 않을 길을 모두 마련하셨습니다. 그는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교회의 지성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죄를 폐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간들이 살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물론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첫 번째 명령을 받은 제자들도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위명령은 제2, 제3, 제4의 제자들이 계속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 역시 그 대위명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약속하신 성령도 이미 우리는 받았습니다. 받은 그 은혜를 우리는 사장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할 일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많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과 우리 중, 우리가 주체(main body)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체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돕는 자일뿐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의 대위명령에 임해야 합니다.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내가 부흥시켜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은퇴한 신자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일광욕을 즐기듯이 교회에 나와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야성(wild)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마귀를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야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모여야 합니다. 부지런히 전해야 합니다. 이미 구원을 이루신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모여야 합니다. 부지런히 기도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가서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주님께로부터 들은 성령님과 함께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삼위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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