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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6:1-6 

 

역사적으로 모든 나라가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그 안에서 자꾸 분열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 잘될 수 있는 토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어울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해방 이후로 분열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남북이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념상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지역적으로도 분열 현상이 뚜렷합니다. 지도를 그려놓고 색칠하라 하면 망설이지 않고 색칠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통일이라는 말까지 하지만, 좋은 일들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 큰 힘을 발휘 할 수 있는 힘입니다.

 

복음의 전파는 예루살렘에서 성령님의 역사로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계속 퍼져 나갔습니다. 유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파되기 위해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성령님께서 역사 하신 것입니다. 120명에서 시작되어 한 번에 3000명이 더해졌습니다(2:41). 이어서 5000명이 또 더해졌습니다(4:4). 숫자상으로 812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는 이스라엘 숫자의 헤아림법입니다. 남자 20세이상 50세 미만의 숫자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교회 성도의 정확한 숫자는 8120명의 두 배 일지, 다섯 배 일지, 더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토록 예루살렘교회가 갑자기 확장되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루살렘교회의 폭발적인 확장에는 그 배경이 성령님이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주도하시는 성장의 배경에는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기 위해서 먼저 예루살렘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예루살렘교회가 폭발적으로 확장한 배경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복음 전파의 기반 다지기라는 것입니다.

 

하루에 수천 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수천 명이 여기저기서 모였습니다. 12 명의 사도들로서는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鼓舞的인 현상과 함께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원망한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Hellenists or Grecian Jews)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히브리파는 대부분 팔레스타인 태생입니다.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Greece-Roma의 각지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들은 Hella어를 사용했습니다. 유대 사회 내에서 이 히브리파와 헬라파 유대인들 간에는 갑자기 어떤 긴장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긴장 관계가 예수님을 Messiah로 인정한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문제는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자들이 헌납한 공동 재산으로 가난한 성도들에게 매일 구제금을 할당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어느 한쪽에만 이익이 많이 돌아간다는 불평이 생긴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과부중에서, 헬라파 과부들은 히브리파에 비하여 덜 혜택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히브리파 사람들이 구제금 나누는 일을 담당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를 불평 없이 돌보는 직책을 만들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서 교회는 앞으로 더 나갈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사도들이 이 일에 전적으로 매달릴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리라 사도들은 성도들에게 봉사하랴, 말씀을 전하랴, 기도하랴 정신이 없었습니다. 어떤 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이 제일 신경을 써야 할 것은 말씀을 전하며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들이 소홀해졌습니다. 이 일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다른 일들이 자기들의 일평생 전부를 분주하게 만들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제일 중요한 일이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사들은 설교하는 일을 위하여 전심을 다 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노력해야 하고, 연구해야 하며, 이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흔히 설교해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합니다. 왜 목사들이 그런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자신이 하나님입니까?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했습니다. 목사로서 제일의 필수조건은 말씀 연구입니다. 설교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에서 소홀해지면 성도들에게 죄송해집니다. 그래서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 일들을 처리하려고 사도들은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우리는 사도와 제자라는 말을 구분해야 합니다. 먼저 사도ajpovstolo"/apôstolos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 Hella어에서 처음에 해양언어였습니다. 화물선이나 보낸 선단, 후에는 원정 함대의 함장이나 해외로 임무를 위해 파견된 자나 원정대 또는 일단의 식민 개척자들을 의미하였습니다. 이것을 교회에서 차용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3:1), 교회가 보낸 사자(고후8:25), 야고보(1:19) 그리고 바나바(14:4)에게도 적용된 바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도란 열두 사도와 바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한 사도라는 호칭과 직위는 승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직은 초대교회 당시의 독특한 상황의 요청하여 생겨난 단회적이었습니다.

제자 maqhthv"/mathtês배우는 자, 생도라는 뜻입니다. 제자라는 말은 기독교 공동체 내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서신서에서는 형제혹은 성도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영적 사업과 물질적 구제사업 모두를 중요시했습니다. 구제 사업상의 문제들이 발생했을 때 사도들은 이 문제를 그냥 넘기지 않았습니다.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결정을 모색해 나갔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교회란 어떤 틀(frame) 속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실제적인 필요에 대응하여 성경적인 방향으로 꾸준히 개최되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죄악 세상에서 하나님께 부름받은 성별된 자들의 모임입니다. 다른 것과 달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거룩한 신앙 공동체로서의 보이지 않는 교회(무형교회)입니다. 또한 거룩한 공동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일정한 장소를 보이는 교회(유형교회)입니다. 구약적 관점에서 교회는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천사들 앞에 경배하고 여호와를 섬기기 위하여 경건하게 서 있는 구속된 공동체입니다. 신약적 관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공동체로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Messiah인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권위 있는 교리의 교사들로서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하는 열두 사도들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영적인 교제인 동시에 장로들의 지도 아래에 있는 지역 회중들의 전 세계적인 조직입니다.

 

교회의 문제를 사도들은 제자들에게 open 했습니다. 공궤 할 사람을 따로 택하자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제자는 집사를 세울 때 몇 가지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첫째로 믿음이 든든한 사람입니다. 이때는 교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든든한 사람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보지 못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박해가 심했기 때문에 겉으로는 믿음이 좋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닥쳐오면 그만 주춤해 버린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집사나 교회의 직분을 맡을 사람은 먼저 믿음이 든든해야 했습니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정규교육을 교회에서 받지 않았습니다. 불신의 세상 교육기관에서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과 지식이 상충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지혜가 충만해야 했습니다. 미묘한 상황을 지혜롭게 처리해야 했습니다. 구제를 관장할 능력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지혜로워야 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구별할 줄을 알아야 했습니다. 교회의 직분을 맡으려면 반드시 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거짓 선지자, 거짓 스승, 사이비 지도자, 못된 장로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복음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해서 순진한 교인들을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지혜로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지혜로웠습니다.

 

또한 성령이 충만해야 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 의도대로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로 믿음과 신념을 굳이 구분한다면, 언뜻 들으면 신념은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념은 너무 자신을 믿은 맹신입니다. 예를 들면 운전자가 술을 마시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운전 판단과 대처가 희미해지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대리운전자를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맹신하는 신념은 끝끝내 자신을 믿습니다. “나의 신념 괜찮다. 나의 신념 운전경력이 몇 년인데. 나의 신념 이 정도는 문제없어.”라고 음주운전을 하는 것이 신념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합니다. 가나안의 첫 성 여리고를 공략하는데 작전회의를 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한 바퀴씩을 돌라고 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그들은 그대로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했습니다. 기드온이 전쟁 소집 나팔을 불었을 때, 3,2000명이 모였습니다(7: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많다고 하셨습니다. 적군의 숫자는 어마어마했습니다.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은지라(7:12)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 말씀대로 2,2000명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시 9700명을 돌려보냈습니다. 전부 3,1700명을 돌려보냈습니다. 이제 남은 사람은 300명입니다. 전투편제 비교를 해보니 메뚜기의 중다함+약대의 무수함+ 해변의 모래처럼 수다함 대 300 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까?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는 사람입니까? 40일 금식기도를 몇 번 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사람들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법도 잘지키고, 남에게 잘하며, 하나님의 일에 협력하고,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성령에 의해서 거듭난 자들입니다. 교회는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성도들끼리 뭉쳐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성전을 형성해 갑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성도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잡음 없이 합니다. 교회의 직분을 맡은 사람은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의 일을 하는 사람은 세상의 기준과도 복합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난 하나님하고만 잘할 거야.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하나님하고만 좋으면 되지 뭐.”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도 충성해야 하지만 사람들에게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어떤 것입니까? 사도들은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칭찬 듣는(marturoumevnou") 사람을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십계명은 두 돌판으로 되었습니다.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섬기는 법, 5계명에서 10계명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다 잘해야 합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선택된 사람들은 칭찬 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봉사직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목회 일선에서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성도들로부터 좋은 평판이 있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당면한 문제를 잡음 없이 처리해야 했습니다.

사도들은 이와 같은 자격을 갖춘 사람 일곱을 뽑아 안수했습니다. 사도들은 일곱 사람을 택한 후 그들에게 안수하였습니다. 일곱 사람을 세운 것은 공동체였습니다. 이들에게 직무를 맡긴 것은 사도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이 그들에게 직무를 맡긴 것은 기도한 후에 그들에게 안수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구약에서는 손을 얹는 행위가 축복할 때였습니다(48:13). 희생을 드리는 사람이 제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과 대상물 사이의 동일성을 표현할 때 손을 얹었습니다(1:4;3:2;4:4:6:21). 후계자를 세울 때 손을 얹었습니다(27:23). 미쉬나(Sanhedrin iv. 4)에 의하면 안수를 통하여 산헤드린 회원이 되었습니다. 이 경우에는 열 두 사도가 일곱 집사에게 특수한 임무를 맡겨서 자기들에게 가담시킨다는 의미의 안수였습니다. 물론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일곱 사람은 이미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세워진 사람은 Stevfano" 스데반, Fivlippo" 빌립, Provcoro" 브로고로, Nikavnwr 니가노르, Tivmwn 디몬, Parmena'" 바메나, Nikovlao" 니골라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일곱을 집사”(deacons)라고 불렀습니다. 여러 교파에서 집사는 교회의 재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 제한된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대목에서는 집사라는 말의 어원인 헬라어 명사 diakonos를 쓰지 않았습니다. diakonos와 동일한 어원을 갖는 diakonia가 쓰였습니다. 2절의 일삼는diakonei'n ‘섬기다라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diakoniva는 매일의 구제(1)말씀 전하는 것”(4th'/ diakoniva tou' lovgou)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곱 명은 기능면에서 볼 때, 집사보다는 헌금 분배자라고 불러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오늘날의 세계는 지도자 부족 현상이 심각합니다. 국가나 교회나 우리 사회에 지도자 부재로 많은 문제가 우리 앞에 산적해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끔찍한 핵무기공장이 건설되고, 인권은 광범위하게 침해받고 있으며, 환경과 에너지의 위기, 남북의 경제적 불균형 문제가 산재해 있습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비참한 장기적 실업, 산업 간의 마찰의 지속(노사간), 인종 분쟁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존속하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면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의 결혼과 가정의 안정을 위협하는 압력들, 의 전통이나 성에 따른 역할에 도전, 그리고 인구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영적인 면으로는 만연하는 물질 지상주의와 초월적인 실재에 대한 상실이 문제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제 세계가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것을 어떻게 피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기술적인 지식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현명한 지혜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현대인들은 혼란에 빠지고 당혹해하며 소외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유를 빌리자면 우리는 목자 없는 양 떼와 같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도자들은 자주 장님을 데리고 다니는 장님 길잡이 같습니다.

소위 leadership에는 많은 종류와 수준이 있습니다. leadership은 세계적인 소수의 정치가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국가의 최고 관리층에 한정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leadership은 어떠한 사회든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목사는 그 지역의 교회나 공동체 안에서 지도자입니다. 부모들은 그들의 가정과 집에서의 지도자들입니다. 학교에서는 선생이 대학에서는 교수가 지도자입니다. 회사나 공장의 중역들, 판사들, 의사들, 정치가들, 사회사업가들, 공무원들 모두가 각자의 분야에서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갖습니다. 방송국에서 여론을 조성하는 사람들-작가, 극작가, 저널리스트, 라디오, TV의 방송인들, 예술가와 프로듀서도 모두 지도자입니다. 세상은 이 모든 다른 상황들 가운데서 더 안목 있고, 더욱 용기 있고 더 헌신적인 지도자들을 바랍니다.

그런데 지도자는 태어나기도 하고 길러지기도 합니다. 미국의 흑인 교육학자 Bennie E. Goodwin소질 있는 지도자들은 탄생하는 것이고, 효율적인 지도자들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Shakespeare의 유명한 시 구절에는 위대한 것을 두려워 말아라. 어떤 사람들은 위대하게 태어나지만, 어떤 이들은 위대함을 성취하고, 어떤 사람들은 위대함이 그냥 그들을 찾아오기도 한다.”라고 했습니다. 경영학 총서는 천부적인 지도자”(BNLs, bom natural leaders)에 관해 말합니다. 그들은 강한 智性과 개성, 그리고 인격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Oswald Sanders는 기독교적 leadership은 타고난 것과 영적인 것의 조화 혹은 타고난 재주와 영적인 재능의 조화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사와 잠재적인 leadership 모두를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Closing 일반적인 leadership의 표지와 특별한 기독교적 leadership의 표지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가 시작하자고 부추기기 전에 우리 스스로 시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 따를 만한 길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우리를 부르신 분이 누구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다음에는 우리를 부르신 분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끈기있게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이기 때문입니다. 변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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