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에게 닥친 재앙의 원인
욥기1:1-22
모든 사람들의 꿈은 재물이 많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재물이 많으면 인생이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좋은 곳에서 좋은 집을 짓고,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돈이 많은 도시들은 늘 번창하고 있습니다. 예로 미국의 首都(수도)도 아니면서 유명한 도시가 New York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미국의 수도가 어디냐고 물으니까, 바로 말하기를 New York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중국의 수도는 Beijing입니다. 그러나 Hongkong이 더 유명합니다. 왜 이들의 도시가 수도보다 더 유명합니까? 돈이 많이 유통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은 때로 실력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돈만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건강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수천억 원의 돈을 가지고 있어도 일 년 365일을 병원에 누워있다면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건강이 제일이리고 말합니다. 돈도 있고, 건강하지만, 또한 자녀가 없다면 또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돈이 많아도 물려줄 사람이 없으면 그것도 불행입니다. “다 쓰고 죽으면 되지”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바로 불행입니다.
사람이 행복하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단 돈이 있어야 한다. 건강해야 한다. 자녀들이 있어야 한다. 여기까지가 세상 사람들의 행복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는 자들은 첫째로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있어야 하며, 건강해야 하고, 돈이 있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1절에서 5절을 보면
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2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3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4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I. 바른 생활의 욥(1-5)
우리나라에도 바른 생활하신 분들이 역사적으로 많습니다. 그중에 백범 김구 선생님을 꼽을 수 있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고 말한 그의 말은 유명합니다. 임시정부를 총지휘하며 오직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분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평생을 나라를 위해서 바르게 산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스 땅에 있는 욥은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욥의 profile을 성경은 한 마디로 말해서 완벽(!T;/tâm/순전), 정직(rv;y:/yâshar),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r/raʽ')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아들딸이 총 열 명입니다. 재산 또한 거부입니다. 양이 7000마리입니다(105억원/150만원). 낙타가 3000마리입니다(240억원/800만원). 소가 1000마리입니다(35억원/350만원). 암나귀가 500마리입니다(13억원/260만원). 대충계산해도 393억 원이 넘습니다. 당시 중동에서 이렇게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여기에 부동산과 다른 것들을 계산하면 아마도 1000억 원 이상 될 것입니다. 욥은 동방에서 소문난 거부였습니다. 재산이 이렇게 많으면 가족관계가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욥의 가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화목했습니다. 누가 생일잔치를 해도 모두 모여서, 함께 잔치를 했습니다. 정말 이상적인 가족관계까지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욥은 돈이 많고 이상적인 가족관계를 형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앙도 좋았습니다. 아들딸들이 잔치를 하게 되면 신앙에서 벗어날 수가 많습니다. 이 문제를 욥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했습니다. 욥은 잔치가 끝나면, 항상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혹 자녀들이 잔치 중에 죄를 범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만큼 사는 모습이 철저했습니다. 욥은 재난을 당할 어떠한 짓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완벽하지 못한데, 성경은 욥이 완벽하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욥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아마도 상상하지 못할 것입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들은 거의 신앙이 밑바닥입니다. 신앙이 있으되 노리개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모든 것을 다 갖추었습니다. 성경의 기록으로 보아 멋진 신자였습니다. 욥은 완벽했습니다. 아들딸이 많은 유복한 가정이었습니다. 재산도 많았습니다. 무엇하나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욥에게 고난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고난과 환란을 당할만한 조건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면 욥은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동방에 욥이 있었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로 인해서 욥과 아들딸들이 복을 받고, 행복하게 잘살았다고 기록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받아야 할 근거와 원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욥에게도 고난이 찾아오더라는 것입니다. 6절에서 12절을 보면
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7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II. 하나님의 자랑을 받는 욥(6-12).
지금까지 욥을 비추던 camera가 천국을 비쳐주고 있습니다. 천상의 회의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불러놓고 세상의 일들을 지시하시는 곳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상의 회의장에는 하나님과 천사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단도 끼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물었습니다. “어디어디를 돌아다녔느냐” 사단은 “여기 끼웃 저기 끼웃”하며 돌아다녔다고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야, 다니는 중에 내 종 욥을 자세히 보았느냐, 그렇게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 봤어? 또 나를 그렇게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을 본 일이 없지?” 그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단이 뭐라고 말합니까? “주께서 잘 해주시니까 그렇지요. 주신 걸 뺏어보십시오. 바로 주님의 면전에서 욕할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망설임 없이 바로 사단에게 욥을 치시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래 어디 한번 해봐라”하지만 욥의 목숨은 절대로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사단은 떠났습니다. 욥에게로 간 것입니다. 욥을 괴롭히고 하나님께 욥의 불신앙을 보여주고자 간 것입니다.
본 6절에서 12절의 내용을 욥은 절대로 모릅니다. 사단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을 욥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천사들과 사탄만 알 뿐입니다. 욥은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사단이 욥을 치기 전에 사전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알려주시지도 않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바로 알려주었을 텐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욥아 이런 일이 있으니 어떻게든 견뎌라’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의문사항을 가질 수 있는 내용이 어떻게 사단(@f;%C;h'/sâtân/슥3장/대상21:1)이 하나님의 천상회의장에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탄은 성경에서 타락한 천사들의 우두머리에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사탄이라는 말은 ‘대적자로 행동 한다’는 말입니다. 영적세계에는 하나의 사탄과 다수의 귀신들(daimovnia)이 있습니다. 원래 귀신들도 거룩하게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타락해서 자기자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악령의 타락을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신 때와 인간이 유혹을 받아 타락하게 된 사건(창3장)사이에 일어났다고 봅니다. 마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반대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신자들이 잘되는 꼴을 못 봅니다. 항상 괴롭히고 찢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분쟁에는 항상 사탄이 끼어있습니다.
사단이 거룩한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왕상22:19-22(····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슥3장(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계12장(하늘에 ···· 이적이 보이니····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에도 나오는데 마치 가룟 유다가 제자들 가운데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이 하나님께 불만인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지만, 멸망시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떤 계획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성도들을 반대하는 것이 사단의 본업이지만,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편재(omnipresence)하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편재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욥을 매우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에게 욥을 매우 자랑하셨습니다. 얼마나 욥을 인정하셨으면 1-5절까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셨습니다.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 말씀을 몇 번이나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사단에게까지 하셨습니다. 사단은 욥의 예배를 볼 때마다 눈에 가시였는데,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욥을 그 자리에서 죽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천상회의에서 욥과 하나님을 떼어 놓을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사단은 생각할 때 욥이 가진 것을 모두 뺏으면, 즉시 하나님을 떠날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아무리 그렇게 할지라도 욥이 절대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본인들이 잘못해서 받는 고난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법을 어기고 사람에게 해를 끼쳐서 감옥에 갔습니다. 감옥에 가서 “왜 이렇게 나에게 이런 고난이 오는가?”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은 하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고난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시험입니다. 저 신앙이 진짜인가? 짝퉁인가? 저 눈물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그것을 시험하기 위해서 고난이 닥치는 것입니다. 욥기를 기록한 사람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욥 같은 경우는 성경을 보아서 알겠지만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욥같이 어려운 상황을 겪어야 한다는 것은 극악무도한 사람이 겪어야 할 재앙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렇게 고난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느 날 천상회의가 문제입니다. 천상회의에서 하나님이 욥을 자랑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을 통해서 비로소 욥은 더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이 어느 정도입니까? 벼락천둥치고 지진이 일어나며 세상 고통을 혼자 모두 겪는 듯한 고통을 겪습니다. 13절에서 22절을 보면
13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14 사자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15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6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7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8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19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한지라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III.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을 받는 욥
찬송 470장을 부르면 참으로 편안합니다. 내 평생이 순탄한 길 같습니다. 이 찬송을 듣노라면 모든 근심걱정이 없는 사람이 이 찬송을 작사하고 작곡한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라는 가사에서 그 평안함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찬송을 作詩한 H. G. Spafford 교수는 시카고 대화재사건 때 재산을 전부 잃었습니다. 그와 가족들은 살 희망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유럽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Spafford는 화재로 타버린 무디 교회를 보살피기 위해 남았습니다. 그래서 부인과 네 딸을 먼저 배에 태워서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 배가 대서양에서 영국 배와 충돌했습니다. 그 배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226명)이 다 죽었습니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가슴이 찢어질듯 했습니다. 가슴이 저미는 듯 했습니다. 그야말로 죽을 것 같았습니다. 아마 Spafford에게 신앙이 없었다면 바로 자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으로 극복하고 1873년에 이 찬송가를 작시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떠나자마자 욥의 집에 큰 사고가 터졌습니다. 그날도 아들딸들이 큰 아들 집에서 잔치를 했을 때입니다. 한 종이 보고하기를 시바인 들이 종들을 모두 죽이고 소와 나귀를 다 빼앗아갔다는 것입니다(13-15절).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른 종이 보고하기를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양과 종들이 다 죽었다고 했습니다(16절). 또 다른 종이 갈대아 사람들이 세 때로 와서 약대를 빼앗아가고 종을 죽이고(17절), 그리고 열 명의 자녀들이 잔치하는 집을 덮친 태풍으로 인해서 열 명의 아들딸들이 모두 죽었다고 했습니다(18-19절).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모두 잃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의 뜻대로, 범죄(af;j;)하지 않았습니다. 꼴사납게 하나님을 원망도 하지 않았습니다(20-22절).
욥은 하루 만에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재산을 빼앗기고, 아들딸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욥의 재산이 가축만 약 380억 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없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이쯤 되면 사람들이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욥은 다 내려놓았습니다. 아니 내려놓아야만 했습니다. 욥은 조용히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하나님께 직접 원망하지 않고, 돌려서 불평을 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당장 하나님께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이 고난을 통해서 신앙이 점점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욥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우스(Uz/에돔의 남쪽, 아리비아의 서쪽에 위치한 지역)라는 땅은 이스라엘 땅밖의 지역입니다. 그러나 욥은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욥이 당한 고난은 어떤 고난입니까? 욥은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의 대표입니다. 욥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고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험하는 고통이지, 욥이 잘못해서 형벌로 당하는 고통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은 의인을 시험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욥의 경우를 통해서 인간의 고난이 꼭 죄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에게도 고난이 옴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도들에게 고난과 환란이 올 때 우리들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합니다. 왜 내가 고통당하지? 저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의 형벌일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저런 고통을 당하지 하고, 豫斷(예단)해버립니다.
그런데 욥의 경우를 보니 고난이 꼭 잘못해서 당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고난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고난은 신자들을 성숙하게 하는 선생입니다. 고난의 연단을 통해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부족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은 인간에게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입니다. 모세는 40년을 미디안에서 고난당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까지 13년의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고난의 쓴잔을 마시지 않고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고난은 신비이며, 우리들과 뗄 수 없는 관계요, 우리들의 스승입니다.
욥의 고난 즉 우리들이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받는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세우기 위한 고난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인생이 성숙되지 못하고, 신앙 또한 자라지 못합니다. 우선 성도들은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께 엎드립니다. 평소에 하지 않던 기도회에 참석합니다. 그리고 전보다 강한 믿음을 가지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래서 신앙이 성숙하게 됩니다. 성도들은 욥처럼 하나님과 사단의 가운데에서 샌드위치적인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때 사단은 우리를 아예 밟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눈동자같이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목적은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더 복된 자리에 올려놓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섭리하심을 우리는 모릅니다. 욥기는 고통 중에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를 찾아가는 지에 대한 모델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된 사람이 가장 복되지 않은 곳에 내려가도 거기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는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한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가장 복된 자리에서 가장 저주된 자리에 떨어져도 범죄 하지 않아야 할 것을 제시합니다. 가장 큰 자의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의 자리에 떨어져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아야 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을 무력화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가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심리적인 안정을 찾기 위해 교회를 찾습니다. 또한 생활의 안정을 위해서 교회를 찾기도 합니다. 삶의 행복을 위해서 교회를 찾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생의 것을 위해서 교회를 찾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이것만을 추구한다면, 종교적인 용어로 기복종교(祈福宗敎)가 됩니다. 이것도 사탄이 원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을 하나님처럼 섭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을 믿기 때문에 때로는 사탄에게 허용된 시험을 하십니다.
사탄이 원하는 것은 신자들의 파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사탄은 우리들을 참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고 있는 한 사탄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 사탄은 무력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신뢰하면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과 은혜만 열릴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시험하도록 내주는 것은 욥을 자랑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아직도 미성숙한 욥을 원숙한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고통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特攻隊(commando)는 특수임무나 기습공격을 실시하기 위하여 특별히 편성된 特殊部隊입니다.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반복훈련과 인내, 그리고 죽음의 계곡을 몇 번이나 넘는 훈련을 거친 후에야 임무수행에 들어갑니다. 그 훈련과 인내가 바로 고난입니다. 우리의 최고선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도들로부터 받는 최고의 영광은 성도들의 고난을 통해서 옵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첩경이요, 우리들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며, 고난 후에는 하나님이 더 높은 위치에 우리를 올려놓으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은 우리의 선생이며, 우리를 더 높은 자리에 올려놓는 크레인입니다. 우리를 더 높이 올려놓는 스승과 크레인인 고난을 기쁨으로 받읍시다. 고난 저 너머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기쁨을 기대하면서 고난에 임합시다. 많은 기쁨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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