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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자를 쓰시는 하나님
사사기6:11-15/2025.4.27
사람들은 큰(great) 것이라는 데에 묘한 매력을 느낍니다. 그래서 ‘大’자라는 말을 이름이나 상호 앞에 넣습니다. 대한민국, 대일본, 대왕, 대예배, 대인, 대 교단, 큰 교회 등 큰 대자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동부에서 서부까지 비행기로 5시간 이상을 가는 미국이나 하루 종일 기차로 달리고 있어도, 미처 성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중국 사람들이 볼 때 가관이라 할 것입니다. 조그마한 나라에서 그것도 절반 나누어진, 거기에 동서로 분열 되다시피한 이 나라를 본다면, 대자를 쓰는 것은 겸연쩍은 일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또한 사람들은 나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을 만나면, 왠지 모르게 기가 죽기도 합니다. 물론 禮儀 면에서는 그렇게 해야겠지만, 스스로를 너무나 비하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러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천지에 자신이 제일 못났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전란 속에서도 나서지 못했습니다. 전란에 처한 이스라엘을 누군가 나서서 구원하기는 해야 하는데,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11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2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13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14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15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하나님의 일은 누가 합니까? 돈 많은 재벌들이 합니까? 수완이 좋다고 하는 정치인들이 합니까? 소위 지성인들이라고 하는 elite들이 합니까? 국가의 모든 걸 책임진다고 하는 행정부에서 합니까? 아닙니다. 이들 중 소수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편에 대부분 서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까? elite들입니까? 지성인들입니까? 잘나가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아주 작은 자들, 자신이 한참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을 더러 부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가리지 않으시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부르시기 전에 한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현 상황을 말씀하셨습니다.
사사기6:7-10 7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은고로 8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9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10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 너희의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에게 고통받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기에 받는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디안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압박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애굽 사람들의 손에서 그리고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모든 나라들의 손에서 거뜬히 구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도무지 말씀을 듣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 가운데 우리는 사사기 시대 기드온을 만나야 합니다.
흔히 기드온의 300용사라고 곧잘 말합니다. 어린이 주일학교 때부터 기드온과 300명은 無敵의 용사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그런가? 기드온과 300명이 Roma시대 때 갈리아 지방을 평정한 시저와 그의 군대만큼 용사였는가? 우리가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은 저로서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11절을 보면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들이 무서워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있는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는 것을 접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이러한 행동은 용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Samson삼손이나 Spartacus스파르타쿠스, 그리고 Alexander알렉산더 등의 용맹과 기드온은 전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의 ‘미’자 소리만 들어도 깜짝깜짝 놀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미’자만 들어도 간이 콩알만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바로 봐야 합니다. 기드온이 여호와를 만나기 전까지 아주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큰 용사여!”(lyIj;h, r/BGI/깁보르 해아일)라고 했습니다. 바로 뒤이어 *M][i hw:hy]/예흐바(아도나이)이므카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했습니다. 기드온은 기가 막혔습니다.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대답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말씀 잘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과거 출애굽 때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적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미디안에게 엄청난 압제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닙니까? 이제 우리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미디안의 손에 붙이신 것 아닙니까? 이제 우리는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기드온은 계속 여호와의 사자에게 들이댑니다.
그런데 14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로 바뀝니다. 12절에서는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와 대화를 했습니다.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14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14절을 보면 바로 여호와로 바뀝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기를 ‘너는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보낸다고 하십니다. 기드온은 더 기가 막혔습니다. ‘내가 무엇인데’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지파, 그중에서도 가장 약한 사람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합니다. 그래서 아예 그런 말씀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할 말씀이 따로 있지, 어떻게 그런 말씀을 쉽게 하십니까? 기드온의 이 말은 절대 겸손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약하디약한 사람이었습니다. 36절에서 40절을 보면,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큰 전쟁이 터져서 무서워 깊이 숨어있는 자에게 미디안과 전쟁을 하라니 말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기드온의 생각은 넓은 gap(간격)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설교가 도덕적인 설교, 윤리적인 설교입니다. 들으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도덕과 윤리는 세상 사람들도, 다른 종교에서도 전유물로 삼고 있는 항목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修養의 종교가 아닙니다. 修行의 종교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展示宗敎는 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살리며,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만들어 낸 어떤 doctrine교리을 퍼뜨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의지해서 앞으로 나아가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구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람들,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 성령님께 속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소유하신 분이 삼위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시시한 사람들의 윤리적인 doctrine을 끌어다 쓰지 않습니다. 만일에 그렇게 할 경우 귀만 즐겁습니다. 그리고 自家撞着자가당착에 빠져버립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데 지금 교회들이 하는 꼬라지를 보십시오. 범죄를 넘어서 무법천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척결해야 한다고 광장에서 떠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역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교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해석되어질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그 말씀을 믿을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시오. 저렇게 사시요’라는 윤리적인 설교는 전혀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끼어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공자와 맹자와 철학자들의 角逐戰場각축전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모토로 삼아야 합니다. 그 말씀을 우리의 기본으로, 그 말씀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가야 합니다. 사람의 경영은 매우 뻔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권을 잡자마자 정적을 제가하려다가 사형을 당할만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권을 잡자마자 다른 나라에 경제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관세25%, 50%는 죽이자는 것이지, 살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경영은 이토록 뻔합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을 돌아볼 때, 너무나 무력하다고 생각합니다. 출신성분 따지니까 더 무력합니다. 지금 상황을 보면 더 무력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만 무력하냐?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나이에, 나 같은 것이 뭐, 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정없이 깎아버립니다. 그리고는 어려워도 아예 일어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일어날 힘이 있는데도 일어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11절과 12절의 여호와의 사자가 14절을 보면 여호와로 바뀝니다. 이분이 도대체 누구십니까? 다니엘의 세 친구가 용광로에 들어갔을 때, 거기 계신 분, 하갈이 사라의 학대에 쫓겨나 물이 없어 금방 죽으려고 할 때 나타나신 분, 삼손의 부모에게 나타나신 분, 그분이 누구십니까?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구약시대 때 수시로 이 땅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성자이신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함께 하시겠다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제이위이신 창조주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미국을 우방으로 두려고 여러 나라에서 무한 애를 쓰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댈만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우산 밑에 있으면 비를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께 속하기를 원합니까?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장군은 함경도에 있다가 이일의 죄를 뒤집어쓰고 백의종군하였습니다. 선조는 그것을 알고도 신립 장군 때문에 묵과했습니다. 그러나 1591년 2월 이순신을 종6품 정읍현감(현재5급)에 제수하였습니다. 곧이어 珍島郡守진도군수로 승진시켰습니다. 이순신이 부임지에 부임하기도 전에 종3품(현 이사관)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습니다. 이어 선조는 이순신이 가리포에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정3품 전라좌수사(현 중장)에 전임하게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지만, 선조는 굳건하게 이순신을 밀어붙여 전라좌수사에 임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용사여! 라고 하시면 큰 용사입니다. 우리가 비록 모자라고 부족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할 만합니다.
성도여러분! 오늘의 우리들은 우리의 약한 생각들을 접어야 합니다. 기드온이 전쟁에서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전쟁 소집 나팔을 불었을 때 3,2000명이 모였습니다. 미디안은 그 수가 엄청 많았습니다. 메뚜기 떼 같다고 했습니다. 8장10절을 보면 13,5000명이 넘었습니다. 따라서 3,2000명:13,5000명은 이미 끝난 전쟁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굳이 물어보십니다. 몇 명이냐? 3,2000명입니다. 뭐 몇 명? 3,2000명! 주님께서 깜짝 놀라십니다. 기드온은 생각하기를 그러면 그렇지! 아마도 군사를 더 오게 하시려나 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현재 인원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를 핑계를 대서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집으로 돌아간 사람이 2,2000명입니다. 이제 1,0000:13,5000명입니다. 이제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또 물으십니다. 이번에는 물가로 가서 사람을 고릅니다. 거기서 선택된 자들이 300명입니다. 나머지 9700명은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기드온이 어떻게 생각한지는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황당했을 것입니다. 3,2000명에 1,0000명, 1,0000명에서 300명으로 줄어들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뻔합니다. 300:13,5000(1:450)명 생각만 해도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승리합니까? 13,5000명의 정예병들이 300명의 민병들에게 패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쟁(War of YHWH)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전쟁이고, 우리들의 전쟁입니다.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전쟁이 우리들의 전쟁입니다. 숫자상으로 볼 때 전혀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전쟁은 사람이 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이 세상은 무엇을 따지기 좋아합니다. 학벌, 지연, 실력, 돈, 외모, 스펙이 탁월해야 좋은 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약하고, 어리석고, 부족해야 ‘사람 괜찮구나!’ 하십니다. 좀 모자란 사람이면 ‘쓸 만한 사람이구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의 ‘다만 신앙’을 보십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 그것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좀 약하다 하시는 분, 희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가슴이 두 근반 세 근반 하는 사람들이 혹 있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은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전쟁이 아니고, 교회의 전쟁이 아니고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망각하고 우리가 덤빌 때 큰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습니까?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목사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회개가 없습니다. 회개가 없다보니 교회에 힘이 없습니다. 교회에 웬 조직이 그렇게 많습니까? 하나님께서는 3,2000명에서 1,0000명으로, 1,0000명에서 300명으로 줄이셨습니다. 조직이 많으면 사람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조직이 없으면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자, 간이 콩알만 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기드온의 300용사라고 할 때 하나님 자리는 없습니다. 300용사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 같이 그런 사람들을 썼습니다. 우리가 우선해서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입니다. [m'v;/shāmaʽ/사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했는지 짚어봐야 합니다. 우리는 곧잘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 혹시 내 뜻대로 살았는지 짚어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할 때 나타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명기28:1-14절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의 복들입니다. 그러나 28:15-68절은 순종하지 않았을 때 받는 저주들입니다.
사람들의 속성은 내 의무와 책임은 다하지 않으면서도 내게 유익될 것은 바로 챙기려 합니다. 신명기28:1-14절은 나에게 맞지만, 15-68절은 나와 관계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책임은 뒷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은 악착같이 받아내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대로 해주시지 않습니다. ‘네가 내 말을 청종하라’ ‘너희가 내 말에 순종하라’ ‘그리하면 너희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힘이 없어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고, 사람들이 순종하지 않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기드온의 기적만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모리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미디안사람들이 쳐들어온 이유가 자명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강조점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곤혹스러운 일들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에 정체성을 부여하셨습니다. 나라를 형성케 하시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철저하게 열 재앙을 통해서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가나안의 신들보다 우월하신 분임을 입증하셨습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는 말씀은 이스라엘과의 언약관계를 확인하는 표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이 모든 것을 저버린다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과 억압은 레위기26장과 신명기28장에 나타나는 언약의 저주의 내용으로 그들이 ‘언약 파기’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기드온이 어떻게 적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했는가만 바라봐선 안 됩니다. 선지자 메시지에 초점을 둬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향한 배교와 불순종을 지적하는데 있습니다. 여호와만이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고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Closing 선지자의 메시지가 끝나자 ‘여호와의 사자’가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상수리나무 아래 앉았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가나안 신들을 예배하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음으로 가나안의 신들을 우습게 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상수리나무아래에서 바알과 아스다롯을 흠모하면서 숭배했습니다. 그런데 상수리나무에 앉음으로 가나안의 신들은 존재하지 않음을 그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만일에 바알과 아스다롯이 살아 있는 신이라면 여호와의 사자와 전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만들어 낸 신, 깎아서 만들고 부어서 만든 것들이기 때문에 허상입니다. 우상은 허상입니다. 그런대도 사람들은 우상에 열을 올립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들에게 우상에 빠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우상에 빠집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목회자가 세속화에 깊이 빠져 있는 것 우상입니다. Martin Luther는 우상숭배는 자기의 의로움과 업적과 장점들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들은 우리 역시 우상숭배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선하지 않으면 우상숭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이 없고 작을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묻는 이스라엘 (0) | 201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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