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낌이 없는 양심(사도행전24:10-23)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바라노라…’ 양심suneivdhsi"/suineîdesis는 suneivdw/suineîdo/이해하다/에서 유래했습니다. 헬라문헌에서 디오, 스트라보, 플루타르크 등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동들을 회고해 볼 때 자신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가 여부에 의거하여 그의 양심이 선한지 악한지를 말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선한양심은 평강을 누립니다. 그러나 악한 양심은 양심의 소유자를 사정없이 괴롭힙니다. 그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헬라문헌은 거의 악한 양심에 관하여 언급했습니다. 이에 반해 로마인인 Cicero는 자주 선한양심과 깨끗한 양심과 좋은 양심에 관하여 언급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양심은 비난과 좌절의 성격을 띠고 나오는 실패와 악에 대한 회고적 지식이었습니다.
한 인간 속에는 두개의 자아가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동일한 사물들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바라봅니다. 그렇지만 동일한 답을 내놓지 않습니다.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답을 내놓습니다. 질서를 지향하는 세력과 무질서를 지향하는 세력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때 갈등은 과거의 무질서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양심은 미래보다 과거에 대한 평가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이 존재론적인 것일 경우, 자아성찰에 있어서 지식이 크게 작용합니다. 하지만 그 갈등이 윤리적인 경우에, 그 자아성찰에 있어서 도덕적 양심이 크게 작용합니다. 사람이라면 이 갈등을 끊임없이 하지만, 사람이면서도 사람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갈등을 하지 않습니다. 무질서와 반윤리적인 행동에 거침없이 손을 댑니다.
후기 Stoa학파에서 양심의 회고적 특성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아 양심의 회고적 특성이 약화되었습니다. 이들은 양심이란 신이 개개인에게 부여한 감시인(testis/증인)으로 생각했습니다. 양심의 역할은 순리대로 살도록 인간을 인도하고 그의 도덕발달을 지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헬라문헌에서 인간의 양심 속에는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믿을 수 있는 방향표지가 들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양심의 임무는 여전히 주로 이미 일어난 일 혹은 아무리 잘 봐주더라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심판을 내리는 사람의 비판적 항소법원의 임무입니다.
LXX에서 suineîdesis는 전도서10:20에서 ‘마음’을 번역했습니다. 집회서 42:18에서는 단순히 ‘지식’을, 지혜서17:10에서는 도덕적으로 나쁜 ‘양심’을 가리켰습니다. 이 구절에서 나쁜 양심은 사법적인 개념을 지닌 것으로 재판관과 형집행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양심에 해당하는 용어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본성에 대한 이해가 헬라인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문제가 더 중요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말씀(시139편)을 통하여 왔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책임 있는 행위를 가능케 하였던 이 말씀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신30:14). 선과 악은 이 말씀에 의하여 인지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것이 이스라엘에게 선했고, 인간들이 선하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하시면 악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시14:1).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양심은 자아를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조화시키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인은 자기의 자의식을 탐색하는 데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책임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신앙고백을 하고 그의 율법을 순종으로 준행하고자 한 것이 구약성경의 양심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양심의 소리는 인간에게 그의 처신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거룩한 재판관의 소리였습니다. 양심의 기능은 마음에 속해 있습니다. 이것은 내적 불화로 나타납니다(창42:21, 삼상24:5, 25:31).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내적인 불화와 갈등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정죄하고 참회하도록 촉구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회개를 통하여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인간을 다시 새롭게 함으로써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기도 했습니다(시51편).
지혜서17:10에서 악은 원래가 소심해서 제 입으로 자신을 단죄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몹시 받으면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양심은 ‘사람 속에서 검사와 판사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필로는 로마인 Seneca가 들은 것만큼이나 높이 외치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양심은 자율적 항소법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형성된 규범적 실체였습니다. 양심의 임무는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자각하여 참회케 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일단 깨어나게 되면, 고소자로 등장하여 양심 소유자를 기소하여 죄를 씌우고 수치를 당케 합니다. 반면에 양심은 그를 바로 잡아주며 회개할 것을 권면하는 재판관으로서 지시하며, 양심은 설득하고 나면 기뻐하고 누그러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양심은 계속적으로 그 죄인을 괴롭힙니다. 양심은 자비하신 하나님 품으로 이 죄인을 이끌기 위하여 이 모든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필로의 양심교리의 구약성경적 기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suineîdesis는 바울서신과 공동서신에서 사용했습니다. 바울서신에서 ‘쉬네이데시스’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서 피력했습니다(고전8:7, 10:25). 고린도교회에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던 주장을 암시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양심은 의지와 지식사이의 분열이나 판단과 행위 사이의 분열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는 ‘자아인식’을 의미했습니다. 양심은 아무런 편견도 없는 공평한 판단력이 아니라 뜻과 행위에 있어서의 ‘자아인식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사항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질적인 양심에 의해 통제되는 것에서 자유 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다른 사람의 보다 더 민감한 양심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구합니다. 바울은 ‘쉬네이데시스’에 어떤 제한을 두었습니다.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자유는 미처 우상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이 참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연약한 자들을 위한 양심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이질적인 양심에 의해 통제되는 것에서 자유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인간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그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강한 자들을 위한 양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보다 연약하여, 더 민감한 양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연약한 자들은 우상들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하여 의혹을 품거나 근심하지 말아야 하며, 강한 자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임의로 먹음으로써 연약한 자들로 하여금 의혹에 빠지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양심만이 변함없고 오류를 범치 않는 안내자라는 사상을 비난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양심이 죽었거나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함으로 해서 양심에 거리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행동의 옳음과 잘못을 결정하는 데는 다른 요소들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 없는 양심은 죽은 양심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사람들 보기에 선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바른 양심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죽은 조상들에게 깍듯이 섬기는 사람들을 바른 사람들이라고 동양적인 사고에서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보시기에는 우상을 심히 섬기는 일이기 때문에 패역한 일입니다.
우리는 많은 청문회를 보았습니다. 참으로 일반사람들은 상상하기는 하지만, 법이라는 테두리가 두려워서 하지 못하는 일들을, 그들은 거침없이 행하여 축재를 하고 부정을 저지른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아무나 하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또한 작금의 목회자들의 윤리적인 문제들이 사회의 issue들이 되어서 회자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학의 교수들이나 연예인들은 잘못하면 바로 사과하고 자신이 맡고 있는 직책에서 떠났습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목회자란 어떤 직업을 가진 자들보다 선명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함을 볼 때 양심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양들을 사정없이 잡아먹는 삯군 목자들이 있기도 합니다. 성전을 짓는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크게 시작하여 감당할 수 없는 규모로 짓다가 보니
참으로 우리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점점 세속화되어 가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양심을 자꾸만 갉아먹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인과 뇌물 (0) | 2016.11.12 |
---|---|
믿으면 좋기는 한데 (0) | 2016.10.29 |
바울의 자기변호 (0) | 2016.10.08 |
아나니아/더둘로/벨릭스 (0) | 2016.09.30 |
교회를 공격하는 사람들 (0) | 2016.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