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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교회의 속성(로마서1:11-15)
전능하신 하나님(전능하신 아버지)을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교회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고대 로마 교회의 신조”
Rufinus가 390년경에 만든 옛 로마신경(the Old Roman Symbo1)은 사도신경의 前身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거룩한 교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700년경에 채택된 사도신경은 “거룩한 보편적 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를 언급했습니다. 325년에 니케아에서 열린 첫 번째 공의회에서 작성된 신조는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the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를 언급했습니다. 381년에 작성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는 “우리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eij" mivan aJgivan kaqolikh;n kai; ajpostolikh;n ejkklhsivan/에이스 미안 하기안 카쏠리켄 카이 아포스톨리켄 에클레시안). 이로써 고대 교회와 중세 교회에서 참된 교회를 묘사하기 위하여 점점 사용되었던 네 가지 속성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속성들은 참된 교회를 묘사하는 적절한 표현입니다(Robert L. Reymond).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가 참된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것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이상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교회들이 참된 교회라고 주장했지만 이상한 교회들이 많았습니다. 어떨 때는 도가 지나치고, 어떨 때는 기준에 모자란 교회들이 많았습니다. 현재도 그렇습니다. 참된 교회라고 주장할만한 교회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권주의자들은 교권에 눈이 멀어 교회의 기본적인 속성조차도 팽개치고 이단 또는 이교도들과 離合集散하는가 하면, 참된 교회도 아니면서 내 교회만을 위해서 철의 장막을 치고 있습니다. 교회의 참된 속성을 무시하면서 말입니다.
바울의 소원 (0) | 2018.1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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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해보는 로마서 (0) | 2018.08.02 |
열 두 사도였던 가룟 유다 (0) | 2018.07.07 |
열 두 사도/맛디아 (0) | 2018.07.01 |
열 두 사도/바울 (0) | 2018.06.23 |
바울의 소원(로마서1:8-10)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육신에 소용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衣食住입니다. 옷을 입어야 합니다. 먹어야 합니다. 비바람을 가릴 거주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들이 최소한만 있어도 괜찮은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계속 업그레이드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인 줄 압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재산)이 인격입니다. 아무리 개차반 같더라도 돈이 많으면 성인군자로 사람들이 인정합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국가가 발전하지 못하고 공동체가 제대로 가지 못합니다. 역사를 왜곡하고 사회를 왜곡되게 하는 것입니다. 경향신문에 의하면 교학사와 리베르스쿨 한국사 교과서가 3·1운동을 ‘폭력적’이라고 기술했다는 것입니다. 아시아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했던 일제의 총칼에 항거한 거족적 저항을 ‘폭력적’으로 기술한 것입니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왜구가 우리나라를 농단하든 말든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 한국인이 되어가지고 이런 못된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즉 富라는 것은 사람을 심히 왜곡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을 짐승으로 돌변하게 하는 것이 사람들이 그렇게 추구하는 富의 副産物입니다. 그래서 인격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거부가 되면 공동체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쪽도 저쪽도 온전히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좋아합니다. 재물은 사람을 편하고 만족시켜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시장에 가려면 삼십리 내지 사십리를 걸어야 했습니다. 즉 12km-16km를 왕복하니까 24-32km를 걸은 셈입니다. 시장에 갔다 오는데 꼬박 늦은 하루가 걸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10분에서 20분이면 갈 수 있습니다. 자동차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을 좋아합니다. 따라서 대체적으로 소원들이 재물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의 소원은 일반사람들과 다릅니다. 8절에서 10절을 보면
8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Roma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10절). 고대 헬라적 서신은 대게 받는 자에게 복을 비는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말도 합니다. 바울사도 역시 이 관습대로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사도는 편지의 머리에 감사의 말을 했습니다. 그 속에 그 편지의 중요한 동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4-9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빌립보서1:3-11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혹 같지 아니한 것을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골로새서1:3-11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이요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 자니라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데살로니가전서2:2-10 2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3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7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고린도교회에는 바울이 그의 기도를 통하여 그들에게 당부하고 있는 것은 고린도의 성도들이 아직도 목표점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7절). 따라서 그들이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9-10절).
이처럼 Roma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좋은 소식에 대한 감사(8절)를 합니다. 이어서 Roma를 곧 방문할 길이 열리기를 바라는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10절).
오늘의 우리들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진정한 소원은 어떤 것입니까? 사도바울처럼 최소한 거룩한 소원을 바라야 할 것입니다.
참된 교회의 속성 (0) | 2018.1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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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해보는 로마서
로마서는 바울서신입니다(롬1:1). 로마서는 바울의 다른 책보다 분량이 많습니다. 로마서는 다른 바울서신보다 전망에 있어서 사색적입니다. 로마서는 稱義(칭의)와 율법에 대한 주된 문제를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논하는 편지입니다. 로마서는 Augustinus, Abélard,1 Martin Luther, John Calvin을 거쳐서 Karl Barth에 이르기까지 로마서는 신학의 발전에 주된 역할을 했습니다.2
로마서는 고대로부터 중세, 근세,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쳐 온 책들 중 하나입니다. 로마서는 종교개혁시대에 개혁자들에게 큰 영감과 신학적 통찰들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신학적으로 로마서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전 세계 도서관에 바울에 관한 수많은 로마서 연구서들과 articles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3
로마서의 저작목적은 보른캄(Gunter Bornkamrm)에 의하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주장하고자 했던 message는 Roma에서, 바울이 Roma로부터 Spain에 이르는 여정에서 계속적으로 선포하려고 했던 메시지와 동일한 것으로 로마서는 바울복음 전체의 강령이며, 이후의 여러 세대들도 로마서를 바울의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4 William Handrixon5은 사랑이 많은 바울은 동료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고(롬1:10,11), 그들과 함께 편히 쉬기 위하여(15:32) Roma에 가기를 원한다는 것이 첫째의 목적이고, 바울이 직접 Roma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로마서를 통하여 Roma교회와 교제를 갖기 원하는 것이다. 바울이 그들을 사랑하기에 로마서를 쓰는데, 자신의 사랑을 나누어주고 그들을 칭찬하며(1:8), 그들을 위해 자신이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음을 알리고(1:9)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며(15:30), 자신의 여행계획을 그들에게 알리고 있다(1:10-12; 15:24). 바울은 반 율법주의자인 오류를 정정하기를 원했고, Roma를 Spain 선교의 본부로 삼기를 원했다. 무엇보다도 바울은 본 서신을 써야 할 필요와 이것을 통하여 로마교회가 기도 가운데 그를 기억해 줄 것을 요청할 필요를 느꼈다.6
로마서의 주제는 바울이 그의 사도권을 입증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복음을 소개하는 데로 방향을 바꿉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소개는 불가피하게 믿음에 관한 논쟁을 수반합니다. 바울은 성경원문을 안내자로 삼아 이 문제로 넘어가 전체서신의 주요한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그 주제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바울은 5장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즉 1-5장까지는 “인간의 유일한 義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임. 그 은혜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제공되고 믿음으로 수납된다고 말합니다. 3장의 끝부분에서 인간의 자만심의 만행을 진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히 거슬리지 못하게 합니다.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았지 행위가 아님을 강조했습니다. 5장은 믿음의 의의 열매와 결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6장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성화에 대해서 논합니다. 7장에서 율법의 효용에 관하여 공명정대하게 논합니다. 8장에서는 많은 위로의 말씀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9장에서는 바울이 자기 자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이 계속 거부하는 안타까움을 말합니다. 10장-11장에서 유대인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간증함으로 그들이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하등의 유익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12장에서는 기독교인의 생활에 대한 일반적은 법칙들을 담고 있으며, 13장에서는 위정자들의 권위에 대해서 말하고 14장에서는 유대인들의 미신적인 행위를 타파하고 또한 유대인들을 지나치게 경멸하지 못하도록 권고합니다. 15장에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의 믿음을 굳게 하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공히 모두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에 달렸음을 말합니다. 16장은 안부들을 묻고 기도로 결론을 맺습니다.7
1.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élard, 1079년~1142년 4월 21일)는 중세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신학자로, 중세 철학사 전체를 지배한 보편 논쟁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라틴어 이름은 Petrus Abaelardus였다. 흔히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2.레이몬드 E. 브라운,『신약개론』김근수·이은순 공역 (서울: 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5), 791.
3.김정훈, “로마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義”『로마서와 하나님의 의』프로에클레시아 신학회 (서울: 도서출판 그리심, 2003), 2.
4.페터 슈틀마허, “바울은 왜 로마서를 썼는가”『로마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목회와신학편집팀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2006), 13.
5.William Handrixon: 헨드릭슨은 화란계 미국인으로서 철저한 개혁주의자요, 복음주의자이며 매우 근면하고 경건한 언어학자이다. 또한 고금의 모든 신학사상과 그 동향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신학자인 그는 오랫동안 강단에 서서 강의와 설교를 통해 많은 영적 감화를 끼쳐 왔고, 또 미국 칼빈 신학교에서 신약학 강의를 맡아 많은 후진을 길러내다가 1982년 로마서 주석을 마지막으로 집필한 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6.William Handrixon,『헨드릭슨聖經註釋/로마서ꃏ』손종국 옮김(서울: 아가페출판사, 1984), 42.
7.존 칼빈.『新約聖經註釋7/로마서·빌립보서』존·칼빈聖經註釋出版委員會 譯 (서울: 聖書敎材刊行社, 1980), 26-34.
참된 교회의 속성 (0) | 2018.1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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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소원 (0) | 2018.11.06 |
열 두 사도였던 가룟 유다 (0) | 2018.07.07 |
열 두 사도/맛디아 (0) | 2018.07.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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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였던 가룟 유다(사도행전28:30-31)
慣用語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관용이란 말은 ‘습관적으로 늘 쓰거나 오랫동안 써서 굳어진 것’을 말합니다. 話者들이 자신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기존의 단조로운 표현과는 다른 새로운 표현양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브루터스 너마저’라는 말은 믿고 신뢰했던 사람마저 배반했다는 말입니다. 즉 씨저가 죽음의 순간에서 관용과 믿음을 베풀었던 사람의 배신을 탄식하는 관용구가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하면 누구나 ‘배반자 유다’라고 할 만큼 관용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사도직이란 그야말로 쉬운 자리가 아니었고, 아무나 하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상 끝까지’의 사명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의 산헤드린보다, 세상의 그 어떤 자리보다 보배로운 자리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성경 속에서 가장 비극적이며 불가사의한 기록 중의 하나입니다. 주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사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가룟 유다와 본디오 빌라도는 영원한 악명을 얻은 야비한 사람으로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예술가들은 유다를 가장 비열한 정열을 묘사하기 위한 주제로서 이용하여 왔으며, 시인들은 그의 지독한 악덕과 음흉한 배은망덕을 제시하기 위하여 모든 상상의 공포를 자아내어서 그를 저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마10:4)를 마귀라고 지칭하셨습니다(요6:70,71). 그는 돈궤를 맡았었습니다(요12:4-6, 13:29). 예수님에게 향유 부은 마리아를 비난했습니다(요12:3-6). 가룟 유다는 마귀에게 사로잡혔습니다(요13:2). 가룟 유다는 멸망의 자식으로 일컬어졌습니다(요17:12). 예수님을 팔기로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흥정했던 자입니다(마26:14-16). 그러면서도 예수님과 함께 최후의 만찬에 참석했습니다(눅22:21).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눅22:22).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막14:44-45, 마26:47-50, 눅22:47-49, 요18:2-5, 행1:16-25). 후에 예수님을 판 것을 뉘우쳐 은 삼십을 도로 갖다 주었습니다(마27:3,4).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마27:5, 행1:18). 유다가 받은 은 삼십은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습니다(슥11:12,13, 마27:6-8). 가룟 유다대신 맛디아가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시109:8, 행1:20,26).
사기꾼들이 사람을 속여도 사기를 당한 사람은 일을 당한 뒤에 알게 됩니다. 사도들은 유다를 마지막까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유다가 배반하리라는 생각을 그의 음모가 완수될 때까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팔려가고 난후에야 그들은 유다의 파렴치한 행위를 알아차렸습니다. 유다는 가룟 출신이었습니다. 가룟(Kerioth)이란 이름이 그에게 부가된 것은 당시에 유다란 이름을 가진 同名異人이 여섯 사람이나 되었기 때문이라고 혹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에게 따라다니는 말이 있는데 ‘…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사도였습니다. 그는 돈궤를 맡은 자였습니다. 그는 영원을 위해 뛰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좋은 것들은 모두 과거가 되었고, 그에 대한 보상이 없어졌습니다. 유다의 이 계획을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끊임없이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귀 너머로 넘겨버렸습니다. 유다는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을 배반하려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주님을 은 삼십(당시 노예 값)에 팔았습니다. 그러나 그 돈도 소유하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어쩌면 가룟 유다에게 회개할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의 기회를 가룟 유다는 놓쳐버렸습니다. 그리고 my way를 외쳤습니다. 자기 갈 길을 가다가 영영 잘못된 길로 들어섰습니다.
유다를 보면서 우리들이 인식해야 할 것은 우리들도 얼마든지 유다의 심성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 반발하고 불순종하다가 다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면전에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유다도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닭이 울자 밖에 나가서 슬피 울었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절대로 자신을 용서하시리라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자비를 곧이듣지 않은 귀들은 결국 악함 속에 완전히 방치되어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바로의 강퍅함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돌이킬 기회가 많았는데 전혀 바로는 그 많은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악한 것과 악한 자들이 제 갈 길로 가버린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계속하는 경고를 듣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스스로 뿌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선택이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의 소원 (0) | 2018.1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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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바울 (0) | 2018.06.23 |
열 두 사도/도마 (0) | 2018.06.16 |
열 두 사도/맛디아(사도행전28:30-31)
사도행전1:13-26 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15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맛디아를 과연 사도라 할 수 있는가? Calvin은 그리스도께서 일찍이 제정하시고 엄명하셨던 일이 한 사람의 부정한 행위로 인하여 부서져 버리게 되지 않기 위해서 맛디아가 유다를 대신하여 선택되어야 하는 일은 옳았다고 했습니다(Calvin 1980, 56). 결원된 사도자리를 보충하는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 완수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로 여겼을 것이라는 것입니다(변종길 2007,115). 베드로는 시편 두절을 인용하는데, 시편69:25과 109:8입니다. 시편69:25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시편109:8 ‘그 년 수를 단촉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원수들이 거하는 거처가 황폐하게 해달라’는 간구와 원수가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죽어 그 원수가 맡았던 막중한 임무를 타인이 취하게 해달라는 기도인데, 이 두 구절은 유다의 계승자를 임명하는데, 한 사람의 결손으로 인하여 사도의 전체성이 무너지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석했습니다(F. F. Bruce 1986, 66). 베드로가 제시한 사도 선택계획은 유다의 죽음으로 인한 사도직의 공백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특이한 방법으로 그 일이 성경말씀의 성취였고, 맛디아도 인간의 수단에 의해서 사도가 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Matthew Henry 1981, 52-60). 그를 사도로 선택하는 사용된 구약에 그 전례가 있으며(삼상14:4), 그 근거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 사람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에 있다고 했습니다(Derrik Williams 1996, 145), 가룟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은 이유는 가룟 유다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그의 배신과 죄악 때문이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가 죽은 뒤에 다시 열둘을 채우기 위해서 사도를 뽑지는 않았다(open Bible).
Herbert Lockyer는 사도들이 유다의 계승자를 선택하는 과정에 있어서 다윗으로 하여금 사도직에 필요한 모든 자격을 갖춘 자가 배신자의 계승자로 선택되어야 한다고 예언하게 만들었던 주격(主格)은 바로 성령이었다는 점이다. 맛디아는 누가에 의해 열 두 제자 중에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문제는 그가 하나님에 의해 열두 번째 사도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베드로에 의한 의사진행의 타당성이 여러 가지 점에서 문제시된다. 비교적 소수의 신자들만이 모여서 계승자는 제비뽑기로 선택되어야 한다는 베드로의 제안을 승인하였고, 결과적으로 맛디아가 뽑혔다. 그러나 그 직책의 선출이 공정한 절차에 따랐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계승자의 임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열 한 사도에 의해 이루어진 인간적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도들은 자신이 독자적으로 선택한 자들임’을 계속 강조했던 것을 보면, 그 열 한 사도가 그들의 선택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에 의해 인도되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결여되어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Herbert Lockyer 1982, 350).
이스라엘에 있어서 12이란 참으로 매력적인 숫자입니다. 이름 못지않게 성경에서는 심오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3,7,10,12 등의 숫자는 ‘완전한 숫자’의 개념이 있습니다. 3은 하나님의 완전하심(perfection)을 상징합니다. 7은 영적인 완전성(perfection)을 의미합니다. 10은 서수적 완전성(ordinal perfection)을 의미합니다. 12는 완전한 통치(Governmental perfection)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12을 부르셨는데, 그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고 가룟 유다가 배신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12을 채우기 위해서 맛디아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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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바울(사도행전28:30-31)
바울만큼 성경에서 많은 정보와 많은 면을 보여준 인물도 드뭅니다. 물론 신약성경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또한 심히 박해했던 자가 dramatic하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바로 개종하여 이방에 하나님의 전도자가 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누구보다 유망했던 사람인 바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던 인물도 역시 바울사도입니다. 신약성경의 절반을 쓴 사도바울, 그에 대해서 쓰려면 아마도 시간과 지면과 자료출처가 너무 많아 제약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빌레몬서까지 신약성경의 상당부분을 썼습니다. 그는 사울/Sau'lo"/Saȗlos이라는 히브리 본명을 쓰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박해자였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것에 열렬히 지지했던 것으로부터 최대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사형을 시키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울이 유대교에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항상 살기등등하다고 했습니다(행9:1).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것을 이단이자 신성모독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개종자들을 많이 체포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바울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성도들을 잡으려고 체포영장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즉시 U-tern을 했습니다. 예전에 그렇게 증오하던 도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아라비아사막에 들어갔습니다. 삼년 후에 모습을 드러낸 바울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핍박했던 열심히 이제는 섬기는 열심히 변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그를 위험스러운 배반자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바울을 암살이나 모살을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렇게 개종한 바울사도는 로마제국의 동부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전도여행을 했습니다(J. Stenphen Lang 2007, 150).
바울사도는 길리기아의 다소출생이었습니다(행9:11,21:39,22:3). 유대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베냐민 지파였습니다(롬11:1, 빌3:5). 왜 베냐민 지파를 자랑스럽게 여깁니까? 여로보암이 열 지파를 끌고나가 예루살렘의 가말리엘 학교에서 배웠습니다(행22:3). 로마시민권을 소유했습니다(행16:37, 22:25-28). 천막제조의 기술도 가지고 있었습니다(행18:1,3).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갈1:14, 빌3:5, 행9:18,19). 유대인으로 있을 때 바리새파였습니다(행23:6, 26:5, 빌3:5,6).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습니다(고전9:5). 누가 뭐라고 해도 사도로 부름 받았습니다(행9:15,16, 22:13-18, 롬1:1, 고전1:1,9:1,2,15:9, 갈1:15,16, 엡1:1, 골1:1, 딤전1:1,2:7, 딤후1:1,11, 딛1:1,3).
바울사도는 온유했습니다(딤후4:16). 양심이 깨끗했습니다(고후1:12, 6:3). 사려가 깊었습니다(빌2:25,26, 몬1:8-14). 그러면서도 담대한 사도였습니다(행9:29, 엡6:20, 살전2:2). 결단성이 있었습니다(행20:22-24, 21:4,5, 10,11).
사도행전의 끝 부분에서 바울사도는 가택 연금된 상태로 신앙을 증언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풀려난 뒤 로마제국의 서쪽 끝인 에스파냐까지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후에 폭군 네로의 박해 때 네로의 후궁들을 개종시키려 했다가 참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신약성서의 상당 부분을 쓴 바울은 그리스도교 최초의 신학자로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사도들은 여러 계층에서 부름을 받아 여러 상황에 맞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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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도마(사도행전28:30-31)
편견/偏見/prejudice이란 한쪽으로 치우친 공정하지 못한 생각이나 견해를 말합니다. 어떤 것을 보더라도 이미 선입관이 서 있어서 공정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 편견입니다. ‘저 인상 봐! 분명히 저 사람은 성격이 거칠 거야.’하고 미리 그 사람을 평가하게 됩니다. ‘저 여자 몸매와 얼굴 좀 봐. 저 여자는 분명히 착할 거야.’라고 평가합니다. 두 평가는 잘못된 평가입니다. 공정한 평가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입관을 가지고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편견의 대상이 된 사람은 아무런 이유 없이 피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피해자가 바로 도마입니다. 도마는 누명을 쓴 사도입니다. 웬만한 주석가나 설교자들은 그에 대해서 한 마디도 좋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도마는 의심하는 자, 도마는 불신앙 자, 도마는 열등한 사람, 도마는 우울한 사람, 도마는 믿음이 없었던 사도, 도마는 확인주의자 라고 도마에 대해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평가입니다.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6:25). 주님의 이 말씀에 ‘녜’하고 절대로 염려하지 않겠습니다. 말할 수 있습니까? 만일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사람일 수 없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셔도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도마는 회의주의자도 아닙니다. 물질주의적인 심성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상실한 사람은 더욱 아닙니다. 우울한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도마는 개성이 뚜렷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사람들의 한 면만 보고 잘못 평가한 것입니다.
도마는 히브리이름입니다. 아람어 !/aT;/thā’ôm/쌍동이란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따라서 Qwma'"/thomȃs란 쌍둥이란 말입니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에서 디두모는 헬라어로 역시 쌍둥이라는 뜻으로 ‘디두모’는 도마의 별명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총 여덟 군데에 도마가 나와 있습니다(마10:3, 막3:18, 눅6:15, 요11:16,14:5,20:24,26,27,28,29,요21:2, 행1:13). 공관복음에는 도마의 이름밖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도마의 면면을 약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14: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20:24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1: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사도행전1:11을 보면 도마는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도마는 제자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는지 어떤 말도 없습니다. 그의 이름은 주님께서 열 두 제자를 택하셔서 둘씩둘씩 보내실 때입니다. 누구나 그랬듯이 도마의 인생이 변화된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고서였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평범한 도마의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사자가 되었습니다. 사자는 사자로되 지존자(至尊者)의 사자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질병을 제어할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았습니다. 귀신들도 자신에게 항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은혜를 얻었습니다. 마태복음10:2-4절을 보면 열 두 사도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가룟 유다’ 이 배열은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배열입니다. 도마는 마태와 함께 묶여있습니다. 즉 마태와 도마는 공통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세리 마태입니다. 그런 자와 함께 묶여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세리는 유대사회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부류였습니다. 그들은 조국 유대를 생각하지 않았고, 오직 자신들의 안일만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 마태와 같이 묶여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주님께서 택하셨구나 하는 은혜입니다.
도마는 사도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열 두 사도 모두가 겪을지도 모르는 슬픈 일을 자기도 기꺼이 무릅쓰겠다는 뚜렷한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주님 죽을 때 같이 죽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일으키시려고 제자들더러 베다니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을 만류했습니다. 그곳의 종교지도자들이 주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설득하여 유대로 가지 못하도록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도마는 비록 죽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주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못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이 말로 인해서 도마는 온갖 못된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주님께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예수와 함께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 자신들 모두 거기서 죽을 수밖에 없 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유대로 올라갔습니다. 생명의 위협이 있을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겠다고 한 비장한 각오입니다. 물론 도마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적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베다니에 가셔서 무슨 일을 하실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러이러해서 저러저러하다’라고 브리핑을 하지 않으십니다. 가서 현장에서 보고 인식하기를 원하셨기에 웬만해선 out-line만 말씀하시지, 자세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도마의 생각은 살 수 있는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로 주님께서 U-turn하시는 것이 안타까워서 한 말이지, 회의주의자여서 죽으러가자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도마는 다만 주님의 마음을 언제나 빨리 알아차려서 행동하고자 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과의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과 헤어진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다시피했습니다. 제자들 모두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와 그가 그들을 위하여 예비할 처소의 기쁨을 말씀하시고, 자기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때 도마가 나서서 우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며, 거기로 가는 길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심히 슬퍼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 모두의 생각이었습니다. 이윽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거기 있지 않았습니다(요한복음20:24).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만났다고 하자 나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로 도마는 믿음이 없는 자라고 낙인이 찍혀버렸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라고 별명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를 만났을 때에 도마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감히 손을 넣지도 않고 확인도 하지 않고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을 너무 쉽게 비교분석합니다. 베드로는 어떻고 바울은 어떠하며 도마와 빌립은 어떻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편견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제자들 전원은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부활하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거기에서 거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다만 그러한 실망 투성이의 제자들을 사용하셔서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신 주님을 항상 찬양해야 합니다. 전혀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믿게 하시고 그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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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대오는 사도였지만 성경에서 역시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대오에 대해서
마태복음10: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마가복음3: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누가복음6:16 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사도행전1: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요한복음14: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다대오/Qaddai'o"/Thaddaȋos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과(KJV의 마10:3에는 "다대오라는 별명을 가진 렙베오”라고 했다) 질문을 한 적이 있는 것과 예수께 몇 마디의 질문을 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열 두 사도 중의 하나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랑스러움과 온유한 기질이라는 것입니다. 다대오는 열 둘 중에 가장 막내였습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것들은 자기 자신을 정의합니다. 자기자신을 현재의 모습으로 규정지으며, 자기 자신과 그 외의 모든 것 사이를 구별해주는 속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경역시 자기를 정의하고 현재의 모습으로 규정지으며 다른 모든 글들과 자기 자신을 구별해주는 속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는 과정의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성경적 신앙은 언제나 책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Robert L. Raymond 2004, 107).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자신의 교회를 위해 장차 있을 모든 복음전파를 위한 원천과 기준, 즉 사도의 직무가 될 공식적인 권위체계를 세우셨습니다. 주님은 사도들이 말하고 기록할 말씀들을 인정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크다 작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눈으로만 보고 인지한 것이지, 그 이상의 것들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볼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크다 작다는 표현은 단지 어떤 像(상)에 대한 것만 인지한 것이지, 그 외의 것에 대한 認知(인지)는 제외 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도들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성경 몇 줄 정도밖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도들을 선택하실 때 주님께서는 기도하신 후에 선택하셨습니다. 후세의 우리들은 이러한 것을 충분히 감안해야 합니다.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음을 우리들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사도들은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했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인명사전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는 오늘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유명한 사람들은 그 일부분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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