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유기(로마서 9:6-13)
하나님의 본성에서 “하나님께서는 선하심이 영원불변하시다”고 말합니다. 소요리문답이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도 항상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무한히 선하십니다. 하나님의 본성의 이 완전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피조물을 관대하고 친절하게 대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의 속성이 피조물에 대한 그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다면 그의 선하심의 속성은 그의 피조물을 향한 謙讓(겸양)을 강조하는 것입니다(Robert L. Raymond, 2004, 276).
우리는 성경에서 또는 신학에서 예정과 선택 그리고 유기를 만나게 됩니다. 아무리 이것을 제거하려고 해도 제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제거해서도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정이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의해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여 놓으신 것입니다(엡1:11). 선택이란 어떤 특정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며 영원한 구원을 소유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은총을 받게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입니다(눅10:20, 행13:48, 롬11:5, 엡1:4, 살후2:13). 유기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특별은총의 수혜에서 제외시키며, 그들의 죄로 인하여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게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입니다(롬9:13,17,18,21,22, 벧전2:8). 하지만 우리가 조심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두 가지 하나님의 작정이 모두 결정적이지만, 이 두 가지가 모든 면에서 동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죄는 유기의 작정에 관한 정의에서 언급된 형벌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선택의 작정에 관한 정의에서 언급된 구원의 원인은 아닙니다(William Hendriksen, 1984, 35). 어떤 의미로는 타락, 죄, 그리고 영원한 형벌이 모두 하나님의 작정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하나님에 의하여 의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어떤 의미에 있어서만 그러할 따름입니다. 은혜와 구원과 같은 의미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은혜와 구원은 모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형벌을 즐기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형벌에 빠지도록 결정하실 수 있는가?입니다. 이 질문은 수많은 사람들이 제기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또한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처벌을 요구하시는 공의의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과 영광에 이르도록 결정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놀라운 일”은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이에 대하여 1647년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onfession)은 선택과 유기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자신의 뜻의 경영에 의하여 장차 되어 질 모든 일을 자유롭게, 그리고 변함없이 미리 작정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창조자는 아니고, 인간의 의지는 침범당하지 않으며, 제2원인의 자유와 우연성은 폐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굳게 선다(제3조1항). 하나님은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된 사람들을 창세 전에 그의 영원하며 불변하신 목적과 비밀의 계획과 그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는데,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와 사랑으로 된 것이며, 사람에게 있는 신앙이나 선행이나 인내나 다른 어떤 것이 하나님을 감동시켜서 그들을 선택하게 하리라는 것을 미리 보시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화로우신 은혜를 찬송하기 위하여 선택된 것이다(제3조5항). 하나님께서는 측량할 수 없는 그의 뜻의 경영을 따라서 택한 백성 이외의 사람들에게 대하여 기뻐하시는 대로 자비를 베풀기도 하시고, 베풀지 않기도 하신다.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권능의 영광을 위하여 용서도 하시고 부끄럽게도 하시며, 그들의 죄에 대하여 노하기도 하시고, 자기의 영광스러운 의를 찬양하게 하기를 기뻐하시기도 하신다(제3조7항).
이와 동일한 진리들이 도르트 신조(Dort Canons)의 제1부 7조와 15조에 표현되어 있으며, 벨기에 신앙고백(Belgic Confession)의 16조에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은 이 문제를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도르트 신조 제5부의 실수의 거부, 결론에서 개혁교회의 교리가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개혁교회는) 하나님은 어떤 죄를 예상하시거나 보시는 일도 없이, 순수한 의지의 임의성만에 의해서 세계의 대부분을 영원한 정죄로 예정하셨으며, 오직 그 정죄만을 위하여 그들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치며, 선택의 사실이 신앙과 선행을 일으키는 근거가 되는 것과 똑같은 형태로 유기는 불신앙과 불경건의 원인이 된다고 가르치며, 신자의 많은 자녀들이 죄가 없으면서도 그들의 어머니의 품에서 탈취되어서 폭력에 의하여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다고 가르치며…개혁교회가 인정하지도 않을 뿐더러 전심으로 싫어하는, 이와 유사한 많은 것들을 개혁교회가 가르치고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개혁교회가 잘못이해하고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오히려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遺棄(유기)된 자들도 이 세상에서 많은 복을 받고 있습니다. 이 복은 유기의 작정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생명, 건강, 힘, 양식, 행복 등의 많은 자연적인 은사를 받습니다(마5:45, 행14: 17, 17:28, 롬1:19, 약1:17 등). 또한 하나님께서는 유기된 자들에게도 스스로를 증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해서도 오래 참으심을 보이십니다(롬9:22).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자신의 은혜의 복음이 선포되게 하십니다. 그들의 죽음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겔18:23,33:11, 마23:37, 눅19:41,24:47, 요3:16, 행17:30, 롬11:32, 설전5:9, 딤전2:4, 벧후3:9). 우리가 아는 대로 가인은 유기된 자였습니다.
요한일서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유다서11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자비롭게 대하셨습니다. 창세기4:14-15을 보면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사실 우리의 신조는 타락후 예정론(infralapsarian)의 입장에서 생겼습니다. 즉 영광에 이르도록 예정된 사람들은 그들이 스스로 뛰어든 죄와 파멸의 상태로부터 선택되어서 건져내어진 사람들입니다. 멸망에 이르도록 예정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그 상태에 남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타락을 허락하셨는가?”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질문에 대해서 명쾌하게 답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신명기29:29의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라는 말씀밖에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욥기11:7,8의 말씀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여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보다 갚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러나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기이한 일들을 보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왜 득세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보기에 선한 사람들이 왜 고통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수백만 수 천만 명이 지구상에서 학살을 당하느냐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비이성적인 일들이 일어났었고,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오묘는 우리가 측량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택과 유기의 교리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많은 견해들 중에서도 로마서9: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의 선택과 유기의 교리를 지지한다는 의견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견해들입니다. 이중에 반대하는 입장은 선택교리는 옳지만, 유기교리는 틀렸다는 것입니다, 로마서9:13뿐 아니라 성경의 어떤 귀절들도 유기를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실제로 선택과 유기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 지금까지 이미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선택과 유기는 위에서 말한 대로 성경적입니다. 선택과 유기는 함께 성립되든가 부정되든가 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선택하시지 않은 사람은 거절하십니다. 하나님의 경영은 모든 것을 포괄하신다는 것을 우리들이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선택하실 때, 그로 하여금 마침내 천국에 들어오도록 하실 뿐 아니라, 그의 탄생으로부터 영화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그를 인도하십니다(시139:16). 결코 성도들은 진공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생명과 불신자의 생명 사이에는 만리장성이 가로 놓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된 자의 삶과 선택되지 않은 자의 삶은 철저하게 서로 뒤얽혀 있습니다. 예로 선택된 자의 밭과 선택되지 않은 자의 밭에 비는 똑같이 오며 햇빛도 같이 비추입니다. 경기장에서, 학교에서, 사업장에서, 공장에서, 정치에서 등 선택된 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하나님의 계획은 선택되지 않은 자에게도 영향을 미치십니다. 그러면서도 그 계획은 그 두 가지의 경우에 있어서 공히 인간의 책임을 백지화시키는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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