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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자녀(로마서 9:6-13)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유대인들은 자기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였습니다. 배척한 것을 넘어서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목적이 좌절되고, 하나님의 계획이 차질을 가져온 것이라는 말인가?(William Barclay) 바울의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바울의 논증은 . 사실상 유대인 모두가 예수님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중 얼마는 예수를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초기 신자들은 다 유대인이었습니다. 초기란 복음이 이방으로 나가기 전입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도 유대인이었습니다. 사도들도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약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선택의 과정이 되풀이 하여 작용하고 있는 것을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복하여 하나님의 목적과 설계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은 유대인 모두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 일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일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집행해 나가신 민족의 계보는 절대로 아브라함의 肉的後裔육적후예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으로 구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전체계획의 배후에는 순전한 혈통적 후예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택하심의 꼭 있었습니다. 자기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바울은 유대역사에서 두 경우를 예를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의 처 사라의 아들 이삭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 두 사람은 틀림없이 다 아브라함의 혈육입니다. 육체적으로 그들은 둘 다 그의 아들입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은 것은 너무 늙어서 인간적으로 말할 때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나이 많아서였습니다. 이삭이 나서 자랄 때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날이 왔던 것입니다. 사라는 매우 언짢게 생각했습니다.그리하여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 쫓았습니다. 이삭 흔자서 상속할 수 있게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기가 그랬습니다.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라가 싫어해도 차마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오 쫓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자손이 그의 이름을 유지할 것이 이삭 안에서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21:10-12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11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사실 이스마엘이 하갈의 소생이라 해도 누가 보거나 누가 말해도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의 논증은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방법과 욕망으로 낳은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아브라함과 하갈은 충분히 생리적으로 아들을 낳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볼 때 아들을 낳는다는 것조차 불가능한 때에 낳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아들이었습니다.

창세기18:10-14 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진정한 후계권이 주어진 것은 약속의 아들이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아브라함의 육적인 후손이 다 유대인 즉 선택된 자로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민족 안에서 하나님의 선별과 택함은 계속되었습니다. 선택의 다른 예로서 바울사도는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잉태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즉 그의 태속에는 두 민족의 조상이 될 두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때가 이르면 형이 아우를 섬기고 그에게 종이 되리라는 것입니다(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이런 상황에서 쌍둥이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에서가 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이었습니다. 그 야곱의 계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변론의 결론을 내리기 위해 바울은 말라기1:2-3을 인용했습니다. 그 곳에는 하나님이 그 선지자에게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의 논증은 유대인 됨에는 아브라함의 후손됨보다 무엇인가가 더 있고, 택함 받은 백성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육적인 후손의 전체가 아니고, 그 종족 자체 내에서 역사 이래 선택의 과정이 계속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면 지금까지의 변론을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아랍인은 아브라함의 순수한 육적인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아랍인이 택함 받은 백성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습니다. 에돔인은 에서의 자손이었습니다. 이것이 말라기가 의미하는 바로서 이삭의 참 아들 아니 야곱의 쌍둥이 형인데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에돔 사람이 택함 받은 백성 중에 한 몫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관점에서 자기의 주장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의 가족 내에서도 선택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그 선택은 행위와 공로와 그것을 얻으려는 인간적인 노력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말합니다. 그 증거로서는 야곱과 에서는 그들이 낳기도 전에 야곱은 택함을 받았고, 에서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 선택은 그들이 아직 모태에 있어 낳기도 전에 이루어졌습니다. 불가피하게 우리의 생각은 이 논리에 주저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명백하게 마음대로 한 사람은 택하고 다른 한 사람은 버리는 분으로 보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논리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는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보이고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렵게 생각이 되지만, 유대인에게는 적중한 논리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논리의 핵심에는 하나의 큰 진리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기인되었고 모든 것 배후에는 하나님의 행위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독단적이고 우연하게 보이는 것 까지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목적 없이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어떤 사람은 거절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하여 인간에 대한 선택과 유기는 결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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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적 예정견해(로마서 9:6-13)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우리는 현재 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오는 세상을 맞이해야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두고 떠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많지 않은 날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끝을 계산해야 합니다. 아무리 그 생명이 길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1년을 365.2422일로 정확하게 계산해서 50년을 살았다면, 1,8262일입니다. 100년을 산다고 가정했을 때는 3,6524일입니다. 많은 것 같아도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인생입니다. 길다고 생각하면 길고, 짧다고 생각하면 짧은 인생을,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살기도 하고, 뒤틀려 살기도 합니다. 옛 학창시절에 유명하다고 생각했던 문인들이 상당수 친일파라는 사실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종교계에서도 적극적으로 친일파였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노래와 그림과 글 그리고 가르침들이 이어지고 있는 사회가 어이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르침을 주어야 할 사료들이나 자료들을 없애버렷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아무렇지 않은 일처럼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알기도 전에 친일했던 사람들을 위인으로, 또는 애국자로 바꾸어 가르침으로 인해서 그 피해가 크다는 것입니다.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날 때 일본교회와 독일교회는 히틀러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승리를 기원했습니다.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사람을 국가별로 살해하는 계획을 세운 사람들을 교회가 축복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상혼(傷魂)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예정에 관한 예지적 견해와는 대조적으로 개혁주의적 견해에서는 구원에 대한 궁극적 결정권이 인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결정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천명합니다. 개혁주의적 견해에서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의 생활가운데 개입하셔서 그들을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인도하시기로 하셨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셨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위를 미리 내다보시지 않고서도 영원 전부터 어떤 사람들은 선택하기로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기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각 개인의 궁극적 운명은 태어나기도 전에 인간의 선택에 전혀 근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물론 인간의 선택은 자유롭게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로 하여금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영향을 미치시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는 인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 있습니다. 예정에 대한 개혁주의적 견해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선택보다 앞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 같이 생각되지만. 하나님의 예정이나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이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예정에 관한 하나의 견해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공정함에 관한 심각한 질문들을 일으키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그토록 많은 분노의 반응을 일으키고 숙명론의 도전 결정론의 도전 등을 유발시키는 견해입니다. 예정에 관한 개혁주의적 견해에서는 황금사슬을(롬8:29,30)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자신이 택하신 자들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마음속에 그들의 정체에 대하여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개인적 정체에 대하여 미리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먼저 사랑하셨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안다”고 말할 때 이 표현이 종종 단순히 사람에 대한 정신적 인식과 깊고 밀접한 사랑 사이를 구별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냥 안면정도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진보해서 단위별로 교제하는 정도의 앎이 아닙니다. 대단히 깊이 아는 앎의 정도를 말합니다. 개혁주의적 견해에서는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모두 내적으로 부르시기로 예정하시고, 그들을 의롭다 하시며, 영화롭게 하시기로 예정하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그분의 택함 받은 자, 오직 택함 받은 자들만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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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예지와 예정(로마서 9:6-13)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창세 이래 아담 이후, 노아 이후부터 현재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었더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기때문입니다. 이 말에는 이중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요소와 긍정적인 요소가 다 들어있습니다. 그 안에는 참된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구원은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안에 참된 이스라엘이 있다는 말입니다.

통상 하나님의 백성을 약속의 자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란 그들 속에 내재하고 있는 어떤 요소(예를 들면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약속의 자녀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한 것입니다. 요한복음1:13절을 보면 애초에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만 내 자녀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치지 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스라엘이라는 공식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스마엘=에서=유대인이라는 사람들이 끼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100%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믿고 있다가 영원한 구원을 놓치고 말기 때문입니다.

예정에 관한 개혁주의적 견해를 거부하는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예정에 대하여 예지적 견해(선견, 앞선 지식)라는 입장을 받아들여버립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입니다. 예지적 견해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일지, 거절할지를 미리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택하기도 전에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가 선택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지식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을 선택하려는 사실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택받은 자들이란 자유롭게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을 하나님께서 아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나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은 전혀 관계가 없게 됩니다. 이 견해에는 하나님의 결정에 관한 자의적 요소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명백히 어떤 잘못된 행위로부터도 벗어나 계십니다. 우리에 대한 궁극적 심판의 기초는 그리스도를 배척하느냐 아니면 받아들이느냐 하는 우리의 결정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로마서8:29-30절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의 豫知에서 시작하여 신자들의 영화에까지 이르는 일종의 순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지적 견해에서 볼 때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예지가 예정보다 앞서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이 구절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선택할 것을 미리 아신 그 지식에 근거하여 선택 하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언급되어 있지도 않고 암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아시는 자들을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여기에서 하나님이 예지를 가지셨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전혀 모르고 계시는 사람들을 선택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선택하시기 위하여 먼저 야곱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시기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의 선택을 근거로 야곱을 택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로마서8장에 나오는 예지-예정의 순서에 대해서는 예지적 견해와 더불어 논쟁거리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구절에 나타나고 있는 사건들의 순서는 예지-예정-부르심-칭의-영화의 순서입니다. 바울사도가 여기에서 부르심이라는 표현을 통해 의미하고 있는 바는 무엇입니까?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한 가지 방법 이상으로 설명합니다.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과 내적 부르심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전파를 통하여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을 발견합니다. 복음이 전파될 때 그것을 듣는 사람마다 부르심을 받거나 그리스도 앞으로 초청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긍정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습니다. 외적 부르심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들을 수 없는 귓가에 복음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의 외적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들만이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칭의(稱義/justification)는 믿음으로 연유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외적전파를 들었던 사람들이 모두 믿음으로 반응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외적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모든 자들을 의롭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여기에서 모두를 첨가한다면 이 구절에 있지도 않은 말을 덧붙이게 됩니다. 바울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 가운데 일부만 의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지적 견해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예정이 사람들의 외적 부르심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할지를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하신다면 어떻게 예정된 자들 가운데 오직 일부만이 부르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정확하게 아시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들만 부르시는데. 부르심을 받지도 않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예정하셔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예정 받은 자들 가운데 일부가 부르심을 받지도 않고 예정 받았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부르심에 반응할 것을 미리 아신 지식에 근거하여 예정하시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부르심이 없는 데에 대하여 아무도 응답하는 사람이 없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예지하실 수는 없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사도는 결코 일부라는 말을 내포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황금사슬은(8:29,30) 필연적으로 모두라는 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 황금사슬에 일부라는 말을 첨가시킨다면 그 결과는 예정에 관한 예지적 견해에 치명적이 되어버립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부르시지도 않은 자들을 예정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즉 예지적 견해는 하나님의 예정이 복음의 부르심에 대한 사람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하고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부르심 없이도 예정되었다면 그 견해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 됩니다. 모두라는 말을 덧붙여도 역시 예지적 견해에 치명적 결과입니다. 이러한 난제는 칭의에 대한 부르심의 관계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만일 부르심을 입은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된다면 그 구절은 아래의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a.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의롭게 된다. b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모두 의롭게 된다. a를 취한다면 복음을 들은 적이 있는 각 사람은 모두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정에 관한 예지적 견해를 견지하고 있는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복음을 들은 사람마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만인 구원론자 들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었든지 안 들었든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예정에 관한 주된 논쟁이 만인 구원론(universalism)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정에 관한 개혁주의적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나 예지적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다 만인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외부적으로 복음(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을 듣는 사람들 중에도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아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a의 입장은 예지적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나 개혁주의적 견해의 옹호자들에게나 모두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의롭게 된다는 b의 입장입니다.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이란 무엇입니까? 외적 부르심은 복음전파입니다. 복음전파는 인간인 우리가 하는 어떤 일입니다. 외적 부르심은 성경을 읽음으로 들을 수도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인간이 기록한 하나의 문서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외적입니다.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 속에서 내적으로 역사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마음에 즉각적인 영향력을 일으키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는 단지 외적으로 말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말들이 마음속에 파고들 수 있을지는 모르나 나의 능력으로 그렇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내적으로 부르실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믿음의 적극적인 반응을 일으키기 위하여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즉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b의 입장이 사도의 의도였다면 그 의미는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내적으로 부르신 모든 자들이 의롭게 되고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모든 자들이 내적 부르심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예지에는 인간이 택하는 자유로운 결정에 대한 단순한 선지식(先知識) 이상의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누가 복음에 반응할 것이며 누가 반응하지 않을 것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단순한 수동적인 방관자의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누구를 내적으로 부르셔야 할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이 내적으로 부르신 모든 자들을 또한 하나님은 의롭게 하실 것입니다. 즉 황금사슬은 하나님께서 내적 부르심을 예정하셨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적 부르심을 주시기로 예정하신 모든 자들은 의롭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보장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내적 부르심을 통하여 택한 자들의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b의 입장이 황금사슬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으신 어떤 종류의 부르심을 일부 사람들에게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의롭게 되는 것이지,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므로, 부르심이란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 깊은 행위라는 것입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로 예정되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예정되지 않았는가? 그 해답은 인간 속에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있는가? 예지적 견해의 옹호자들은, 하나님이 오직 일부의 사람들만을 내적으로 부르신 이유는 누가 내적 부르심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누가 반응하지 않을지를 하나님이 미리 아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내적 부르심을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 부르심에 호의를 가지고 반응할 것을 미리 아신 자들에게만 내적소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 가운데는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가?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어떤 특권이라도 있는가? 내적 부르심이 자신의 힘으로 거기에 반응할 것을 아신 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실질적 능력이 없는 내부적 영향력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내적 부르심이 외적 부르심을 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준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시지 않는 어떤 특권을 일부 사람들에게만 예정하셨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내적 부르심이 인간의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혀 영향력이 아닐 것입니다. 만일 내적 부르심이 전혀 영향을 미치는 능력이 아니라면 구원을 위하여 아무런 의미도 없고 황금사슬의 무의미한 부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이 사람들이 믿기 전 곧 믿음으로 반응하기 전에 그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적 부르심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반응에 영향을 미친다면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에게 어떤 특권을 예정하셨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내적 부르심이 인간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슨 역할을 합니까? 이러한 dilemma는 예지적 견해에 있어서는 결코 달랠 수 없는 큰 고통이 될 것입니다(R.C.Sproul, 1998, 126-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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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근심과 고통(로마서 9:1-5)

 

로마서는 크게 네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a. 서문 1:1~17

b. 구원과 교리 1:18~1l:36

c. 그리스도인의 삶 12:1~15:13

d. 결론 15:14~16:27

바울사도는 1:18~32에서 이방인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2:1~3:2에서는 유대인의 죄,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방인-유대인)의 죄의 심각성과 심판의 불가피성을 3:3~20까지 부각(浮刻)시켰습니다. 다음으로 믿음으로 인한 구원을 3:21~5:11에서, 5:12~8:39에서는 은혜로 인한 구원을 강조했습니다. 9장에서 11장까지는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김상훈 2006, 143).

특권(privilege)이란 어떤 개인이나 집단 또는 국가기관에 대하여 인정하는 특별한 권리나 이익 또는 의무의 면제입니다. 그래서 특권은 일부에게만 해당됩니다. 모든 사람이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특권이란 한정된 권리입니다. 그래서 자칫 특권을 가진 자들은 자신의 마음대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고는 합니다. 이스라엘은 창조주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었습니다. 수천 년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일상화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버리고, 이방사람들을 버리면서까지 이스라엘만을 위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순종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바라심대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특권이 있기 때문에 괜찮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특권은 위선적인 특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일차로 유대인의 회당을 찾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저주를 받아에서 저주/ajnavqema 는 고전 헬라어문헌에서 신들의 진노에 바쳐지는 것, (파멸에) 저주의 힘 아래로 떨어진 것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70인역본에서는 헌신, 금지, 저주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사도의 논증에 의하면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동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어디에 나타나 있습니까?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의 구원을 바라고 있음이 간절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바울의 심정은 정말 간절합니다(1-3). 그것은 바울사도의 근심과 고통으로 이어집니다(3).

어쩌면 특권이 그들을 이상하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특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저희들은 자신들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엄청 많습니다. ‘우리교회는, 우리교단은, 우리목사는, 우리들은, 우리들의 공동체는라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서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늘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과 같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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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과 하나님의 관계(로마서 9:1-33)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구속의 행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속전(그의 피 혹은 죽으심)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점이 예수님 사역의 성격을 구속적이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대속물(luvtron/rûitron)로 주시려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20:28/10:45). 그리스도의 사역은 구속(救贖)으로 언급되었습니다(1:68/2:38/9:12). 데이스만(Deissmann)은 이에 대하여

1세기에 희랍어 luvtron(ransom/속전)이란 말을 들을 때에 그것은 의당히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지불된 노예매입금으로 생각했다. 86, 100, 91년 또는 107년에 노예해방과 관련된 Oxyrhynchus에서 나온 3문헌이 다 이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고 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와 중세교회의 많은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하나의 속전(a random)으로서 사탄에게 지불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때에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풀어주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바실, 두 분의 그레고리, 알렉산드리아의 시릴, 다마스커스의 존, 힐라리, 루피누스, 제롬, 어거스틴, 레오 대제와 같은 위인들, 그리고 버나드와 루터와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사단을 파멸시키는 일로 이해하는 이러한 견해는 성경적인 근거가 부족했습니다. 그리하여 점차 사라졌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과연 누구에게 속전으로 지불되었는가? 물론 그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속전으로서 하나님께 지불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함으로써 그의 거룩하심과 공의가 손상되었기 때문입니다. Anselm은 이와 같은 교부들의 견해에서 오류를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형벌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빚을 지지 않은 만큼 인간이 갚아야 할 모든 것은 하나님께 빚을 진 것이지, 마귀에게 진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사역은 구속의 성격상 하나님을 지향하였음을 우리가 인식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불하신 대속물은 사단에게 지불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지불한 것입니다. 상환을 요구하는 채무(債務)는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에 기인된 것입니다. 사단은 죄인에게 하등의 법적요구권이 없습니다. 죄인이 석방되려고 사단에게 무엇을 지불할 필요는 전연 없다는 것입니다. Shedd하나님의 자비가 사람을 하나님의 공의에서부터 속량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단에게도 속박되어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Shedd

사단에게 포로된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적 효험에 관계하기보다는 성령의 역사에 관계된 것이다. 사단의 속박에서부터의 구출은 칭의 역사라기보다는 성화의 역사의 일부이다. 사탄의 포로에서의 구출은 다른 구출 뒤에 온다. 즉 구출의 성질상, 속죄의 피에 의해 공의의 주장에서 부터의 일차적언 구속이 있은 연후에야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에 의하여 죄와 사단의 포로 빛 속박에서부터의 구속이 가능한 것이다.

대체적으로 Shedd의 의견과 일치하지만, Hodge는 다수의 성경귀절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율법의 형벌과 율법자체와 능력으로서의 죄와 사단과 그러고 모든 악에서부터 구속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율법의 형벌에서부터의 구속 또는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3:13절에서 말한 것처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함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자체에서 구속함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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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구원문제

 

그리스도교는 지중해 동부 연안에서 Levant(동부지중해 연안제국)종교로 출발했습니다. 이후에 그리스도교는 세련되었다고 하는 서구인으로부터 오스트레일리아 사막의 원주민에 이르는 거의 세계의 모든 국가와 모든 민족의 신봉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에 그 신자를 뺏기지 않은 종교가 하나도 없습니다(Stephen Neil 1999, 9, 15).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을 때 지중해를 둘러싸고 있는 땅들은 정치적으로 로마가 다스렸습니다(Williston Walker 2008, 17). 사도요한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1:11). 그런데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자기 땅, 자기 백성은 물론 유대와 유대인입니다.

유대교라고 하면 유대인들의 종교입니다. 유대교가 생겨난 것은 바벨론 유수로부터였습니다. 그러나 유대교란 AD 70년까지만 하더라도 구약의 사상들을 수정하거나 확장시킨 것을 의미했습니다. 70년에 있었던 성전 파괴 이후에야 비로소 유대교의 존재가 확연해졌습니다. 구약에서 유대인이란 유다 왕국의 백성을 의미했습니다(1 :2). 그러나 신약에서 유대인이란 유대교 신앙을 지닌 자 혹은 예수님과 그 복음을 대적하던 무리들을 가리켰습니다. 사실 구약성경에서난 신약성경에서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긋지긋하게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이고 내쳤습니다.

William Barclay9-11장에서 사도바울은 교회가 해결했어야 할 가장 곤란한 문제 즉 유대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합니다. 유대인은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 중에서 독특하고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자 그들은 바로 배척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처형까지 했습니다. 이 비극적인 paradox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부족과 아울러 그들의 잘못된 신앙관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9장에서 11장은 복잡하고 난해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도바울은 자기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사도바울은 자기 형제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끌 수만 있다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버릴 각오도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유대인이 선민이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입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성전의 예배와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스러운 임재까지 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인간 족보상으로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속에서 유대인의 특별한 위치를 바울은 전체문제의 원리이며 시발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my-way를 외친지가 수천 년이 지났습니다. 바벨론 포로부터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my-way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유대인이 하나의 민족으로서는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국민인 것이 사실이나 유대인 모두가 다 그를 배척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들 중 얼마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이나 로마제국 내에 있었던 초기 신자는 모두가 다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역사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아브라함으로부터의 육적인 혈통은 유대인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유대인의 역사에는 여러 번 되풀이 하여 하나님의 선발과정(선택)이 있었는데, 그것을 통해 아브라함의 육적자손 중 어떤 이들은 선택되고 어떤 이들은 버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출생한 이삭은 선택되었습니다. 단순히 자연적인 과정과 욕망을 통해 낳은 아들 이스마엘은 선택되지 못했습니다. 이삭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아들 야곱은 선택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쌍둥이인 에서는 선택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선택은 인간의 공로와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선택된 사람들이 어떤 권리로서 얻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의 지혜와 권능의 일입니다.

참으로 선택된 백성은 절대로 전체민족이 아닙니다. 의로운 남아있는 자들입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척할 때에도 하나님께 신실한 소수자이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모든 백성이 바알을 따라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신실했던 7000명의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의 교훈의 본질적 부분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을 것”(9:27,10:22)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의도는 아무 때라도 전체 백성이 선택된 백성이었던 때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항상 하나님 편에서 선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러하심이 과연 공정하시느냐는 것이 사람들의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는 택하고 누구는 버린다는 것이 과연 공정한 것이냐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잘 잘못으로 기인되지 않고 누구는 택함을 받고 누구는 버림을 받는다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한다고 해서 어떻게 그들을 비난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어떻게 그들을 칭찬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사용하는 이러한 논쟁은 우리를 망설이게 할뿐 아니라 위축하게 만듭니다. 실로 바울의 변론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좋아하시는 것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결정이 제아무리 난해할지라도 그것에 대하여 반문할 아무런 권리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진흙은 그 옹기장이에게 반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물건이 자기를 만든 장인에게 반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장인이 두 개의 그릇을 만들 때 하나는 영광스러운 목적을 위해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천한 목적을 위해 만들 수 있으되 그 그릇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 관해 가지고 계신 권리라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로마서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바로는 하나님의 보복의 능력을 과시하는 도구가 되게 하기 위하여 역사의 무대 위에 올라서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인의 선택에 관하여 미리 경고를 받았었습니다. 선지자 호세아가 말한 대로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1:10,9: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 배척은 예사롭고 목적이 없으며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이 들어올 수 있게 하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문은 이방인에게 열려지기 위해서 유대인에게는 한시적으로 닫힌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마음을 굳게 하고 그들의 눈을 멀게 하였다면 하나님께서 그리하셨고 그것은 이방인들을 신앙 안으로 들어오게 할 길을 열어 줄 궁극적 목적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불필요한 모든 것을 다 떼어놓고 보면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어느 사람이나 어느 민족에게 대하여도 당신이 하고 싶은 때 할 수 있으며 이방인들이 들어오게 되기 위해서 유대인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눈을 감게 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까닭 없이 유대인들이 잘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유대인들에게 근본적인 잘못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근본적인 실수는 그들이 인간적 노력 즉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그들은 혼자서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하고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하나님 말씀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은 신앙의 길이라는 것과 인간업적은 아무런 효험이 없다는 것을 알았어야만 했습니다. 이사야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28:16/10:11)고 했습니다. 요엘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32/10:13). 사실 아무도 하나님의 제언을 듣기 전에는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그런 제언이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한 인격적 업적방법을 줄기차게 고집했습니다. 그들은 행위에 운명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줄기차게 그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은 신앙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은 어떻습니까? 이방인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마련한 것입니다. 이방인이 들어올 수 있게 허락되게끔 마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자만심을 갖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돌 감람나무 순과 같은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네 구원을 스스로 이룩하지 못합니다. 사실상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에게 의존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접붙인 가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뿌리와 줄기는 여전히 선민입니다. 이방인들의 선택됨과 유대인의 버림받음에 이방인들은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만은 곧 버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대로 영원히 쭉 가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갔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뒤늦게 자신들을 그런 관계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원을 하게끔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32:21/10:19). 결국 이 방인들은 유대인이 구원을 얻게 하는 바로 그 수단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11:26). 구원하시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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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에서 절대로 끊을 수 없다(마서8:35-39)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라는 단어는 삼수변에 갈 거자입니다. 모든 이치가 물이 흐르듯 흘러가야 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개별적인 죄악과 사회적인 죄악 그리고 국가전체적인 죄악들이 법의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사회의 근거는 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렇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어제까지의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것이 이 세상사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죽이려고 쫓아오지만, 그전에 그들이 먼저 당합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고 유대인들을 진멸하려고 했지만(3:12), 정작 죽임을 당한 사람은 하만이었습니다(7:12). 바울사도가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면서 환난이나 곤고나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사도가 나열했던 것들은 당시에 무시무시한 것들입니다. 당시의 무적 Roma의 형벌도구였으며, 이것을 피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다른 어떤 피조물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나열한 것 중 에는 초자연적인 것들도 있지만, 그런 것들도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확고부동한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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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까(마서8:35-39)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신 말씀이 Roma에 계속 퍼지고 있었습니다. Roma는 어떤 결단을 내려야만 할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속주인 팔레스타인으로부터 나온 기독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대로 놓아두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제재를 해야 할 것인가? Roma에는 그 자체의 종교가 있었습니다. Zeus를 비롯한 수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Roma사람들은 그 신들이 나라를 세우고 왕성하게 하여 대제국으로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신들의 도움으로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의 Roma에는 얼마나 신들이 많든지, 걸어다니면 발에 걸리는 것들이 신이라고 했습니다. Roma는 주전 27Augustus 때가 전성기였습니다. 그로부터 200년 년간 Roma는 참으로 평안하였습니다. 약간의 충돌이 국경에서 있었을 뿐, 내전도 없었고 경제는 번영했습니다. 따라서 문학과 예술도 활짝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법은 북아프리카에서 북해까지 그리고 아라비아에서 영국까지 적용되었습니다. 대제국이었습니다. Roma는 여러 민족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화는 사람들을 나약하게 만들었습니다. 황제도 원로원에서 선출하지 못했습니다. 군부에서 황제가 나왔습니다. 당연히 힘으로 밀어붙였습니다. 황제는 명분만 민주공화제였습니다. 실상은 독재였습니다. 황제의 철권정치였습니다. 이러다보니 사람들은 황제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최고의 권좌에 오르면 하고 싶은 일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신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황제숭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리고도 행여 지진이나 전쟁에서 안 좋은 조짐이라도 보이면 여지없이 다른 곳에 눈을 돌리게 했습니다. 기독교가 있으니까 안 좋은 상황들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바울사도가 이 말을 할때에 막연하게 이런 것들이 있을 것이라고 나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서를 쓰기이전에 이미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을 체험하였습니다. 외적으로 환난을 당하여 내적인 곤고를 느꼈습니다. 그야말로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들이 수없이 밀려왔습니다. 왜 이런 못된 것들이 예나지금이나 성도들을 괴롭힙니까? 우리의 원수들이 주님과 우리사이를 단절시키고자 불리한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라고 고백합니다.

남녀간의 사랑은 주고받는 사랑입니다. 상대방이나 내가 잘못할 때는 가차없이 끝내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렇게 가면 안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탄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 예수믿니?’ 그런데 네가 이렇게 어려운 상황인데 예수께서는 아무조치도 취하시지 않지않아? 그러니까 소용이 없는거야.라고 하면서 우리들의 역경을 바라보며 하나님 믿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자꾸 빈정거립니다. 그리고 믿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실제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교회를 공격하고 우리들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주님께 매여 있는 성도들은 어떻게 해도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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