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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절대주권(로마서 9:14-18)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선택과 유기를 우리가 생각할 때 무엇인가 불평등한 느낌을 받는 것 같습니다. 바울사도가 하는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렇다고 하나님께 불의가 있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불만이 있을까?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 대한 불만인 사람들의 요구가 무엇입니까? a. 하나님의 선택은 아무래도 불의한 것 같다. b.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면 인간에게는 죄에 대한 어떤 책임도 없지 않느냐? 과연 하나님의 선택이 정당한가? 사람들의 의지는 전혀 반영되지 않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정책이 괴연 공의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전 역사는 하나님의 선택과 선별과정이었습니다. 바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불평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Servius Sulpicius Galba(재위68-69/로마 제6대 황제)Nero에 이어 로마황제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고압적인 통치스타일 때문에 친위대 병사에게 살해되었습니다. Galba는 폭군 Nero를 쫓아내고, 황제로 등극했을 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고 또 누구에게라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Roma황제의 특권을 말한 것입니다(William Barclay, 1981, 192). 바울사도는 출애굽기33:19을 인용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한 민족이나 한 세기에 대해서는 자비를 베푸시고 다른 세기와 다른 민족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나오시는 이유가 이성으로 봐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만큼 사람들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툴툴거립니다. 어느 사람은 택하고 어느 사람은 버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은 언제고 불경건한 사람들의 중상모략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다양성의 원인을 이해하기 전에는 이 양자에 대한 구별을 짓는 하나님께서 불공평하다고 정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에 따라서 자신이 기뻐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특수한 자비를 행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주장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전파를 통해서 영원 전부터 비밀로 되어 있던 이 신비를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불가해한 경륜을 신자들에게 지적했습니다(16:25).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오랜 세기에 걸쳐서 국외자들이었던 이방인들을 교회의 품에 접붙여 주심으로써 천사들에게 마저 숨겨 두셨던 오묘한 신비를 시간이 차자 만민에게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3:9). 하나님께서는 그가 자신을 옛날 족장들보다 모세에게 더 완전하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원인은 오직 자신의 경륜 내지는 선하신 뜻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의 시여는 자신의 유일한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민족의 선택과 그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의 태도도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애굽과 바로의 권력으로부터의 해방 전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처음으로 바로에게 가서 놓아달라고 요구했을 때, 바로에게 경고하기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또 그 능력을 거역하는 자에게 그 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명백히 하기 위해서 바로를 역사의 무대 위에 올려놓으셨다고 했습니다. 바로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하는 한 예로써 역사 위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삼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아무 일이나 하실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격에 위배되는 일을 아무 것도 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지구의 공전과 자전을 바꾸신다든지, 지구의 자전을 바꾸신다든지 하지는 않으십니다.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베푸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바로의 마음상태에 대한 구절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7:13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7:22 애굽 술객들도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8:19 바로의 마음이 강퍅케 되어

9:12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9:35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10:20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10:27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11:10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13:15 그 때에 바로가 강퍅하여

14:4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강퍅케 하다강화하다라는 말입니다. 즉 바로가 자신의 마음을 강화하였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모세의 말을 자신의 마음을 강화시켜 무시해버렸다는 말입니다. 9:12절과 10:20 등에서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본래는 선했던 바로의 마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고의적으로 악하고 강퍅한 마옴으로 바꾸어 놓으셨다는 뜻으로 알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의 마음도 능동적으로 개입하셔서 강퍅케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악한 자들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십니다.

에스겔33:11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디모데전서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3:9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세상의 패역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대항해서 자기들 스스로의 마음을 강퍅케 했을 뿐입니다. 바로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동안 자신의 행동이 여호와께 명백한 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원초적으로 주어진(2:16.17) 자유의지를 남용하고 악용하여 자신의 오만한 거부 행사를 철회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그 강퍅한 마음을 그대로 버려 두어 전혀 관여치 않으셨습니다. 본 절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유기 상태를 표현한 말입니다(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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