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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19-28 2022.2.27
 
사람이 고집이 세며, 완고하고, 우둔하여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을 碧昌호라고 합니다. 본래는 碧昌호가 아니고, 碧昌牛입니다. 碧昌牛가 시간이 흘러 碧昌호로 바뀌었습니다. 碧昌牛의 碧昌이란, 평안북도의 碧潼郡과 昌城郡을 의미합니다. 이 두 지방의 소가 덩치가 크고 성질이 억세다는 뜻에서 유래했습니다. 碧潼, 昌城 지방의 소처럼 고집이 세고 우둔하여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原則主義와는 다른 말입니다. 원칙주의는 나름대로 정해진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지만, 벽창호 유형의 사람은 자기 고집대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올바른 사람이 벽창호이면, 주변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타락한 사람이 벽창호이기까지 한다면 말 그대로 큰일입니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 전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이 통하지 않은 민족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주전 7세기에 시행된 요시야의 종교 개혁에 의하면 합법적인 희생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전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다른 예배 중심지를 찾아야 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간에 성전이 제거됨에 따라 구약 종교를 유대교로 수정하는 일이 불가피해졌습니다. 이때부터 모세가 받은 율법이 삶의 규칙을 제시하는 핵심적인 규범이 되었습니다. 에스라의 정책도 주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주전 2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헬라화 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제사장들도 헬라화 되었습니다. 이러다보니 성전예배는 기쁨의 예배가 아니라 하나의 의무감에서 드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회당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오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편으로 격상시켰습니다. 그리스도가 계시던 당시에는 예루살렘에만 하더라도 수백 개의 회당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 곧 유대교의 교리는 철벽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만 했습니다. 바리새인에게 있어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계시한다고 여겼습니다. 선지서들을 법에 대한 해석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이스라엘은 그 존재의의를 가졌습니다. 이들에게 모세오경은 성문화된 율법일 뿐이었습니다. 율법의 원칙들을 매일의 삶에 적용할 필요에 따라 구두 율법을 발전시켰습니다. 성문 율법에는 적극적인 명령 248개와 소극적인 명령 365개 등 모두 613개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이 계명들을 일일이 준수하는 것이 바로 기본적인 계명들을 준수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율법주의를 추구하는 경향은 올바른 마음가짐곧 윤리를 강조함으로 완화되었습니다. 유대교는 원죄에 관한 기독교 교리와는 무관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기독교에 비해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성을 덜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임할 세계에 대한 유대교의 소망은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속죄에 관한 문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성육신의 개념도 배제되었습니다.

이러한 말도 안 되는 구원관과 율법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Messiah는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기다리는 Messiah는 한정적이었습니다. 현재 유다가 로마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기다리는 Messiah는 점령군의 사령관이고 강력한 왕이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씨저보다 더 강력한 Messiah여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백마를 탄 강력한 왕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군을 일시에 격파하고 자신들을 신하로 삼는 power-king Messiah를 기다렸습니다.

요한복음1:1절에서 18절까지 narration이 청중에게 이야기하듯이 사도요한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그 말씀이 태초에 함께 계셨다. 만물 곧 우주가 그 말씀으로 인하여 지어졌다. 어떤 것도 안 만드신 것이 없었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 그런데 빛이 어두움에 비쳤는데, 어두움이 왜 빛이 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갑자기 인물이 바뀝니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다. 그 이름은 세례요한이다. 저는 이 땅에 증거 하러 왔다. 하나님께로서 온 빛에 대하여 증거 한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으로 자기의 증거로 인하여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세례요한은 그 빛이 아니었다. 오직 그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것뿐이다.

다시 그 빛에 대하여 조명합니다. 그 빛은 참 빛이라 했습니다. 참 빛을 말했을 때엔 거짓 빛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거짓 빛은 사람들이 만든 빛입니다. 그러나 참 빛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빛이 죄인들에게 비취었다. 그 빛이 애초에는 하늘에 계셨다. 그런데 지금은 이 세상에 계셨다. 세상은 그 빛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다. 그러나 세상 곧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 더구나 자기 땅 곧 유대 땅에 왔으나 자기 백성들이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 빛을 영접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그런데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계셨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의롭다 할 사람이 없다. 그러니 대속하신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뿐이다. 그리고 여태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실제로 하나도 없다. 그런데 예수님을 이 땅에 오게 하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셨다고 했습니다. 사도요한은 자기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예수는 인간의 모양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정신이요 하나님의 이성이며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19절을 보면 갑자기 세례요한이 유대인들로부터 주목을 받습니다. 이에 대한 배경이 마태복음3:1-12입니다.

1 그때에 세례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4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5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요한은 어떤 기적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요단강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그의 외침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의 외침에 사람들이 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외침에 사람들이 나가서 죄를 자복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요한은 사가랴의 아들이요. 사가랴는 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눅1:5). 유대교에 있어서 제사장을 위한 유일한 자격은 혈통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아론의 자손이 아니고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제사장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론의 자손은 제사장이 되는 것을 누가 막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당국자들의 안목으로 볼 때 세례요한은 사실상 제사장이었습니다. 제사장이 왜 이런 비정상적인 처신을 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자 찾아 왔습니다.유대인 곧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다르게 표현하면 당시 종교문제에 실권을 잡은 자들은 실태조사를 하러 사람을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에게 묻습니다. 네가 Messiah냐? 아니면 네가 Elijah냐? 혹은 그 선지자냐? 이들이 말한 사람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예언들입니다. 모두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사야63:1-6 1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2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3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4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5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6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산헤드린 곧 예루살렘 공회의 여러 기능 중의 하나는 거짓 예언자로 혐의를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든지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은 세례요한이 거짓 선지자인지 아닌지 그 사람을 살펴보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제사장의 통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설교자의 통념에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사를 해보자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세례요한에게 네가 Messiah냐?고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Messiah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미 오신 Messiah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다와 예루살렘은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사로잡힌 바 된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구해 줄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만간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하시기 위해 개입하시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세례요한을 Messiah냐고 물은 것입니다. Messiah에 대한 관념을 그들은 여러 각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온 땅에 평화를 가져오실 분을 기다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의로 다스릴 분이 오시리라고 기대하였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백마 탄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 유대인의 군대를 이끌고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민족적 위대한 戰士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씨저보다 더 위대한 분이 오실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파송된 어떤 초자연적인 인물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다윗의 계열에서 한 군왕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종종 자칭 Messiah라고 하는 자들이 일어나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요한에게 와서 그가 Messiah인지 아닌지를 물어보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 주장을 완전히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암시를 제시하면서 그것을 부인했습니다. 헬라어로 나 ejgw;(egô)란 말은 그것이 놓여지는 바에 따라 그 뜻이 강조됩니다. “Messiah는 내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돌려서 말하지 않고 바로 직설적으로 나는 절대로 Messiah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세례요한에게 네가 Elijah냐?고 물었습니다. 말라기4:5-6을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에게 Elijah가 아닌지를 물었습니다. Messiah가 오시기 전에 그의 오심을 전하고 세상이 그를 영접하도록 준비하기 위하여 Elijah가 오리라는 것이 유대인의 신념이었습니다. 특별히 Elijah는 반대자를 처리하기 위해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물건이건 사람들이건 간에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을 가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lijah가 갈멜산에서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을 죽인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유대인과 유대인이 아닌 자들을 가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흩어져 있던 가족들을 다시 한 데 모으리라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율법이 소유자가 분명치 않아 서로 다투고 있는 금전이나 재산 혹은 소유자가 밝혀지지 않은 재산은 어떤 것이든지 “Elijah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을 정도로 유대인들은 이 일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Messiah가 오시기 전에 Elijah가 오리라는 신앙은 말라기4:절에 근거한 것입니다. 모든 왕이 다 그러했듯이 Elijah가 Messiah의 즉위 때에 기름을 부을 것이라고 믿기까지 했습니다. Elijah는 죽은 자들을 일으켜 그 새 왕국에 참여하게 할 것이라고 믿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나는 Elijah가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요한은 Elijah의 정신과 능력으로 나아갔습니다(눅1:17).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Elijah라고 일컬으셨습니다(마17:12). 그러나 문자 그대로의 Elijah는 아니었습니다. 단연코 나는 Elijah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세례요한에게 네가 그 선지자냐?고 물었습니다. 신명기18:15-18을 보면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산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에게 기다리고 있던 약속된 선지자냐고 물었습니다. 때때로 Messiah가 오실 때는 Isaiah나 Jeremiah가 다시 오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모세가 신명기18:15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는 말씀을 백성들에게 준 보증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이라면 그 누구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예언자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자가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보다 뛰어난(par excellence) 예언자가 오실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밝히 계시해 줄 한 선지자 곧 Messiah를 말합니다. 이 선지자는 모세와의 연관성 속에 율법해석의 권위와 정통성을 지니게 될 Messiah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말해진 이 선지자는 궁극적으로는 온 인류의 대속자로 오실 Messiah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신 Messiah입니다. 모세는 선지자로서 여호와와 직접 대면한 자입니다. 애굽에서 이적을 베푼 자입니다. 권능과 위엄을 백성 앞에서 나타냈습니다.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했던 자입니다. 계시의 완성자요 인류 구속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이 모세에 필적할 만한 선지자가 곧 Messiah입니다.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에게 그 선지자냐고 물었을 때 그러한 영광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자기는 오직 예수님 앞서서 오실 길을 다지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왕이 오실 길을 예비하라고 외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인용절은 이사야40:3절에서 온 것입니다. 복음서 전체가 세례요한에 대하여 이 귀절을 인용했습니다. 이 말씀의 배후에 들어있는 관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동방의 도로들은 평평하지 않았습니다. 자갈이 깔려있지도 않았습니다. 그 길은 단지 밟아서 다져진 길들이었습니다. 왕이 어느 지방에 순시하러 갈 때나, 정복자가 자기의 영토를 지나가려고 할 때 그 길을 미리 다지고 곧게 정리하였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왕이 오실 길을 예비하라고 말하는 소리일 뿐이다. 세례요한은 또 “왕이 방금 오시고 있으니 스스로 예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세례요한은 인기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세례요한에게는 수십만의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개척교회 수준인데, 세례요한은 대형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 자신은 자신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일을 전혀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망각하고 오직 왕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기를 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조사해보니 세례요한을 두려워해야 할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례요한이 무슨 권세로 세례를 베풀까? 이상히 여겼습니다. 만일 그가 Messiah이든가, Elijah이든가 혹은 선지자라면 세례를 베풀 수도 있었습니다. Isaiah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사52:15)라고 말했습니다. 에스겔은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겔36:25) 라고 말했습니다. 스가랴는 “그 날의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13:1)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왜 요한이 세례를 베풀어야 하나? 그들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검증을 해보니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왜 세례를 줄까?

바리새인들은 요한이 무슨 권세로 세례를 베푸느냐고 물었습니다. 왜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는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손으로 받는 세례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은 다른 신앙에서 돌아온 개종자였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세례를 받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씻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방 종교에서 개종한 이방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씻음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은 단지 이방인들만 받아야 할 세례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선택받은 백성도 정결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믿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회개였습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서있다.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자기 자신에게 노예 이상 천한 직업을 부과했습니다. 신들메를 푸는 일은 아주 천한 노예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너무나도 천한 일이어서 제자들로서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나는 오실 그 분의 노예가 되기에도 합당치 못하다.”요한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왕은 오시고 있다. 그러므로 왕의 오심을 위하여 너희는 이방인이 정결하게 해야 하는 만큼 정결하게 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왕이 역사에 개입하심을 위하여 준비하라”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요한의 역할은 다만 그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위대함도 그가 오시리라고 예언한 그 분의 위대함에서 온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말살했습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가 그렇게 알고 있었듯이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이정표였습니다.

Gerald Moore제랄드 무어(1899.7.30.-1987.3.13.)는 영국에서 태어나서 카나다로 가족이 이주했습니다.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웁니다. 하지만 독주자로는 각광을 받지 못했습니다. 교회오르간 연주, 무성영화반주자 등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21년부터 본격적으로 반주자로 나갑니다. 당대에 유명한 성악가들의 반주를 맡아 연주회와 녹음을 했습니다. 평생 한 번도 독주무대를 갖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성악가들의 반주만 했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반주가 유명한 성악가들의 노래에 폐를 끼치지 않는지 조심했습니다. 한번은 자신의 피아노소리로 인하여 성악가들의 목소리를 눌러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반주자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연주회가 1967년2월20일 런던의 로열 페스티벌홀에서 있었습니다. 이 연주회에서도 무어는 여전히 성악가들의 노래를 돕는 반주자였습니다.

closing 이스라엘이 그대하고 바라고 있었던 것은 Messiah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내면 그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왜일까? 자기들이 잘났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똑똑하고 잘나서 하나님께서 보낸 자들이라도 검증을 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아들 Messiah가 왔어도 검증을 하다가 십자가에서 죽이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spotlight는 조명 기구 중 하나입니다. spotlight는 콘서트, 뮤지컬과 같이 특정한 인물을 집중적으로 비치기 위해 사용됩니다. 우리는 자칫 spotlight가 우리를 비취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오류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spotlight는 예수님만 비취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예수님의 종으로서 낮은 위치에서 주님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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