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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신분

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 빛

요한복음1:9 2023.

 

 

배가 좌초되었다는 말을 Greece어로 ajporiva(21:25혼란한)라고 합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할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배가 좌초되면 순식간에 침몰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안전한 구원의 손길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 우리가 구원 얻었다.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구원받았다.”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실제로 구원이란 말이 우리 피부에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작가 토스토예프스키는 1849년 그가 스물여덟살 때 사회주의 혁명단체에 가입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영하 50도나 되는 추운 겨울날 그는 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토스토예프스키는 세 사람이 기둥에 묶이는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이제 최후의 5분이 남아 있었습니다. 28년간을 살아왔지만 5분이 이처럼 귀하게 여겨지기는 처음이었습니다. 5분을 어떻게 쓸까? 형장에 같이 끌려온 사람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한마디씩 하는데 2분이면 됩니다. 오늘까지 살아온 삶을 정리해 보는데 2, 나머지 1분은 대지를 그리고 자연을 한번 둘러보는데 쓰자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곁에 묶여 있는 두 사람에게 최후의 인사를 하고 가족을 잠깐 생각하고 나니 벌써 2분이 지나버렸습니다. 이제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는데, ‘3분 후에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찔해졌습니다. 28년간이란 세월을 한순간 한순간 아껴 쓰지 못한 것이 무척 후회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살 수만 있다면 순간마다 값있게 쓰련만 하고 생각했으나 가슴만 아파올 뿐이었습니다. 그 순간 장탄하는 금속성 소리가 철커덕하고 났고 이와 동시에 견딜수없는 죽음의 공포가 엄습 해 왔습니다. 내 생명이 이렇게 끝나버리다니 하고 있을 때 드라마 같은 극적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한 병사가 멀리서부터 흰 손수건을 흔들면서 황제의 특사령을 가지고 왔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곳에서 풀려나 시베리아에서 긴 유형 생활을 하다가 1859년에야 모스크바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형의 순간에 느꼈던 시간의 고귀함을 평생 잊을 수가 없었고 그 후에 영혼의 문제에 심취하여 그의 소설 속에는 언제나 신앙적 최후 승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시베리아 유배 생활에서 석방된 직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 신앙을 한 편지 속에서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구세주와 같이 그렇게도 아름답고 심오하며 동정심에 가득 차고 여성적이면서도 또 남성 다운 면까지 갖춘 완전한 분이라곤 없다. 정말 질투심마저 느끼는 그런 사랑을 품고 나는 말하거니와, 그와 같이 완전한 분은 절대로 없으며 또한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좀 더 얘기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어느 누구든 간에 나더러 그리스도는 진리의 실천자가 아니고, 실제에 있어서 진리인 그리스도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을 증명까지 해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서슴지 않고 그 진리를 버리고 그리스도 편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의 인간을 상상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참 빛 to; fw'" to; ajlhqinovn이라는 말은 거짓 빛과 대조되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희미한 빛조차도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사람들이 천사나 인간들을 빛이라고 부르고 숭배할까 봐 미리 차단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해달별들과 같은 빚들은 파생된 빛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시로 만든 빛들입니다. 후에는 이런 빛들이 필요 없습니다. 참 빛이신 그리스도의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 빛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이 빛이 하나님 나라로부터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말씀이시고 구원이신 이 빛이 진짜 빛입니다. 가장 이상적이고, 순수한 빛입니다. 이 빛의 광채에 비하면 기타의 모든 빛은 희미한 빛도 되지 않습니다. 빛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의 빛을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큰 혜택을 주십니다.

그런데 알량한 인간들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이 빛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면서 빛이 아닌 것들을 빛이라고 우깁니다. 그래서 빛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마태복음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요한복음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사도요한은 예수님 오시기 전 이 세상을 어둠/skotiva/으로 표현했습니. 이 세상이 캄캄한 암흑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짓들을 보세요. 심히 오염된 물을 바다에 방류하는 것,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국민을 전쟁에 몰아넣는 것, 자신들의 자식을 위해서 타인은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것, 그로 인해서 많은 사건 사고가 그치지 않는 것, 온통 어둠뿐입니다. 이 세상은 어둠에 있으며, 세상 자체가 어두움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빛에 저항하지도 못합니다. 이 어둠을 위해서 빛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참 빛으로 성육신해서 온 세상을 비춥니다.

 

세상이 어둡다는 것은 빛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곧 사람마다 빛이 필요한데, 예수그리스도가 없으면 빛이 없는 것입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에 폭풍우가 몰아칩니다. 배는 이미 모든 기능이 고장 났습니다. 이제 이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소망 없는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세상이 이와같습니다. 그래서 각 사람마다 비취는 참빛에 의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구원을 swthriva/soterîa쏘테리아라고 합니다. swthriva는 고전 헬라어에서 구출이나 보존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집에 없을 때나 여행 후에 자기 가정이나 모국에 안전하게 돌아오는 것을 soterîa라 했습니다. “안전의 보증soterîa라 했습니다. 위험에 대한 안전swthriva라 했습니다. 파피루스에서 soterîa의 의미는 신체적인 건강이었습니다. 예로 가족의 한 사람이 집에 편지를 쓸 때 여러분의 soterîa에 대하여 편지를 주십시오”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 주세요라고 할 때 soterîa를 사용했습니다. 70인역 성경에서 soterîa일반적인 안전과 보장을 의미했습니다. 잠언11:14에서 조언자가 많으면 soterîa/평안가 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28:21에서 야곱은 만일 soterîa/로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계약을 했습니다. 창세기44:17에서 요셉은 잔이 발견되지 않는 자는soterîa/평안히로 아버지께 올라갈 것이라고 약속하였습니다. 70인역 성경에서 soterîa일반적인 괴로움에서 구출을 의미했습니다. 시편3:2절을 보면 조롱하는 자가 시편기자에게 말합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soterîa/구원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편42:11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시편기자를 후원하는 soterîa/도우시는이십니다. 고라자손은 하나님께 soterîa/구원를 베푸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대망하는 자는 그의 soterîa/구원를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이라 했습니다.

 

70인역 성경에서soterîa는 특히 적으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사사기15:18에서는 블레셋으로부터의 soterîa/구원을, 사무엘상11:913을 보면 암몬으로부터의 soterîa/구원을, 열왕기하13:5에서는 아람으로부터의 soterîa/구원을. 역대하12:7에서는 애굽으로부터의 soterîa/구원을. 역대하20:17에서는 모압으로부터의 soterîa/구출을 나타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를 통하여 그 적으로부터의 하나님의 soterîa/구원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70인역 성경에서 Dramaticsoterîa홍해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었습니다. 출애굽기14:13에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soterîa/구원를 보라고 모세는 말했습니다. 모든 구원은 주님의 soterîa/구원였지만, 홍해에서의 soterîa/구원는 특별히 뛰어난 soterîa였습니다. 거기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손이 그의 탁월성과 능력에서 보여졌습니다.

 

70인역 성경에서 종종 soterîa종말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장차 오는 새로운 시대에서만 그 완전한 개화와 영광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끊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느 세상에서도 영원한 구원입니다(45:17,52:10,3:23).

일관적으로 이 soterîa는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soterîa/도움은 헛되다고 시편 60:1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soterîa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이 무력할 때, 하나님의 soterîa/능력는 주어집니다. 사람의 한계는 언제나 하나님의 기회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soterîa란 말은 감사를 노래하는 승리에 찬 서정적인 귀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에 모세의 노래에서(15:2), 사울의 손에서 구출된 후 다윗의 노래에서(삼 하22:3), 아들을 얻은 것을 알았을 때 한나의 노래에서(삼상2:1)에서 soterîa가 나타납니다. 구원은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큰 기쁨으로 찬송하게 합니다.

 

신약성경 기록자들이 soterîa를 사용했을 때는 이 풍성한 기업에 들어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soterîa 역사나 개인적인 생활의 위기에서 구원과 보존, 섭리하는 능력을 나타내며, 또한 이 세상에서 끝나지 않는 배려나 구원으로 감싸진 사람으로 하여금 기쁨으로 찬송케 하는 배려를 나타내기 때문이었습니다.

soterîa하나님의 의도예수 그리스도의 목적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사람들의 죄사함을 위하여 화해되어야 하는 진노의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릅니다. 또한 그것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어떻게 진노에서 자비로 변해졌는가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릅니다. 신약성서에서 soterîa/구원의 주도권은 모두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노가 아닌 soterîa/구원을 얻도록 정하셨습니다(살전 5:9). 하나님은 태초로부터 사람을 soterîa/구원에로 선택하셨습니다(살후2:13).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soterîa/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그것은 soterîa를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입니다. 이와같이 soterîa는 하나님의 특권이기 때문에 계시록의 송영에서도 구원은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7:10,19:1). 우리를 구원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는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3:17). soterîa의 원동력은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은 이론이 아닙니다. 구원은 실제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유명을 달리했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약 100년의 인생이란 굉장히 중요한 삶입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최고로 우선해서 하나님 나라에 자신이 등록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만일에 등록되지 않았다면 빨리 등록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soterîa/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무한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monitor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길을 피할래야 피할 수 없습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반드시 받습니다. 아담이 우리에게 상속한 죄는 죽음입니다. 아담이 우리에게 준 것은 죄의 확장이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5:12). 결과는 사망이었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죽음은 죄의 책임을 묻는 행동의 결과입니다. 사망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습니다(5:12 5:17). 죽음은 인정이 없습니다. 죽음은 사정을 보지 않습니다. 죽음은 무정합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빼앗아갑니다. 죽음은 무자비한 괴물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죽음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이 죽음에서 우리가 탈출해야 합니다.

 

죄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을 줍니까? 세계는 온통 IAEA 나쁜 놈들, 일본 나쁜 놈들, 일본의 편을 드는 미국도 나쁜 놈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쿄전력이 2011311, 동일본 대지진으로 원자로 1, 2, 3, 4호기의 냉각기능이 상실되어 노심이 용해되면서 방사능이 누출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접근을 하지 못합니다. 냉각기능이 상실되어 노심이 용해되었다는 것은 원자로를 식히기 위해 오염된 134t의 오염수를 2100년까지 바다에 방류한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수백톤의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는데 2100년후까지 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짓을 합니까? 돈 때문입니다. 오염수를 땅을 파 묻어야 하는데 돈이 많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다에 방류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이에 적극 협조했는데, 1명이 2주에 한 번 정도 검사하는데 서 있을 뿐입니다. 얼마나 나쁜 사람들입니까? 이에 중국에서는 일본의 수산물을 전면 수입금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부는 오염수라고 하지 말고 일본에서 쓰는 처리수라고 불러야 한다고 억지를 쓰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오염수를 처리수라고 씁니다. 미국과 유럽도 처리수라고 씁니다. 혹 어떤 언론은 오염처리수라고 씁니다. 중국은 핵오염수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도 오염수라고 하지 말고 핵오염수라고 불러야 합니다. 방류후 삼중수소가 검출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가 검증하고 있습니까? 도쿄전력에서 검증하고 있습니다. 도둑이 도둑을 잡겠다고 하는데 전 세계가 이에 거의 협조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검증을 하면서 안전하다고 하면서 마스크를 쓰고 방독마시크를 씁니까?

 

죄는 이토록 사람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칩니다. 이 죄들은 영원히 죽을 죄들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언제? 지금 구원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soterîa를 받아야 합니다. 이에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어떤 핑계도 없습니다. 이 결정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우리 육신이 죽은 후에는 어떤 도옴도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 구원받아야 하고, 지금 결정 해야합니다. 미적미적하다가는 큰 일을 당합니다.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가족이 큰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을 뻔했으나 못받은 사람들이 노아의 방주를 지을 때 도운 사람들입니다. 방주를 120년이나 걸쳐서 지었기 때문에 구경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품삯을 받고 일하러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방주에 들어가 보았을지는 모르나 방주에 남아 있지는 않았습니다.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소돔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불가항력으로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충분한 기회를 주었습니다. 널리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멸망당했습니다.

 

Closing 구원받는다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역은 힘든 사역이었습니다. 또 우리 안에서 은혜로 역사하시고, 우리가 타락과 유혹과 혼란의 길을 가지 않도록 이끄시는 성령님의 사역도 어려운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주라 하셨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가 결단을 해야 합니다. 죄의 심각성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결단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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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고집이 세며, 완고하고, 우둔하여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을 碧昌호라고 합니다. 본래는 碧昌호가 아니고, 碧昌牛입니다. 碧昌牛가 시간이 흘러 碧昌호로 바뀌었습니다. 碧昌牛의 碧昌이란, 평안북도의 碧潼郡과 昌城郡을 의미합니다. 이 두 지방의 소가 덩치가 크고 성질이 억세다는 뜻에서 유래했습니다. 碧潼, 昌城 지방의 소처럼 고집이 세고 우둔하여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原則主義와는 다른 말입니다. 원칙주의는 나름대로 정해진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지만, 벽창호 유형의 사람은 자기 고집대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올바른 사람이 벽창호이면, 주변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타락한 사람이 벽창호이기까지 한다면 말 그대로 큰일입니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 전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이 통하지 않은 민족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주전 7세기에 시행된 요시야의 종교 개혁에 의하면 합법적인 희생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전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다른 예배 중심지를 찾아야 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간에 성전이 제거됨에 따라 구약 종교를 유대교로 수정하는 일이 불가피해졌습니다. 이때부터 모세가 받은 율법이 삶의 규칙을 제시하는 핵심적인 규범이 되었습니다. 에스라의 정책도 주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주전 2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헬라화 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제사장들도 헬라화 되었습니다. 이러다보니 성전예배는 기쁨의 예배가 아니라 하나의 의무감에서 드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회당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오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편으로 격상시켰습니다. 그리스도가 계시던 당시에는 예루살렘에만 하더라도 수백 개의 회당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 곧 유대교의 교리는 철벽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만 했습니다. 바리새인에게 있어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계시한다고 여겼습니다. 선지서들을 법에 대한 해석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이스라엘은 그 존재의의를 가졌습니다. 이들에게 모세오경은 성문화된 율법일 뿐이었습니다. 율법의 원칙들을 매일의 삶에 적용할 필요에 따라 구두 율법을 발전시켰습니다. 성문 율법에는 적극적인 명령 248개와 소극적인 명령 365개 등 모두 613개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이 계명들을 일일이 준수하는 것이 바로 기본적인 계명들을 준수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율법주의를 추구하는 경향은 올바른 마음가짐곧 윤리를 강조함으로 완화되었습니다. 유대교는 원죄에 관한 기독교 교리와는 무관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기독교에 비해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성을 덜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임할 세계에 대한 유대교의 소망은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속죄에 관한 문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성육신의 개념도 배제되었습니다.

이러한 말도 안 되는 구원관과 율법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Messiah는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기다리는 Messiah는 한정적이었습니다. 현재 유다가 로마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기다리는 Messiah는 점령군의 사령관이고 강력한 왕이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씨저보다 더 강력한 Messiah여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백마를 탄 강력한 왕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군을 일시에 격파하고 자신들을 신하로 삼는 power-king Messiah를 기다렸습니다.

요한복음1:1절에서 18절까지 narration이 청중에게 이야기하듯이 사도요한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그 말씀이 태초에 함께 계셨다. 만물 곧 우주가 그 말씀으로 인하여 지어졌다. 어떤 것도 안 만드신 것이 없었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 그런데 빛이 어두움에 비쳤는데, 어두움이 왜 빛이 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갑자기 인물이 바뀝니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다. 그 이름은 세례요한이다. 저는 이 땅에 증거 하러 왔다. 하나님께로서 온 빛에 대하여 증거 한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으로 자기의 증거로 인하여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세례요한은 그 빛이 아니었다. 오직 그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것뿐이다.

다시 그 빛에 대하여 조명합니다. 그 빛은 참 빛이라 했습니다. 참 빛을 말했을 때엔 거짓 빛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거짓 빛은 사람들이 만든 빛입니다. 그러나 참 빛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빛이 죄인들에게 비취었다. 그 빛이 애초에는 하늘에 계셨다. 그런데 지금은 이 세상에 계셨다. 세상은 그 빛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다. 그러나 세상 곧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 더구나 자기 땅 곧 유대 땅에 왔으나 자기 백성들이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 빛을 영접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그런데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계셨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의롭다 할 사람이 없다. 그러니 대속하신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뿐이다. 그리고 여태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실제로 하나도 없다. 그런데 예수님을 이 땅에 오게 하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셨다고 했습니다. 사도요한은 자기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예수는 인간의 모양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정신이요 하나님의 이성이며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19절을 보면 갑자기 세례요한이 유대인들로부터 주목을 받습니다. 이에 대한 배경이 마태복음3:1-12입니다.

1 그때에 세례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4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5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요한은 어떤 기적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요단강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그의 외침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의 외침에 사람들이 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외침에 사람들이 나가서 죄를 자복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요한은 사가랴의 아들이요. 사가랴는 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눅1:5). 유대교에 있어서 제사장을 위한 유일한 자격은 혈통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아론의 자손이 아니고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제사장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론의 자손은 제사장이 되는 것을 누가 막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당국자들의 안목으로 볼 때 세례요한은 사실상 제사장이었습니다. 제사장이 왜 이런 비정상적인 처신을 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자 찾아 왔습니다.유대인 곧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다르게 표현하면 당시 종교문제에 실권을 잡은 자들은 실태조사를 하러 사람을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에게 묻습니다. 네가 Messiah냐? 아니면 네가 Elijah냐? 혹은 그 선지자냐? 이들이 말한 사람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예언들입니다. 모두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사야63:1-6 1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2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3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4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5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6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산헤드린 곧 예루살렘 공회의 여러 기능 중의 하나는 거짓 예언자로 혐의를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든지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은 세례요한이 거짓 선지자인지 아닌지 그 사람을 살펴보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제사장의 통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설교자의 통념에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사를 해보자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세례요한에게 네가 Messiah냐?고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Messiah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미 오신 Messiah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다와 예루살렘은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사로잡힌 바 된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구해 줄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만간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하시기 위해 개입하시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세례요한을 Messiah냐고 물은 것입니다. Messiah에 대한 관념을 그들은 여러 각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온 땅에 평화를 가져오실 분을 기다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의로 다스릴 분이 오시리라고 기대하였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백마 탄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 유대인의 군대를 이끌고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민족적 위대한 戰士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씨저보다 더 위대한 분이 오실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파송된 어떤 초자연적인 인물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다윗의 계열에서 한 군왕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종종 자칭 Messiah라고 하는 자들이 일어나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요한에게 와서 그가 Messiah인지 아닌지를 물어보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 주장을 완전히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암시를 제시하면서 그것을 부인했습니다. 헬라어로 나 ejgw;(egô)란 말은 그것이 놓여지는 바에 따라 그 뜻이 강조됩니다. “Messiah는 내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돌려서 말하지 않고 바로 직설적으로 나는 절대로 Messiah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세례요한에게 네가 Elijah냐?고 물었습니다. 말라기4:5-6을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에게 Elijah가 아닌지를 물었습니다. Messiah가 오시기 전에 그의 오심을 전하고 세상이 그를 영접하도록 준비하기 위하여 Elijah가 오리라는 것이 유대인의 신념이었습니다. 특별히 Elijah는 반대자를 처리하기 위해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물건이건 사람들이건 간에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을 가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lijah가 갈멜산에서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을 죽인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유대인과 유대인이 아닌 자들을 가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흩어져 있던 가족들을 다시 한 데 모으리라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율법이 소유자가 분명치 않아 서로 다투고 있는 금전이나 재산 혹은 소유자가 밝혀지지 않은 재산은 어떤 것이든지 “Elijah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을 정도로 유대인들은 이 일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Messiah가 오시기 전에 Elijah가 오리라는 신앙은 말라기4:절에 근거한 것입니다. 모든 왕이 다 그러했듯이 Elijah가 Messiah의 즉위 때에 기름을 부을 것이라고 믿기까지 했습니다. Elijah는 죽은 자들을 일으켜 그 새 왕국에 참여하게 할 것이라고 믿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나는 Elijah가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요한은 Elijah의 정신과 능력으로 나아갔습니다(눅1:17).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Elijah라고 일컬으셨습니다(마17:12). 그러나 문자 그대로의 Elijah는 아니었습니다. 단연코 나는 Elijah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세례요한에게 네가 그 선지자냐?고 물었습니다. 신명기18:15-18을 보면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산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에게 기다리고 있던 약속된 선지자냐고 물었습니다. 때때로 Messiah가 오실 때는 Isaiah나 Jeremiah가 다시 오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모세가 신명기18:15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는 말씀을 백성들에게 준 보증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이라면 그 누구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예언자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자가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보다 뛰어난(par excellence) 예언자가 오실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밝히 계시해 줄 한 선지자 곧 Messiah를 말합니다. 이 선지자는 모세와의 연관성 속에 율법해석의 권위와 정통성을 지니게 될 Messiah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말해진 이 선지자는 궁극적으로는 온 인류의 대속자로 오실 Messiah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신 Messiah입니다. 모세는 선지자로서 여호와와 직접 대면한 자입니다. 애굽에서 이적을 베푼 자입니다. 권능과 위엄을 백성 앞에서 나타냈습니다.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했던 자입니다. 계시의 완성자요 인류 구속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이 모세에 필적할 만한 선지자가 곧 Messiah입니다.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에게 그 선지자냐고 물었을 때 그러한 영광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자기는 오직 예수님 앞서서 오실 길을 다지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왕이 오실 길을 예비하라고 외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인용절은 이사야40:3절에서 온 것입니다. 복음서 전체가 세례요한에 대하여 이 귀절을 인용했습니다. 이 말씀의 배후에 들어있는 관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동방의 도로들은 평평하지 않았습니다. 자갈이 깔려있지도 않았습니다. 그 길은 단지 밟아서 다져진 길들이었습니다. 왕이 어느 지방에 순시하러 갈 때나, 정복자가 자기의 영토를 지나가려고 할 때 그 길을 미리 다지고 곧게 정리하였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왕이 오실 길을 예비하라고 말하는 소리일 뿐이다. 세례요한은 또 “왕이 방금 오시고 있으니 스스로 예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세례요한은 인기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세례요한에게는 수십만의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개척교회 수준인데, 세례요한은 대형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 자신은 자신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일을 전혀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망각하고 오직 왕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기를 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조사해보니 세례요한을 두려워해야 할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례요한이 무슨 권세로 세례를 베풀까? 이상히 여겼습니다. 만일 그가 Messiah이든가, Elijah이든가 혹은 선지자라면 세례를 베풀 수도 있었습니다. Isaiah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사52:15)라고 말했습니다. 에스겔은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겔36:25) 라고 말했습니다. 스가랴는 “그 날의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13:1)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왜 요한이 세례를 베풀어야 하나? 그들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검증을 해보니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왜 세례를 줄까?

바리새인들은 요한이 무슨 권세로 세례를 베푸느냐고 물었습니다. 왜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는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손으로 받는 세례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은 다른 신앙에서 돌아온 개종자였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세례를 받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씻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방 종교에서 개종한 이방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씻음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은 단지 이방인들만 받아야 할 세례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선택받은 백성도 정결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믿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회개였습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서있다.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자기 자신에게 노예 이상 천한 직업을 부과했습니다. 신들메를 푸는 일은 아주 천한 노예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너무나도 천한 일이어서 제자들로서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나는 오실 그 분의 노예가 되기에도 합당치 못하다.”요한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왕은 오시고 있다. 그러므로 왕의 오심을 위하여 너희는 이방인이 정결하게 해야 하는 만큼 정결하게 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왕이 역사에 개입하심을 위하여 준비하라”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요한의 역할은 다만 그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위대함도 그가 오시리라고 예언한 그 분의 위대함에서 온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말살했습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가 그렇게 알고 있었듯이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이정표였습니다.

Gerald Moore제랄드 무어(1899.7.30.-1987.3.13.)는 영국에서 태어나서 카나다로 가족이 이주했습니다.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웁니다. 하지만 독주자로는 각광을 받지 못했습니다. 교회오르간 연주, 무성영화반주자 등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21년부터 본격적으로 반주자로 나갑니다. 당대에 유명한 성악가들의 반주를 맡아 연주회와 녹음을 했습니다. 평생 한 번도 독주무대를 갖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성악가들의 반주만 했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반주가 유명한 성악가들의 노래에 폐를 끼치지 않는지 조심했습니다. 한번은 자신의 피아노소리로 인하여 성악가들의 목소리를 눌러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반주자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연주회가 1967년2월20일 런던의 로열 페스티벌홀에서 있었습니다. 이 연주회에서도 무어는 여전히 성악가들의 노래를 돕는 반주자였습니다.

closing 이스라엘이 그대하고 바라고 있었던 것은 Messiah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내면 그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왜일까? 자기들이 잘났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똑똑하고 잘나서 하나님께서 보낸 자들이라도 검증을 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아들 Messiah가 왔어도 검증을 하다가 십자가에서 죽이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spotlight는 조명 기구 중 하나입니다. spotlight는 콘서트, 뮤지컬과 같이 특정한 인물을 집중적으로 비치기 위해 사용됩니다. 우리는 자칫 spotlight가 우리를 비취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오류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spotlight는 예수님만 비취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예수님의 종으로서 낮은 위치에서 주님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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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신분

요한복음 1:1-3

어느 성에서 굉장한 연회가 열렸습니다. 그 연회는 보통의 연회가 아니었습니다. 각국의 왕들이 참석했습니다. 왕이 미처 오지 못하는 나라에서는 특사를 보냈습니다. 지구 이쪽 끝에서 저쪽에 있는 온 나라들이 그 연회에 관심을 총 집중시켰습니다. 그 연회에 가장 귀하신 분이 오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연회를 주관하는 宴會長은 초비상이었습니다. 자기가 태어난 이래 일생에 가장 귀한 연회였기 때문입니다. 연회장은 오실 분의 사람됨을 체크했습니다. 최고였습니다. 존귀함을 체크했습니다. 말로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훌륭해서 그분을 잘 소개하기 위하여 연습하고 또 연습했습니다. 그래서 연회장은 그에 대한 자료를 최대한 모아서 작성하였습니다. 이윽고 그 분이 도착하자 연회장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분을 감명 깊게 소개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 소개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였습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가까이 모시고 있었습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께서 변화하실 때도 목격하였습니다.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목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갈보리언덕의 십자가 사건을 목격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만났습니다. 승천하심도 친히 눈으로 봤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기간은 물론하고 승천하시기까지를 친히 눈으로 보았던 요한이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jEn ajrch'/ h\n oJ lovgo",

I. 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예수님(1a).

“신분”(state)이란 사전적인 의미는 “개인이 속하는 일정한 사회적인 지위 또는 법률상 사람의 일정한 지위나 자격”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신분을 안다는 것은 굉장히 유익합니다. 신분을 안다는 것은 정보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을 안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신분을 안다는 것은 죄인 된 우리로서는 최고의 정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예수님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사9:6; 요1:1).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마1:18-25/눅2:5-7) 인간이라고도 말합니다. 교회는 오래전부터 그리스도를 신성(Deity)과 인성(Humanity)을 가지셨음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계시된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태초라는 말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약간씩 다릅니다. 창세기의 태초가 요한복음 태초보다 훨씬 오랜 후의 태초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창세기의 태초가 요한복음의 태초보다 훨씬 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태초는 만물을 창조할 때의 태초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태초는 만물을 창조하기 이전의 시간을 말합니다. 창세기 1:1절의 태초(tyviarEB])는 창조의 시작점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태초(ajrch'//아르케)는 우리의 상상을 시작하기 이전입니다. 모든 사물이 존재하기 이전입니다. 즉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전의 상태입니다. 요한복음 1:1은 시간 이전의 어떤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간 내에서의 시작이 아닙니다. 절대적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결부시켜서만이 언급될 수 있는 시작입니다.

그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말씀이 만물의 창조 전부터 계셨습니다. 말씀(lovgo")은 세상 이전에 선재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세상과 함께 시작한 시간보다 먼저 존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셨습니다. 우주만물의 시작이 전혀 없는 태초부터 계신분입니다. 아직 시간이 시작되지 않은 태초 전부터 계신 분입니다. 이 태초는 어떤 새로운 일이 조만간 시작되는 긴장된 태초였습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lovgo")으로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선재적인 신분이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왜 말씀으로 계셨습니까? ‘로고스’라는 말을 헬라적으로 성경에서는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계신 이유는 그 본질과 직무를 표현하고자 함입니다. 말은 드러내는(reveal) 것입니다. 말씀은 반드시 듣는 자가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심이 목적이었습니다.

우리조상 아담은 그의 후손들에게 치명적인 것을 남겨주었습니다. 모든 인류를 파멸의 곳인 지옥으로 들어가야 할 입장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만들어진 피조물이 아니었습니다. 점점 패괴해져 갔습니다. 영원한 멸망으로 모두 가고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이 세상은 어둠으로 검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이 세상은 폭발하여야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동산에서 과일 몇 개 먹은 것 치고 너무나 가중처벌 된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지금도 남의 과수원에서 과일 몇 개 먹는 것은 주인의 마음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加重處罰이 되었습니까?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금지명령을 준수하는데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황금 10,000톤을 놓으나 선악과를 놓으나 어기는 수치는 똑같습니다.

국회의원들은 선거법 위반혐의로 재판에서 벌금 100만 원 이상의 형을 받거나 배우자·직계존속 및 선거사무장·회계책임자 등이 300만 원 이상의 형을 받을 경우 당선이 무효화됩니다. 100억원 받은 사람이나 100만원 받은 사람이나 모두 당선무효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금단의 열매를 먹은 인간은 불순종에 이르렀습니다. 사탄이 인간에게 예견한대로 인간의 눈이 “열림”으로 새로운 세계를 경험케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떠난 다른 길을 보았습니다. 연약함을 경험했습니다. 공포를 경험했습니다.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각종 질병이 인간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속계획이 이 세상에 들어와야만 했습니다.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한 하나님께서는 창조이전부터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Incarnation)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사람으로 불리어지지 않았습니다. 태초에는 아무것도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계시는 예수님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의 의사소통인 말씀(communication)으로 계셨습니다. 우리와 친밀한 관계성을 갖고자 요한을 통해서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다바르/로고스)은 인간에게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히11:3).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을 멸망하시기도 합니다(벧후3:5-7). 하나님의 말씀은 멸망 받아야 할 사람을 살리십니다(약1:18). 말씀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공중의 권세를 잡은 마귀의 머리를 밟으시고 깨버리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기 이전에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조 이전부터 계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 두 번째로)

II. 하나님과 함께 계신 예수님(1b2).

1b와 2절에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kai; oJ lovgo" h\n pro;" to;n qeovn, kai; qeo;" h\n oJ lovgo".

2. ou+'to" h\n ejn ajrch'/ pro;" to;n qeovn.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십니다. 함께(pro;")는 “~ 에서부터, ~을 향하여”입니다. 어떤 장소에서부터 출발하는 동작입니다. 또한 어떤 장소를 향한 동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향하여 계셨다”는 것입니다. 향한다는 것은 의지하기 위한 것이며 합동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해서 계셨습니까? 우리의 구원은 주님께 속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계획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계획되어 있는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예비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3-5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은 하늘에 속한 복입니다. 창세전에 그 복을 주시려고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예비하신 구원이기에 현세에서 효력을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죄와 그 결과들로부터의 최소한의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선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지혜롭고 능력 있는 구원입니다. 은총과 사랑이 있는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최대한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속하시려고 이 세상에 그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때가 차매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기로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그의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정하셨습니다.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한 말씀이신 예수님은 그 신분이 존귀합니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존재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1절 중간에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했습니다. 곧 ‘하나님은 말씀이라’가 아닙니다. 요한은 말씀이신 예수님의 존귀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어디에나 편재하여 계십니다. 카나리아 제도에도 계시고, 전주에도 계십니다. 천국에도 계시고 이 땅에도 계십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언약하심을 끊임없이 끝까지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신성에 속한 것을 모두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의 통치는 우주 및 전 세계의 유일하신 통치자이십니다.

말씀이신 통치자가 하나님과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항상 동적(dynamic)인 존재로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서도 동일하게 동적(dynamic)으로 계십니다. 따라서 로고스를 가진 사람들은 항상 동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역시 하나님을 향해 동적인 존재로 아버지와 함께 있습니다. 로고스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의 상태로 계십니다. 성부와 성령하나님과 대등한 위치로 신비하게 존재하십니다.(pro;" to;n qeovn)

그래서 우리가 로고스이신 하나님께 기도하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교통하십니다.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하신 것처럼, 로고스이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위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라지와 곡식을 가리지 않은 추수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천국의 백성과 지옥의 백성들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으스스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수도 있습니다. 날마다 울면서 생활하는 통곡의 계곡을 거닐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첩첩산중에서 헤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항상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분의 눈동자가 항상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자기 몸을 버리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듣기 위해 항상 귀를 우리에게 기울이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그의 능력을 말씀합니다. 그분의 능력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분의 우리에 대한 긍휼은 아직까지 측정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은 오늘도 내일도 오직 관심은 그의 성도들입니다.

(예수님은 창조 이전부터 계셨으며 지금도 하나님과 함께 계십니다. 오늘 세 번째로)

III. 만물을 창조하신 예수님(3).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pavnta di! aujtou' ejgevneto, kai; cwri;" aujtou' ejgevneto oujde; e{n. o{ gevgonen.

우리의 우주는 광대합니다. 한 줄기의 빛은 시간당 11억km를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하수라 하는 은하계를 지나가는데 빛의 속도로 10만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은하계는 수십억 개의 은하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계산하기 바랍니다. 지구와 태양간의 거리가 약 1억 4000km입니다. 그런데 그 거리를 종이 한 장이라고 가정합시다. 가장 가까운 별까지의 거리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20m높이의 종이더미가 필요합니다. 은하계의 직경을 나타내는 데는 496km 높이의 종이더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그 자체의 축을 중심으로 시속 1600km로 自轉하고 있습니다. 지구는 시속 110,000km로 태양을 공전하고 있습니다. 지구는 시속 216만km로 공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24시간마다 우리는 9,000만km를 여행하고 있습니다. 매년 우리는 336억km의 공간을 여행합니다. 20세 된 사람은 6,720억km를 여행하였습니다. 지구둘레를 1,680만 바퀴를 돌았다는 말입니다.

우주에서 인체로 돌아옵시다. 발길이와 팔 길이가 일치합니다. 우리의 핏줄을 전부 잇는다면 지구를 3바퀴 돌 수 있는 거리입니다(120,000km). 피가 몸을 완전히 도는 시간은 46초입니다. 눈을 한번 깜빡이는데 걸리는 시간은 1/40 초입니다. 혀에 침이 묻어 있지 않으면 절대로 맛을 알 수 없고 코에 물기가 없으면 냄새를 맡을 수 없습니다. 갓난아기는 305개의 뼈를 갖고 태어나는데 커가면서, 여러 개가 합쳐져서 206개 정도로 줄어듭니다. 사람의 허파는 오른쪽보다 왼쪽이 더 무겁습니다. 모든 인간은 코에 극소량의 철(Fe)을 가지고 있어서 커다란 자장이 있는 지구에서 방향을 잡기 쉽도록 해줍니다. 빛이 없을 때 이것을 이용해서 방향을 잡습니다. 눈의 근육은 24시간 동안 약 100,000번 움직입니다. 다리가 이 정도의 운동을 하려면 적어도 80Km는 걸어야 합니다. 두개의 콧구멍은 3~4시간마다 그 활동을 교대합니다. 즉 한쪽 콧구멍이 냄새를 맡는 동안 다른 하나는 쉰다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재채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재채기는 시속 160Km의 속도라고 합니다.

우리는 만물의 극히 일부인 지구와 인체를 잠깐 상고했습니다. 만물을 모두 나열한다면 평생을 그 연구만 하다가 일생을 마쳐야 합니다. 그래도 다 못하고 극히 일부만 건드렸다가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우주의 기원에 관해서 모든 시대는 인간들의 정신을 지배해 왔습니다. 창조에 대한 억측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사람들이 모두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 하셨습니다. 하면 될 것을, 아니다 라고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간단합니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반박하려고 여러 가지 거짓말을 붙이고 붙였습니다. Big-Bang이니 우연이니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계속 붙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말도 안 되는 군더더기가 지금도 계속 붙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先在(선재)하신 로고스를 통해서 존재하였습니다. 모든 만물이 창조 되어질 때에 예수님의 말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없었는데 제멋대로 우연히 나온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대충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하나 세밀하게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영혼)까지 만드셨습니다. 종류대로 아름답고 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에는 로고스이신 예수님의 의지와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심오함과 신비함이 들어있습니다. 특히 인간을 창조하심에는 기이하고 기이한 창조의 신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신 목적이 있습니다. 기쁨을 누리시기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창1:3).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그 하신 일을 나타내기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시19:1).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대신 다스리라고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친히 교제를 나누시기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15세기에 보헤미야[Bohemia]의 종교개혁자 쟌 후스(1372-1415)가 어느 날 거리에 나갔다가 두 그림이 나란히 붙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개탄했습니다. 한 그림은 나사렛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은 청빈하고 초라하였습니다. 소박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곁에 붙어 있는 그림은 로마교황의 그림이었습니다. 교황은 머리에 삼층 면류관을 썼습니다. 사람들이 어깨에 멘 호화찬란한 가마를 타고 있었습니다. 시종이 옆에서 양산을 받쳐주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교황청연감에 따르면 교황이란 “로마의 주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합니다. 사도의 우두머리인 베드로의 후계자라합니다. 전세계 가톨릭교회의 守長입니다. 서(西)유럽의 總大主敎입니다. 이탈리아의 首席大主敎입니다. 로마 管區大主敎입니다. 로마首都大主敎입니다. 바티칸의 주권자입니다. 교황의 모습은 나사렛 예수님의 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교황의 종으로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서민의 신분이었습니다. 평신도의 신분으로 있었습니다. 가난한 목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암행어사였습니다. 그의 신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우리를 보호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항상 우리를 인도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말씀으로 계시는 예수님,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 창조주이신 예수님과 항상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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